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살다보면 ‘그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어떤 일을 거기까지만 진행한 것이 잘된 일이라는 이의미로도 들리지만 대부분은 더 나쁜 상태까지 갈 수도 있었는데 그쯤에서 멈춘 것이 다행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낫지만 접촉사고 수준인 경우에 쓰일 수 있다. 또는 교통사고로 찰과상을 입었다면 팔이 부러지지 않아 다행, 왼팔이 부러졌다면 오른팔은 성하니 일상생활에 불편이 덜하다고 할 것이고 다리는 성하여 걸어 다닐 수 있어 ‘그만하길 다행’이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다리가 부러졌다면 단순골절, 복잡골절을 말할 것이고 허리가 성하니 다리 아픈 것은 시간만 지나면 될 일 아니냐면서 위로를 한다. 그런데 이 같은 경우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먼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는 편리하고 필요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후회하고 원망하고 따지는 일이 무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발생하는 일과 사건들을 운명적으로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운명을 타개해 나가려는 의지는 사라지고 매사에 맹종하게 되는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든지 이보다 더 높은
“저승사자와 사신은 25㎝ 간격으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고속도로에서 다른 버스와의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이 무섭다는 변우량 교수님의 강의내용이다. 변 교수님은 또 “깊은 산속 높은 교량에서 사고가 나서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모습을 같은 회사 다음 버스안에서 바라보아야만 했다.”고도 했다. 변 교수는 출장지에서 돌아오기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줄을 서 있는데 조금 앞에서 어느 청년이 새치기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참 바쁜 일이 있으려니 하면서 눈감아 주었고 순서대로 타다 보니 교수님 앞에서 정원이 마감되고 다음 버스를 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새치기 청년까지 태운 앞 버스가 저렇게 교량 난간에 대롱대롱 위태로운 지경을 맞이한 것이다. 어떤 대학교수가 조금 빨리 보직교수가 되었는데 거기에는 약간의 개인적인 청탁이 있던 것으로 대부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보직교수가 된 지 몇 주 만에 전국 대학 회의가 열렸고 보직교수로서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가 탑승한 헬기가 안개 속에서 무리하게 운행하다가 산 중턱에 충돌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고 한다. 1981년에 창문너머로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시에 교수님의 강의내용이 창밖의 젊은
남양주에서의 계란 삶기는 게릴라 전략입니다. 연휴 중 어느 날 아침에 필이 오면 동남마트 할인점에 가서 계란한판을 사오는 것입니다. GS아파트에서 일단 삶아서 들고 출근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오늘아침 계란 값은 5,400원입니다. 30개 1판이니 1개당 180원입니다. 160원인 날도 있었는데 명절 지났다고 금방 가격이 올랐습니다. 물론 수요와 공급의 곡선이 만나는 가격일 것입니다. 계란은 찬물에서 시작하여 물이 뜨거울 타임에 한쪽 방향으로 5번 정도 계란더미를 저어 줍니다. 계란의 노른자가 정중앙에 위치하도록 하는 것이라 합니다. 물론 소금과 식초는 가스 불 켜고 곧바로 뿌리고 넣었습니다. 이제 20분 정도 기다리면 계란이 반숙이거나 거의 90% 완숙이 될 것입니다. 팔팔 끓을 때 불을 끄고 냄비를 싱크대로 이동한 후 찬물을 뿌려줍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물을 따르고 계속해서 찬물에 식힙니다. 껍질 까기에 편하도록 하자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계란판에 다시 담은 후 시장 가방에 계란 한판을 세워서 넣은 후 공간에 신문을 접어서 끼워줍니다. 장바구니를 들어도 계란이 미끌어 지지 않도록 쇄기를 박아주는 것입니다. 이제 홍유릉 뒷길을 따라 산책하면 됩니다. 오늘
1919년 3월에 우리 남양주시에서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독립만세를 부른지 97년이 흘렀고 1919년 그 해에 승하(昇遐)하신 고종황제는 사후에 대한민국 백성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3·1운동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종황제(1852~1919)와 명성황후(1851~1895)를 홍유릉(洪裕陵·사적207호)에 모셨습니다. 홍릉(洪陵)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모셨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왕릉에 등을 기댄 듯 위치한 유릉(裕陵)에는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순정황후가 영면하십니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고종과 국정을 논의하는 파트너였으며 당시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배경이 없는 분이라서 황후(왕비) 자리에 올랐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홍유릉을 지나 뒷산으로 가면 영친왕을 모신 영원(英園), 이구 황세손을 모신 회인원(懷仁園)이 자리합니다. 의친왕묘가 같은 자락에서 마주하며 특히 고종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묘가 참으로 단아하게 우리를 맞아줍니다. 고명딸 덕혜옹주(1912~1989)의 교육을 위해 고종황제께서는 덕수궁에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幼稚園)을 설립했다고 합니다. 정략결혼과 따님을
업무협의는 만나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효율적인 것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SNS와 내부통신망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합니다. 실장, 과장, 주무계장을 그룹으로 하는 카톡방을 만들고자 합니다. 전자 편지를 수시로 보고, 메일도 자주 열 것 입니다. 긍정의 마인드로 세상을 보고 민원인의 입장에서 판단하며 물건을 파는 점원의 심정으로 업무를 추진하면 참 좋을 것입니다. 갑이 아니라 을, 병, 정이 되는 역할연기도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실 배치는 원탁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외부인사는 가급적 상석에 배치하고 공무원은 주변에 자리 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국장이 위원장인 경우에도 원탁이나 사각형으로 배치하고 (표 나지 않게) 외부 인사를 상석으로 모시도록 하고자 합니다. 외부인사와 과장님, 팀장님들이 회의 중 국장과 논의할 사안이 발생하였다면, 국장과 실장을 해당과로 부르시면 됩니다. 다수인원이 이동하는 것보다 국장이나 실장, 부시장이 수첩 하나 들고 그분들이 계신 곳으로 가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출장, 연가, 외출, 기타 공사무의 경우 간단한 내용을 메시지로 보내거나 메모, 기타 SNS, 내부 통신망을 최대한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흑인 마을 청년들이 아침 일찍 일터로 가는 길에 물살이 빠른 여울목을 건너야 하는데 이때 강둑에 던져진 검은 돌을 하나씩 안고 갑니다. 선교사들이 궁금하여 그 이유를 확인한바 청년들이 돌을 안고 가는 이유는 체중을 늘려서 물살을 이겨내기 위함입니다. 청년들이 물살을 견디기 위해서는 체중을 늘려야 하는데 마침 주변에 둥근 돌이 많이 있어서 잘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청년들이 가슴에 안고 가는 돌은 그 사람의 체중에 반비례합니다. 즉, 체중이 가벼운 청년은 무거운 돌을 들어야 하고 체중이 좀 나가는 경우에는 가벼운 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살펴본 결과 자신의 체중이 50kg나가는 청년은 30kg 정도 나가는 돌을 선택하고 60kg의 체중이라면 20kg의 돌을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과 돌의 무게를 합해서 대략 80kg의 무게를 확보하고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무게의 기준은 지난 수 백년, 수 천년을 살아온 이들 부족사회의 경험칙일 것입니다. 그동안 장마에 떠내려간 아이들, 물살에 넘어져 다친 이들이 아주 많았을 것이므로 그때마다 물살을 적정하게 견뎌내는 돌의 무게와 물살을 이겨내
### 사자와 호랑이는 빠른 다리와 날카로운 송곳니로 살아갑니다. 시원한 오후에 5분짜리 사냥을 해서 영양 한 마리를 잡은 6마리 사자가족은 만찬을 즐긴 후 잠을 자고 다음날 오전에도 게으른 눈으로 주변을 굽어보며 그냥 존재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호랑이도 일순간 달려가 먹이 감을 낚아채면 2~3일은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늪지대 악어도 지나가는 누(소와 비슷한 동물) 뒷다리 잡아채 물속으로 끌어가 익사시킨 후 아내 악어와 빨래 짜듯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몸통비틀기를 하여 먹이를 나누면 보름정도는 물만 먹으며 소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한방에 먹이를 먹고 되새김질 하듯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동차는 20년 내내 휘발유만 넣어주면 씽씽 달리고 그러다가 조금 미안하면 엔진오일 갈아주고 미션오일 보충하면 그만입니다. 가끔 공기압 살펴보고 플러그 전선줄 갈아주면 그저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참으로 필요한 소품이 많습니다. 큰 물건으로는 미사일, 여객기, 덤프트럭, 아파트, 100층 빌딩이 필요합니다. 百貨店(백화점)은 이제 千(천)화점 萬(만)화점이 되었습니다. 백화점에서는 주로 마른 물건을
### 1983년에 퇴임하신 공직 선배님이 퇴직하시는 날까지 사무실에서 비품대장과 소모품대장을 정리하시고 추운 겨울날 1월 중순에 자택에서 도장 결재를 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후배들의 송별 기념품도 연거푸 정중히 거절하시고 다른 그 무엇도 그리하시므로 1984년부터 2009년까지 25년 동안 사무실과 집에 보관하다 선배님의 따님에게 전달한 일도 생각이 납니다.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이분의 사연은 훗날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오늘 아침에 불쑥 선배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32년 전에 만나 뵌 그분의 공직만큼 세월을 보내고 보니 공직이든 주변이든 모든 것들이 소중해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엊그제 전주행사에서 가져온 테이블의 네임택, 회의서류, 3천원짜리 기념품이 더더욱 소중해 보입니다. 바쁘게 살면서 정신없이 키우고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들딸이 소중합니다만 그 딸 아들이 결혼해서 낳은 손자손녀가 더더욱 사랑스럽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식은 내리사랑이어서 아들딸 이상으로 손자손녀가 귀하디귀하다는 말씀에 대해 공감을 할 것 같습니다. 90을 바라보시는 장인어르신을 수 개월 만에 뵙고 악수하면서 인사드렸습니다. 외손녀딸 현아와는 아주 재미
### 1975년 비봉면 자안1리와 2리를 통 털어 80호에 500명쯤이 살았는데 비봉우체국 교환실에 매달린 교환식 전화 1대가 소통의 전부였습니다. 이종근 이장님 댁에 설치된 이 전화기는 설치당시 배정받은 분의 소유이므로 다른 분이 이장을 이어받았지만 직인과 부책만 넘어가고 전화기는 그대로 구이장님 댁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장은 아니지만 전과같이 공공성있는 전화기의 기능은 계속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서울에 나가 사시는 집안 어르신의 자안리 거주 친척간의 통화매신저역할에는 달라짐이 없습니다. 봉재야! 서울에서 전화 왔으니 전화 받아라. 이봉재 아저씨가 구이장댁에 가면 전화는 끊겨있고 10분 기다리면 다시 서울에서 전화가 와서 통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전화를 걸 일이면 교환실에 서울번호를 신청하고 기다렸다가 연결되면 통화하고 다시 교환양에게 몇 통화인가 물어 그 요금을 구이장님께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여유롭게 기다려야 합니다. 급하게 서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1977년에 면사무소 발령을 받았습니다. 행정전화가 울리는데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아 수화기를 들려하자 그냥 두라고 합니다. 알고 보니 군청 행정전화 라인에 4개면이 매달려
### 수년 전에 공업용 '우지라면'사건이 크게 보도되어 온 국민이 관심을 가졌던 일이 있었습니다만 공업용 우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소에서 기름을 발라낼 때 공업용으로 쓸 요량으로 비위생적으로 관리하여서 문제가 된 것으로 압니다. 소를 도축하면 나오는 흰색 덩어리 기름은 식용보다는 공업용에 쓰이고 있다 합니다. 하지만 1970년대 우리의 시골 정육점(푸주간)에서 매주 매일 강조하는 오늘의 표어는 "고기는 냉장고에 있습니다."라는 흰 바탕에 붉은색 아크릴 표찰입니다. 좋은 고기는 냉장을 해야 하니 쇼윈도우에 걸어두지 못합니다. 그러니 혹시 손님들이 고기가 떨어져서 없는 줄 생각하고 발길을 돌릴 수도 있으므로 고기가 많이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의 아크릴 표찰을 내걸었던 것입니다. 증조할아버지 제사를 맞이하여 어머니께서는 초등생 아들에게 5km 걸어가서 다시 걸어오는 면사무소 인근 윤씨 정육점에 가서 소고기 반근(300g)을 사오라 하십니다. 말표 검정색 고무신을 신고 타박타박 걷고 걸어서 두 고개를 넘어 면소재지 중심부에 자리한 정육점에 도착합니다. 소고기 반근을 주문하니 炙(적)꺼리냐 찌게꺼리냐를 물으십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적거리라 답하니 마블링으로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