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아침 출근길은 10분 걷고 매교역에서 전철을 타고 수원역을 거쳐 고색역에 내려 시청 통근버스에 탑승하는 순서로 빠르고 편안하게 사무실에 도착합니다. 가끔은 승용차를 가져가는데 운전에 신경쓰면서 1시간이 걸리는데반해 대중교통은 10분 걷기, 전철, 통근버스로 이어지고 소요시간은 50분 이내이니 교통여건에 따라서는 승용차가 왕도, 지름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출근길 수원시내지역에서 시간을 많이 쓰고 퇴근길에도 화성시지역에서는 호쾌하게 달려가지만 수원중심가 집에 도착하는데는 추가시간이 소요됩니다. 학문에 왕도가 없듯이 출근길에도 지름길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아직도 승용차와 전철을 타고 통근버스를 이용하는 두가지 방안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리한 전철을 이용하면서 얻게되는 세가지 부가서비스는 나이들어 정부가 제공한 교통카드로 무료승차를 하는 것이 하나이고 빠르고 편안하게 목적지로 달려가는 대중교통의 고마움이 둘이며 셋은 자리에 앉거나 서서 잠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념,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추가 보너스로는 다른 젊은이들이 전철안에서 어찌 행동하고 무슨 일에 집중하는가를 보게되고 통근버스에서는 이시대
ooo 대형!!! 황망하여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망설이다가 다시 비보를 읽어보니 그냥 숨이 답답합니다. 평소처럼 반가운 소식을 보냈나 카카오톡 편지를 열었습니다. 상조회사에서 보내는 편지이니 가끔 살아오면서 알게된 지인의 부음을 보내는 글이려니 생각했습니다. 혹시 효자아드님 조철제 대형의 마음 슬프게 하는 부모님의 상사인가 생각했습니다. 아!, 그런데, 따님이 아버님의 부음을 알리는 글입니다. 이 무슨 일인가요. 인자하고 화사한 대형의 사진이 왜 여기에서 나오시나요. 불쑥 나타나서 인사를 하듯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사고인가 궁금하여 지인 몇사람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 당신이 어제밤 늦은 시각에 떠나신 걸 알았습니다. 황망하여 빈소 아주대만 확인하고 보슬비 내리는 길을 달렸습니다. 그리고 빈소에서 대형의 사진앞에 절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냥 황망한 마음뿐이었지요. 경기도청 여러부서 과, 가가호호에서 퇴직한 공무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합류해서 슬픔을 나눴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하면 기쁨은 커지고 슬픔은 나눠진다고 했지만 이 순간에 슬픔은 줄어들지 못했습니다. 빈소에서 평소에 만나면 밝은 표정으로 인
진료비를 내면 병원에서는 영수증 한장과 주차장을 패스할 수 있는 바코드 하나를 줄 뿐입니다. 투약을 위한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서 또다시 돈을 내고 약을 받습니다.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의 몸과 정신건강을 위해 진료, 시술을 할뿐 우리몸에 보태주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병원에서 주는 것은 주사 뿐입니다. 오히려 사전에 채혈을 통해 주사기 한가득 피를 뽑아갑니다. 다음으로 아쉬운 일은 비행기 비즈니스석 항공료입니다. 이코노미석의 2배가 넘는 돈을 냈지만 좌석에서 일어서는 순간 똑같은 비행기 승객입니다. 일반석에 비해 2분정도 먼저내리는 혜택이 있을뿐입니다. 캐리어가 조금 일찍 나오는가는 모르겠습니다만 큰 돈을 부담한데 비하여 비행장을 나설 때 허전함이 클 것입니다. 자신은 이코노미가 아니라 비즈니스 손님이었다는 영수증을 가계부에 붙이면서 나홀로 즐거워하는 것은 본인의 자화자찬일뿐 다른 승객들은 모르는 일입니다. 아내들의 아침, 저녁 식사준비, 휴일의 점심식사에 들이는 공은 남편과 가족들만 기억하는 일이어서 노고에 비해 평가절하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과 저녁을 먹을 때 반찬 한 두가지를 칭찬하기에 열을 올리는 중입니다. 김치가 적당히 익었다거
3개월후 6월24일 비봉노인대학 강의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터이기는 한데 그 이후 5개월, 총 여덟달 후 11월11일에 수원시 팔달구노인대학에서도 오후2시로 날짜는 물론 시각까지 2시간으로 결정해서 출강을 하라 하십니다. 화성과 수원이니 연결성은 없어보이는데 두곳 모두 1년치 일정계획을 잡는 것, 강의제목을 정하는 일, 그리고 강의계획서를 내라는 말씀이 공통됩니다. 대한노인회노인회 경기 수원시지부, 경기 화성시지부, 그리고 각각의 비봉면 분회와 권선구 분회에서는 아마도 중앙의 지침에 따라서 시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노인대학 강의를 하는 줄 추론을 해 봅니다. 비봉노인대학의 경우 3번 출강한 바여서 노인대학장님이 다음번에는 다른 소재, 주제로 준비해달라는 당부를 하신 바입니다. 다음주 화요일에는 수원시 팔달구청 공무원 100명을 모시고 "슬기로운 행사진행"에 대한 두시간 강의를 앞두고 있습니다. 1개월전에 시잘된 강의안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PPT작업은 끊없는 개미지옥입니다. 한페이지를 만들면 이에 파생되는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사진을 찾아보거나 생각에 접근하는 사진을 구하기 위해 인터넷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일단 펼치고나서
대중가요 가사중에 고장난 벽시계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월아 너는 어찌 돌아도 보지 않느냐. 나를 속인 사람보다 니가 더욱 야속 하더라.” 그리고 마무리는 더욱 심오합니다.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 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어디 세월이 고장나겠습니까. 요즘에 나오는 시계는 건전지만 충분하면 끝없이 돌아갑니다.그리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벽시계는 아침 그 시각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새벽 5시경입니다. 어제저녁에 잠들기전에는 밤 10시30분이었고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기상하기까지 대략 6시간반동안 분침, 초침이 틀리지 않고 그 자리를 돌고돌아 새벽, 아침 그 시각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시계에게 한 일이라고는 동드란 작은 건전지하나 끼웠을 뿐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시계주인이 보든 아니보든 시계의 초침은 1분에 한바퀴를 돌아 60초를 완성하고 그 시각에 분침은 그만큼 움직이고 시침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정을 넘어서 새벽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나 워치는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잠들면 자기들도 숙면을 합니다. 물론 마음속 시간의 흐름은 무의식으로 관리하다가 주인이 목이말라 새벽에 깨면 잠을 안잔 것처럼 표정관리를 하면서 번
1990년대 우리사회에 널리 퍼진 고스톱은 운칠기삼이라고 했습니다. 실력은 30%정도이고 그날의 운이 70%를 좌우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밤 늦은시각까지 아내의 기가를 독촉하는 전화를 받으면서 동료들과 어울린 젊은 날의 추억을 되집어보면 고스톱이 잘되는 날이 더러 있었지만 마이너스 기록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더구나 초년시절 막판에 5광이 나서 저녁내내 잃은 놀음밑천을 다 회수할 기회가 왔지만 이내 판이 깨져서 원금을 회수할 기회를 놓친 경우도 두 번 이상 있었습니다. 지금도 75세에 이른 당시의 선배들을 만나면 막내가 돈을 많이 잃은 것은 알았지만 자신도 풍족하지는 않아서 판을 마감한 것 같다고 인정을 해 주십니다. 하지만 당시의 서글품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을 채우고 있습니다. 혹시 인생도 운칠기삼으로 사는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정치권을 보면 5번 도전하여 변호사가 된 분이 있고 젊은 날에 한방, 대학교 3학년 시절에 사법고시에 패스를 한 분도 있습니다. 역시 여러번 도전한 경우나 한 번에 합격한 경우나 운칠기삼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국가기관의 직원을 조선시대 음서제도처럼 채용했다해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한국사 강사중에 유
인생은 수많은 선택과 결정의 과정이라는 말을 합니다. 인생이 걸어온 길은 그 선택의 결과로 사거리에서 직진하기도 하고 삼거리에서 우회전 또는 좌회전하고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다시 넓은 길을 나와서 좁은 길, 비포장길, 자갈길을 서행하다가 또다시 넓은 길을 만나서 창문을 열고 시원하게 질주하기도 합니다. 인생을 돌이켜보면 신명나게 달린 구간도 있고 덜덜거리며 불편한 먼짓길을 불편하게 운행한 시절도 있습니다. 대구에서 젊은시절을 보낸 지인이 최근에 고향을 다녀왔는데 40년전보다 도로가 넓어지고 구간도 늘어나서 첨단의 네비게이션을 이용하여 목적지를 가기위해 운전을 하니 이처럼 다양한 경로가 생겨났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인생도 참으로 많은 선택과 결정을 해야하고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인가 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다보면 한두번 실수로 고속도로 출구를 지나치거나 조금 일찍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갑자기 남은 거리가 80km에서 120으로 늘어나는 순간에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만 잠시후에는 스스로 마음을 평온하게 잡아보기도 합니다. 그 이유와 핑계는 신의 뜻이라 가정합니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에 가는 길
대통령 시절에는 조간이나 석간신문에 국무총리, 감사원장, 국무위원, 장관의 사진이 말그대로 대문짝, 신문짝만하게 나면 그것이 개각이었습니다. 조각수준의 개각도 여러번 보았습니다. 국무위원 21명중 10명정도를 바꾸면 '개각수준'이라 했던 것입니다. 특히 국무총리가 바뀌면 신문에 네모사진이 등장합니다. 부총리, 감사원장, 대통령비서실장 사진도 네모입니다. 장관급 국무위원 사진은 동그라미였습니다. 그러니까 네모사진과 동그라미 사진이 신문에 올라오면 조각급 개각이고 동그리마 4명이 나타나면 부분개각입니다. 개각은 장기근속자를 교체하는 경우가 있고 국정의 특정분야에서 미진한 부분을 일신우일신한다는 분위기쇄신용 개각도 있었습니다. 국민과 독자들은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데 관심을 가졌고 2년동안 장관으로 일하고 떠난 이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안 일인데 일부 장관은 퇴직후에 정부 공공기관에서 장관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는 CEO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장관자리에서 내려온 것을 크게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그정도 위치에서 일하는 분이 한달 근무하고 15일, 20일, 25일에 받는 급여통장을 찍어보고 즐거워하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그리 추정합니다. 반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이든 타산지석이든 어렵다는 한자에 의지해볼까 합니다. 오래도 아닌 조선시대에 양반으로 신분을 가르고 일부 기득권층은 한문을 익히고 다른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음으로서 권력을 이용하여 지배계층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제사의 축문이나 제문을 어렵다는 한자로 써놓고는 저들끼리 읽으면서 하인들은 모르지 했다고 합니다. 어느 집안의 며느리들이 영어로만 이야기를 하므로 늦게 합류한 동서가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서 히어링은 되는 정도에 이르러 명절모임에 갔는데 이번에는 그 동서들이 모두 프랑스어로 밀담을 나누더라는 조크도 있습니다. 그래서인가 프랑스어 건배사로는 '마셔불어'라는 조크조차 있는가 봅니다. 그러자 바로옆 동료가 독일어 건배사는 '마시랑께'라고 하자 다른 친구가 러시아 건배는 '먀서브러스키'라고 받았다는 농담도 들어본바 입니다. 혹시 요즘 정치권이 그런 건배사를 하는 모습일까 상상해 봅니다. 우리의 정치는 국민 모두를 정치학과에 입학시켰고 모든 방송이 정치강의를 하는 듯 보입니다. 종편은 정치이야기로 프로그램을 채우고 이제는 김밥할머니 평생재산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는 뉴스조차 만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헌혈 100회를 달성
1977년에 공직에 들어와 면사무소에 출근을 하면 가장 먼저 해야하는 일이 출근부 싸인입니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영어 필기체처럼 연결해서 서명을 하기도 하고 당시 총무계장님은 한자 李(이)를 쓰고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40년 가까이 써오신 자신의 싸인이어서 그 필체가 일정, 균일하여 마치 팽이 여러 개가 종이위에서 돌고있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81년에 경기도청 사업소에 근무할 때에도 어김없이 출근하면 싸인을 했습니다. A4용지를 가로로 길게 잘라 만든 크기의 두꺼운 캔트지에 깔끔하게 인쇄된 출근부는 1년에 4번 분기별로 만나는 아침 인사 妖精(요정)과도 같았습니다. 공무로 2박3일 출장을 가면 2일과 3일차 난에는 ‘출장’이라는 고무인을 찍었습니다. 아침마다 복무담당 공무원은 각 부서의 출근카드가 담긴 나무상자를 아침 7시반경에 복도 창가에 비치한 후 지키고 있다가 정각 9시가 되면 즉각 회수해 사무실로 가져갔습니다. 출근부를 회수할 시각에 헐레벌떡 도착한 직원과의 밀당도 벌어집니다. 9시전에 왔으니 싸인을 하겠다는 입장과 늦었으니 지각이라는 주장이 격렬합니다. 결국 그날의 출근부에는 ‘지참’이라는 朱印(주인)이 찍히고 지각한 사유를 써내야 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