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살다보면 미래의 가능성에 심취해서 실수를 하는 경우를 봅니다. 누구에게 들었을까. 아마도 초등학교때 선생님의 말씀으로 기억되는 병아리 이야기입니다. 어느 청년이 계란 30개를 사서 식탁에 올려놓고 잠시 꿈을 꿉니다. 이 계란을 팔아서 닭을 사고 닭이 계란을 낳고 그 돈으로 고양이를 사고 고양이를 팔아 개를 사고 개를 팔아 당나귀를 사고 당나귀를 팔아 소를 사고 소를 팔아 땅을 삽니다. 청년은 그날 꿈속에서 큰 부자가 되었고 꿈에서 깨어보니 눈앞에 계란 한 판이 덩그러나 놓여있으므로 "내가 큰 부자인데 이깟 계란 한판이 대수냐"라면서 밖으로 내다버렸다는 말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어린 시절 이 말을 들으면서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격언으로 생각했습니다. 미리 미래의 가능성에 심취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이해했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는 임금님 앞에서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커다란 나무에서 열매가 하나 떨어지니 데구르르 굴러가 연못에 풍덩 빠졌다고 무한반복하는 이야기와도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열매가 몇 개인가 이야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열매는 떨어지고 데구르르 굴러가서 연못에 풍덩하고 빠진다는 같은 이야기를 무한 반복하여 임금님이 더 이상 이야기
“한 번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수원시 로컬푸드 의뢰로 농산물안정성검사(농농케어)를 받아야 하는데 그동안 검사를 해주던 경기도농업기술원 분석기계가 고장나서 못한다하여 대단히 곤란한 상황입니다. 연말까지는 검사가 불가하다고 합니다. 농가의 농산물 12건을 검사해야 출하가 가능하다는데 큰 걱정입니다. 큰 일입니다. 화성시농업기술센터에서 접수하고자 하는데 연결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실제 카톡에는 이보다 더 절절한 설명과 걱정과 부탁의 말씀이 있었습니다만 많이 줄이고 평상의 문장으로 보정했습니다. 우선 농민들이 정성으로 가꾼 농산물이고 출하를 위해 거쳐야 하는 검사의 길이 막혔으니 화성시의 도움을 청하는 상황입니다. 농업인이 화성시보다 적은 수원시에는 이 기기가 없다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곧바로 화성시 라인으로 연결하여 소통을 완료하였습니다. 그런데 화성시 담당자는 같은 화성시의 농산물인 줄 알고 검사를 하겠다고 하였는데 수원시 농가의 생산품이라는 말에 잠시 머뭇거리게 됩니다. 그리고 경기도농업기술원의 협조요청 공문을 보내달라 합니다. 기계가 고장나서 기존의 업무를 못하게 된 도 기술원에서 화성시 기술원으로 협조요청 공문서가 발송되었고 검사받을 농산물을 화성
지방선거가 가까워집니다. 4년간 지방자치를 위해 일하신 시의원, 군의원, 도의원, 시장군수, 도지사가 인계인수를 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초선시장은 전임자의 직인을 물려받게 되고 초선 시장이 재선되면 자연스럽게 8년의 임기 5년차를 이어갑니다. 더러 3선을 하면 12년동안 시청에서 정무직 공무원으로 일합니다. 늘공이라 칭하는 직업공무원도 59세가 되면 퇴직을 준비합니다. 25세에 들어와 34년동안 일하고 회갑을 앞둔 젊은 나이이 짐을 챙겨서 사무실을 나와 청사에 세워둔 중형승용차에 싣고 집으로 갑니다. 퇴임식을 하는 경우 꽃다발과 몇가지 선물상자를 트렁크 가득 싣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신문사 주필이 4년간 일하고 공천에서 밀려나서 한달여 임기를 앞두고 있거나 재선, 삼선 도전에서 실패하여 선거에서 낙선하는 경우 남은 1~2개월은 승리하듯 열정적으로 일하라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주 내용은 후임자를 위해 노력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선거유세에서 하루를 1년같이 열심히 일한다 했으니 30일을 늘공의 30년처럼 최선을 다해서 시정을 위해 노력하라 했습니다. 하지만 이른바 레임덕현상을 절절하게 느끼는 시기이기도 하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의미을 글도 나옵
<정보와 첩보> 동료와 상사에게 어떤 들은 이야기를 전할 때 정보인지 첩보인지를 구분해서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너한테만 하는 이야기는 첩보다. 통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어제 시청 국장님이 오셔서 이곳에 도로공사를 한다고 한다면 이는 누구나 알 수 있고 알아야 하는 정보, 공보사항이다. 상사는 주변의 후배들이 첩보와 정보를 흥부 박씨 처럼 물어다주면 매번 '김 주무관 아니었으면 중요한 정보를 놓칠 뻔 했군!'하면서 리액션을 해야한다. 선배는 후배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크게 반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렵게 얻어낸 정보를 전하는데 '이 사람아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었네!'하고 무시해 버리면 보고가 소원해져서 정말로 중요한 첩보를 놓칠 수 있기에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자세를 유지해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과거 관선 시장님의 하루 일정, 내일의 계획을 아는 공무원은 수십명 이내였다. 이 정보를 아는 것이 곧 힘이고 권력이기도 했다. 과거 모든 사무실에는 2개의 불빛이 있었다. 하나는 시장님 전구이고 다른 하나는 부시장의 것이다. 두개의 불이 켜있으면 두 분이 청내에 계신 것이고 꺼진 燈은 출장을 가셨거나 다른 용무로 사무실에 안게시므로 결
주광덕 남양주시장님과 남양주시 공무원께 드립니다! 저는 2016#2017년에 남양주시청에서 이석우 시장님을 모시고 공무원으로 근무한 이강석입니다. 공무원으로 근무한 2016년에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되었는데, 간부들과 영화를 관람하고 소감문을 모아서 영화사 허진호 감독 등 관계자, 출연배우 손예진님, 라미란님, 박해일님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공보과 용석만 과장의 노력으로 감독과 영화투자자가 시청을 방문하여 이석우 시장님께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당시 560만 관객은 큰 성과이고 남양주시 공무원이 기여한 바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시청을 방문한 영화사 일행을 덕혜옹주 묘역으로 안내하여 인사를 드렸습니다. 영화사 관계자가 묘역을 방문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영화에 대한 홍보효과가 있었으며 언론홍보를 통해 알려지면서 덕혜옹주 묘역 단체관람이 늘었습니다. 이에 구리시 소재 왕릉관리사무소에서 27분 조선왕의 왕릉사진을 덕혜옹주 묘역 앞 산책로에 전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네스코유산 등록자료를 공개해주었습니다. 시민은 물론 인근의 학생들이 관람했습니다.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나비효과가 발생한 것입니다. 공무원들의 적극행정으로 남양주시의
흑인마을 청년들이 아침 일찍 일터로 가는 길에 물살이 빠른 여울목을 건너야 했다. 이때 강둑에 던져진 검은 돌을 하나씩 안고 가는 게 아닌가. 그 이유가 궁금했던 선교사들이 묻자 청년들은 체중을 늘려 물살을 이겨내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물살을 견디기 위해 체중을 늘려야 하는데, 마침 주변에 둥근 돌이 많아 잘 활용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청년들이 가슴에 안고 가는 돌은 그 사람의 체중에 반비례했다. 즉, 체중이 가벼운 청년은 무거운 돌을 들어야 하고, 체중이 좀 나가는 경우에는 가벼운 돌을 선택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살펴본 결과 자신의 체중이 50kg 나가는 청년은 30kg 정도 나가는 돌을 선택하고, 60kg의 체중이라면 20kg의 돌을 안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대략 80kg의 무게를 확보하고 강을 건너는 셈이다. 흑인청년들이 강을 건널 때 검은 돌을 안고 가는 모습에서 인생사에 누구나 걱정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맞지 않는 상사를 만나기도 하고 불편한 부하 직원을 모시고(?)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평범해 보이지만 가정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 어려운 일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조선시대 임금 중 효성을 상징하는 분은 정조 대왕이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며 임금에 오르지 못한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아들이다. 장헌세자와 정조의 능은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있다. 왼쪽의 융릉은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와 동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고, 오른쪽의 건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와 동비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장헌세자의 능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당시에는 양주의 배봉산)에 있었으며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정조 13년(1789)의 일이다. 그후 한 해에 수 차례씩 아버지의 능참길에 올랐던 정조는 때때로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비오는 날에는 ‘아버지가 얼마나 추우실까’라는 생각에 사람을 시켜 무덤에 가 보게 했더니 전날밤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능참봉이 능 앞에 엎드려 있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정조가 부친의 묘소를 옮긴 후 능 주변 소나무에 송충이가 번식, 솔잎을 갉아 먹는 것을 보고 진노해 송충이를 잡아 입에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 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고 꾸짖고 돌아서자 갑자기 천둥번개와 장대비가 쏟아져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도 수원시내 고등학생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이재율 부지사님이 퇴임하신단다. 그냥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었다. 이 부지사님은 퇴임하지 않을 줄 믿었다. 늘 경기도정의 중심에서 일할 줄로만 생각했다. 축구 경기로 말하면 풀백과 링커였다. 행정이 어려우면 풀백이 되고 도정이 느슨하면 센터포워드로 뛰었다. 숱한 기자들의 표현대로 ‘뼛속까지 경기맨’ 이재율 부지사가 퇴임을 한단다. 50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이재율 ‘데자뷰’처럼 어린 9살 소년의 마음속에 그런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흰 브라우스에 검은 스커트를 입은 우리의 여선생님을 처음 보았다. 동네 누나들과는 다른 의상이었고 얼굴도 달랐다. 그래서 여자 선생님은 화장실을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 선생님은 매운 고추장, 시큼한 된장을 먹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설악산 사슴이 이슬만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처럼 선생님은 그냥 흰 쌀밥, 시금치나물, 순두부 등 예쁘고 흰 음식만 먹을거라 상상했었다. 그래서 이재율 부지사도 어려서 만난 초등학교 ‘사슴 여선생님’처럼 절대로 나이 들지 않고 퇴직하지 않고 경기도청에서 아주 오래도록 일할 줄 알았다. 하루하루를 1년처럼 일해 온 분이
다문화출신으로 보이는 청년이 화성특례시청 복도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본 동료 옴부즈만위원이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시청방문 목적을 물었습니다. 자동차세 납부를 위해 시청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둘이 안내를 위하여 옴부즈만실과 같은 1층 세정과로 갔습니다. "이 분이 자동차세를 납부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침 입구에 서있던 주무관 2명 중 한사람이 신속하게 안내했습니다. "주소가 어디이신가요?" 남양읍에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향남읍에 있는 만세구청 관할이었습니다. 대답은 간명했습니다. "만세구청으로 가세요!" 만세구청은 향남읍에 있습니다. 20km쯤 떨어진 곳입니다. 이 대목에서 민원처리는 완벽하게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뒷편에서 팀장이 걸어나왔습니다. 그리고 일행을 건너편 징수과로 안내했습니다. 우리 두명의 옴부즈만은 이쯤에서 안내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팀장의 민원안내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자동차세는 그 구조와 내용이 간명합니다. 세금이 부과되었는데 납부시기를 놓쳤을 것입니다. 고지서가 집으로 배달되었는데 수령하지 못하였거나 인터넷을 통해 모바일로 전송된 것을 아직 납부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동차세는 세금을 관리하는
2016년 8월에 손예진, 라미란, 박해일 등 유명배우가 출연한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했다. 남양주시 공무원들이 덕혜옹주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덕혜옹주의 묘가 남양주에 있기 때문이었다.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1989년 같은 해에 별세했다. 덕혜옹주는 4월 21일, 이방자 여사는 4월 30일에 별세해 남양주 금곡에 영면했다. 남양주시 공무원들은 영화 ‘덕혜옹주’를 관람한 뒤 소감문을 모아 자료집을 내고 이를 영화사와 문화단체 등에 배포했다. ‘슬프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 역사인 만큼 덕혜옹주를 기억하고 덕혜옹주의 묘가 남양주에 있는 것을 알리고자’ 자료집을 만들어 배포하고 영화사와 출연 배우들에게도 보냈던 것이다. 영화 상영 이후 남양주시는 덕혜옹주 묘역 진입로에 홍보물을 세웠다. 문화재청 왕릉관리사무소는 덕혜옹주묘역~영친왕 묘역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에 조선 27대 왕릉 사진과 연혁이 적힌 판넬을 전시했다. 시 공보실에서는 이후에도 지속적인 홍보활동을 이어갔다. 언론의 보도를 보고 수도권에서 청소년, 어른할 것 없이 관광객들이 찾아왔다. 왕릉관리사무소에서 별도의 문화해설사를 배치해 주었다. 1년이 지난 2017년 5월에 문화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