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화성시청에서 청년과 장년시대를 보낸 후 정년퇴직하고 나서 그동안 공무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는가, 진심으로 열심히 일하였나를 돌이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름 바쁘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데, 공직자로서 도민에게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과천청사에 있는 기재부 사무실에 가서 이틀 이상 투쟁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2000년 전후에 비수도권 기초자치단체장의 법인카드를 들고 상경한 공무원 열사들이 기재부와 중앙부처의 사무관을 만나기 위해 청사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이른바 비수도권 지방의 시청과 군청의 공무원들이 당시에 서울 광화문과 과천 정부청사에 몰려있는, 예산을 쥐고 있던 중앙부처를 방문하여 투쟁적으로 예산을 따냈다고 합니다. 예산확보는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과실을 따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지난날 호남, 영남, 충청, 강원도 공무원들은 4박5일치 짐을 미리 챙겨서 서울로 과천으로 올라왔답니다. 요즘에는 지방공무원들이 세종시로 출장을 가고 있습니다. 열정적인 공무원들은 아침과 오후에 현장으로 달려가서 중앙의 귀하신 국가 공무원에게 가난하고 인구가 줄어가는 군민 3만 규모의 기초자치단체를
우선은 인사발령장을 전달하는 행사를 ‘사령교부’라고 하는 용어부터 개선을 건의합니다. 공직 내내 그렇게 발령장을 받았으면서 이제서야 개선을 건의하는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멋지고 의미 있는, 발령장을 주는 자의 입장이 아니라 받는 공직자의 시선에서 개선해 달라는 의견을 말하고자 합니다. 1977년이면 공직에서도 권위주의가 하늘에 닿아있을 시기입니다. 화성군청 군수님을 만나서 5급을류 공무원 사령교부, 오늘날 9급 공무원 발령장을 받으러 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생으로 학원을 다니는 중에 발령이 났다는 연락을 받고 흰색 T-셔츠에 끈 없는 운동화를 신고 오산읍에 소재한 화성군청 내무과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내무과장, 행정계장은 모든 ‘공무원의 헌병’이어서 이른바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던 시절인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발령장 받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겁 없이 호랑이 굴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예상 밖의 불량하고 미흡한 발령 대상자를 본 당시의 목이 짧은 행정계장님은 ‘복장불량’을 호되게 지적했습니다. “당신은 뭐요?” “발령장 주신다고 해서 받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복장이 뭐요? 발령자 준수사항을 읽지 않았
10년 전에 재미삼아 작성해 본 나름의 전화기 사용설명서인데 2023년 오늘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듯합니다. 일부 부분개정이 필요해 보입니다만 개정한다 해도 더 보강할 내용이 떠오를 뿐 삭제할 곳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핸드폰 이전에 쓴 ‘자안리’ 마이크가 생각났습니다. 고향마을 1977년경에는 자안1리와 2리를 합해서 70호 200여명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우체국에서 공급한 전화기는 자안2리 이장님 댁에 1대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대략 45년 전 시골마을 이야기입니다. 이장님 댁 동네 스피커 방송이 전달되는 자안2리 주민들은 도시에서 걸려온 일가친척, 형제자매의 전화를 30분 시차를 가지고 걸고 받을 수 있었지만 윗마을 자안1리 고향마을 주민들은 본인이 필요할 때 아랫마을 이장님 집에 가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자석식 전화기의 손잡이를 잡고 전기를 일으키면 우체국에서 신호를 받아 통화가 되고 서울, 수원, 인천지역 번호를 신청하면 잠시 후에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들고 기다리면 상대편에서 ‘여보세요’하여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빈약한 통신의 시대를 지나 1998년 동두천시청 동장으로 근무한다는 명분을 바탕으로 이동전화기를 신청하였고 사장
가정과 직장은 물론 기업이나 공장의 생산공정에서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다수가 크게 편리하고 생산성을 확충할 수 있는 사례를 자주 보게 됩니다. 중학생 때 시골마을에서는 부엌과 안방사이의 벽을 뚫어 밥과 반찬이 드나드는 창을 내는 작업이 유행했습니다. 방에 상을 펴고 부엌에서 어머니가 올려주는 반찬과 밥, 국그릇으로 아들딸은 방안에서 상을 차렸습니다. 초창기 할아버지들은 '에헴'하며 불편해 하셨지만 수년 내에 시골동네 모든 집 주방-안방간 사이에는 이른바 음식을 위한 ‘소통의 문’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들어오고 빈 그릇을 설거지하기 위해 드나드는 것은 물론 가족 간의 소통의 창문이 되었습니다. 주차장에서 건물로 들어오는 길이 멋스럽지만 불편하게 만들어져 있으므로 이곳에 지름길을 내는 개선안을 제안하여 공사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대통령을 하신 분(아마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이 대학총장으로 일할 때 학생과 교수들이 잔디를 밟고 다녀서 징계를 하겠다는 주장에 대해 현장을 살핀 결과 그 곳이 지름길이고 이곳을 막으면 먼 거리를 돌아가는 불편함을 확인하고 오히려 그곳으로 길을 낸 사례를 참고했습
요즘 젊은이들은 늘 핸드폰을 손에들고 눈앞 30cm를 유지합니다. 초등학생때 선생님은 교과서를 눈앞 30cm에 두고 읽으라 하셨지 스마트폰을 그리하라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1965년 초등학고 1학년때에는 스마트폰이 없었고 가정전화도 없었고 학교의 교장선생님 교무실에도 전화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끔 학교앞을 지나가는 군인들중에 몇명이 무전기를 들고 가거나 등에 안테나가 달린 등짐을 지고 행군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늘 가방을 메고 앞을 보면서 걸었고 더러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은 교과서를 들고 읽으면서 걷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선 전철안에서 책을 읽거나 통학버스 안에서 교과서를 보고 시험공부를 하는 중고생을 보는 것이 보통의 젊은이, 학생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해 어느날부터 어른들이 폴더형 핸드폰을 들고다니고 얼마지나서는 모두가 납짝한 스마트폰이라는 것을 들고 그 안에 비춰지는 글과 그림을 보고 있습니다. 버스와 전철안 승객들의 손에 들려있던 책은 스마트폰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 작은 폰을 두손으로 부여잡고 두눈을 가까이 대고 내용을 읽고 있습니다. 손가락이 참으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그림을 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3년고개'라는 글을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깨닫고 강의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3년고개'라서 3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통념을 뛰어넘어서 3년을 산다고 생각한 며느리의 적극성에 박수를 보내게 되었고 그런 생각으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토리는 이러합니다. 어느 날 노인이 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3년고개'에서 넘어져 3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걱정에 머리를 싸매고 누웠습니다. 건강하시던 시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며느리가 물었습니다. “아버님, 어찌하여 누워만 계십니까?” 시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내가 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다가 저 '3년고개'에서 넘어졌단다. 이제 3년 후에는 죽게 되었으므로 이렇게 누워있단다.” 시아버지의 근심 어린 답변에 며느리는 말했습니다. “그럼 아버님, '3년고개'에 가셔서 한 번 더 넘어지시면 3년을 추가해서 더 사시겠습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말을 듣자 크게 깨닫고 '3년고개'에 가서 일부러 여러 번 넘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시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은 이 고개에서 6만 번을 넘어졌다.” 며느리의 재치로 노인의 걱정을 해
식당에서 배우는 인생 며칠 전에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두 집 부부가 점심을 먹었습니다. 주인장 와이프는 주방에서 생태와 코다리찜 2인분, 4인분을 찌그러져 수세미가 닿는 부분만 반짝이고 그 안쪽은 검정색이 남아있는 냄비에 담아 애벌을 끓여서 남편에게 인계하고 남편은 즉시 악어 입 옆으로 돌린 듯 보이는 집게로 번쩍 들어서 손님상에 배달해 줍니다. 12시 지나 들어간 식당에는 손님이 한가득이고 이미 식사를 마친 테이블을 정리하지 못 한 채 남자 사장 혼자서 홀 서빙하고 계산대에서 카드를 받고 친절하게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장사는 이렇게 해야 잘 되는 것이라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즘 코로나19로 손님의 등락이 크다보니 종업원을 한 분 더 두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동시수용 20명 정도의 식당에서 종업원을 채용하면 한 달 인건비와 함께 발생하는 잘잘한 비용을 감당하기보다는 스스로 발품을 더 팔아서 이른바 박리다매(薄利多賣) 전략으로 가시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이 식당이 손님을 끄는 힘은 아내의 손맛인가 생각합니다. 국물과 반찬이 입에 맞습니다. 살짝 건조 후 볶아낸 듯 여겨지는 어묵조림의 식감이 기분을 좋게 합
중앙지와 지방신문이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를 병용하던 1988년 전후의 시기에 국무총리, 대통령비서실장, 장관인선 발표를 보면 장관급 인사의 사진은 동그라미이고 국무총리, 감사원장, 대법원장,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의 사진은 동그라미 장관의 사진보다 조금 더 큰 네모사진이었습니다. 신문보도에서 사진의 크기는 그 인물의 위계와 비중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인사중 단 한명인 대통령비서실장의 위상은 아마도 총리급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비서실장, 조선시대 도승지는 '1인 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와 현행 경제와 교육을 담당하는 부총리와의 중간쯤에 자리할 것으로 추측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비서실장의 위상이 높은 이유는 모든 조직과 기구와 대기업에서 비서실장의 위치는 공고하고 강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비서실장은 비밀스러운 일, 소중하게 다뤄야 할 자료를 챙기는 인물로 생각합니다. 야전에서는 '자료와 서류가 든 가방을 든다'해서 비서는 '가방맨'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요즘에 미국 대통령이 현장에 나갈 때 지근거리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정부요원이 카메라에 잡히는데, 이 가방 속에는 핵을 열고 닫는 장비, 즉 핵 단
오산시 궐동에 소재한 궐리사는 공자님의 사당입니다. 공자의 64세손인 공서린(1483~1541)선생이 낙향해 강당을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던 곳입니다. 공서린 선생 별세후에 폐허가 되었는데 1792년 정조대왕의 어명으로 사당을 다시 짓게 됩니다. 정조는 사당에 성묘라는 어필현판을 내렸습니다. 2025년 3월 27일에 “공부자탄강 2576년 춘기 석전대제”가 봉행되었습니다. 오산시청에 근무할 때 3번 초헌관 초청을 받아서 석전대제에 참여했습니다. 시청을 떠날 때 화성궐리사의 유관진 도유사(전 오산시 민선시장)님의 배려로 임금님이 내리시는 교지 형식의 초헌관 초청장을 받았고 이를 표구하여 방에 걸어두었습니다. 공자님의 격려를 받고 공직에서 열심히 일하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2025년에 6월 14일에 화성궐리사 유도회가 주관하는 “오산시민을 위한 김병조 선생 초청 강연회”가 열렸고 초청을 받아 참석했습니다. 강연내용은 공자님의 仁義禮智(인의예지)인데 개그맨 출신 한학자 김병조 교수님의 명강의가 마음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정리한 내용을 개인 수필집에 실어서 출간하였습니다. 이후 공자님이 맺어준 인연으로 3번에 걸쳐 석전대제에 참여할때에 관복을 관장하시고 차
최근 국회에서 양곡관리법을 제정하였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쌀 수급 안정, 직불제 확대 및 농업·농촌 발전방안'을 발표했는데 이번 대책은 쌀값 하락을 막겠다는 취지이며 더불어민주당이 3월23일 처리한 양곡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대안책이라고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일 국무회의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재의 요구를 의결하며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농촌을 세심히 살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정부는 올해 수확기 쌀값이 한 가마니(80㎏)당 20만원 수준이 되도록 수급 안정 대책을 적극 추진한다고 했는데 이는 지난해 수확기 쌀값(80㎏당 18만7268원)을 웃도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마트에 가면 10kg(25,000원), 20kg(50,000원) 단위로 구매하여 필요한 만큼씩 플라스틱 병에 담아서 줄 세워놓고 밥을 지어먹었습니다. 그런데 80kg들이 쌀 1포대가 20만원쯤 나간다는 계산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양곡관리법 개정과 정부의 거부권 행사 내용이 언론에 회자(膾炙)되는 것을 보면서 1977년 9급 공무원 초임 당시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