조선시대 착한 농부가 풍년을 맞아서 임금께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 수수엿을 준비하여 한양길에 올랐습니다. 며칠을 걸어서 도착한 궁궐에는 창과 칼을 든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남루한 옷차림과 시골스러운 행색으로 인해 쉽게 궁궐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을 방황하던 농부는 성벽 한구석에 앉아서 슬피 울었습니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임금이 농민을 발견했습니다. 임금은 아마도 정조대왕으로 생각됩니다. 선비차림의 正祖(정조)는 농부에게 다가가 울고있는 사연을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이곳에서 울고 있나요?"
"네, 저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농부인데요, 임금님 덕분에 농사가 잘 되어서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기 위해 수수엿을 고아서 임금께 드리러 왔지만 만나뵐 길이 없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선비가 가까이 다다가서 말했습니다.
"만약 임금께 이 엿을 드리면 상을 내리실 수도 있을 것인데, 고을의 원님 벼슬을 내리면 받으시겠습니까?"
"예, 고을벼슬을 주시면 제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다음으로 관찰사 벼슬도 하겠습니까?"
"제가 부족하지만, 觀察使(관찰사)도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평복 선비차림의 정조와 농부의 대화가 무르익었고 참판을 지나 이조판서를 거쳐서 우의정, 좌의정이 되고 결국에는 영의정에 이르렀습니다.
漸入佳境(점입가경)으로 달리던 벼슬놀이는 결국 마무리되었습니다.
"허면, 왕이 그대에게 임금 자리를 내리면 하시겠소?"
갑자기 임금의 눈에 별이 튀었습니다. 농부는 임금자리를 받겠는가라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선비, 즉 정조의 말을 듣는 순간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선비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지른 것입니다.
평생 前無後無(전무후무)한 주먹질을 당한 왕은 크게 당황하였지만 마음을 진정하고 농부에게 사과했습니다.
"내가 못할 말을 하였구려, 미안하오."
"나라의 임금은 한분이고 그 대를 이어가는 것이거늘. 어찌 그런 망발을 입에 담는단 말이오!"
단호한 농부의 말에 임금은 내심 감동하여 주먹질로 맞은 얼굴이 아픈것도 잊은채 궁궐에 들어가는 비법을 설명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다음날 아침, 농부는 민복차림의 정조가 알려준대로 궁궐에 다다르자 이미 군사들에게 행동지침이 전해졌으므로 '무사통과'로 엿보따리를 짊어진 농부는 임금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고마운 농부라면서 고개를 들어 나를 보라 합니다.
마치 춘향전에서 어사 이몽룡이 옥에 갇혀있던 춘향이를 불러내어 사또를 바라보라는 대목이 그려집니다. 고개를 들어 왕의 얼굴을 보는 순간 농부는 사색이 되었습니다. 그 임금은 어제저녁 궁궐 한편에서 만난 그분이었습니다.
대화중에 벼슬놀이를 하다가 영의정을 지나 '왕의 자리'를 흥정했던 그분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주먹으로 얼굴을 정통 가격한 그분이었습니다.
정말로 오늘 죽는구나, 어제가 제삿날이구나 하면서 벌벌 떨고있는 농부를 위로, 격려한 왕은 농부에게 고을원님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勸善懲惡(권선징악), 우리의 이야기에는 항상 반전이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건너마을 부자영감이 꾀를 내봅니다. 저 평범한 농부가 수수엿으로 우리고을 원님벼슬을 얻었으니 나는 찹쌀엿에 참깨를 박아넣은 '보석같은 엿'을 준비하여 관찰사 자리를 얻어내야겠다는 전략을 준비한 것입니다.
富者(부자) 영감이 한양으로 달려가서 며칠동안 궁궐앞에서 임금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고 열흘정도를 기다려서 결국에는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야행을 나오신 정조대왕을 만나 농부와의 대화와 같은 이야기를 다시 진행합니다. 그런데 또다시 시작된 벼슬놀이에서 결정타를 맞고 말았습니다.
영의정을 지나가는 순간 주먹을 쥐어야 했는데 왕이 '왕의 자리'를 넘기는 것에 대해 부자영감은 "찬성, 동의, 오케이"를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부자영감은 찹쌀엿을 짊어지고 쓸쓸히 고향마을 고갯길을 걸어서 돌아왔습니다.
어려서 先親(선친)의 膝下(슬하)에서 들은 이야기를 각색해 보았습니다. 당시 들은 기억으로 부자 영감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들었습니다만 존경하는 정조대왕이 부자영감을 벌하기 보다는 타일러 고향으로 보내서 어려운 이웃을 돕도록 지도편달했을 것이라는 구상으로 바꿔보았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달리라는 말이 궁금해서 돌아보았으므로 화진포의 '며느리 이화진' 석상이 탄생했다는 전설이 있듯이 농부가 고을원님 벼슬을 얻을때 결정적인 부분을 흘려듣고 왕의 자리도 받겠다는 무모한 도전을 한 부자영감의 안타까운 사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귀감이 되고 他山之石(타산지석)으로 다가옵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