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은 금강산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수 천년 이어져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봉우리 40곳을 보아야 금강산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데 겨우 두곳을 일별하고 감히 금강산을 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정이기에 글로 남겨보고자 하는 것이다.
1. 금강호
우리의 금강호는 동해바다 동해시 해안가에 선미를 남으로 하고 선수를 북으로 하여 금강산으로 통하는 동해바다 해안가를 조용히 열고 있었다. 50여년을 막았던 철조망은 푸른 파도속에 숨기고 10층보다 높은 거함은 뱃고동도 없이 북동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향한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동쪽인지를 알수는 없지만 우리는 지금 북으로 향하고 있다. 파도는 잔잔하고 하늘의 달은 뭍에서 본 그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화사하게 웃고 있다. 하늘이 맑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국토 삼천리 금수강산을 조용한 밤에만 내려다 보는 저 달도 어느 날부터 북으로 가서 3,4일 머물고 돌아오는 금강호와 그 형제들을 관심있게 보면서 좀더 많은 달빛을 쪼이고 있었을 것이다.
달은 인자하여 남에도, 북에도, 비무장지대에도 비추고 저 넓은 동해바다에도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평등하게 누구를 가리지 않고 밤이 되면 해맑은 미소의 빛을 보내고 보름이 되면 더더욱 힘주어 빛을 보내고 그믐, 초승까지 쉬다가 보름을 전후하여 환하게 비추리라. 그러나, 오늘밤 달빛은 유난히 금강호에 강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해변가 불빛이 점점으로 사라지고 어느덧 금으로 만든 왕관을 길게 펼쳐놓은 듯 멀어진다. 우리는 지금 북동방향으로 달려 공해를 지나 장전항으로 향하고 있다. 장전항은 천혜의 요새다. 전기저항을 표현하는 오옴(Ω)형태의 항구로서 군함이 주둔해 있다.
2. 장전항
아마도 남과 북은 자정쯤에 바뀌는 것 같다. 자정쯤에 배는 좌회전을 했을 것이다. 12시간을 항해했다. 그렇게 먼 곳은 아니지만, 금강산 관광의 기대에 부푼 실향민을 포함한 1,400여 관광객과 500여 승무원들의 잠자리를 편안하게 하고자 한발한발 시간과 거리를 계산하면서 항해하는 것이다. 50년 기다린 세월인데 한밤정도는 조급할 일도 아닐 것이다.
일출을 보아야 한다. 5시부터 창문을 열고 가슴 조리며 해돋이를 기다리는 사람, 갑판에 올라 가슴깊이 맑은 공기를 마시며 북측에서의 첫태양이 솟아오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동쪽하늘에 시선을 모으고 있다. 동해바다의 해돋이는 물속에 붉은 물감을 푸는 것으로 시작된다. 검붉은 물감은 잔잔한 파도를 타고 주황색으로 변하면서 파도의 벽면마다에 은색 가루를 뿌려 잠시 스포트라이트를 뿌린다음 바다 끝 뚝을 넘어들면서 잠시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사실 감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는 바라볼 수 없는 강렬한 빛을 뿌리는 것이다. 정신을 차려 다시 바라보면 태양은 자신의 몸집보다 3배이상 바다를 잡아내려 하늘위로 떠오르고 있다. 저 할머니의 소망은 무엇일까. 고사리 손 모아쥔 어린이는 무엇을 기대할까. 초로의 저 아저씨 고향은 혹시 북쪽, 금강산 부근일까.
기대에 부픈 관광객 모두는 질서있게 행동하고 있다. 정말로 “한배”를 탄 사람들 아닌가. 한민족, 한가족으로서 한마음으로 금강산을 보고 북쪽 땅을 밟고 금강산 공기를 마시며 북한동포를 만나보기 위해 한배를 타고 온 것이다. 경기도, 강원도가 아니다. 우리 측 안내원 말대로 모두가 남측이다. 북한은 북측이라 부르기로 했단다.
우리의 해맞이가 끝나자 장전항이 그 모습을 들어낸다. 둥근 해안선의 중앙에 우리의 금강호는 빌딩을 옮겨놓은 듯 묵직히 앉아있다. 둥굴게 둘러싼 해안선을 따라 회색 건물이 서있다. 6층짜리가 너댓개 있는데 비어있다는 느낌이다. 군함은 녹슬어 검정색이고 나뭇가지 사이로 조금 번듯한 건물이 보이는데 아마도 우리로 말하면 면사무소 청사인 듯하다. 아침 이른 시간인데 고깃배가 출어에 바쁘다. 50여대의 크고 작은 배들이 연이어 나간다.
아침식사를 서둘러 마친 일행은 작은 배에 옮겨 탄다. 배낭 속에 간식과 작은 카메라를 메고 한손에 도시락을 들고 방북의 기대감을 가슴에 담고.
3. 북한땅을 밟으며
드디어 도착한 곳은 북한 땅. 그러나 우리 앞에 나타난 북녘땅의 시작은 북측 병사와 우리나라 60년대 대학생복 차림의 표정없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측에서 제공한 컴퓨터 검색대와 약식여권이라 할 수 있는 금강산 관람증이었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이정도를 감수하기로 하고 금강호에 올랐다. 고향은 못가지만 금수강산의 최고봉인 금강산의 정상에 올라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할머니, 어머니께서 눈물로 등지셨던 우리조국 산하를 밟아보고, 맨발로라도 달려달려 가슴으로 안고야 말 이 땅 이 국토의 심장부를 만나보려는 것이다.
거함 금강호는 장전항 중앙에 섬처럼 떠있고 작은 배가 승객 1천400명을 동시에 태워 금강산 자락 해변에 상륙시킨다. 하선하면서 처음 만난 사람은 북측 안전 요원인 듯 한 남자. 그래도 키는 큰 편이고 검붉은 얼굴은 표정없이 우리 일행을 바라보고 있다. 자유스러운 노인, 아이, 청년들과 단란한 일가족을 바라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해안도로변에 서있는 북측 병사의 부동자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래도 입국수속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표정이 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썬그라스를 코끝까지 내려쓰고 있는 모습이 텔레비젼을 통해보던 그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이곳에 근무하는 북측 종사원들은 남측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경우 찾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그 외의 사람들은 옷을 바꾸어 입혀도 곧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금강산을 향해 알 수 없는 깊이로 빠져들었다. 운전자는 모두가 조선족으로 우리말을 잘 하는 것 같다. 얼굴이 하나같이 어린시절 이웃에 사시던 시골아저씨 모습이다. 이들 조선족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6.25때 중국으로 이주했거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지 못한 분은 아닐까.
4. 북한의 농촌마을
일행을 태운 버스는 농촌마을 중앙을 지나고 있다. 60년대 어린시절 살았던 우리시골과 흡사하다. 북으로 달리던 그 기차길은 단선인채로 구불구불 지나고 있는데 우리측 가이드 말로는 북한에서 승용차를 보는 것은 행운이요 기차를 만나거든 곧바로 복권을 사라고 했다. 결국 우리는 기차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기차는 가끔 다니는 듯하다. 레일 표면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승용차는 한대 보았는데 일본에서 수입한 듯하며 군인복장의 3명이 타고 있다.
비포장 신작로 양측에는 조악한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는데 북측에서는 이를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루 2회정도 버스가 이동하는 길인데 야생동물을 보호한다는 의미보다는 우리 관광객을 통제하려는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금강산에는 새소리가 없다. 산속을 2일동안 다녔지만 조류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우리가 만난 북측 동물은 뱀, 까마귀, 검은 개구리, 다람쥐 몇 마리, 나비, 도마뱀 정도였다.
아직 모내기를 하지 않았으며 모자리 모도 아직 어리다. 논갈이도 별로 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손으로 농사를 짓는 듯 한데 2일차에 트렉터 한 대를 보았다. 논갈이를 하는데 새것이었다. 농촌의 일하는 모습은 반반이다. 무리지어 일하고 있는데 대부분 쉬는 시간이었는지 논두렁이 삼삼오오 앉아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그 속에 서있는 아이들의 고사리 손이 애처롭고 아낙들의 표정이 숙연하며 남정네 들은 손 흔드는데 인색하다. 가이드 말로 북한의 농사일은 여성들이 하며 노인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남자들이 일하는 모습은 드믈다. 60년대에 보았던 마차 3대가 알 수 없는 짐을 싣고 논길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북측에서 지난해에 수해가 있었다. 하천 양측에는 아직도 모래와 자갈이 뒤엉켜 있다.
농가의 모습은 초라한 편이다. 규격화된 집들은 지난해 완공된 것이라 하는데 사람 사는 흔적이 적다. 집안에서 무리지어 지나는 버스를 구경하기도 하고 아이들 너댓이 “사방치기” 비슷한 놀이를 하고 있다. 북측 농가의 특성은 한마디로 우리의 60년대 농촌 그 모습이다. 다만 집 주변에 울타리를 한 땅은 개인이 경작하는 곳이고 나머지는 집단농장이라고 한다.
5. 금강산에 오르다
일행은 현대에서 현대식으로 지은 중간 휴게소에 도착했다. 옆에는 북한 서커스 공연장이 있는데 요금협상이 난항이어서 아직 개장하지 못했다. 북한땅 한가운데에 이런 곳이 있다니. 상해 임시정부 건물이 떠오른다. 애연가들이 이곳에서 2개피 이상 태우고 황급히 끈다. 이제 담배피울 기회는 한번 남았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드디어 금강산의 한줄기 구룡폭포 코스를 향한다. 비포장 길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어느덧 하늘이 덥히고 산줄기가 거칠어지면서 계곡의 물줄기가 소리내어 달리는 곳이다. 아 여기가 금강산 자락. 이제 금강산이 시작되는가.
6. 구룡폭포와 금강산
수백년 됨직한 토종 붉은 소나무 군락지는 세계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한다. 토종 소나무와 계곡의 맑은 물은 흰 돌과 어우러져 흐른다. 계곡의 경사가 빠른 때문인지 바닥에는 낙엽조차 없고 맑은 물과 크고 작은 돌과 바위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밀식된 소나무들이 5천년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한민족의 기상을 상징하고 있으며 흰 돌과 계곡의 맑은 물은 백의민족의 순수성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이곳이 금강산이다. 금강산은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리는 50년 만에 이곳에 왔다. 하룻밤을 지새워 배를 달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가까운 금강산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멀리 있었단 말인가?
산길을 오르면서 일행은 감탄하기 시작했다. 산이 높은 만큼 계곡이 깊고 깊은 계곡의 옥수는 푸른 바탕위에 흰 물결로 하늘거리고 땀과 눈물이 하나된 우리 일행은 정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는 것이다. 계곡의 돌과 물 만가지고도 몇 일 밤을 새우며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생 다시 올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산행이기에 시린 무릎 감싸며, 저린 발목 주무르며 우리는 금강산 봉우리를 향해 걷고 매달리며 올라가는 것이다.
오르는 길 양측 암벽이 평평한 곳에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금강산에 와서 한 말은 물론 그동안 북한 주민에게 행한 말과 행 동내용을 써놓았다. 큰 글씨의 경우 1획 속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한글자에 페인트 500리터이상 들겠다.그리고 김정일의 할아버지 이름이 나오는 글도 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나 걸터 앉거나 올라서면 안 된다. 이를 위해 감시원 2명이 배치되어 있다.
구룡폭포는 하늘처럼 높은 산 정상에서 물줄기가 내려와 굽이굽이 날아 13미터 웅덩이로 뛰어든다. 폭포 옆에 弗(불)자가 크게 음각되어 있는데 그 길이와 폭포수가 떨어지는 항아리 수심과 같다고 한다. 혹시 글씨를 더 길게 파야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해보지만 수 억년동안 흐른 폭포가 만든 물구덩이가 더 이상 깊게 패일 수 있을까.
기암괴석 금강산 1만2천봉에는 봉우리마다 이름이 있다. 곰, 뱀, 할머니, 코끼리, 모녀, 병사바위.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한다. 산 정상에 탱크바위, 개구리바위.
구룡폭포 물줄기 옆의 벽면을 보면 관세음보살의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눈을 선하게 뜨고 보아야 나타난다고 한다. 사실 금강산을 구경한 사람이 천년 역사만 생각해 보아도 그 수가 얼마나 많을까. 또 금강산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둑판 묘수풀이 보다 다양하여 보는 이의 관점과 생각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금강산 경치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전체를 볼 수 없는 이 금강산의 어느 한 골짜기에 서서 금강산 전체를 보겠노라 마음조차 먹지 말아야 할 일이며 1만2천 봉 중 수 십개 봉우리를 일별하고 누구에게 금강산을 말할 수 있을까.
7. 북측 안내원
금강산을 오르는 길목에는 북측 남녀 1쌍이 대기하고 있는데 외길을 가는 쉼터에 앉아있는 것으로 보아 안내원은 아니고 감시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사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이 카메라에 찍힌 것 같다며 정사진을 필름을 압수하기도 하고 동사진은 테잎을 돌려보고 자신의 모습이 없자 “잘 찍으셨네요”하며 겨면쩍게 되돌려 주기도 했다. 약수가 조금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할머니 말씀에 대해서 “약수가 쩍어야 약수디, 풍부하게 나오면 어드러케 약수라 하겠시유”라고 응수하기도 한다. 자신들은 신경써서 차려입고 나온 옷이겠지만 대부분 우리의 60년대 동네처녀 모습이다. 신발도 보라색이나 검정 단색인데 3구멍짜리 운동화 끈이 없는지 가운데 한 코만 실을 몇번 겹처 매고 있으며 흰색 브라우스에 검정바지로 통일되어 있으며 일부는 남측 관광객과 바꾸거나 얻은 듯한 등산복과 운동화를 신고 있다.
8. 봉이 김선달
오를 때는 금강산을 처음 간다는 마음으로 들뜬 나머지 거리에 대한 느낌 없이 경치에 취해 줄다름질 쳤으나 몸도 지치고 맑은 공기를 뚫고 내리 쬐이는 태양열로 피곤하여 하산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몇구비를 돌고 다리를 지나고 혁명구호 붉은 글씨를 또다시 지나쳐도 우리의 버스는 보이지를 않는다. 참으로 멀리도 올라왔구나 생각하며 가끔 올랐던 산봉우리를 뒤돌아 보기를 몇 차례.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버스와 관광객과 나무와 바위로 가득한 주차장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흡연장소인데 청년, 장년, 노인 한곳에 둘러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산행 5시간만의 끽연이니 애연가야 얼마나 기다리던 시간인가. 북측 청년도 담배를 피우는데 자세히 보니 앞윗니 4대 정도가 없다. 치과의사가 없는 것인지 돈이 부족한 것인지. 이곳에 근무하는 이는 어느 정도 신분도 높고 경제력도 있으련만. 그 청년은 우리들 일행이 거의 다 하산하자 나무로 만든 재떨이의 담배꽁초를 비닐주머니에 담는다. 그리고는 우리 버스기사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적지 않은 돈을 관광수수료로 챙긴다고 들었는데 한봉지 담배꽁초조차 되돌려보내는 북측의 처사는 대동강 물 팔았다는 봉이 김선달인가.
9. 관광객의 매너에 대하여
하지만 우리가 배울 점이 여기에 있다. 금강산 관광은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관광객으로서의 매너를 배우는 기회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침을 뱉으면 벌금이 100달러. 돌을 가져갈 수 없으며 나무를 훼손해서도 안된다. 상식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질서를 우리는 지키지 않았다. 달러 100불이면 12만원 돈이니 적지도 않지만 금강산까지 와서 벌금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일행은 가조와 나조로 나누어 코스를 바꾸어 가며 관광하기 때문에 우리 조는 500여명이 함께 다녔다. 그 많은 인원이 식사하고 난 자리에 작은 휴지조각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오전에 청소한 비질자국이 지워졌을 뿐이다. 우리는 공중질서를 지킬 수 있는 문화시민이다. 다만 한 두 사람이 지키지 않는 것이 점차 전체로 퍼져나가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므로 시작부터 질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10.북한 땅 첫 밤
아쉬운 하루를 보낸 우리를 태운 버스는 이른바 출입국 관리소에 도착하였다. 도시락 가방을 들고 조별로 줄을 서서 X-레이 검사를 받아야 한다. 작은 배를 타고 모선으로 돌아온 일행은 갑판위에, 선창가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금강산 석양을 아쉬움과 서글픔과 애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관광 2일째 장전항에도 밤은 온다. 전기사정이 정말로 어려운지 장전항의 밤은 고요와 어둠뿐이다. 가끔 해안선을 따라 비추는 “서치라이트”는 누구를 감시하는 것인지. 푸른 파도가 점차 검게 변하면서 북한에서의 초저녁은 침묵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금강호는 어둠속에 빛나는 북극성처럼 장전항 어둠의 중앙에 섬처럼 떠있다.
11. 만물상과 망양정
아침이 밝았다. 어느새 선상생활이 익숙해진 기분이다. 단 이틀인데? 오늘은 만물상과 망양대를 가는 날이다. 정말로 금강산을 보려면 만물상을 보아야 한다.
전날의 철조망 길을 지나면서 몇 번이나 북한군 보초병에게 손을 흔들어도 대꾸가 없다. 다만 버스가 지날 때마다 눈만 돌려 감시하는 눈초리가 있을 뿐이다. 뒷편 논길의 아낙과 아이들은 약속된 몸짓으로 손을 흔든다. 김정숙 휴양소를 왼쪽으로 두고 산 길을 접어드니 어제본 토종소나무보다 미끈하고 잘생긴 소나무들이 북한군 보초병보다 꼿꼿하게 서서 우리를 맞이한다. 미인송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편안하고 느긋하게 우리를 감싸 안으며 반기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도 역사속 어느날 이곳을 지났을 것이다. 본 듯한 모습이 전생이라더니 우리의 전생 중 꽤 긴 세월을 이 골짜기에서 살았을 것이다.
등줄기가 땀으로 젖을 즈음 우리는 금강산 망양대 줄기를 달리고 있다. 뒷편으로 돌고 돌아 망양대 정상에 오르니 동해바다 모래길이 우리를 반긴다. 먼저 올랐다가 하산하던 할아버지께서 명사십리가 보인다고 하시더니 정말로 10리도 넘는 모래 길이 저 멀리 보인다. “명사십리”는 원산에 있다던가. 하지만 명사15리는 되겠다. 흰 모래와 푸른 파도가 땅과 바다를 가르고 누워있다.
눈을 돌려 발아래를 보자.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이러할까. 일상에서 모든 사물을 옆으로만 보아온 눈에 들어온 산 정상의 모습이 만물상이다. 정말로 만물상을 보려면 정상에서 내려다 보아야 한다.
만물상의 기암괴석은 각각이 나름대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모양으로 서있고 몇 개를 합해서 또 다른 이름으로 거듭나고 있다.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어 그 속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산수화이고 모두가 풍경화다. 조선시대 그림에 나오는 산과 강과 인간의 조화가 강조된 모습이 상상속의 그것이 아니고 정말로 이곳 금강산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한다. 오히려 제아무리 가는 붓으로도, 천재성을 가진 화가의 머리로도 종이위에 그려낼 수 없는 그림들이 사방에 걸려있다. 팔지도 않지만 살수도 없는 그림들이다. 보는이 없어도 전시되어 있는 그림이요 보는이 없다고 거두어가는 그림도 아니다.
스스로 금강산인채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겁의 세월을 묵묵히 함께하는 우리민족의 영산, 금강산일 뿐이다. 이렇게 수억년을 저 모습으로 살아온 만물상의 심정은 어떠할까. 우리가 분단의 아픔을 안고 동해바다를 엉뚱하게 돌아서 온 우리의 심정을 알고 있을까. 사진박힌 이름표를 목에건 사연을 저 돌과 노송은 알고 있을까. 남북분단을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이어진 역사의 한 기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해바다를 다시한번 돌아보고 내려와 올라간 곳이 천선암. 선녀들이 목욕을 했다는 곳이다. 선녀들의 화장품이 놓았을 법한 자리에 지금도 2개의 동그란 구멍이 있고 지난번에 내린 빗물이 고여 산바람에 파르르 흔들린다.
천선암 정상에는 28세정도의 지적인 여성과 19살의 꽃순이 처녀가 우리 일행의 카메라 렌즈를 피해 이리저리 움직인다. 보라색 상의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멋부리지 않은 가방을 대각선으로 메고 있었는데 가이드와는 안면이 있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만 우리 일행과는 가급적 대화를 피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가진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엘리트층으로 보이는 이들의 분위기에서 북측 사회 전반이 어떠한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선암에서 바라보는 만물상이라야 제맛이 난다.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하늘을 향해 뽐내는 자태가 아름답다. 초여름 풍경이야 녹색이 전부이지만 가을 단풍을 마음속에 담아 이를 투영시키면 가을 경치요, 설경을 겹치면 겨울이 되는 것이다. 만물상의 중심에 서서 4계절 그림을 그리고 나니 어느덧 하산시간이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그 길인데 방향에 따라 분위기가 새롭다. 도무지 처음가는 길인 것만 같다. 얼마를 내려와 그래도 마음이 허전하여 뒤돌아 보니 저산을 우리가 올랐구나 모두가 놀란다. 하늘 끝 저 먼곳에 또 하나의 하늘처럼 망양대가 자리하고 있다. 바다를 바라본다 하여 망양대라 이름 지어진 곳이다.
계곡을 지나면 원시림 숲인데 몇 백년을 살다가 온 몸이 회색으로 말라버린 백소나무가 간간히 보인다. 죽어서도 백년 넘게 금강산 만물상을 지키고 있다. 그 노송 뒤를 지키고 있는 바위는 또 몇 억년을 살며 세월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바위는 제 몸 깍으려 비를 불러오고 계곡의 옥수는 금강산 절경을 요리저리 구경하며 세월에 지친 바위를 쪼개어 계곡의 조약돌을 만들고 바람은 바위와 나무를 휘감아 세월의 껍질을 데리고 동해바다 넘나들기 몇 번일까. 오늘 남측에서 108번째 금강산 유람선이 왔다는데 지금 흐르는 저 녹수는 몇 번이나 금강산을 방문했을까. 기나긴 세월의 흐름을 가늠할 길 없으며 이 길을 오르내린 뭇사람들이 몇 명이었을까 헤아릴 길 없다.
12. 머리속에 만물상, 가슴속에 북한 땅
3박4일중 대부분을 금강산과 장전항에서 보낸 이번 여행은 예단하기 어려우나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기에 그 심정이 애처롭다. 38선과 휴전선을 뒤로하고 월남하던 그분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와 직장에 복귀한 지금 이 시간에도 북녘 하늘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동포를 생각해 본다. 그들의 체격이 우리와 같아지려면 50년, 3대가 지나야 가능하단다. 그것도 통일이 되어 동일한 환경에서 생활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컴퓨터에 입력되어 대답할 데이터가 있는 경우에만 말하고 자료가 없으면 “모름네다”를 기계어처럼 반복할 북측 동포를 생각해 본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