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여행 이야기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말대로 부푼 기대를 품고 딸, 엄마, 아빠가 인천공항으로 달려갑니다. 아들 현재도 함께하면 더더욱 좋은 일입니다만 직장에서의 일정상 함께하지 못하고 며칠후에 일본여행을 간다고 합니다. 전에 4인가족이 다니는 여행을 몇번 다녀서 익숙함이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3인이 단촐하게 출발합니다.

 

2시. 새벽에 일어나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4시경에 집을 나서서 새벽 바람을 가르며 달려갑니다. 4월입니다만 새벽 바람은 시원함속에 서늘함을 느끼므로 마침 아내가 챙겨준 점퍼가 포근함을 느끼게 합니다. 일단 옷은 얇은 것을 두세벌 입는 것이 여행에서 유리합니다. 옷이 두터우면 무겁고 얇으면 찬 바람이 스며듭니다.

 

 

늘 그러하듯이 인천공항은 대략 5만의 도시를 이동시켜 놓은 듯한 미래의 신도시입니다. 젊음이 가득한 현장입니다. 가끔 영화에서 미래 세계로 가는 내용으로 구성된 현장을 보게되는데 인천공항이 바로 그런 곳인듯 여겨집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여러가지 옷차림에 여행가방을 구비하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해상도시 인천공항입니다. 세계 10위안에 늘 들어간다는 인천공항을 처음 기획하신 분은 중앙의 행정안전부 소속 지방행정연수원장님인데 이분이 인천광역시청의 건설국장을 하시던 1988년 전후의 시절에 '바다위 인천공항'을 구상하고 이를 청와대에 건의하였다고 합니다.

 

전두환 대통령 임기말에 한번 건의했다가 물리고 다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설명하여 지방의 정책이 정부의 시책이 된 거의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고 합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바다에 떠있는 섬마을에 공항을 건설하자는 구상을 공무원이 시작했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보통의 공무원이라면 기존의 김포공항을 확장하거나 인근의 어느 지역에서 민원을 감내해가며 땅을 사고 보상을 해서 공항을 건설하고 또 늘리면서 다양한 민원과 토지의 한계에 봉착하는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분, 박연수 인천광역시 건설국장은 섬을 깎아 바다를 메우고 바다위 갯벌에 파일을 세워서 고속도로와 전철공사를 추진하자 했습니다. 바다위 섬의 돌과 흙을 깎아서 바다를 메우자 평지가 나오고 포장을 하니 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활주로가 되었습니다.갯벌기둥위에 상판을 올리니 다리가 되었습니다. 인천항에 배다 드나들도록 기둥을 더 높게 세우고 상판을 올리자 아름답고 위용 가득한 인천대교가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인천대교를 승용차로 날아오르듯이 달려가서 인천공항으로 내려갑니다. 주탑을 지나면 공항까지 내리막 길입니다. 장기주차장을 찾아서 주차하고 짐을 끌고 그 공항안으로 가고 있습니다. 45번게이트 건너편 4층 면세점을 목표지점을 삼았습니다.

 

전에 부부가 제주도 여행때 정맥인식을 등록한 바 있지만 여권없이 주민등록증으로 한 것이어서 이는 국내용이고 오늘 대만의 타오위안공항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검색과 출국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차분히 표를 받고 짐을 탁송하고 출국절차를 마치자 2시간 여유가 생겨나있습니다.

 

비행기 여행은 긴박함과 평온함이 반복되는 참으로 묘한 긴장을 줍니다. 막상 출국장을 거치면 잠시 조국을 떠나간다는 들뜸이 있고 내국과 외국의 중간지점인 면세점에는 소장하고 싶은 물품이 가득합니다. 오늘 인천공항 면세점의 모든 물품을 일거에 사들이기 위해서는 대략 2조원 정도가 필요할까요? 아마 누구도 그 금액을 추정해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알려고 해도 쉽지 않은 추정치일 것입니다.

 

그렇게 차분하고 긴장감있는 시간을 보낸 후 07:20에 39번 게이트를 통해 탑승한 비행기 62번 자리에서 09:20분까지 대략 2시간30분 비행기로 날았습니다. 대한민국-타이페이는 1시간 시차가 있습니다. 환율을 44원입니다. 대만돈 100원은 우리나라돈 4,400원이니 그냥 5,000원으로 생각합니다. 대략 100원짜리 물건이 흔하므로 이를 우리돈 5천원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대만에서 1,000원이면 우리는 5만원짜리입니다.

 

 

대만 타오위안 공항은 아기자기하고 깔끔한데 시설은 좀 나이든 듯 하지만 깔끔하게 정비된 모습입니다. 딸 현아가 공항내 편의점에서 "도라에몽"을 구매한다 하므로 장난감인가 생각했는데 교통카드입니다. 4일동안 늘 손에 익숙한 카드입니다. 전철을 타고 버스로 환승하고 다시 전철을 탈때마다 주머니에서 발만큼이나 손 빠르게 꺼내어 찍어주고 다시 보관했습니다. 편의점에서 충전하고 다시 다른 편의점에서 우유와 커피를 사서 먹고 마셨습니다.

 

공항버스를 타려다가 시간이 맞지 않아서 전철로 변경했습니다. 전철을 타고 달리는 대만의 풍경은 여름입니다. 지도를 생각해 보아도 대한민국보다 남쪽이고 베트남과 가까운 위치이니 4월은 여름이고 신록이 우거지고 나무의 질감이 깊습니다.

 

우리나라의 한여름을 맞은 느낌입니다. 풍성한 나무와 높은 산에는 더 높아보이는 고가도로가 여러갈래 지나갑니다. 그 산과 들에 자리한 건물은 일단 나이가 들어보이는 회색일색입니다. 나중에 가이드의 말을 들어보니 대만은 1년중 200여일 비가 내리므로 늘 젖어있고 습기가 높아서 페인트의 색상이 제 빛을 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건물 외벽이나 집의 외양은 회색 일색이지만 그 내부는 아름답게 치장한다 합니다.

 

우리의 숙소 Wholesome Hotel은 도심의 빌딩 숲속에 자리한 건물입니다. 현대식 디자인을 한 로비에 짐을 맡기고 나와서 식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유명 맛집입니다. 연어초밥을 주문하는데 3인이 3접시, 새우볶음밥을 달라하지 자그마한 중국 사장님이 3인에 2피스만 주문하라면서 주문지의 숫자를 수정합니다. 식사가 나온 것을 보니 3인 2접시를 추천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초밥을 말고 그 위에 두툼한 연어고기를 올려주는데 그 크기가 살면서 처음보는 킹싸이즈입니다.

 

큰 초밥인데 식감이 아주 많이 좋습니다.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은 쉽지 않은 법인데 여기에서는 큰 초밥인데도 맛있습니다. 새우볶음밥도 좋습니다. 시원한 된장국물은 셀프 무한리필입니다. 두부튀김도 두번째 별미입니다.

 

용산사는 도심에 있는 고찰입니다. 목조의 수려함이 돋보이는 사찰입니다. 한바퀴 돌면서 인생의 값진 삶을 기원했습니다. 여기까지 여행을 온 것만으로 큰 가피를 받은 바이지만 그래도 더 큰 가피를 기원했습니다. 중국인, 대만인의 부처님에 대한 경배의 모습은 정말로 진지하고 진정성이 있습니다. 갈구하고 바라는 바가 확신에 차 있는 듯 보입니다.

 

장개석 기념관은 그 크기가 역시 중국입니다. 중국 본토에서 전쟁에 패해 이곳 대만 타이페이로 밀려왔지만 후손과 국민들은 장개석 기념관을 크고 수려하게 건립했습니다. 국가 지도자를 추모하고 새로운 미래로 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의미를 담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독립기념관을 세운 것과 유사하게 생각됩니다.

 

넓은 광장은 여의도광장을 생각하게 합니다. 광장은 정치인의 무대인가 생각합니다. 지금은 광장이 아니지만 초기의 '여의도 광장'은 넓은 공간에서 국민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행사를 하기위해 마련되었을 것입니다. 이곳 장개선 기념관과 광장은 후손이 건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쑨원 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많이 걸었습니다. 대략 26,000보를 걸었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순원기념과 내부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중국, 대만을 이해하기 위해서 장개선과 순원에 대한 자료를 찾았습니다.

 

[인터넷검색] 장제스 蔣介石 (Chiang Kai-shek) 은 정치인입니다. 1887. 10. 31~ 1975. 4. 5. 중국 국민당 총재, 타이완 중화민국 총통, 1937 중국 국공합작 육해공군 총사령관입니다.중국의 정치가, 군인,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의 제2·4대 국민정부 주석이자 헌정 실시 이후 중화민국의 제1~5대 총통을 역임하였으며, 무려 46년 동안 집권하여 세계사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장기집권한 비군주 지도자로도 꼽힌다.

 

[인터넷검색] 쑨원 孫文(Sun Wen) 1866. 11. 12. ~ 1925. 3. 12. 중화혁명당 창설. 중국의 혁명적 민주주의자. 자(字)는 일선(逸仙), 호(號)는 중산(中山). 홍콩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반청 혁명을 목표로 하여 1894년 흥중회(興中會)를,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를 설립했고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에서 임시대통령에 추대되어 다음해 중화민국의 성립과 동시에 대통령에 취임하였지만, 원세개(袁世凱)에게 부득이 양보하고 사임하였다. 그 후에 여러 번 망명생활을 하다 일본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1917년에는 광동군정부를 만들어 대원수에 취임. 1918년 상해에서 중국 국민당을 만들어 1924년 북벌군을 일으켰으나 다음해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홍마오청은 대만의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입니다. 다른 일정을 진행하느라 저녁 6시경 도착하니 문을 닫아서 들어가지 못하고 문틈으로 들여다보고 돌아왔으므로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 역사를 이해하였습니다.

 

[인터넷 자료] 1628년 스페인에 의해 처음 목조로 지어진 요새로 산도밍고(San Domingo)라 불렀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여전히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볼 수 있는 홍마오청(紅毛城)은 스페인을 몰아낸 네덜란드에 의해 1649년 더욱 견고하게 세워진 요새로 샌안토니오(San Antonio) 로 불렸다고 한다. 당시 원주민들이 붉은 머리칼과 수염을 가졌던 네덜라드인을 홍마오(紅毛)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여 이곳을 홍마오청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명, 청나라 그리고 영국, 일본, 미국, 호주까지 이곳을 영사 관저로 사용하였으며 1980년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역사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는 여행자들의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우리의 일정에는 진리대학, 담강고등학교, 소백궁이 있었지만 다 방문하지는 못하였고, 홍마오청 앞의 바다와 정원을 거닐면서 관람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곳을 돌아보는 동안 대만이 섬나라인 것을 다시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바다와 높은 산이 어우러지는 나라입니다.

 

관광의 진수는 야시장입니다. 젊은이들이 한가득한 야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틈새를 거닐면서 맛집을 다니고 마무리로 맛있는 국수를 먹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오가는 길에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많고 주변국 청춘들이 이곳에서 야시장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2일차에는 짐을 챙겨서 택시를 타고 2,3일차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골목길에서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깔끔하고 아담한 숙소에 짐을 풀고 고궁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세계 5대박물관입니다. 누군가가 주장하기를 세계 5대박물관은 루브루박물관, 대영박물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에르미타슈박물관, 중국의 자금성박물관이라고 합니다. 5대이든 10대이든 박물관은 각각의 특성이 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입장료는 350달러이니 17,500원입니다. 열심히 층층을 돌면서 다양한 역사를 돌아보았습니다. 이 박물관은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올때 군사들을 동원하여 가져왔다고 합니다.진귀하고 대단한 작품들입니다. 사실 중국은 역대왕조가 바뀌면 전대의 유적을 모두 말살했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장개석 총통은 작은 작품, 귀중하고 소중한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어서 다행이고, 가이드는 이들 박물관 역사유물이 중국 공산당의 대만포격을 막아주었다고 설명하여 공감했습니다. 미세하고 정교한 작품과 부러움의 극치라 할 붓글씨 작품을 많이 관람하고 감탄했습니다.

 

담배공장 건조실을 개조해서 문화의 거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리저리 야경을 보면서 자원을 멋지게 재활용하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탄광촌, 폐광, 폐교, 기타 시설을 재활용하는 관광산업중에 성공사례가 많습니다. 외국 관광은 그런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하고 이를 우리의 환경여건에 접목하는데 기여하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오늘 3일차에는 버스투어입니다. 저렴한 가격으로 단체 25명 정도가 함께 성실한 가이드의 안내로 버스에 올랐습니다. 예류 해양공원에 도착하니 풍화작용을 거쳐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관광도시라고 합니다.

 

여왕바위, 촛대바위 등 다양한 모양으로 인해 고유한 이름이 붙여진 바위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사진찍기 좋은 곳입니다. 그리고 이 지구와 섬과 바다의 긴 세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긴 세월을 달려온 지구상의 어느 땅에서 잠시의 세월을 걸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다른 섬의 어느 관광지에서 스스로가 살고 있는 지구의 위대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스펀폭포입니다. 가뭄기라서 수량은 적다고 합니다만 처음 보는 입장에서는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오르고 내려가서 가까이 다가가서 폭포의 장관을 보고 느끼고 사진에 담았습니다. 닭날개 볶음밥이 맛있습니다. 마늘과 구운 소시지의 조화로운 맛에 감동했습니다.

 

4면에 가족의 소원을 적은 천등을 날려보냈습니다. 청년의 안내로 붓글씨 소원을 적은 천등에 석유불을 붙이니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고 손을 떠난 천등은 하늘높이 15분정도 날아간다고 합니다. 국내에서는 산불로 큰 걱정을 했는데 대만은 비가 자주오고 산 전체에 습기가 많아서 산불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천등의 틀을 모아서 자원 재활용한다고 하니 우리나라와는 다른 환경 여건인가 생각합니다.

 

천등을 날리는 자리는 철도길인데 천등을 보낸 후 실물 기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지나갔습니다. 철도길을 따라 기념품점과 맛집이 줄을 서있는데 얇은 막위에 땅콩엿을 대패로 갈아낸 가루를 올리고 다시 아이스크림 2스픈을 얹어준 피자형 아이스크림을 맛나게 베밀어 먹었습니다. 맛있는 간식입니다. 미리 주문한 닭다리밥도 맛을 기억하고 있으며 다시 먹고싶은 음식이 되었습니다.

 

지우펀은 '작은 상하이'라 불리는 마을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브가 된 수치루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우선 금광에 가서 일본식 도시락을 주문하여 늦은 점심으로 먹었는데 카레라이스가 참 맛있습니다. 중간에 고기도 나오고 밥도 있고 채소도 적당합니다. 아침은 빵, 점심은 간간스럽게 소시지, 마늘, 과자, 닭날개를 먹었습니다만 계속되는 관광, 걷기 등으로 체력을 많이 쓰니 배가 고픕니다. 시장이 반찬이기도 하고 운동이 밥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배부르게 먹고나니 세상이 잘 보이고 관광지가 더욱 아름답습니다. 내친 김에 교통카드를 들고가서 우유 한팩을 사서 훅하고 마셨습니다. 체력이 불끈 올라오는 기분입니다. 이곳 광산촌에는 일본천왕을 위한 숙소를 지었다고 하는데 개방하지 않습니다. 천왕이 방문한 바가 없다고 합니다.

 

대신에 일본인들이 점령기에 살던 숙소를 지금은 일반에게 게스트룸으로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 관광객들이 자존심을 세우는 의미에서 많이 이용할 것으로 추정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절벽마을에는 홍등이 유명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고 합니다. 각종 음식은 물론 차와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즐비합니다만 좁은 골목에 역악한 환경입니다.

 

우리나라 인터넷에 핫플레이스중 하나인 홍등거리를 촬영하기위해 멀리 돌고 돌았고 오간 길을 다시 가서 결국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비탈에 지어진 건물 추녀와 골목길 하늘을 뒤덮은 홍등이 오후의 석양과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 했을 것처럼 우리도 어렵게 사진촬영에 성공하였습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타이페이 중앙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의 숙소는 중앙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백화점 지하에 가보니 우리의 마트와 같은 공간입니다. 사과, 귤 등 먹을 것을 구매했습니다. 내일 새벽에 숙소를 나와서 공항으로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아침을 먹기가 어려우니 좀 늦어도 공항에서 늦은 아침을 먹기로 했습니다.

 

짐을 끌고 이고 공항철도에 도착했습니다. 빙빙 돌아서 결국에 직통 전철을 이용하게 되어 행운이었습니다. 여러개의 역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가더니 공항 1구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들어가 맛있는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공항의 면세점을 1시간 30분 돌다가 아빠는 기권하고 엄마와 딸은 다시 30분을 더 돌아왔습니다. 여성의 면세점 투어는 유명합니다. 들판을 걸으라 하면 못간다는 사모님들이지만 면세점에서는 발목에 큰 힘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여행을 하면서 부부가 손을 잡고 걸었고 가파른 계단을 오를때 힘차게 당겨 올려주었습니다. 험한지역의 화장실을 갈 때에는 같이 가서 기다려서 함께 버스로 돌아왔습니다. 평소 집에서는 긴요하지 않은 남편인지 모르겠으나 외국에 오면 필요한 남자가 될 것이라는 깜찍한 상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여행중에는 좀더 세련된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에서야 습관대로 대화하면 될 것이지만 이국 땅, 관광지에서는 좀더 배려하고 살피는 대화기술과 행동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리니 아들이 달려와 맞아줍니다. 지금까지 외국에서 돌아올때 아무도 없었는데 드디어 아들이 여행사 직원처럼 입국장 맨 앞줄에서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가족이란 그러합니다. 늦은 점심을 부부가 먼저 먹었습니다. 딸과 아들은 주차장을 향해 짐을 밀고가서 주고받을 물품 교환을 하고 늦게와서 국수와 김치찌게를 먹습니다. 부부가 남매의 점심식사 모습을 지켜보면서 많이 컷구나, 세월이 참으로 길게 흐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외여행을 다닐때는 중국어, 일본어는 그만두더라도 영어는 배워야겠다 생각을 합니다만 돌아오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출국, 입국시에는 딸의 뒤에 서려 합니다. 영어가 필요할때 도움을 받고자 하는 간곡한 마음때문입니다. 결국 인천공항에 비행기 바퀴가 내려서는 순간부터는 그러하지 않습니다. 언어가 힘이고 어휘가 파워입니다. 오늘부터 여행준비에 새로운 버전이 필요해졌습니다. 흔히 여행준비는 치약, 치솔, 내복, 옷 등으로 생각하였습니다만 요즘에는 충전기, 교통카드가 필요하고 특히 관광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분재는 고개를 숙인자에게 진면목을 보여주듯이 여행, 관광은 사전 정보를 알고 지식을 축적한 광광객에게만 그 역사의 진실, 문화의 가치를 알려줍니다.

 

같은 산으로 보는 것 같아도 그 산을 아는 이는 산속의 깊이를 알고 모르는 이에게는 그냥 뾰족한 뫼산(山)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동시에 인생은 앞이 보이지 않는 공항철도와 같습니다. 지금 철길을 달니는 것은 알겠고 저 앞에 레일이 있는 것은 알지만 승객으로 앉아있으면 철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철길을 달리는 것이 인생길인가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나온 철길만 볼 것이 아니고 하행선의 다른 손님이 탄 기차만을 바라볼 일이 아닌줄 생각합니다.

 

자신이 타고 있는 기차가 달리는 앞길이 좌로 휘는지 오른쪽으로 달려가는가를 미리 알고 몸을 움직이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인생이 값지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의지로 기관차를 몰고 나의 생각으로 앞길을 바라보면서 속도를 조절하고 방향을 미리미리 대비하면서 운영하는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인생철도길

내가 지나온 길은

돌아도 보이지 않고

내다보아도

그 앞에 없네

인생 철길은

크게 휘돌아야 앞이 보이네

인생의 철도길은

종점에 도착하면

역사라는 역사에 숨고

외롭게 달려오니

마지막 출입문만 보이네

 

저 바위처럼 시간을 넘어서 세월속에 스미는 파도가 되어 바위를 어루만지는 시간이 되어 바닷속 심연에서 올라온 그 시간의 의미를 느껴봅니다. 그렇게 오르고 내리는 짧은 인생사는 금모래의 흔적과도 같으니 오늘을 알고 지내고 어제를 잊고 지내도 미래의 그곳에는 누군가가 존재하였기에 우리가 다가가는 시간의 존재인가 생각합니다.

 

황금이어도 좋고 파도 부스러기라도 괜찮습니다. 이곳에 잠시 존재한다는 것으로 나는 그렇게 머물렀고 그날이 지워졌어도 작은 존재의 찰라는 기억하는 것이고 구름 한점속 연기라 해도 존재한 사실은 있는 것이니 그 속에 살아왔음을 자신의 의미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빼곡한 여행일정을 잡고 유연하게 현장상황을 반영하면서 일정을 진행해준 가이드 딸 현아에게 엄마와 아빠가 박수를 보냅니다. 그 작은 스마트폰 하나로 대한민국을 출발하여 대만의 북부지역을 종횡무진한 인터넷시대의 대단함도 느껴봅니다. 그 작은 칩 하나로 대한민국과 카카오톡을 주고받고 기사를 검색하며, 새로 개국한 OBS라디오를 들었습니다.

 

개인 까페에 올린 글을 읽고 대만 북부의 숙소에서 글을 써 올리고 사진을 올려서 지인들의 관심을 일으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있다는 사실을 이번 여행을 통해 거듭 크게 느끼고 그 실황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

 

일상으로 돌아와서 세탁기 빵빵하게 빨래를 하고 건조기에 둔채 피곤하게 잠든 아내를 위해 건조빨래를 가져와서 네모를 두번 접는 단순한 수건개기만 하고 나머지 빨래와 옷은 수북하게 쌓아둔 바입니다. 여행은 빨래를 남기고 수첩을 기록하고 추억을 쌓아서 기억으로 살포시 간직하게 합니다. 어제부터 오늘아침까지 이틀동안 작성한 소감문을 마무리하고 비행기표와 여행지에서 받은 영수증을 이곳 바인더북에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이 글을 늦게 읽은 아내는 몇곳 오탈자를 손볼 것이고 일정 가이드 딸 아이는 시제, 순서의 틀림을 지적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인터넷 시대에는 수정이 가능하므로 아나로그 출력물은 그대로 간직하고 이곳 오픈공간에는 수정한 자료를 다시 올리게 될 것입니다. 수고했습니다 모두가!!!!!! 감사드립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