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 않은 '꼬마전구'

1970년대 임명직 군수님 집무실을 官房(관방)이라 불렀습니다. 사전에서 관방을 “벼슬아치가 일을 보거나 숙직하던 방”이라 사전에서 풀어줍니다만 당대에 군수실을 관방이라 불렀고 방 주인은 ‘군수영감’이라 칭했습니다. 令監(영감) 이라는 호칭은 지금도 공식, 비공식적으로 쓰이는 줄 압니다.

 

그 관방의 부속실 벽에 비밀 스위치가 있었습니다. 모든 부서 사무실 구석 벽면에는 5촉짜리 꼬마전구가 있었고 그 스위치는 부속실 직원만이 켜고 끌 수 있습니다. 아침 8시반경 군수가 출근하면 켜지고 저녁 6시반 영감님 퇴근시에 꺼졌습니다.

 

주로 낮을 밝히는 전구입니다. 비서실에 스위치는 있는데 비서실에서는 불빛이 보이지않는 조명장치이고 각 사무실에서 보면 스위치가 없는데 알아서 켜지고 꺼지는 '공무원들의 출퇴근을 지휘하는 등대 같은 등불'이라 할 것입니다.

 

오래된 청사의 천정에는 지금도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전구의 숫자는 12가 아니고 1과 2 입니다. 1은 군수실 비서가 스위치를 내리면 꺼지는 등불이고 2는 부군수실 비서가 전원을 OFF하되는 전구입니다.

 

저녁 6시20분부터 많은 공무원들이 저 숫자 1, 2 또는 12를 바라보면서 1번이 꺼지기를 기다렸고 이어서 2번이 꺼지는 순간 '퇴근스나미'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요즘과는 크게 다른 눈치행정의 시대가 있었나 봅니다.

 

항상 1번이 꺼지고 나면 10분 이내에 2번도 점멸되었다고 합니다. 군수가 퇴근하면 곧이어 부군수도 청사를 나가 집으로 가거나 저녁식사를 하거나 공무원들과 술 한잔 하는 편안한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렇게 1번과 2번불이 꺼지기를 갈망하는 이유는 두가지 입니다. 당시의 간부들은 낮과 밤, 아침과 저녁 시간에 관계없이 누군가 필요하면 관방으로 불렀습니다. 연락이 안되면 야단치고 여러가지로 감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공무원으로서는 고과점수가 깍이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보고를 잘해서 다음번 승진이나 좋은 보직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군수님 퇴근을 신경쓰던 시절의 이 전구는 절대로 작지 않은 ‘꼬마전구’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용처가 없어져 퇴화된 인간의 꼬리뼈처럼 그렇게 행정적 석고상이 되어 공무원의 시간 너머에서 옛날의 일들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이 꼬마전구가 수많은 공무원을 우르르 퇴근시키고 요즘의 사회적통신망 'sns'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군수실과 비서실공간은 여러번 리모델링해서 재청과 퇴청을 알리던 스위치도 전선도 철거되었지만 한적한 부서의 사무실 벽면에는 그 시대와 시간의 유물이 남아있었습니다.

 

당시에 이 전구불의 역할을 아시는 기관장, 군수였다면 퇴근시간에 관방으로 탕수육 주문하고 점바둑 맞수 과장을 불러서 여러판 ‘반상의 대결’을 펼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끔 불려가는 과장도 눈치와 정무적 판단이 있었다면 2판 정도 아슬하슬하게 이기고 다음 두 판은 비슷하게 패함으로써 군수영감의 ‘심기경호’를 했어야 합니다.

 

 

눈치없이 내리 3판을 이겨버리니 郡守令監(군수영감)은 화가나고 그래서 노땅 과장과의 바둑판은 밤 11시를 넘겼을 것입니다. 운전기사는 현관에 시동을 건 차량을 대기한채 수시간을 기다리고 있고, 시골 비포장길로 버스타고 출퇴근하던 결혼적령기의 비서는 버스에서 내려 배웅나온 아버지와 다시 오리길 밤길을 걸어서 집으로 퇴근했을 것입니다.

 

세월이 50년 흘렀습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입니다. 아직도 우리 공직사회에 불필요한 5촉짜리 전구를 켜고 끄는이가 있는가 돌아봅니다. 더구나 근무시간은 대충 흘려보내고 퇴근시각에 임박하여 일하는 척하다가 정시에 퇴근해 버리는 아쉬운 모습도 보입니다. 창구, 현장민원은 6시가 지나면 민원도 없을 것입니다만 그래도 공직의 사무실에는 늦은 밤까지 불을 밝히고 조직의 미래를 걱정하는 눈빛이 반짝이는 젊은 공무원이 더더욱 많기를 국민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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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