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첩된 인연과 우리의 삶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살아가면서 만나는 參羅萬像(삼라만상)은 서로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냥 주변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서는 모든 것들이 그순간 그 자리에 나타나야 할 이유와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2009년경 동학사 입구에서 만난 나무들은 모두 돌과의 사랑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 돌 하나에 도대체 몇 그루의 나무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을까요. 나무가 바위틈새로 자라서 돌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형상입니다.

 

 

하지만 돌이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올라서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의 선과 후를 안다면 돌의 역사가 길고 나무는 누대의 자손이 면면히 이어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나무의 조상을 따라 올라가면 이산이 아니라 건너편 산에서 출발한 나무 가문의 자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에게 가문이 있다면 나무에게도 木門(목문)이 있을 것입니다. 나무는 뿌리로 자손을 이어가기도 하고 씨앗을 날려서 새로운 자손을 번창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 돌 속의 진액이 나무를 통해 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까요. 혹시 저 돌들은 나무가 있어 제자리를 지키고 저 나무는 돌 틈에서만 생명이 유지되는 특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돌과 나무가 함께해야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돌이 지닌 단단함과 나무의 견고함이 합쳐져서 이 산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돌을 부여잡은 나무 모두는 왕성한 생명력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돌이 없는 나무는 웃자라거나 못자라서 枯死(고사)하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바위가 있어서 나무의 생장을 조절하고 나무로 인해 그 돌이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일까요.

지금 자리한 그곳이 최고의 명당이고 살아가기 딱 좋은 적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장 편안한 자기합리화라 해도 말입니다. 이 돌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운명적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나무가 이 돌틈에서 성장하여야 하는 인연이 있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이 나무들은 돌 틈을 보금자리로 시작하였으므로 다른 곳에서 뿌리를 내렸더라면 저처럼 거목으로 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무가 거름이 많다고 크게 자라는 것이 아닌 것 처럼 인간에게 밥을 많이 먹인다고 책을 많이 사준다고 모두 키가 더 크고 더 훌륭한 위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해도 좋을 듯합니다.

오히려 척박한 산촌이나 강가, 빈민가에서 부족한 영양과 메마른 교육환경을 딛고 인고의 세월을 보낸 후에 위인이 탄생한다는 그런 진리 같은 말을 누군가가 우리에게 해 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위인은 금수저보다 흙수저 집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하고 이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2022년에는 부잣집 아들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엄마말도 잘 듣는다고 합니다. 이런 학생을 ‘엄친아’라고 하지요. ‘엄마와 친한 집안의 아들’입니다. 이 아들은 유니콘 같은 상상의 아들일 것입니다.

<유니콘 unicorn>

인도와 유럽의 전설상의 동물. 모양과 크기는 말과 같고 이마에 뿔이 하나 있다고 한다. 환상의 존재로 통칭되는 유니콘에 비유하여, 원하지만 매우 찾기 어려운 무언가를 뜻하는 말.

 

TRPG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1) 합이 잘 맞는 2) 여러 사람이 3) 일정을 잘 맞춰 모여야 하기 때문에 바쁜 사회인의 경우 세션을 잡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모든 것들이 잘 맞은 경우나 그런 팀을 '유니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계룡산 기슭의 동학사를 가는 오솔길에는 나그네를 맞이하는 나무들은 하나같이 한 두 개, 서너 개의 돌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그 돌이 이 나무에게 있어서 어머니 같은 존재인 듯 보입니다.

 

저 바위들은 제 몸을 녹여서 저 나무를 잉태하고 거목으로 키워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연은 더 큰 진리의 메시지를 늘 우리 인간 세상에 보내고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동학사 입구에 가시면 수 백년째 목석의 사랑을 보실 수 있습니다만 바쁘신 분은 훗날 가시더라도 저 나무와 돌과 산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나무와 바위는 늘 인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우리가 그 산에 가지 못하고 그 나무와 바위를 만나지 않으려 합니다.

 

동학사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동학사에서 돌과 바위와 나무와 바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학사는 죽어서 부연이 된 자식 나무, 베어져서 기둥이 된 부모 나무가 사찰을 꾸미고 그 앞 암벽에는 10대조도 넘을 법한 살아있는 할아버지 나무가 공존하는 사찰입니다.

동학사에 가시면 긴 세월을 한 폭으로 감상하실 수 있고 전혀 다를 듯한 돌과 나무가 그렇게도 잘 어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숲과 바위 틈새에 동학사가 자리한 것인지, 동학사 주변에 그 많은 나무와 바위가 모여든 것인지는 더 살펴보아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 선후를 닭과 계란처럼, 방금과 금방처럼, 부부 싸움처럼 우리가 알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습니다.

살면서 마주하는 葛藤(갈등)은 모두가 허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을 말합니다. 노사 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문학, 소설이나 희곡에서, 등장인물 사이에 일어나는 대립과 충돌 또는 등장인물과 환경 사이의 모순과 대립을 이르는 말입니다. 두 가지 이상의 상반되는 요구나 욕구, 기회 또는 목표에 직면하였을 때, 선택을 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갈등이라는 것이 두가지, 세가지가 겹치는 경우에 발생하는데 이들의 시차가 10분정도, 1분만 달라도 갈등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두 가지가 같은 시각에 만난 운명을 타고났기에 발생하는 충돌입니다. 칡나무와 등나무가 어떤 것은 오른쪽으로 감기고 다른 것은 왼쪽으로 감아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둘이만나서 동시에 줄기를 뻗어 올라가면 반대방향에서 엉켜버리고 시간이 지나면 줄기가 단단하게 굳어버리므로 가을쯤에는 도저히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같은 방향으로 감았다면 물을 뿌려서 부드럽게 한 후에 한줄기씩 풀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줄기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서로 감겨있으니 엉킨 실타래 이상으로 꽁꽁 묶여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갈등은 초봄에, 아지랑이가 필 무렵에 줄기가 엉키려 할 때에 미리 방향을 바꿔주어야 합니다.

호박이 넝쿨째 떨어졌다고 합니다. 호박줄기가 왕성하게 줄기를 키워서 이리저리 뻗어나갑니다. 그 방향이 흙바닥으로 향하면 할아버지는 풀받으로 줄기의 방향을 바꿔줍니다. 그리하여 창고나 가축우리의 지붕으로 올라갑니다.

지붕위에서 커다란 호박을 키워내는데 늦여름 어느날 무게를 견지디지 못하고 지붕아래로 흘러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호박이 넝쿨째 떨어졌다는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냥 호박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넝쿨도 같이 흘러내립니다. 사람들은 늘 호박은 넝쿨과 함께 자라고 지붕에서도 호박+넝쿨이 우장창 떨어지는 것을 여러번 보았으므로 이런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좋은 소득이 있고 잘잘한 수익도 동시에 챙길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꿩먹고 알먹고와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차지만 참외와 수박은 넝쿨손이 약해서 지붕까지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수박은 귀한 것이니 지붕으로 올라가기전에 풀밭으로 방향을 잡아줍니다. 그리고 수박이 열리면 짚으로 똬리를 틀어서 바닥에 깔아줍니다. 수박의 색상도 보호하고 동드란 모양이 잘 잡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수박이 열리면 주사위 모양으로 만든 플라스틱 통에 작은 수박을 넣어둡니다. 수박의 동그란 체적을 네모 공간에 채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배를 하면 네모난 주사위에 꽉 들어찬 수박을 수확하게 됩니다.

 

박스를 풀어내면 정말로 주사위 모양의 수박을 얻습니다. 여러개를 함께 쌓아도 굴러가지 않습니다. 수박에서는 아픈 기억이겠지만 농민들이 수송하는 과정에서 편리하고 소비자들은 네모난 새로운 수박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바위와 나무의 인연에 이어서 도토리나무와의 인연도 있습니다. 동학사 나무 아래 돌 의자에 앉아서 바람결에 도토리가 내 어깨에 떨어집니다. 어떤 인연으로 그 자리에 앉아서 사색을 하는 시간에 도토리가 낙하하여 어깨를 스친 후 발아래에 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무슨 인연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자연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萬有引力(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높은 도토리 나무에서 결실을 맺은 도토리가 나그네의 어깨를 치고 바닥에 굴러 다음 자손을 키워낼 생각을 할까요.

나그네가 깊은 인연이라고 도토리를 주워서 주머니에 넣으면 그들의 인연은 그해에 끝날 것입니다. 그래서 도토리를 주워서 하천 건너편으로 힘차게 던졌습니다.

 

그 도토리는 건너편 부드러운 토양속으로 들어가서 이 겨울의 냉기를 견디고 내년봄의 땅속 물기와 지표면의 따스함으로 새싹을 틔울 것입니다. 하지만 청설모, 다람쥐의 입안에 들어가면 동물의 몸으로 환생하는 또 다른 인연의 길로 들어서겠지요.

이런 생각에 이르면 인생의 의미, 영겁의 세월, 그리고 돌과 바위의 어울림, 도토리와 나그네, 다람쥐와 도토리의 인연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참 좋은 참선의 시간을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참석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전생부터 어떤 인연의 끈이 꾸준히 존재했음을 알게되고 그래서 오늘 한순간의 동학사 사색이 아주 긴 호흡으로 오래오래 간직될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나무가 커가면서 돌을 감싸 안고 그 나무에 안긴 돌이 엄마 품에 잠든 아이처럼 보이는 정경은 동학사에서만 가능한 서정이고 정서라 생각했습니다.

 

극과 극, 상극으로 생각하였던 돌이 나무와 어우러지는 모습은 제주도의 밭에 뿌려진 씨앗을 바람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구멍 숭숭한 현무암 돌덩이와 같다는 느낌입니다.

싸우는 개와 고양이가 아니라 젖 먹여 키우는 엄마 개와 아기고양이의 모습입니다. 동학사에 오셔서 세속의 묶은 껍질을 벗겨내시고 깨달음의 새살을 꽃피워 보시기 바랍니다.

 

10년 전에 다녀온 동학사에 대한 기억이 이처럼 생생할 수 있는 이유는 그날 2시간의 산책에서 만난 그 정경이 감동을 넘어 감격스러웠기 때문인가 봅니다.

동학사 입구에서 만난 나무들은 모두 돌과의 사랑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 돌 하나에 도대체 몇 그루의 나무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을까요.

아니면 저 돌 속의 진액이 나무를 통해 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까요. 혹시 저 돌들은 나무가 있어 제자리를 지키고 저 나무는 돌틈에서만 생명이 유지되는 특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나이 먹은 나무와 죽어 부연이 된 30년생 석가래 나무가 공존하는 곳이 동학사입니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돌 틈 보금자리로 시작하였으므로 다른 곳에서 뿌리를 내렸더라면 저처럼 거목으로 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무가 거름이 많다고 크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보여주듯이 인간에게 밥을 많이 먹인다고 책을 많이 사준다고 모두 위인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瘠薄(척박)한 山村(산촌)이나 외로운 강가, 貧民街(빈민가)에서 부족한 영양과 메마른 교육환경을 딛고 인고의 세월을 보낸 후에 위인이 탄생한다는 그런 眞理(진리)같은 말을 누군가가 우리에게 해 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어느 해 가을에 木石(목석)간의 생명력있는 사랑이야기를 사진으로 모아 보았습니다. 계룡산 기슭의 동학사를 가는 길에 나그네를 맞이하는 나무들은 하나같이 한 두 개, 서 너 개의 돌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그 나무에게 있어서 돌은 어머니 같은 존재일까요? 저 바위들은 제 몸을 녹여서 저 나무를 잉태하고 거목으로 키워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연은 더 큰 진리의 메시지를 늘 우리 인간에게 보내고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오늘이라도 당장 동학사에 달려가시면 입구에서 수천년째 이어지는 목석의 사랑을 보실 수 있습니다만 바쁘신 분은 훗날 가시더라도 저 나무와 돌과 산이 여러분을 반갑게 맞이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런 인연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사색이 필요합니다. 산을 보고 나무도 보고 멀리보고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면서 대자연과의 인연, 이 생을 살면서 만나는 인연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살면서 만나는 인연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 사색을 바탕으로 자연을 대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아름답지 않은 자연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행운이고 이 순간을 살고 있음이 행복인 줄을 알지만 하루 하루를 살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고마운 일이 매일매일 눈처럼 쌓이고 낙엽처럼 모여듭니다.

저 은행나무의 잎새보다 더 많은 인연을 만나고 느티나무의 줄기보다 복잡한 인간관계로 살지만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은행나무 한그루이고 풍성한 느티나무가 언덕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니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7그루 서있고 그 자리는 마치 북두칠성이었습니다. 한 그루 한 나무가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것이 우주의 7개 별이 무심한 듯 7자리를 형성한 것입니다.

 

인연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고 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우며 인연의 별들이 하늘에 7개의 북두칠성을 구성하는 것처럼 작은 듯 보이는 인간사에서도 빼곡한 나무중에 7개의 북두칠성 자리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