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융건릉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 융건릉#용주사 ▥

京鄕各地(경향각지)에서 우리문화유산 탐방 멤버들이 삼삼오오 승용차를 타고 화성소재 융건릉으로 달려왔습니다. 융건릉은 장조(사도세자)와 영조대왕의 왕릉입니다.

이른 시간이어서 편안하게 주차하고 왕릉 입구에 모였습니다. 한사람 두 사람 인사를 하고 해설사님을 따라서 입장했습니다.

 

부모자식의 묘와 왕릉이 위아래가 바뀌는 사례는 거의 없는 것이 우리의 유교정신이라 합니다만 율곡선생의 逆葬(역장= 조상의 묘 윗자리에 자손의 묘를 씀)사례가 있고 정조대왕의 묘역이 장조(사도세자, 정조의 아버지)의 자리보다 높은 것이 그 다음의 일이라 합니다.

그래서 회원들은 장조는 후대 고종황제가 장조로 追尊(추존)한 바이니 장례 당시에는 정조가 왕이었고 장조는 세자의 신분이었으니 가능한 일일 것이라는 마음속으로 공감했습니다.

 

묘, 능, 왕릉 등 모든 산소는 사후에 자손들이나 신하들에 의해서 조성되는 것이니 살았을때의 행정과 대칭되어 조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중전의 릉이 호화로운 것은 그 자식이 어렵게 왕위에 올라 그렇게 조성한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 집니다.

해설사님의 설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를 모신 왕릉이고 건릉은 22대 정조대왕과 효의왕후를 모신 두 왕릉 모두 합장릉입니다. 정조는 다른 곳에 모셨다가 21년후 왕후와 합장하면서 현재의 건릉에 영면하셨습니다.

정조가 8살이던 때에 아버지 사도세자는 무더운 여름날 뒤주에 갇혀서 8일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정조 즉위 13년 후에 왕권이 강화되면서 매봉산의 사도세자를 이곳 현륭원으로 모셨습니다.

 

顯隆園(현륭원)은 신도시 화성을 탄생시킨 으뜸 요인으로, 정조의 지극한 효성으로 새로이 遷葬(천장)한 사도세자의 무덤을 말한다고 인터넷은 해설합니다.

재실로 이동하였습니다. 왕릉관리실이고 제사를 준비하는 곳입니다. 제기와 제관의 옷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300살이 지났을 천연기념물 ‘개비자나무’를 소개합니다. 요즘에는 천연기념물에 일련번호를 지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조는 이곳에 아버지를 모신 후에 식목작업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왕중에 나무심기를 가장 많이 추진한 왕이라고도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소나무를 벌채하였지만 이후의 나무들은 잘 관리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坤申池(곤신지) - 여의주를 의미하며 사도세자가 용이 되시기를 기원하여 조성되었다 합니다.

 

1800년 6월에 승하하신 정조를 모신 왕릉터에 다다랐습니다. 정조대왕의 초장지입니다. 그 인근에 坤申池(곤신지)가 있습니다. 다른 왕릉에는 네모 형태를 합니다만 유독 정조가 아버지를 위해 만든 곤신지를 원형입니다.

원형은 如意珠(여의주)를 의미하며 아버지 사도세자가 용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서 곤신지를 만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의보주如意寶珠 : 불교에서 이것을 가진 자의 모든 원망(願望)을 성취시켜 준다는 주옥(珠玉))

 

이제 융릉, 사도세자, 장조의 왕릉앞에 다다르니 홍살문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절할 때 어른에게 1배, 조상에게 2배, 신에게는 3배를 합니다만 왕릉에서는 4배를 올린다 합니다. 鞠躬(국궁)이란 사람이나 위패(位牌) 앞에서 존경하는 뜻으로 몸을 굽힘을 의미합니다.

紅箭門(홍살문)을 지나 3가지 길을 만나게 됩니다. 향로는 축문을 든 제관이 가는 길인데 전에는 신도라 했는데 향로라고 명칭을 통일했다 합니다. 어로는 제사를 주관하러 온 왕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두 길을 피해서 옆으로 걸었습니다.

 

3가지 길의 바닥이 모두 거친 돌로 만들어진 이유는 차분히 경건하게 걸어가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합니다. 이제 정자각에 올라야 하는데 2개의 계단이 보입니다. 왼쪽 계단의 돌에는 북이 새겨졌고 구름 모양의 조각도 보입니다.

북소리는 병사들에게 앞으로 전진하라는 명이고 후퇴를 징으로 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선왕과 함께 왕과 신하들이 전진하라는 의미로 계단에 북을 조각했습니다. 이 계단은 역시 향로이니 신하와 백성은 오르지 않습니다. 그 옆의 꾸밈없는 돌계단은 왕이 오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신하와 백성은 임시로 나무계단을 만들어 정자각에 올랐습니다. 오른발을 올리고 왼발이 따라가고 다시 오른발을 올리고 왼발을 올려서 경건하게 정자각으로 이동합니다.

정자각 제수를 살펴보니 백성들 제사상 밥의 자리에 면이, 고기의 자리에는 튀김이 陳設(진설 =제사나 잔치 때, 음식을 법식에 따라 상 위에 차려 놓음)됩니다. 이는 經國大典(경국대전) 국조오례의에 이렇게 정해져 있다고 해설사님이 해설하십니다.

 

산신석은 왕릉을 마련한 산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자리입니다. 정자각과 왕릉 사이에 자그마하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 역할을 몰랐는데 해설사님 덕분에 많은 이야기를 듣는 기회였습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이곳에 모시고 묘지문을 적었습니다. 원한을 가지고 모질게 살아온 이유는 제가 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그 임무는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역적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없으니 정조는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해서 왕이 되었습니다.

 

융릉 앞의 정자각이 오른쪽에 자리한 것은 뒤주에서 8일간 갇혀 돌아가신 부왕의 답답함을 덜어드리기 위한 정조의 효심이라는 이야기에 대해 우리 해설사님은 이보다는 풍수지리에서 여러 가지 검토가 있었다는 역사적 史實(사실)이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하지만 최근의 학자들은 화성행궁에서 8일간 정조의 어머니, 장조의 왕후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연 것은 뒤주에 갇힌 8일과 연장 선상에 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정자각이 융릉에서 바라보았을 때 약간 우측으로 배치된 것 역시 답답함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정조가 송충이를 깨물어서 융릉의 소나무를 살려냈다는 이야기, 답답함을 덜어드리기 위한 정자각의 배치, 수원 지지대고개와 지지대 이야기, 효행공원 등 다양한 정조 스토리텔링에는 공감을 하는 바입니다.

왕릉앞에는 魂遊石(혼유석)이 있는데 이곳은 왕의 영혼이 올라가시는 무대로서 음식을 차리지 않는다 하는데 어느 드라마에서 혼유석에 음식을 차린 장면이 나왔으며 이는 고증이 잘못된 것이라 해설사가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무인석위에는 봉황의 조각이 있으니 이는 아버지 장조가 용이 되시기를 바라는 염원이었고 봉분 주변의 연꽃 또한 막 피어나는 순간을 조각했다고 합니다. 정조의 효심을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스토리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신 고종황제께서 비문 뒤편에 친필을 쓰셨다고 합니다. 초심자가 보아도 명필입니다.

 

점심은 반반한 명태가 식당(031-226-0202)입니다. 따끈한 밥과 코다리, 다양한 반찬이 나와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전원이 마스크를 벗고 웃으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용주사에 도착하니 해설사님이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말씀이 빠른 만큼 발거름도 신속한 해설사님이신데 교육자이신 듯 보입니다.

용주사 주변 10리가 왕릉의 땅이었고 용주사는 대중, 백성을 위한 사찰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제궁이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사당입니다. 절 앞에 홍살문을 세우는 것을 극히 예외적입니다.

 

문을 닫는 사찰입니다. 사당은 3문을 설치합니다. 동입서출합니다. 종묘 역시 3문입니다. 행랑이 있습니다. 새의 모습이라 해서 익랑이라 하고 줄행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줄행랑이 다른 사찰에는 없습니다.

5층석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대웅전에 오르기 전 누마루를 높게 했습니다. 다른 사찰의 경우 누마루가 낮아서 사찰에 오는 신도나 관광객이 고개를 숙이도록 했습니다만 용주사는 백성이 아니라 왕이 들어가는 사찰이니 누마루를 높게 했습니다.

 

대웅보전 앞에 야단법석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단을 쌓고 법문을 했으니 사람들이 와글거림을 야단법석이라 합니다. 벽면에 방명록이 있습니다. 잔 글씨가 보이는데 과거 누가 이곳에서 강연을 하고 설법을 하였음을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판승은 암자에서 수도하시는 스님으로 성철스님, 법정스님의 예입니다. 사판승은 행정승이며 이분들이 일을 해서 이판승이 수도하시도록 돕는 일을 합니다만 이판승이 대우를 더 받은 듯 보입니다.

대영웅석가모니 – 대웅전입니다. 대웅전과 대웅보전은 다릅니다.

 

[大雄殿(대웅전)과 大雄寶殿(대웅보전)]

<대웅전>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덕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을 좌우협시로 모신 법당이다 '대웅'은 진리를 깨달아 세상에 두루 펼친 위대한 영웅이라는 말이다 수덕사 봉정사 전등사 등에 대웅전이 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완전한 지혜를 가진 보살이며 손에는 칼을 들고 사자 위에 올라타고 있다 문수보살은 성불하여 산시성 청량산(淸凉山)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문수보살의 인도발음이 '만주슈리'이다 누루하치가 여진족을 문수보살처럼 지혜롭다는 뜻으로 만주족으로 개칭했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보살이며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있다 보현보살은 보살 가운데 으뜸으로 중생들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지고 중생을 교화한다.

 

<대웅보전>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좌우에 모신 법당이다 대웅전의 격을 한층 더 높여 과거불, 현세불, 미래불을 안치했다 내소사 마곡사 운문사 등에 대웅보전이 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이며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현재까지 설법을 하고 있다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 깨달음을 얻어 고통이 없고 즐거움만 있는 정토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약사여래(藥師如來)는 질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늘려주며 재난을 없애주는 부처이며 현세의 복락을 약속한다 약사여래는 동방의 극락세계를 주재하며 약사불을 만지거나 약사여래를 소리 내어 부르기만 해도 치료가 된다고 한다.

출처 : 한국역사문화신문

 

그리고 대웅전, 대웅보전에 모셔진 분 중 머리에 관이나 다른 무엇을 쓰신 분은 보살이고 이런 것을 쓰지 않은 분은 부처님입니다.

사찰 한 곳에 대략 10개의 종이 있겠습니다만 그 많은 종중 4개만이 국보인데 용주사의 범종은 국보 120호입니다. 고려시대에 주조된 종으로 본다고 합니다.

 

유명한 종은 4개인데 용주사 종과 함께 상원사 오대산 동종, 경주 박물관 선덕대왕신종(에밀레종), 천안소재 사찰의 종(박물관에 보존중)이라고 합니다.

국제적으로 종에 대한 학명은 동양종, 서양종, 그리고 코리안벨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의 종은 음통이 있습니다. 서양의 종은 높은 종루에 매달려 있지만 우리나라 종은 지상에 설치하고 그 아래에 음통을 설치하고 그 밑에는 항아리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종의 위아래 두께를 달리해서 풍성한 소리를 내고 아래로 내려간 음이 울려서 다시 종의 위쪽 음통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공명을 내도록 제작되었다 합니다.

魂魄(혼백)이란 사람의 몸에 있으면서 몸을 거느리고 정신을 다스리는 비물질적인 것이고 몸이 죽어도 영원히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사전에서 설명합니다.

 

혼은 신주이고 백은 뼈를 말하는데 혼구멍을 낸다는 말은 죽는다는 의미로 강한 표현인데, 혼은 향으로 부르고 백은 술로 모신다고 하니 제사에서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리는 것입니다.

護聖殿(호성전)은 아마도 용주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입니다. 여기에 장조의 혼을 모시고 정조의 혼을 모셨습니다.

 

오늘은 정조의 효심과 융건릉의 유래, 그리고 용주사의 특징에 대해 전문가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매 계절마다 융건릉을 거닐고 용주사를 방문하고자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한번 더 실감하는 바입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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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