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실장

중앙지와 지방신문이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를 병용하던 1988년 전후의 시기에 국무총리, 대통령비서실장, 장관인선 발표를 보면 장관급 인사의 사진은 동그라미이고 국무총리, 감사원장, 대법원장,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의 사진은 동그라미 장관의 사진보다 조금 더 큰 네모사진이었습니다. 신문보도에서 사진의 크기는 그 인물의 위계와 비중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인사중 단 한명인 대통령비서실장의 위상은 아마도 총리급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비서실장, 조선시대 도승지는 '1인 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와 현행 경제와 교육을 담당하는 부총리와의 중간쯤에 자리할 것으로 추측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비서실장의 위상이 높은 이유는 모든 조직과 기구와 대기업에서 비서실장의 위치는 공고하고 강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비서실장은 비밀스러운 일, 소중하게 다뤄야 할 자료를 챙기는 인물로 생각합니다. 야전에서는 '자료와 서류가 든 가방을 든다'해서 비서는 '가방맨'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요즘에 미국 대통령이 현장에 나갈 때 지근거리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정부요원이 카메라에 잡히는데, 이 가방 속에는 핵을 열고 닫는 장비, 즉 핵 단추, 핵버튼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비서는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시작해서 중소기업 사장실에서 전화를 받고 차를 대접하는 비서까지 아마도 그 기능과 역할과 위상을 숫자로 계량한다면 100단계가 넘는 경우의 수가 존재할 것입니다. 그만큼 비서의 기능은 다양하고 소중하며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통상의 의전에서 중요한 화두는 ‘과공은 결례’라고 말합니다. 음식을 가득 차려놓은 주부가 ‘차린 것이 없다’고 말하고 손님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라고 치하의 말을 합니다. 그동안 보아온 상다리는 튼튼해서 상위에 음식을 많이 올라가도 휘거나 부러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으며 상의 중간부분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사례를 본 바가 없습니다.

 

1980년대에는 기관장이나 간부의 승용차가 도착하면 미리 나와 있던 직원이 벌컥 하고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멋진 의전이었습니다. 하지만 2023년 오늘은 기관장 차량의 문을 가급적 밖에서 열지 않습니다. 요즘 기관장은 차량 안에서 결재를 하고 서류를 검토하고 전화 통화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기관 중 의전을 중시하는 정보기관의 장이 현관에 도착하는 모습을 2층 창문을 통해 본 기억이 있습니다. 차 안에서 누군가가 하나둘 구호에 맞춘 듯이 운전석, 조수석, 운전석 뒤편 문이 급 비상하는 잠자리 날개처럼 동시에 열리고 수행비서가 내려서 기관장의 차 문을 박력 있게 오픈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대통령, 도지사, 장관의 차량이 도착했을 때 수행팀이나 비서, 경호팀에서는 차분하게 여유롭게 차문을 열고 내린 후에도 여유롭게 차 문을 닫습니다.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직접 문을 열고 내려서 본인이 차량의 문을 닫는 기관장이 참으로 멋져 보입니다.

 

1982년경에 경기도청 간부를 모시고 행사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2명이 함께 타고 가야하는 상황이어서 운전사 옆자리, 뒤편 한자리는 공무원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과장님을 사무실에서부터 수행해서 차량 앞에 도착하여 뒷문을 열고 타시도록 안내했습니다. 하지만 과장님은 저에게 먼저 타라 하십니다.

 

8급이 5급 국비과장님, 요즘으로 서기관 과장님이 승차하라 차문을 열어주신 격이 되니 대단히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단호한 과장님 말씀에 급하게 탑승하여 3명 가운데에 앉았습니다. 30분 정도 운행시간동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업무를 마치고 선배에게 차량탑승 예절을 물었습니다. 그 결과 앞자리에 비서격의 공무원이 차문을 열어 과장님을 태웠어야 했습니다. 저는 뒷자리 중간에 미리 탑승하여 대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가는 동안 3인의 중간에 타보니 다리위치가 불편하고 양측의 어르신에게 기대지 않으려 중심을 잡기도 어려웠습니다.

 

이후 차량탑승 의전을 제대로 배워보니 기사가 운전하는 차량의 상석 1번은 대각선 뒷자리이고 동료가 운전하는 차량의 상석은 옆자리입니다. 뒷좌석의 중간은 서열 5번의 자리입니다. 차량의전 경험담을 말했으니 식당에서의 의전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과장, 팀장, 주무관 10명이 식사를 하는 경우 서무담당 주무관은 펄펄 끓어오르는 해장국을 가져온 식당 여사님에게 첫 번은 과장님, 두 번째는 주무계장님에게 드리라고 참견을 합니다.

 

명찰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과도한 의전을 챙기다가 그릇이 넘어가면 주변 동료들이 큰 화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서무담당자는 절대로 '끓어 넘치는 해장국'을 누구에게 먼저 주라 말하면 안 됩니다. 여사님들은 그동안 이 같은 불필요한 의전으로 스트레스를 겪고 있고 그래서 좌중의 연장자나 가운데 분에게 먼저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더구나 뜨거운 국물을 10초 먼저 받아서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크게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자리에 앉은 순서이든 여사님의 판단이든 그날 그 식당에서 한 그릇 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리고 매운탕이 잘 끓으면 상사의 접시를 가져다가 국자로 떠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또한 저는 반대입니다. 먼저 뜨시도록 하는 것은 바른 의전에 접근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순서 의전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뜨거운 국물을 떠서 주는데 자신이 받을 순서가 아니라고 손으로 떠밀다가 국물을 흘리고 손가락 화상을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친절하게 뜨거운 국물을 떠서 주면 고맙다 하면서 즉시 받아야 합니다. 뜨거운 국물그릇을 빨리 전하고 신속하게 받아야 합니다.

 

불필요한 의전으로 국물 그릇을 밀고 당기는 것은 큰 결례이고 이 시대에 맞는 의전도 아닙니다. 더구나 매운탕의 어느 부분을 뜨는가는 개인 선호가 다르답니다. 결국 의전의 바른 길은 의전을 받는 분이 편안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름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과도한 움직임보다는 차분하게 상사의 움직임에 맞추는 템포와 연결이 중요합니다.

 

엘리베이터를 미리 잡아서 다른 분들이 기다리게 하는 것은 의전이 아니라 민폐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잠시 여유롭게 기다리는 것도 의전입니다. 오늘 행사에서 잘된 점을 말씀드리는 기회로 삼아도 좋을 것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는다고 조급함을 나타내며 버튼을 연속으로 누르는 것도 의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액션은 의전이 아니라 오히려 불편을 드리는 일입니다. 움직임에 맞춰서 앞서거나 따라가고 물 흐르듯 왈츠곡에 맞춰서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소리 없는 의전이 모두를 편안하게 합니다. 그리고 공기관은 물론 기업에서도 비서실장은 한두 급씩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도지사의 4급 실장은 2급 실장으로, 시장의 5급 실장도 4급으로 올려서 각 기관의 최고위 간부와 동급으로서 원활하게 일정을 조율하고 정책적인 제언을 하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비서실장이 가방 들고 다니는 직원으로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무기능이 더더욱 강조되는 시기이기에 요즘에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