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님 관방의 붉은 전구

이강석 전 남양주시부시장

군수님 집무실을 그때에는 官房(관방)이라 불렀습니다. 관방을 “벼슬아치가 일을 보거나 숙직하던 방”이라 사전에서 풀어줍니다만 1960년대 군수실을 관방이라 불렀고 방 주인은 ‘군수영감’이라 칭했습니다. 令監(영감)이라는 호칭은 지금도 공식, 비공식적으로 쓰이는 줄 압니다.

 

그 관방의 부속실 벽에는 관청의 모든 부서 사무실을 밝히는 작은 5촉짜리 등불을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었습니다. (사진)  부속실 스위치에 연결된 5촉 전구는 각 과 사무실의 천정 구석에 붙어있어서 아침 8시반에 군수 출근시각에 켜지고 저녁 6시반 퇴근시에 꺼졌습니다. 주로 낮을 밝히는 전구입니다. 비서실에 스위치는 있는데 비서실에서는 불빛이 보이지 조명장치이고 각 사무실입장에서는 스위치가 없는데 알아서 켜지고 꺼지는 '공무원들의 출퇴근을 지휘하는 등대같은 등불'이라 할 것입니다.

 

오래된 청사의 천정에는 지금도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전구(사진)의 숫자는 12가 아니고 1과 2 입니다. 1은 군수실 비서가 스위치를 내리면 꺼지는 등불이고 2는 부군수실 비서가 전원을 OFF되는 전등입니다. 저녁 6시20분부터 많은 공무원들이 저 숫자 1, 2 또는 12를 바라보면서 1번이 꺼지기를 기다렸고 이어서 2번이 꺼지는 순간 '퇴근스나미'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요즘과는 크게 다른 눈치행정의 시대가 있었나 봅니다.

항상 1번이 꺼지고나면 10분 이내에 2번도 점멸되었다고 합니다. 군수가 퇴근하면 곧이어 부군수도 청사를 나가 집으로 가거나 저녁식사를 하거나 공무원들과 술 한잔 하는 편안한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렇게 1번과 2번불이 꺼지기를 갈망하는 이유는 두가지 입니다. 당시의 간부들은 낮과 밤, 아침과 저녁 시간에 관계없이 누군가 필요하면 관방으로 불렀습니다. 연락이 안되면 야단치고 여러가지로 감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공무원으로서는 감정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보고를 잘해서 다음번 승진이나 좋은 보직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대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통신과 교통수단이 열악했습니다. 집으로 퇴근하면 연락두절이고 정 필요하면 숙직실 지프차량이 해당 공무원의 집으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더러는 이장집 전화를 통해 인편으로 파발을 띄워야 했던 것입니다. 자가용 타고가서 저녁먹고 대리불러 집으로 가는 시절이 아닌 것입니다.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그 공무원의 존재는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무실과 군수실을 무언으로 연결하는 이 불이 꺼지기를 간절히 바라던 그 당시의 공무원 눈빛 빅데이터가 지금도 남아있다면 저 사진의 아크릴 면이 반짝반짝 할 것입니다. 의자위에 올라가 천장 틈새를 살펴보니 2개의 전구는 더이상 켜지지 않은 채 아주 깔끔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용처가 없어져 퇴화된 인간의 꼬리뼈처럼 그렇게 행정적 석고상이 되어 공무원의 시간 너머에서 옛날의 일들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이 꼬마전구가 수많은 공무원을 우르르 퇴근시키고 요즘의 사회적통신망 'sns'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군수실과 비서실은 여러번 리모델링해서 재청과 퇴청을 알리던 스위치도 전선도 철거되었지만 한적한 부서의 사무실 벽면에는 그 시대와 시간의 유물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이 전구불의 역할을 아시는 기관장, 군수였다면 퇴근시간에 관방으로 탕수육 주문하고 점바둑 맞수 과장을 불러서 여러판 ‘반상의 대결’을 펼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끔 불려가는 과장도 눈치와 정무적 판단이 있었다면 2판 정도 아슬하슬하게 이기고 다음 두 판은 비슷하게 패함으로써 군수영감의 ‘심기경호’를 했어야 합니다. 

 

눈치없이 내리 3판을 이겨버리니 郡守令監(군수영감)은 화가나고 그래서 노땅 과장과의 바둑판은 밤 11시를 넘겼을 것입니다. 운전기사는 현관에 차량을 대기한채 수시간을 기다리고 있고, 시골 비포장길로 버스타고 출퇴근하던 결혼적령기의 비서는 버스에서 내려 배웅나온  아버지와 다시 오리길 밤길을 걸어서 집으로 퇴근했을 것입니다.

 

세월이 50년 흘렀습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입니다. 경기도지방행정동우회에 건강한 모습으로 나오시는 분 중에, 경기도민회 이사회에서 조직발전을 위해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시는 경기도 원로 중에, 그리고 혹시 이글을 보시는 어르신중에는 밤 늦게까지 바둑을 두면서 저 5촉짜리 등불로 수 많은 공무원들의 가슴을 붉게 태워버린 주인공이 계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과는 다르게 전화기가 귀했던 때의 일입니다. 동네 이장집 자석식 전화기 한 대로 온 동네가 통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통신이 열악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그래서인가 몰라도 요즘과는 다른 공직의 위계질서가 엄격했던 시절의 일이니 한때의 추억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5촉짜리 전구로 인해 얼마나 많은 불평등과 비효율이 우리 지방행정을 지배했는가 하는데 대한 작은 반성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미 50년도 더 지난 일이고 SNS 인프라가 부족했던 시절의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유없이 지나간 애달픔으로 기억하라 하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스마트폰, 문자, 카카오톡, 그리고 젊은이들의 손가락 끝에서 요동치는 SNS천국의 시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한 시대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작은 생각의 화두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에 탄톡방 업무지시, 퇴근후 추가지시 등을 갑질로 취급하는 연약한 공직사회를 보면서 과거 공직사회의 근엄했던 권위의 한두조각만이라도 현시대 공직에 투영되었으면 하는 소망도 자그마하게 작동 중이기는 합니다. 적극행정을 하려하면 위법부당을 말하고 업무지휘를 하려면 '갑질'이라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행정지휘권 속에서 상하간에 위법은 생각해 보겠으나 부당은 부당하다는 신념이 퇴직공무원의 가슴속에 일부 남아있나 봅니다.

 

그래서 행정에서도 ‘타산지석’을 벤치마킹해 보기를 권합니다. 홍길동전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길동이가 집을 나가는 그날에 아버지는 ‘오늘부터 呼父呼兄(호부호형)을 허 하노라’는 중재안을 냈지만 결국 길동은 집을 나서 전국을 내달리는 ‘삼천리표 홍길동’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업무를 지시할 과장을 찾지 못하는 국장이 많이 있고 과장이 업무를 맡으면 함께 의논할 계장이 별로 신통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어떤 ‘후배간부’의 하소연을 듣고나니 오늘날의 지방행정 조직 분위기위에 과거 ‘군수님 방 5촉 등불’같은 레벨의 권위주의 는 아니어도 관방앞에 공무원의 관기는 그 부스러기라도 남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전진 앞으로!!!"라는 상사의 명령을 받고는 볼펜을 소총으로 삼고 결재판을 철모로 삼았던 당대 공무원의 군기같은 관기의 결연함을 조금이라도 보고싶은 심정입니다. "나때는 말이야"를 연호하는 꼰대 공무원 퇴직자가 되지 말라는 권고가 많고 민주적 리더십만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끌어간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그래도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카리스마 있는 힘의 리더십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설탕을 농축하고 압축하면 오히려 쓴맛을 내는 것처럼 민주, 평등, 합리성, 소통만을 강조하면서 행정의 목표를 이룩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 사안에서 모범답안적인 체크리스트를 들이대는 요즘의 행정행태에 대하 할 말이 참 많습니다. 1975년에 공직위에 스나미가  서정쇄신이라는 스나미가 지나간 이후 권위주의의 정점이었던 1977년에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직사회 민주주의가 최고봉에 이른 2016년까지 39년8개월간 행복하고 보람찬 공직생활을 하였음을 주변에 자랑하게 됩니다. 

 

88올림픽에 참여하고 금융실명제를 맞이하고 2002년 월드컵의 감동속에 공직자로서 열정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선배처럼 퇴직을 하고 민간인이 되어서도 공무원으로 일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일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반성도 하고 있고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자세를 고추세우고 있습니다.

 

커피(커피)가 아닌 ‘나 때에’ 공무원인 것이 자랑스럽고 밤새워 일을 한 다음 날 아침에도 피곤함이 없었던 이유가 당시에는 젊은 40대였기때문인 것 이외에 다른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만 같습니다. 당시에는 공무원, 공직자로서의 자부심이 충만했고 선배, 상사의 격려가 피로를 잊고 매몰차게 달리는 에너지를 주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고, 그래서 당시 젊은 시절에 좀 더 맹렬하게 일하지 않았음을 반성하고 후회합니다. 

 

그래서 지방공무원이 근무하는 IT와 SNS, 그리고 민주적 공직관이 풍성한 현대적 사무실의 책상위에 저 붉은 등불, 5촉 전구가 몇 개 더 켜져서 자부심, 자긍심 충만한 공무원들이 열정으로 일하기를 기대합니다. 퇴직한 후 後悔(후회)는 늦은 것이니 현직을 즐기고 現職(현직)에서 최선을 다하고 퇴직 후에는 절대로  후회하는 일이 없는 멋진 공무원, 아름다운 퇴직공무원이기를 바랍니다. 힘든 것도 현직이니 그러한 것이고 어려운 민원도 현직이라서 풀어낼 수 있다는 엄연한 진실을 전해 드립니다. 

 

선배 공직자 중에 혹시 관방에서 늦은 시각까지 바둑에 심취했던 기억이 나신다면 이제라도 후배들에게 작은 사과의 메시지를 카톡과 문자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과한 민주주의에 빠진 듯 보이는 이 시대 행정 공무원들에게 王(왕) 선배로서 權威(권위)있는 訓戒(훈계)의 말씀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국민을 위해 일했고 일하는 공통점이 있는 현직 공무원과 퇴직 공직자들께 지난날의 기억과 추억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로 나가도록 방향의 등대가 된 5촉 꼬마전구 사진을 여러분께 보여드리는 것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혹시 이 시대에는 민주적이라는 어떤 소품이 또다른 50년후에는 지난날의 권위주의적인 상징물로 기록될 수도 있겠지요.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