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에서는 8급이 서무나 총무를 담당하고 7급이 예산회계를 보았습니다만 퇴직후 사회로 나와보니 회장과 총무도 회원과 동격이고 돌아가면서 담당하게 됩니다.
성의 가나다순으로 하니 강씨는 제일 먼저이고 홍씨는 맨나중입니다. 우리는 왜 언제부터 가나다순일까요.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이후에 가나다 순번제가 형성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전에는 갑을병인듯 보입니다.
9인회가 있습니다. 공무원, 언론인, 변호사, 방송인 등 다양한 멤버들이 매달 한번 모여서 순대국, 해장국을 먹으며 세상을 이야기하고 삶을 토론합니다.
다양한 멤버구성인지라 정치이야기는 금기시합니다. A당도 있고 B당소속의 인물도 있으며 정치적인 활동을 했거나 진행형인 분도 함께하므로 정치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대화가 잠시 멈춘 후 곧바로 다른 소재로 넘어가곤 합니다.
대화라는 것이 어느 모임이나 단체에서도 그러하겠지만은 진행자가 따로 없습니다. 방송중 유명했던 100분 토론에도 사회자가 있고 종편방송을 보면 정치이야기를 할때 진행자가 있으며 정치이야기를 강력하게 진행하는 어느 방송의 경우에는 진행자의 강력한 공격형 진행으로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그래서 시청율이 올라가는 듯 보입니다.
이 모임도 역시 난상토론입니다. 누군가 한마디 하려면 단체 줄넘기처럼 목을 빼고 치고 들어갈 구석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워낙에 논객수준의 토론전문가 틈새에서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느날 대화가 잘 먹히지 않으면 스스로 방청객이 됩니다. 방청객에게 어쩌다가 마이크가 넘어오면 한마디 멘트를 하는 정도입니다.
순대국을 먹을 때 하지 못한 말은 그다음 커피점에서 발설하면 됩니다. 9명이 둘러앉으니 식사때와는 다르게 2개그룹이 형성됩니다.
물론 식당에서도 중앙방송과 지방방송이 돌고 중앙지와 지방지가 각기 호외를 발행하였다지만 커피점은 다소 안정된 가운데 삼삼오오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삼+오=팔이니 나홀로 남아서 고독과 독백을 나눠도 됩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그룹에는 들어가게 됩니다.
이 모임의 특징은 어느 한 순간에는 발언용 마이크가 빙빙 돌아간다는 점입니다. 말솜씨 좋은 분들이 차지한 마이크의 건전지가 방전될 즈음에 거대한 지미집에 매단 녹음용 마이크가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에 하고 싶은 말이나 살아가는 근황을 짧게 멘트하면 됩니다. 마음속에 잠겨있던 답답함을 풀어줄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일행중 SNS에 열정적인 분이 있어서 식사시작전에 사진촬영을 합니다. 식사중에 뒤늦게 오시는 멤버가 있는 경우 추가촬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식사하는 중의 식탁이 나오는 것은 매끄럽지 못한 사진이 됩니다.
그래서 식사전에 촬영하거나 커피점에서 담백하게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한 번은 단골집 젊은 직원이 스스로 사진을 찍어주겠다 나섰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이미 찍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젊은 직원의 성의를 받지 못해 미안하고 아쉬웠습니다. 본인의 업무에 더하여 손님들을 위해 사진촬영을 자원한 것인데 박절하게 끊어낸 것입니다.
요즘 스마트폰에는 필름이 없습니다. 32매 필름, 48매 필름을 장착하지 않아도 디지털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젊은 직원의 정성에 화답하여 한번 더 환하게 웃으며 촬영에 임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세대의 촬영이 먼저 찍은 사진보다 더 품질이나 컨셉이 좋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좋은 사진을 남길 기회를 날려보낸 것입니다.
동시에 기성세대로서 이른바 '슬기로운 사회생활'에 미달하고 말았습니다. 살면서 다른 이를 배려하고 주변 사람의 정성을 제대로 잘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생활의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멤버들은 모르는 둘만의 비밀 하나를 공개하고자 합니다.
폭설로 집들이형 모임을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폭설전에 멤버 전원이 모은 회비로 사과 한상자와 귤 2박스를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통상은 3일전에 주문하면 신선한 과일을 택배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택배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문 후에 폭설이 내렸고 좌장격의 큰형이 연기를 제안하였고 전원의 동의로 순연했습니다.
아마도 주최자는 돼지목살 5근을 실끈으로 묶어서 냉장고에 숙성시키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임 당일 아침 9시에 알콜에 불붙여 약한 불로 훈제하듯 페치카를 켜두면 정확히 11시50분에 오픈하여 김이 파르르 오르는 맛나는 바베큐를 식탁에 올릴 요량입니다.
훈제바비큐를 장착할 때에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늘의 태양을 한번 바라보기도 한다고 주인장이 전에 말했습니다.
그런데 폭설로 교통이 마비되니 택배 대란이 발생하였습니다. 폭설로 연기한 그날의 모임 날 오후에서야 과일이 도착한듯 보입니다. 카톡이 왔습니다.
행사가 취소되었으니 과일은 제가 돈을 내고 잘 먹겠습니다.
구좌번호를 알려주세요.
가격도요.
공금은 공금이니까요.
구좌번호가 맞나요, 계좌번호가 옳은가요? 둘다 맞는 수능 복수 정답일까요.
제갈공명과 솔로몬의 지혜를 얻기위해 답변을 하루 연기했습니다. 다음날 보냈습니다.
사과 73,900원+귤 24,800원 = 98,700원.
통장에 100,000원이 입금되었으니 이번 과일 장사로 1,300원을 벌었습니다.
총무를 하다보니 부수입도 생깁니다. 이 또한 폭설에 의한 재난사태, 불가항력이었습니다. 귤을 먼저 드시고 사과는 서늘한 장소에 보관하면서 오전에 부부가 한개씩 드시면 올겨울 중간까지는 비타민 등 영양소 공급에 큰 도움이 되시겠습니다.
둘만이 알고 넘기기에는 그 향기가 널리 퍼지는 이야기라서 회원과 다른 분들에게도 공유, 향유하고자 합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