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 백미항 넓은 갯벌에 서니 온몸에 짠 기를 풀어놓은 듯 오롯한 그 맛이 짭조름하니 알싸하다 미지근한 순항은 밍밍하지만 호된 사지를 넘어온 짜릿한 안착은 단번에 빨려든다 수산물 작업장 창고 마당 꽃 달린 해님이 달그락거리는 오후 널브러진 그물은 한낮 햇살에 달큰하게 늘어지고 비닐하우스 한 채 굴뚝 연기로 몸 비틀어 유혹하는데 얼마만의 호기인가 소복하게 쌓인 굴 더미 성곽처럼 둘러앉은 동네 아낙들 찌그러진 양동이로 토닥토닥 모이는데 새댁 얼굴에 복사꽃 핀 걸 보니 졸겠구먼 그게 아니랑게유 칼칼한 양념 웃음 난로 위 주전자 구수하게 수증기 오르면 항구의 겨울이 입담으로 밀려간다 윤민희 시인 충남 보령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문학석사) 졸업, 시집 『그리움을 위하여 가슴 한 켠을 비워두기로 했습니다』, 『엇박자』, 『책들이 나를 보고 있다』, 수상/경력 - 동서문학상, 오산문학상, 풀잎문학상,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입상, 전국여성문학대전 동시부문 최우수상 수상, 경기도 문화예술진흥유공 표창, 오산문인협회 제11대 회장 역임, 초등학교 교사. - 시작메모 - 윤민희 시인의 시집 『책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삶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느끼는 감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 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 불꺼진 삼십 촉 알전구처럼 포구에 어선과 여객선을 골고루 슬어놓은 북항, 이 해안도시는 따뜻해서 싫어 싫어야 돌아누운 북항, 탕아의 눈밑의 그늘 같은 북항, 겨울이 파도에 입을 대면 칼날처럼 얼음이 해변의 허리에 백여 빛날 것 같아서 북항, 하면 아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이 있을 것만 같아서 나를 버린 것은 너였으나 내가 울기 전에 나를 위해 뱃고동이 대신 울어준 북항, 나는 서러워져서 그리운 곳을 북항이라 하였는데 너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하였다 안도현 시인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석·박사) 졸업,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등 저서『서울
8월에 들어서자 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거리의 기온은 섭씨 35도를 육박하며 불쾌지수는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한 여름을 풍미하며 세차게 울던 매미도 이제 지쳤는지 조용하다. 다만, 도로의 일부 구간을 통제하며 도로변의 잡초와 공원의 웃자란 수목들을 정리하는 관리원들의 예초기 소리만 요란하다. 일부구간의 교통통제로 차량통행에 체증이 일어나자 운전자들은 짜증을 내며 한마디씩 하고 지나간다. “아니, 교통량이 적은 새벽이나 퇴근 시간이 지난 후 작업을 해야지” 왜 교통량이 많은 시간에 통제까지 하며 작업을 하느냐고 불만을 내뱉는 것이다. 물론 공익적 차원에서 그렇게도 할 수 있지만 참으로 이기적 발상이다. 결국은 공원관리원과 도로관리원들에게 안전과 관련하여 위험도가 높은 야간작업을 하라는 것인데 그것은 노동자의 생리적 리듬과 인권을 무시한 발언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공원관리원과 도로관리원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사람이 있다. 그 주인공은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서 의료용 물품을 생산하는 나성기술연구소와 나성산업을 운영하는 송기덕 대표이다. 그는 공원이나 도로변에서 관리원들이 조경관련 미화작업을 할 때마다 시원한 생수와 과일 주스 등 음료수 몇 박스씩을
상가 꼭대기에서 아파트 쪽으로 이어진 여러 줄의 전선 끝에 반달이 쉼표처럼 걸려 있다 꽁지가 긴 새들과 초저녁별 두어 개도 새초롬하게 전깃줄 위에 앉아 있다 돌아오는 이들을 위해 하늘에다 마련한 한 소절의 악보 손가락 길게 저어 흔들면 쪼르르 몰려나와 익숙한 가락을 몇 번이고 되풀이할 것 같은 노래 한 도막을 누가 어두워지는 하늘에 걸어 놓았을까 이제 그만 일터의 문을 나와 한 사람의 여자로 돌아오라고 누군가의 아빠로 돌아오라고 새들이 꽁지를 까닥거리며 음표를 건너가고 있다 도종완 시인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충남대 문학박사,1984 동인지《분단시대》를 통해 작품 활동 시작,시집 『접시꽃 당신』,『접시꽃 당신2』,『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당신은 누구십니까』,『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부드러운 직선』,『슬픔의 뿌리』,『해인으로 가는 길』,『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등,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사람은 누구나 꽃이다』,동화집 『바다유리』 『나무야 안녕』 등,신동엽 창작상,
카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도심으로 손돌바람 몰아치자 전선줄은 일제히 발정 난 암고양이 울음 토해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누군가를 흘긋흘긋 훔쳐보며 좀비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있는 베스트실버요양병원 고양이 한 마리 음식물 쓰레기통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가시 덮인 청미래넝쿨 숲을 뚫고 흙먼지 날리는 황토길 달려 왔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짙은 어둠을 밀어 내고 빛을 모았다 크로노스가 작곡했다는 쉼표도 없는 악보 속에서 난이도가 높은 음계 따라 파도를 타며 살아 왔다 아다지오와 안단테가 표시되지 않은 악보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를 찾아 거친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 삶을 끌고 가던 주파수가 끊겼다 이어지고 다시 끊긴다 희미해지는 전파채널을 잡으려 양쪽 귀와 꼬리를 곧추 세워본다 음파가 멈춘 난청지대에서 안테나를 조절하며 주파수를 찾고 있지만 이제는 잡음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다 무뎌진 발톱 보듬고 허공 향해 앞발 치켜들며 휘젓는 늙은 고양이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비틀거리며 걷는다 길 옆, 폐휴지 가득 실은 낡은 리어카 가로수에 몸 지탱하고 있다. 정겸 시인 1957년 경기 화성출생(본명
주민센타에 걸려 있는 코로나19 플래카드 가을 장맛비에 축 처져있다 장발장이 된 아이들이 헐벗은 모습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성냥팔이 소녀들은 아직도 손을 호호 불며 좁은 골목 헤매며 성냥을 팔고 있다 신데렐라는 폐업 신고 된 엠마뉴엘빠에서 향기 없는 꽃을 들고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다 사냥꾼의 합창이 백수들의 합창으로 들리는 저녁 샤일록저축은행 불빛 아래 허리띠를 졸라 맨 개미떼가 진을 치고 있다 텅 빈 식당가에는 양화대교에서 천국행 티켓을 팔고 있다는 소문 퍼져나가고 사람들은 양화대교를 주술처럼 읊고 다닌다 마음씨 좋기로는 세상에서 둘 도 없는 고향동무 박가朴家 놈 삼십년 직장 생활에 부장은커녕 차장도 못했다 버틸 때까지 버티라고 신신당부 했건만 구조조정 사내공지 뜨자마자 그래도 팀장은 달아봤다며 젊은 애들에게 자리 내줘야 한다며 명퇴금조차 받지 못하고 발가벗고 나왔다 제2의 인생 잘 살아보겠다며 택시운전 하던 첫 날 차별화된 콘셉트라며 정장 차림으로 운전대 잡았다 내비게이션 지시에 긴장하는 사이 아차차, 요금 미터기 누르지 않고 목적지까지 달렸다는 사실 사납금 꼬라박을 생각에 한숨 내쉴 때 뒷좌석에 앉은 손님 여기는 늘 다니던 곳이라며 삼만 원을 내민 순간
오죽헌 뜰 앞 육백 년을 머문 배롱나무 어미는 몸 낮추어 흙으로 돌아갔다는데 생명 줄 하나 싹을 틔워 어미의 세월을 살고 있다 어머니의 어머니를 찾아서 떠나면 수미산을 몇 바퀴 돌아야 본래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오죽헌 밤하늘에 뜬 별 들 만큼이나 많았을 내 어머니의 시간을 살고 있는 나 허상 하나 만들어 놓고 돌고 도는구나 배롱나무 밑동에 뻗은 실가지 너인 듯 나인 듯 어미에 어미로 또 육백 년을 살겠구나. 이복순 시인 1957년 경기도 김포 출생, 2015년 [수원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경기여류문학 회원, 수원시 버스정류장 인문학 글판 수상 KBS 성우협회 수원시 주관 시와 음악이 있는 밤 공모 수상 길 위의 인문학상 수상, 수원문학인상 수상, 서울 지하철 시민 창작시 선정, 수원문인협회 19대 부회장, 현 수원문인협회 이사, 시집 『서쪽으로 뜨는 해도 아름답다』 -시작메모- 때는 바야흐로 배롱나무의 계절이다. 일명 간지럼나무, 목백일홍이라 부른다. 붉디붉은 꽃이 피고 지며 백일까지 간다하여 백일홍이라 불렀다. 쌀이 귀했던 어린 시절 어르신들은 배롱나무 꽃이 져야 햅쌀밥을 먹는다하여 꽃이 빨리 지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던 추억의 꽃이기도 하다. 시인은 오
환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꽃들 조잘조잘 기억이 피어나온다 시간이 흘러도 앵두는 앵두다 한 분단 두 분단 나란히 줄지어 앉아 덧셈 뺄셈을 배우던 작은 꽃들이다 기억이 기억을 물고 나온다 제 각기 각인된 계절과 그날의 날씨 기억과 기억이 교차하고 냉탕과 온탕을 부드럽게 오가는 오늘의 기후 뒷자리 앉아 머리카락을 한 번씩 잡아당겼다는 친구는 친구를 향해 눈을 흘기고 명절이면 부잣집으로 몰려가 한 상 차려주는 음식으로 그동안 주린 배를 채웠다는 아이들 누구나 한 번씩은 사먹었다는 독사탕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도 해마다 피어나는 서로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가 한 뿌리 한 나무가 되어 꽃을 피우는 우리의 초등학교 동창회 해가 갈수록 그 시간의 켜가 두텁게 쌓이는 올해도 한바탕 꽃을 피워내고 있는 앵두나무가 환하다 서정임 시인 전북 남원 출생 2006년 『문학선』 등단 시집 『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 『아몬드를 먹는 고양이』 안산굿모닝신문문학상 2012년 2020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작메모- 한참을 걸어 왔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살아오는 동안 앵두꽃은 몇 번을 피었다 졌을까. 앵두꽃은 벚꽃과 같은 시기에 피기 때문에 벚꽃 그늘에 가려 베이부머
모든 초록을 나무라 인식하자 마침내 국경은 해제되고 벚나무들 일제히 가지 흔든다 비행기도 수시로 이륙한다 쉽게 뜨고 가볍게 날아서 세상 이것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지 쇠의 심장에 이카루스 날개를 달아준 호기심 많고 슬기로운 사람은 어느 누대를 지나고 있을까 먼 훗날 CPU무덤에서 발견될 보잉이나 에바의 금빛 인장 앙상한 날개 뼈에 기록된 들뜨고 우월했던 장소들 몸 보다 무거운 마음이 먼저 날아가 착륙했습니다 목동좌를 이탈한 양들의 주파수는 언제나 명랑하지만 아주 원시적인 비행이었습니다 거의 백악기급 이랄까요? 지나온 억 만년과 다가올 억 만년 나에겐 한심해지고 싶은 마음 하나 있으니 모래 언덕에 앉아 멍하니 멍하니 지금 노을과 바꾼다 탄소연대론 추리해낼 수 없는 내밀한 사연들 하얀 부싯돌 반짝이며 날아간다 김미옥 시인 인천출생, 2010년 월간 시문학 등단, 성신여자대학교 전통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 2015년, 2021년 인천문화재단 예술표현활동 지원금 수혜 시집 북쪽 강에서의 이별, 탄수화물적 사랑, 잠시 詩었다 가자 외 동인시집 다수 현재 인천에서 어울동인, 빈터동인으로 활동중. -시작메모- 차경(借景)이라는 용어가 있다. 정원을 설계하는 조경학에서 사용하는
어기적거리는 누렁이 소 몇 마리와 주먹만 한 흰 새들이 호수 같은 풀밭에 철조망도 없이 띄엄띄엄 서서 늦은 조식 중이었다 소낙비는 시커멓게 몰려와 금방이라도 쏟아질 거 같은데 비를 피해 두 칸 우사로 들어가겠지 넬슨 베이 로드에서 본 흠뻑 젖을 나라와 그 시민이 오는 내내 나란히 걱정되었다 윤희경 시인 2015년 『미네르바』 신인상 등단. 시집 『대티를 솔티라고 불렀다』. 전자시집 『빨간 일기예보』, 2022년 <재외동포문학상> 수상, 엠코(주) 월간에세이 연재. 『문학과시드니』 편집위원, <빈터>, <캥거루문학회> 활동 중 -시작메모- 이 시를 읽는 순간 특별한 수사(修辭) 없이 서정적으로 다가오는 시적 이미지가 담백하다. 시를 천천히 읽어내려 가면 왠지 마음이 정화되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시의 첫 행에서 어기적거리는 누렁이 소와 흰 새들의 한가롭게 노는 모습이 평화롭고, 호수 같이 넓은 풀밭에 띄엄띄엄 풀을 뜯는 풍경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청량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시적 내면의 세계를 면밀히 살펴보면 요즘같이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조급성과 탐욕을 가진 인간들에게 소와 새들같이 넉넉함을 가지라는 암시를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