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석이 주장하는 개선해야 할 일들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핸드폰 없던 시절에 사무실은 전화벨소리로 일을 하는 듯 보였습니다. 전화가 오고 전화를 통화하고 그런 소란스러움으로 행정을 무르익어갔습니다.

과장님(4급)이 출장이거나 부재중이면 차석(6급)들은 일상의 업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과장님이 재실중이시면 시군청에 전화를 해서 업무독촉을 했습니다.

 

당시, 1985년경 경기도청의 모든과에서는 과장님 출장일을 無頭日(무두일)이라 했습니다. 작은 5촉짜리 불을 켜는 무드등이 아니라 머리가 없는 날이니, 즉 과장님이 출타중이시니 신나게 놀 수 있는 날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관 계장들은 한잔하러 가고 6급 차석들도 자신들만의 대화를 위해 족발집으로 갔습니다. 그리되면 7급이하들은 쩜모임이라면서 좋아하는 식당에서 한 잔 하면서 계장, 과장을 식탁에 올려 안주로 대신했습니다.

 

하지만 과장이 在室(재실)중이면 6급들은 자신의 5급 승진권을 쥐고 있는 과장님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시군을 통할하는 업무를 열심히 추진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화를 통화했습니다. 큰 소리로 시군 공무원을 야단치는 차석이 일 잘하는 직원으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과장님이 6급 차석 4명의 점수 순서를 매겨서 국장에게 넘기면 4개국을 총괄하시는 국장님이 다시 4개과의 차석 16~20명의 순서를 정하여 인사과로 보냈습니다. 인사과는 경기도청 전체 6급의 순위명부를 작성하고 이를 부지사에게 넘깁니다.

 

부지사는 실국장으로 구성된 근평조정위원회를 열어서 실국간의 서열, 부서간 서열, 특정한 주사 차석의 평점이나 순위가 적정한가에 대한 조율을 합니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왕수'점수를 하사했습니다. 대략 인사위원인 국장에게 '왕수'점수를 줄 수 있는 카드는 1장이고 부지사는 대략 5개를 투하합니다.

왜 투하일까요. 왕수는 1점인데 0.2점 차의 명부에서는 5명의 순위를 뛰어넘어가는 추진력을 가진 점수입니다. 이번 인사에서 5급승진자가 20명이라면 대략 3~4배수인 70등까지가 '유력'입니다. 명부서열에서 73등인자가 왕수 1점을 받으면 5등이 상승하여 68번이 되고 배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배수라는 마력은 대단한 것이 1~10등을 배제하고 50~70번까지를 깡그리 승진시켜도 행정적, 법률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임용권자는 배수안에 든 어느 사람이라도 승진대상자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혹시 기관에서 계속 승진 누락되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매번 승진후보자 서열에서는 1자리수에 들지만 비고란에 어떤 연필글씨가 올라가서 매번 탈락하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갓 올라온 4배수 턱걸이 선수가 승진하고 고참은 누락되고 다음번 명부 수위에 오른 후보자는 또다시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 것입니다.

결국 기관장이 바뀌거나 부지사의 애틋한 마음이 작용해서 막차를 타고 승진하여 몇 년 근무하면 다음 급의 승진후보자에 오르기 전에 명퇴나 정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7급 때 열심히 일하고 6급이 되면 빡세게 근무해서 사무관이 되어야 했습니다. 1970~80년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최근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분위기가 전과는 크게 다르다고 합니다. 고시로 젊은 나이에 5급에 임용된 공무원들이 관리직을 차지하면서 비고시 9급 출신, 7급으로 시작한 공무원들이 들어설 틈새가 적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지방자치가 말 그대로 자치화되면서 늘공의 자리를 어공이 채우고 있습니다.

'늘공'이란 평생 공직자로 일하는 법대로 말해서 직업공무원입니다.

직업공무원제도에 대한 인터넷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넷글] 공직(公職)에 종사하는 것을 일생의 직업으로 생각하고, 이에 대하여 긍지를 갖도록 조직·운영되는 공무원 제도. 즉, 직업공무원제란 공무원으로 일단 임용되면 공직(公職)을 보람 있는 평생의 직업이라 생각하고 장기간 근무할 수 있도록 조직·운영되는 공무원 제도를 말한다.

따라서 직업공무원제는 공직에서 단순히 장기간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공직에 근무하는 것을 '보람 있는 평생의 일[직업]'(a worthwhile life work)로 생각하고 근무할 수 있게끔 여건이 마련된 제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이 공직을 명예롭고 보람 있는 평생의 직업으로 생각하고 근무하게 하려면

① 무엇보다도 먼저 공직에 긍지를 가지게끔 공무원이 선망의 대상으로서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② 공무원을 채용함에 있어서는 널리 응시의 문호를 개방하여 유능한 젊은이들을 확보하여야 하며,

③ 재직(在職) 때나 퇴직 후에도 생계(生計)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정한 보수(compensation)와 연금(pension)이 보장되어야 하며,

④ 개인의 업적과 성장에 따라 승진(昇進)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직업 공무원제 [職業公務員制, career civil service system]

이에 반해 '어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다 공무원'이라는 말이지요. 아마도 TV프로그램에서 '어쩌다 어른'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여기에서 만들어진 造語(조어)인듯 보입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슬기로운 감방생활에서 슬기로운 공무원 생활, 슬기로운 부부생활 등 파생어가 나온 것과 같다고 보입니다.

어공들은 그 유형이 일반 늘공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우선 2년간의 계약직으로 들어와서 총 5년을 근무하는 케이스가 있습니다. 공모를 통해 응모한 후보자의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 결정되면 계약직으로 채용됩니다. 통상 계약기간은 2년인데 최근에는 1년짜리도 있다고 합니다.

일단 2년 계약을 하면 1년간은 채용조건에 명시된 대로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서 일하게 됩니다. 다음 1년은 조금씩 갈등을 겪습니다.

채용 당시의 6급 차석과 5급 사무관이 부서이동을 하고 다른 6급, 5급이 와서 근무합니다. 이때부터 코드가 맞지 않습니다. 불편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새로 온 주사와 사무관에게 同和(동화)될 것인가, 자신의 역량과 경험을 바탕으로 컬러있는 계약직으로서 일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새로 온 6급, 5급의 취향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전문가로 들어와 1년만에 受命(수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2년 재계약을 위해 현실적인 處世(처세)를 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2년차에도 자신의 경험과 주관,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재계약을 포기하고 나름의 열정을 불태우고 2년이 되는 날에 책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경우 본인 스스로의 자존심을 높아질지 모르겠으나 업무의 질은 저하됩니다.

두 가지 경우를 보면 둘다 얻음과 손실이 있습니다. 현실에 맞춰서 새로 온 6급, 5급의 취향에 맞추다보니 전문가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스스로 현실에 손과 발을 묶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전문가를 채용했는데 전문가가 예산을 들여서 사회의 다른 전문가를 고용하고 그들의 업무를 관리하는 용역, 감리하는 격입니다.

자신의 전문성을 과하게 표출하여 주무과 계장과 마찰을 빚으면서 2년을 보내고 나면 성과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과보다는 갈등의 부스러기들만 캐비넷을 채우고 있습니다.

전산파일을 열어보아도 얻을 자료가 없습니다. 전투의 포탄 껍질은 즐비한데 戰功(전공)이나 얻어낸 성과물이 없습니다.

 

하지만 계약직이라는 자리를 시작한 어느 선각자 공무원의 노력으로 공직사회에 큰 변화의 물결이 들이닥친 것은 사실입니다. 과거의 공무원들은 그들만의 리그였습니다.

독일의 徒弟制度(도제제도)처럼 어느 과장의 휘하에서 10년을 근무하다 보면 과장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도 받아들입니다. 官僚主義(관료주의)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흔히 權威(권위)와 權威主義(권위주의)는 다르다 합니다. 권위는 말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실력과 경력, 판단력을 인정하는 것이고 권위주의는 자신이 그러하다고 강압적으로 주변에 알리고 강압하는 못된 습관을 말하는 것으로 풀어봅니다.

 

술좌석에서 자신의 주법에 틀린 신입을 직접 지도하지 않고 차석을 통해 가르치도록 하는 과장의 모습에서 우리는 권위주의를 봅니다.

관선시절 종무식을 마치고서 시군의 새해예산안 결재를 하면서 '내가 결재를 해야하나?'라며 으시대는 어느 도지사의 모습에서 권위주의를 부리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서류결재를 오전에는 못 한다 하고 시간 정해놓고 결재를 해주는, 정말로 누구를 위해서 결재를 해주던 그 간부들이 권위주의의 최고봉이라 할 것입니다.

 

결재는 간부, 책임자의 기본적인 임무입니다. 결재하라고 그 자리에 올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임금님이 술한잔 내리듯이 싸인펜의 은총을 베풀듯 결재하는 어깨에 힘을 주던 권위주의 대빵 간부님들이 많았음을 성성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광주군수 현직시절에 부서를 돌아다니면서 결재를 하신 조한유 총장님을 칭찬합니다. 화성시 비봉면 출신 고향 선배, 공직 선배이십니다.

계약직 공무원은 그 분야에 권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권위주의에 찬 공무원들이 전문가가 우리부서에서 역량을 발휘하도록 응원하지 못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행정을 펼치도록 권위주의를 행사한 것은 아닐까 반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모르는 일을 우리 부서에서 할 수 없다는 꼭 막힌 행정가가 더이상 우리조직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국장도 과장도 자신이 모르면 신입 9급이든 계약직 공무원이든 민원인에게서조차 배우겠다는 초심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히려 그런 자세가 權威(권위)스러운 자세일 것입니다. 내가 제일 잘나간다는 유행가 가사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배우고 익힌 후 이를 행정에 반영하겠다는 스폰지형 관리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어공의 또 다른 유형은 기관장 직속으로 들어온 경우입니다. 기관장이 당선되면 가장 먼저 들어서는 점령군 같은 인사는 바로 비서실입니다. 비서 요원은 公採(공채)가 아니라 特採(특채)입니다. 자격요건이 되고 신원조회에 통과하면 기관장의 결재로 임용됩니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은 곧바로 작동됩니다.

 

단체장 당선 후 1개월간의 인수위 활동을 통해 비서실, 정책실 등이 자리를 잡습니다. 기관장이 취임하면 어공을 채용하기 시작합니다. 20여년 전 어공 채용이 시작될 때 경기도청에서도 5급 자리를 어공이 가져가서 한동안 승진적체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1996년 11월에 6급에서 5급에 승진하였는데 이때만 해도 어공 인원, 특히 단체장이 외부인사를 채용하는 특채가 적어서 늘공들이 승진에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몇 년이 지나서 계약직 어공이 늘면서 5급자리를 잠식했다 들었습니다.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우니 어느 변호사의 방식을 빌려서 ‘그랬었다고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급자리를 어공이 차지하므로 직업공무원 6급이 5급에 승진할 기회가 줄었고 그 여파는 이들 공무원 평생의 여정에 불편하고 억울하여 근무의욕을 다운시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들어온 어공들이 자신의 업무에서 최선을 다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한 모습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늘공을 불편하게 하는 모양새만 부각되었고 실제로도 어공의 不協和音(불협화음)은 到處(도처)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솔직히 늘공끼리 일해도 충돌과 갈등이 발생하는 법인데 화남금녀(화성에서 온 男子(남자) 금성에서 온 女子(여자))까지는 아니어도 고졸, 대졸후 20대에 들어와 40이된 공무원 늘공과 사회생활, 정치활동, 정치인과의 선거전을 뛰놀던 어공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코끼리가 냉장고에 들어가기보다 어렵고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보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어공 간부는 우리부서의 예산 전체를 이분이 마음대로 집행해도 되는 듯 아십니다. 우리 예산 속에는 급여, 수당, 여비, 수용비가 있고 시군이나 단체와 추진하는 사업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업무추진비용과 정보성 경비는 미미합니다. 전체예산이 100억이라면 간부가 맘대로 쓸 수 있는 비용은 8천만원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 8천만원을 12개월 365일동안 법인카드로 쓰게 되는데 쓰는 시기, 상대, 금액도 규제가 크고 1회에 50만원을 넘는 식비는 그 계획을 사전에 결재받아야 하고 그런 식사를 할 이유를 소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체예산을 원하는 바대로 쓰고 싶어하는 어공 간부를 모시는(!) 늘공의 마음은 숯가마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사 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늘공의 입장에서 어공의 주문이 나오는 대로 거부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늘공으로서 지나친 경직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공의 주장이 열흘 삶은 호박에 이빨이 안 들어가는 상황인 듯 보였는데 어느 순간에 어공이 그 호박을 자근자근 씹어주고 있습니다. 표현이 과했다면 사과를 드립니다.

예산뿐 아니라 업무방식에서 늘공의 전통적인 관행이나 관례답습이 어공의 개혁과 破格(파격)에 공감을 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늘공이 부족한 부분을 어공이 채워주고 어공들도 더러 가끔은 늘공과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어공의 협상력은 늘공 역량의 5배가 넘을 것입니다. 정치판에서 20년 돌아다닌 경력이라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경우 협상하고 거래를 하였겠습니까. 그러니 고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는 늘공을 이해시키는 것은 식은 죽일 것입니다.

뜨거운 죽도 이리저리 저어가면서 잘 먹을 수 있는 어공들의 역량을 생각해 보면 늘공들의 비판이나 협상력은 가히 鳥足之血(조족지혈)이었습니다. 늘공이 상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음을 늘공들은 뒤늦게 알았던 것입니다.

 

둔한 늘공은 퇴직 3년이 지나서야 10년전 어공들의 행태와 업무처리가 왜 그리 되었는가를 알았을 것입니다. 정말로 퇴직후 세상을 살아보니 어공과 늘공의 차이를 더더욱 크게 절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공이 기관장의 라인인 것을 인식한 늘공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 연줄을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늘공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어공들은 참으로 쉽게 처리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놀랐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행정개선이라는 타이틀로 출발한 글의 목표는 행정서식의 개선 중 하나를 제시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공직 퇴직후에 인사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위원회를 마치면 의결서에 서명을 합니다.

 

위원회에 참석했다는 서명부는 이름과 서명자리를 서식으로 그려서 제시하므로 빈 칸에 싸인을 합니다. 그리고 의결서는 의결내용, 의결일시 다음에 위원의 이름을 적어줍니다.

그런데 그 이름 다음에 (서명)이라는 워드프로세서 글씨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는 홍길동 ㊞이라고 작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기차표에 적힌 내 자리에 옆손님이 핸드백을 올린 격입니다. 자리는 있는데 비집고 들어가 앉지 못하는 형상입니다. 공연장에서 보니 10분 일찍 오신 사모님들이 자리를 잡고 옆자리에 핸드백과 외투를 걸쳐놓고 핸드폰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공연시각에 임박하여 젊은 부부가 와서 인사를 하면서 자리에 앉으려하자 그제서야 자신의 물건을 치웁니다. 그리되면 공연내내 옆자리 손님은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깔끔한 매너로 앉아있었다면 옆좌석 손님과 눈인사를 나누고 깊은 인연으로 옆자리에 앉게 됨을 마음에 새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경기아트센터에 가는 경우 아내는 지인을 초청합니다. 밖에서 바쁘게 다른 손님을 안내한 아내는 공연 시각에 임박하여 옆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니 다른 옆자리에 앉으신 모르는 분이 아내의 친구이거나 지인이거나 초청한 분입니다. 그래서 늘 옆자리 관객에게는 작지만 친절한 예의를 표하곤 합니다. 그것이 공연부부의 새로운 에티켓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면 공연 리뷰를 인터넷에 올립니다. SNS에도 올려봅니다. 페이스북의 경우 ‘좋아요’를 눌러주는 이가 10명 내외이지만 나중에 누군가를 만나면 페북을 통해서 잘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눈으로만 보고 지나가는 눈팅족이 그리도 많은가 봅니다.

 

다시 書式(서식)개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서명해야 할 자리에 [서명]이나 ㊞자가 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옆에 서명을 하면 [서명]과 ㊞의 워딩위에 싸인글씨가 겹치므로 서명자로서는 개운한 맛이 없습니다.

공직자로서 싸인은 자존심입니다. 초임시절 팀장님, 과장님이 싸인펜으로 문장 몇 곳을 툭툭 체크를 한 후에 결재칸에 시원하게 휘갈기는 모습을 보면서 훗날 그런 시대가 도래하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공직의 꽃이라는 사무관이 되어서 萬年筆(만년필)까지 준비해서 결재를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즈음에 행정의 전산화가 가속기를 밟고 있었습니다. 6급때 예산편성을 주전산기에 넣고 퇴근하면서 찜찜해 하시던 선임 차석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서류로 작성하여 자신의 캐비넷에 넣고 잠근 후 퇴근하다가 술 한잔 함께하던 선임이었습니다.

이분의 하루 작업자료가 전산에 들어가서 어딘지도 모르는 3층의 어느 창고안 전산기기안에 들어있다는 것이 많이 불편해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컴퓨터 모티더로 자료를 열면서 밤새 누군가가 와서 그 내용을 다 빼간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도 있었습니다. 전산실도 늘공이었지만 그 이전의 늘공 입장에서는 전산파트는 어공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이후에 전산실은 예산프로그램 뿐 아니라 일반문서 결재에도 전산화를 결행하였습니다. 실무자가 전산으로 올린 기안문에 마우스로 결재를 하라는 것입니다. 싸인펜으로 휙휙 수정하고 결재하시던 과장님들은 도무지 오토바이를 타다가 자전거로 갈아탄 기분입니다.

부릉부릉 달리던 오도바이를 세우고 자전거를 타고 휘청거리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결재가 신명나는 업무가 아니라 마음대로 수정이 되지 않고 절차도 까다로운 불편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언제 기안문이 올라왔는가도 어렵고 불쑥 실무자가 계장에게 결재하라 퉁명스럽게 말하니 과거 권위는 사라지고 오히려 실무자의 역 권위주의가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기안문 수정도 쉽지 않았고 수정을 해도 원문에 표기되는 것이 아니라 결재자 의견란에 긴 문장으로 작성해야 했습니다. 평생 타자는 타자수가 치는 것이고 과장은 싸인펜으로 북북 긋고 결재를 하면 되는 줄만 알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싸인펜, 만년필 결재의 시대는 지나가고 마우스 결재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도지사님은 컴퓨터 결재가 미덥지 않으므로 부지사 결재가 난 문서를 출력해서 전처럼 서면으로 결재를 했습니다. 도지사 결재가 나면 비서실에 들고 가 담당자에게 보이면 도지사 대신에 마우스로 크릭해서 결재문서가 전산에 보관되도록 했습니다.

 

문서를 줄이기 위해 전산화를 추진했지만 한 동안은 오히려 전자문서와 일반 종이 문서를 이중적으로 생산하고 각각 보관해야 하는 비능율의 시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컴퓨터, 키보드, 마우스, SNS시대를 이해하는 기관장이 들어서면서 이중적인 문서작성을 줄었지만 2022년 오늘날에도 종이문서 보고는 줄지 않은 듯 보입니다.

 

문서 이야기로 들어서니 1984년 쪽지보고가 생각납니다. 필자의 기고문집을 集大成(집대성)한 수필집 '군자불기 대기만성', '금의야행 조삼모사' 제목을 써주신 石齊(석제) 임동빈 선배님이 내무국 서무과 서무계에 근무하셨고 필자는 내무국 새마을지도과에 서무담당으로 일했습니다.

당시 내무국에는 서무과, 새마을지도과, 세정과, 회계과 등 4과가 있습니다. 행정의 안살림을 추진하는 부서가 대부분인데 1972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내무부서 담당하게 되므로 도청에서도 새마을업무를 내무국에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청와대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내무부장관은 지금의 경찰청 업무도 관장하는 바이므로 집안의 아내를 내무부장관이라 부를 법도 하다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권력기관이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내무국의 유일한 사업부서가 새마을지도과였습니다.

그런데 1984년 당시에 기획관리실이 있었지만 쪽찌보고라는 제도는 내무국 서무과 서무계가 담당하였고 그 주무관이 바로 임동빈 주사였던 것입니다.

 

이분은 매일 오후 4시가 되면 전화를 걸어와서 오늘의 '때꺼리'를 달라 하십니다. 이런 보고서는 기획관리실에서 담당함이 타당해 보입니다만, 지금 생각해도 그러합니다만 전임, 전전임 내무국장이 하겠다고 일을 맏아 온 것일까 思料(사료 = 깊이 생각되어 헤아려지다. )됩니다.

당시에는 기획조정실장과 내무국장이 도지사 수행비서를 자기 사람으로 집어 넣어서 정보를 관리하려 했던 경쟁의 시대였기에 하는 말입니다. 당시에 도지사님들은 고향 후배를 비서로 쓰거나 경기도청 국장 재직시에 주무차석을 했던 분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하기도 했거든요.

 

도청 전체직원의 불편한 유명세를 탄 "쪽찌보고"는 대략 15장 정도의 도정관련 보고자료를 엽서크기 종이에 타자를 해서 상좌철로 묶은 후 아첨지를 붙여서 비서실에 올렸습니다.

여기에서 阿諂(아첨)의 사전풀이를 보면 ‘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알랑거림, 또는 그런 말이나 짓’이랍니다. 아첨지는 색지에 양면 테잎을 바른 후 좌상귀 귀퉁이의 호치키스 철핀을 감싸는 것을 말합니다.

호치키스를 찍은 후 플라스틱 자를 철핀위에 올리고 작은 망치로 통통 쳐서 철핀이 구불어진 부분, 돌출 부분이 종이속으로 들어가도록 한 후에 아첨지를 붙였습니다.

 

이 서류를 만지시다가 간부나 도지사님이 손을 베이면 큰 불경이라 생각하다가 만들어진 '레드테잎'이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繁文縟禮(번문욕례)라고 한답니다.

레드테잎(red tape)은 사전에서 미국식, 영국식으로 ‘못마땅함’이라 하고 ‘관공서의 불필요한 요식’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만들어지는 보고자료는 아침에 하루 일과를 시작하면서 저녁에 마무리, 퇴근할 때까지 서무담당 공무원들에게는 아주 큰 과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대로 내무국의 사업부서는 새마을지도과 하나이고 그 과의 서무담당으로서는 국 전체의 보고서를 책임지는 입장이었습니다.

다른 실국이나 과에서는 상시 큰 사업이 진행중이므로 그중에 한두개 현안을 간략히 작성해도 도지사와 회의에 참석한 간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가 지금 큰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무국 서무과는 서무과장조차 추진하는 사업이 거의 없었고 도지사 일정, 부지사 저녁식사를 챙기는 관리형 과장이었습니다. 세정과는 세금이 잘 들어온다고 분기에 한 번 보고하면 끝입니다. 세정과는 세금 잘 들어오면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도지사로서는 예산에 편성된 내용을 집행하면 되는 것이고 당시에는 세금은 그냥 ‘자연뻥’으로 들어오는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세금을 잘 들어왔고 부족함 없이 예산을 집행하던 시대입니다.

돈이 모자라면 어김없이 내무부에서 교부세를 보내주었습니다. 정말로 돈이 부족하면 도유지 땅을 조금 팔기도 했습니다.

회계과는 그 예산을 집행하는 부서이니 과장 전결이고 한 달에 한번 국장에게 집행상황을 보고하면 끝입니다. 내무국에서 도지사가 관심을 가질만한 보고자료는 오직 새마을지도과에서만 나올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른바 '때꺼리'를 채우기 위해 8급 서무담당은 여러가지 전략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에서 온 문서를 가져다가 대충대략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한 후 주무 6급을 패싱하고 5급 사무관 계장님에게 이렇게 도지사에게 報告(보고)하다고 보고합니다.

자료를 달라해도 주지 않던 6급은 5급 계장으로부터 이를 도지사께 보고한다고 하자 화들짝 놀라면서 검토를 시작합니다. 1시간 토론 후에 내준 보고서 초안을 바탕으로 타자 작성을 합니다. 9급때 학원을 다녀서 타자실력을 갖춘 바이므로 손 빠르게 작성하여 보여드립니다.

 

그러면 수정이 나옵니다. 간단한 것은 흰색 메뉴큐어를 발라서 수정하지만 문장이 수정되는 경우에는 재타자하는 것이 빠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작성한 도지사 보고용 쪽찌 5장을 만들면 퇴근길이 가볍습니다. 과장님 보고를 득한 후에 서무과 임동빈 주무 차석에게 전합니다.

 

 

그렇게나 반색을 하십니다. 임동빈 주무차석님은 ‘리액션 甲(갑)’입니다. 그렇게나 고마워하십니다. 늘 웃는 모습의 임동빈 선생님는 이강석의 기고문집 두 권에 대한 제목을 써주신 그해에 타계하셨습니다. 본인 스스로는 "밀물처럼 썰물처럼"이라는 수필집을 발행하시고 한권을 우편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쪽지보고 행정은 2년간 지속했고 7급에 승진하여 세정과로 가서 답답한 업무를 2년간 보던 중에 공보실 스카우트를 받습니다. 1988년이니 31살때입니다. 7급 2년차에 공보실 언론계로 가보니 행정의 세상이 달랐습니다.

 

이전까지는 한 발짝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행정시스템에서 일했었는데 공보실에서 일을 시작해보니 결재라는 것이 없습니다. 마음대로 자료 얻어서 신명나게 쓰고 기자실에 배포하면 석간신문에 기사가 나는 것입니다.

전날의 도지사 행사사진을 들고 비싼 택시비를 부담하면서 경인일보, 경기일보 본사 사무실 편집국 정치부에 전하면 오후 3시경 석간신문에 떡하니 사진이 나오고 기사문도 3단, 4단기사로 나옵니다.

분기행정을 하던 세정과에 비하면 일일행정, 오전과 오후행정을 펼치는 공보실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한달내내 계산기를 두드려서 집계하여 한장의 세외수입 보고서를 만들면 여기에 지방세 세목별 수입액을 합쳐서 행안부에 보고하면 끝이었던 단순하고 매몰된 듯 느껴지는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그러다가 부서을 옮겨와서 종이 한 장, 사진 한 장이 온누리에 펴지는 들불처럼 정보로 기사로 번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공보부서에서 일하는 것은 가히 희열스러운 일이라 자평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업무의 가치가 높았고 음식점으로 말하면 기대치가 높았으며 투입대비 산출의 결과는 어머어마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흔히 쓰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여기에 적정하게 쓰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효율성이 높다는 평범한 표현 말고 다른 말이 있을 것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단어를 구상해보던 중 '가성비'라는 말이 드디어 떠올랐습니다. 시인이 단어 하나를 위해 하룻밤을 새웠다고 합니다. 시인 아닌 것이 다행입니다. 이렇게 단어 하나를 생각해 내는 과정조차 글이 되고 문장으로 지면을 차지할 수 있는 수필이 나은 편인듯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수필집을 누가 나에게 쓰라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2015년 1월1일 오산시청에 근무할 당시에 독산성 세마대에서 새해맞이 행사를 하던 중에 별다른 소원이 없고 가족건강을 기원한다 하니 부처님이거나 보살이거나 스스로 자신이거나 누군가가 매일아침 108배를 올리는 것이 좋겠다는 다짐을 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못한다고 사양하다가 어느 순간에 그리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는데 마침 이날 새벽에 집에서 108배를 올리고 6시에 독산성 세마대에 올랐으니 오늘치는 이미 절을 올렸고 내일부터 절을 108번 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된다는 안도감에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고 이제 2022년, 매일아침 108배 올리기 8년차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키지도 않은 108배를 매일 아침 올리듯이 매일매일 시간을 내서 수필인가 글인가, 그냥 일상의 생각을 모으고 쌓아서 한페이지, 두페이지를 채우고 있고 어느 순간에 화두같은 단어가 잡히면 거기에 거미줄을 매고 잡아당겨서 생각의 끈을 꾸준히 길게 이어가는 중입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머릿속을 맴도는 사념의 담배 연기이고 이를 봉지에 끌어모은 후 濃縮(농축)하여 한쪽으로 구멍을 내고 진득한 액체를 잡아당기면 글이 되고 문장으로 줄줄 나오는 것입니다.

가래떡같이 나오기도 하고 거미의 팔각형 몸통에서 액체에서 고체로, 비단실로 나오는 거미줄과도 같다 하겠습니다.

거미줄을 5겹 당기면 음악의 오선지가 되고 이를 다시 굵게 모으고 겹치면 원고지 붉은 칸을 한 칸, 두 칸 채워서 200자를 올리고 다시 10장을 달성하면 1,000자 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듭하면 원고지 780매, 14만자 분량 270쪽 내외의 수필집이 완성됩니다.

그동안 대략 1개월에 한 권을 채웠습니다. 지금 38권에 도전하는 중이고 내년 2023년에 65세가 되고 5년후 70 古稀(고희)에 이를 즈음에 50권에 이르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에는 70세 청춘이라고도 하니 최선을 다해서 마음속 생각을 아침 이슬처럼 잃어버리지 않고 저녁 노을 안개처럼 한 폭의 그림으로 정제시키고자 합니다.

척박한 황무지에 뿌리를 내리고 땅심이 부족하면 공기중의 窒素(질소)를 잡아다가 영양소를 만드는 콩 종류의 뿌리에 기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의 역할처럼 텅 빈 머리속의 생각을 하나 둘, 한 단어, 두 문장을 모아가는 노년의 精勵(정려=힘을 다하여 부지런히 노력함)를 보이고자 합니다.

다음으로 살면서 개선해야 할 이야기는 소금 이야기입니다. 황금, 소금보다 소중한 것이 지금이라고 합니다. 차마고도의 말과 나귀의 등짐에는 황토가 섞인 소금도 있습니다. 가축들은 적당량의 소금을 먹어야 생존할 수 있답니다.

 

어느 지역에는 큰 호수가 소금 바다입니다. 걸어가서 얼음덩어리처럼 응고된 소금 덩어리를 망치로 깨서 자루에 담아 나귀의 등짐으로 가져가서 팔면 돈이 됩니다.

가져간 소금보다 더 무거운 곡식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나라에서 소금을 관리했다고 합니다. 바다에서 먼 곳에 소금을 전하는 물류기능이 빈곤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내륙의 중심지인 안동에는 간고등어가 유명합니다. 안동시 언덕에서 살짝 발효되기 직전의 고등어 구석구석에 소금을 뿌리는 사람을 간재미라고 부릅니다. 그냥 슬슬 소금을 뿌리는 것 같아도 전문가 간재미의 고등어와 초보자의 간고등어의 품질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고등어의 아가미, 몸통 등 적절한 곳에 적정량의 소금을 던지듯 부려야 제대로 숙성이 되고 상품이 깔끔하며 맛나게 보존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안동 간고등어에 대한 이야기를 빌려왔습니다.

 

[경북 안동에서 유래된 염장 처리한 고등어]

안동 간고등어는 동해안 영덕항에서 잡힌 고등어를 소금에 절여 내륙에 위치한 안동으로 가져와 먹던 데서 유래한다. 예전에 보부상(褓負商)들이 영덕 강구항에서 안동까지 고등어를 운반하는 데 이틀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유독 쉽게 부패하는 생선인 고등어를 제대로 운반하기에는 적합치 않았다.

이에 상인들은 고등어가 이 시간 동안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소금을 쳤는데, 안동에서 반나절 거리인 임동 챗거리 장터에서 쳤다고 한다. 챗거리장터에 이르면 고등어가 얼추 상하기 직전이 되는데, 이때 소금 간을 하면 가장 맛있는 간고등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금을 친 고등어를 안동까지 가져왔는데 이것이 안동 간고등어의 유래가 되었다.

안동 간고등어는 먼저 간잽이(염장처리하는 사람)가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낸 고등어를 수 차례에 걸쳐 깨끗이 씻은 뒤 소금물에 넣는 습식 염장(濕式 鹽藏)을 한다. 이는 살은 물론 뼛속까지 간이 배어들도록 하는 것으로, 이 단계가 끝나면 마른 소금을 치는 건식(乾式) 염장이 이뤄진다. 소금을 얼마나 골고루 뿌려주느냐에 따라 고등어 맛이 달라질 만큼 이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동 간고등어 (시사상식사전)

서양의 도넛츠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서 동그란 환 모양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반죽을 해서 우리의 찐빵처럼 둥글게 만들어서 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둥근 도넛츠의 가운데 부분이 제대로 익지 않아서 품질이 떨어지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 우연히 제빵사가 가운데를 눌러서 구멍을 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環(환) 모양의 도넛을 기름에 튀기니 전체가 고르게 익고 타지 않아서 좋은 제품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양의 치즈도 깜빡하고 우유를 방치했는데 그 우유통 안에 응결된 내용물이 적정하게 발효되어서 치즈로 변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장기 저장이 가능하고 새로운 영양을 제공하는 가치있는 醱酵(발효)식품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미식가들이 즐기는 홍어도 역시 방치되었다가 발견해보니 그 냄새가 심했지만 이를 어찌하다보니 熟成(숙성), 발효된 홍어의 특별한 맛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수많은 시식과 식사를 통해서 홍어+신김치+막걸리가 어울리는 것을 알았고 이를 홍탁, 三合(삼합)이라 작명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김치등 발효음식 역시 유사한 과정을 통해서 익숙해진 것이고 이제는 과학적으로 김치의 효능을 알게 된 것입니다. 된장이 그러하고 술의 발효 효소인 누룩 역시 그러합니다.

된장은 메주콩으로 만든 발효식품이고 누룩은 통밀을 갈아서 쑥과함께 발효시키면 누룩곰팡이가 피어나고 그 누룩을 꼬두밥(쌀밥, 수수밥 등)과 섞어서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면 발효되어서 알콜이 만들어지며 이 술을 더 숙성시키면 식초가 되는 것도 확인된 바입니다.

엿은 감주, 食醯(식혜)를 명주보자기로 짜낸 국물을 조리고 다리면 걸쭉한 조청이 되고 이를 조청 항아리에 조금 퍼담고 남은 재료를 더 졸인 후에 통깨를 넣고 저은 후에 종이위에 콩가루를 펼친후에 넓게 퍼서 굳히면 엿이 됩니다.

엿을 퍼낸 가마솥에 물을 한 바가지 붓고 다시 졸이다가 볶은 땅콩을 넣으면 땅콩강정이 되고 볶은 콩을 넣어도 좋고 쌀을 튀겨낸 튀밥을 넣어서 휘저은 후 얇게 펴서 썰어내면 강정이 됩니다.

닭고기를 잘게 썰어 튀긴 후에 양념해서 퍼담으면 닭강정이라 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 하겠습니다.

우리의 친근한 음식들은 조상 대대로 오랜 전통과 경험, 시행착오를 반복한 후에 이룩된 민간신앙과도 같은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전통을 존중하고 이어가려는 노력이 중요함을 크게 강조하는 바입니다.

동동주를 긴 시간 묶히면 식초가 되고 막걸리를 차분하게 담아두면 윗부분에 藥酒(약주)가 모입니다. 그리고 유효기간이 경과한 막걸리는 소주를 내립니다. 증류의 과정을 통해서 먹는 알콜성분을 걸러내는 과정입니다.

시큼한 막걸리나 걸러내기 전의 술독을 큰 가마솥에 넣고 약한 불을 지펴줍니다. 깔끔하게 씻은 솥뚜껑을 반대로 뒤집이서 솥위에 올리고 차가운 물을 부어줍니다.

가마솥 막걸리 호수가운데에 무거운 오지그릇을 넣어두었습니다. 깔끔하게 세척한 오지그릇 빈 자리는 맑고 투명한 소주가 모여듭니다.

약한 불은 막걸리속의 알콜성분을 증류시키고 기체상태의 알콜은 솥뚜껑에 닿아서 이슬처럼 방울방울 맺히게 됩니다.

솥뚜껑 위에 찬물을 붓고 다시 갈아주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미열에 증류된 알콜성분이 물방울이 되었다가 솥뚜껑을 타고 손잡이를 거쳐서 오지그릇 안에 모이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1시간 정도 반복하면 오지그릇 안에는 2홉 소주 4병 이상의 소주성분을 많이 머금은 술이 담겨있습니다. 이를 유리병에 담아내면 더 장기간 두고 마실 수 있는 가정식 소주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불조절과 솥뚜껑위 물의 냉기관리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에 시골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얼음을 구하지 못하여 찬물을 쓴 것으로 보이고, 요즘 농촌에서 막걸리로 소주를 내린다면 찬물에 더하여 얼음덩어리를 솥단지 위에 넣으면 소주 생산성이 높아질 것이라 봅니다.

이런 원리를 이용하여 안동소주, 홍도소주가 만들어지는 줄 압니다. 이처럼 곡식으로 만드는 술은 화학주에 비하여 맛도 좋고 인체에도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화학주는 강제를 취하게 만드는 대신에 곡주는 취하기는 하되 인체에도 이로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음주를 권하는 것은 아니고 적정량의 음주는 순환기에, 소화계통에 도움을 준다는 생각을 하지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과음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세월을 지내놓고 보니 확연하게 깨닫게 됩니다.

이제 개선점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더 많은 개선점이 보이겠습니다만 이미 수많은 사람이 시행착오를 거쳐서 이룩한 절차인 것이니 한사람의 생각으로 바꾸겠다 덤비는 것은 하룻강아지이고 개미가 느티나무를 흔드는 격이 될 것입니다.

螳螂拒轍(당랑거철), 사마귀가 마차의 바퀴를 가로막는 형상을 보이는 것은 과도한 행동이고 살아보니 세상사는 돌아가는 대로 따르는 것이 순리라 봅니다.

아내는 횡단보도에 서면 반드시 화살표 방향에 서라 합니다. 전에 어느 노인께서 교통안내를 하면서 붉은 경광봉을 들고 화살표 방향으로 서라 지휘를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우측통행을 하면 개운합니다. 하지만 넓은 횡단보도에서조차 우측통행을 강조하는 것은 과하다고 봅니다. 좁은 복도, 하천변 산책로에서는 우측통행을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은 직각 보행을 하고 식당에서도 숟가락이 눈높이로 올라와서 수평으로 입에 음식을 넣었다고 합니다. 과연 필요한 과정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군대 이야기중 남자 병사들이 웃통 벗고 축구한 이야기가 여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목이라더니 2002 월드컵, 카타르 월트컵의 영광으로 여성팬이 더 많이 늘어서 이제는 남성보다 여성들이 축구를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손흥민 출국장에도 여성팬들이 많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병사, 장교들의 윗옷을 허리춤 벨트안에 넣고 1948년부터 대략 2000년까지 근무했다고 봅니다. 어느 멋쟁이 장교님이 자꾸 밖으로 빠져나오는 윗옷을 아예 밖으로 빼도록 규정을 바꾼 듯 보입니다.

전에 방위로 근무하면서 日朝點呼(일조점호)에 참여하고 10개월차 고참으로서 點呼(점호)를 주관한 바 있습니다.

당시 중학교 동창 송석재군이 매일 발간 내복을 방위복 안쪽에 입고 나타나서 선임 방위 소대장으로서 엄동설한에 그 자리에서 목에 비치는 빨강 내복을 벗도록 지시를 내린 바가 있습니다.

중학교 동창간에 미안한 일이지만 수 차례 여러 번 개선지시에 불응하므로 내린 특단의 조치였습니다.

방위조직도 位階(위계)가 있는 터라 송석재 동창은 그 자리에서 과감하게 탈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억해보니 이규주 결혼식 사회에 이어 송석재 결혼식에서도 사회를 보았습니다. 기억은 가물한데 집에있는 자료집에 악필로 쓴 송석재 결혼식 사회 시나리오가 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이지만 사업하며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으니 고마운 일이고 같은 나이 64세에도 성성하고 멋지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첫번 결혼식 사회의 신랑 이규주는 지금도 수원에 살면서 가끔 연락이 되는 초중고, 공무원 동창생입니다.

공직자로서 경기도청에 9급으로 전입되었습니다. 화성군 팔탄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중에 경기도청 전입시험에 합격했고 합격 10개월여만에 화성시 태안읍 소재 경기도농민교육원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 8급으로 근무하다가 1984년에 새마을지도과 서무담당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가보니 권위주의, 엽관제, 레드테잎, 번문욕례, 생고시용 등 공직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도대체 각 계의 선임 6급에게 次官(차관)이라는 호칭을 합니다. 長官(장관) 다음으로 계급이 높은 분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내무부 차관보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경기도청 안에서 6급을 차관이라 부르던 시절에 서무과 차석과 7급이 행안부 출장을 갔습니다. 업무를 마치고 11시50분경에 1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점심시간이어서 인원이 점점 늘어나서 자리가 좁아졌습니다.

이때 평소대로 7급이 말했습니다.

“차관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엘리베이터가 인원이 늘어 좁아지자 자신의 쪽은 조금 여유가 있다며 7급이 한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좁은 엘리베이터 안의 중앙청사 공무원들이 오히려 자기들 편으로 움직여서 도청 차석의 공간을 넓혀주었다 합니다.

아마도 엘리베이터 안의 공무원들은 틀도 좋고 머리도 약간 벗겨진 분으로 보아서 중앙부처의 어느 次官(차관)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기도청 6급 차석은 13~1층 엘리베이터 차관이 되었습니다. 내려서 전철을 타고 수원역으로 돌아왔답니다.

어느 분이 전한 이야기인가는 몰라도 장관 다음 차관이 된 경기도 6급 차관은 훗날 구청장을 하시고 공기관에서 시민을 위해 여러 가지 행정업무를 하신 줄 압니다.

이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리자 경기도청에서 문화관광국장을 하신 행정고시 출신 이인재 전 파주시장님이 답을 주셨습니다.

비슷한 일들이 많았어요. 중앙부처에서 전화 왔는데 "지금 차관님 안 계십니다"라고 해서 중앙부처 공무원 기겁^^

이런 에피소드가 나왔던 시절에 경기도정은 ‘차관행정’이라 했습니다. 당대에 지방행정주사 아래의 ‘지방행정주사보’가 행정을 이끌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 임**, 이**, 홍**, 박**, 김**, 민**, 방**, 백**, 곽**

주사보가 앞장서고 주사는 지휘하는 체계였습니다. 사무관은 검정색 의자안에서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국비사무관 과장은 군수 영감 되는 날을 기다리는 입장이어서 위선의 동향에 관심이 높았습니다.

업무적으로 날리는 7급 주사보들은 자신의 업무가 가장 중요하므로 오늘당장 처리하라 서둘렀습니다. 어쩌다가 부지사가 행안부 회의에 다녀오면 오후 5시부터 행정계 차석(차관)은 난리가 납니다.

중앙에서 받아온 회의서류를 경기도에 맞게 다시 작성해서 다음날 오전에 시장군수 회의를 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나 숨차게 회의를 열어야 했는가는 지금도 공감하지 못합니다.

다시말해 중앙에서 긴급한 일을 포함해서 지침을 전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겠지만 바로 다음 날 전달해야 할 정도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在下者有口無言(재하자유구무언)’의 시대입니다.

재하자유구무언在下者有口無言 [한자 뜻과 음] 있을 재, 아래 하, 놈 자, 있을 유, 입 구, 없을 무, 말씀 언. [풀이] 아랫사람은 그저 할 말도 못 하고 지냄.

下馬碑(하마비)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야 하는 것처럼 지방과 행정계에서 시키는 일이면 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합니다. 다음번에 우리가 시군작업을 하거나 회의를 할 때 행정계장님의 협조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행정계에서 추진하는 일에 소홀하다가 주사보나 차석에서 찍히면 다음번 시군과의 회의, 작업소집 공문에 행정계장님 협조 싸인을 받을 때 옆에서 거부하여야 한다는 말 한마디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행정계, 인사계, 기획계, 확인평가계, 예산계 등에서는 유사한 갑질급의 업무추진력을 발휘한 바가 있고 대부분의 부서에서는 이들의 권력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살았습니다. 태생이 하인인 것을 원망하지 않았던 朝鮮時代(조선시대) 계급사회와도 같았습니다.

실제로 당시에 시군 팀장 회의 소집, 시군 실무자 작업지시 공문서에는 반드시 행정계장님 싸인이 있어야 문서계에서 공문을 시군에 보내주었습니다. 요즘 공무원들은 참으로 편하게 일한다 생각하세요.

회의, 문서, 보고. 출장 등에는 참으로 많은 통제기능이 있었습니다. 지금 말한 대로 회의는 행정계 통제이고 문서는 문서계 통제를 받았으며 출장은 확인평가계의 검열 도장이 있어야 가능했습니다.

觀察制(관찰제)라고 1978년경 손재식 지사님때 지금 지방행정동우회 회장이시고 경기도 행정2부지사를 하신 권두현 주사가 만드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에도 가끔 동우회 사무실을 방문합니다.

지인을 장안문 인근에 내려드리고 동우회에 가서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했지지만 권두현 회장님께서 점심값을 선불하셨다 합니다. 감사히 점심을 먹었고 다음에 제가 점심을 사겠다 말씀 드렸습니다.

권두현 부지사님이 실무자 때에 만드신 이 제도는 공무원이 자신의 업무뿐 아니라 출장 중에 발견한 개선이 필요한 사항을 적어서 확인평가계에 제출하고 이를 관리하고 끝까지 추적 처리하는 시스템입니다.

출장명령을 받아 다녀온 공무원들이 이 관찰제를 제출하지 않으면 다음번 출장명령시에 制裁(제재)를 받습니다. 그래서 당시 공무원들은 간판불량, 프랑카드 늘어짐 등 형식적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적어서 제출했습니다.

이외에도 행정조직 스스로에서 규제하고 통제하는 제도와 절차는 참으로 많았습니다. 대략 1988년까지 출근부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사무실에 가면 현관에 과별로 출근했다는 서명을 하는 카드가 놓여있습니다.

출장명령을 받은 경우에는 미리 출근날짜에 출장이라는 고무인을 찍어둡니다. 年暇(연가) 도장도 있고 외출도 있습니다.

공무원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수단입니다. 아침 9시가 되면 서무과 담당자는 출근부를 회수하러 가고 이시각에 도착한 직원들은 출근부에 싸인하려 하고 서무계 직원은 지각이라며 출근부를 빼앗으려 합니다.

같은 회사 같은 직원끼리 볼썽사나운 행태였습니다. 공무원이 출근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고 이제와서 보니 엄청난 권력이었습니다. 이제는 출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게으른 공무원들은 늦게 출근하여 이런 실갱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출근부가 사라졌습니다. 당대로서는 엄청난 혁신이었습니다. 서무계 직원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택시에서 핸들을 치우는 것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출근부 없이 어찌 복무통제를 할 수 있을까 걱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출근부 없는 경기도청, 수원시청, 화성시청, 동두천시청, 오산시청, 남양주시청이 잘 돌아갑니다. 경기도청에 근무했고 수원시에 살며 화성시청을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두천시청 동장, 동두천시청 부시장, 오산시청 부시장, 남양주시청 부시장으로 일했습니다. 공직자로서 9급에서 2급 지방이사관까지 승진하고 1급 지방관리관으로 명예퇴직하였다고 어디 가서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이 책을 읽으실 분이 지극히 제한적일 것이므로 여기에서나마 속 시원하게 자기 자랑,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바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신 분은 입가에 작은 미소가 드리워지실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앞서 누누이 자기자랑, 자화자찬을 하지 말자는 다짐을 해온 바이지만 오늘은 힘이 나서 자랑을 합니다. 엣따 자기자랑을 한번 하고 나니 기분이 시원해 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경기일보 김종구 주필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부시장이 되어 독방에 홀자 앉아있다가 갑자기 문을 잠그고 홀로 크게 웃었답니다. 저의 이야기입니다.

 

[네가 비봉면사무소 9급 시보로 들어와서 업무가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서무에서 사업계로 좌천되었다고 사표를 던지는 등 경망스러운 행동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부시장이라고 폼재고 앉아있는 모습이 스스로에게도 웃움이 나온다]는 말을 했답니다.

정말로 부시장실에 혼자 앉아서 잠시 시간이 나면 비봉면, 팔탄면 근무시절의 추억을 되새겨 보곤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승진을 하고 큰 업무를 담당하다 보니 부시장에 올랐습니다.

법인카드를 받고 차량에 운전기사가 있습니다. 4급 동두천시 부시장, 3급 오산시 부시장은 내근비서 1명과 운전실장 1명이 있습니다만 2급 지방이사관 남양주부시장은 7급 수행비서가 추가됩니다.

승용차가 나오는 3번의 부시장과 수도권교통본부장, 균형발전기획실장으로 일하면서 관용차를 출퇴근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동두천 부시장으로 일하면서 동네길을 걸어서 출근하고 걸어서 퇴근했습니다.

행사나 저녁식사가 있는 경우에는 차량을 이용했습니다. 한번은 동두천시청에서 저녁에 술한잔 하고 택시를 타고 귀가를 했습니다. 이를 시민이 보시고 행정계장에게 제보를 했답니다.

행정계장님은 부시장이 직원들과 술마신 후에 택시를 타고 관사로 가면 우리가 욕을 먹는다면서 반드시 관용차를 타라 했습니다.

오산시청에 근무하면서도 가급적 관용차를 타지 않으려 했습니다. 마침 관사아파트에서 시청까지는 300m 거리였습니다. 동료들과 회식을 한 경우에는 관사까지 차량을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수원집으로 퇴근하는 날에는 버스를 이용했고 다음 날 아침에도 버스를 타고 오색시장 앞에 내려 시장을 살펴보면서 걸어서 출근했습니다.

한번은 시장 선거기간에 전임 시장으로서 이번 선거에 출마하시는 인사와 앞뒤로 걷게 되었습니다. 8년전에 4년간 시장으로 일하신 후보자님은 자신의 뒤를 꾸준히 따라오는 누군가를 의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청 도착전 마지막 횡단보도에서 말을 걸어오십니다.

“시청에 근무하시나?”

“예”

“그런데 내가 왜 모르지?”

후보님은 나이로 보아 시청 과장급으로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후보님이 당연히 알아야 할 사람인데 모르겠으니 이상하다는 말씀인 것 같았습니다.

“네, 시장님, 저는 부시장입니다.”

후보님 뒤를 따라서 걸어 출근하는 사람이 부시장인 것이 대단히 송구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오산시는 적정한 규모여서 시장으로 4년간 근무하시면 팀장, 과장, 국장의 신상은 100%이상 꿰고 있으실 것입니다.

아마도 후보님은 시민중 한사람이고 혹시 오산시 유권자일 수 있다는 후보의 심정으로 말을 걸어오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후에도 공식 행사에서 만나면 달려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곽상욱 3선 시장님이 그해 지방선거에서 당선되셨습니다.

남양주시 부시장으로 근무할 때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일주일의 절반을 관사에서 함께 보냈습니다. 아내는 수원집을 관리하고 남양주시청 관사에서 식사준비를 하고 빨래 등 집안살림을 했습니다.

아침을 먹고 출근길에 아내가 함께 나섭니다. 남양주시청 관사에서 청사까지 걸어가는 2개 노선이 있습니다. 직선으로 가면 3km정도인데 차가 다니는 대로의 인도로 가야 합니다. 소음과 먼지가 나서 불편한 길입니다.

조금은 멀지만 우회로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덕혜옹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파트를 나서면 동네 골목길을 지나고 곧바고 산기슭의 오솔길을 만납니다. 양계장을 지나면서 강아지 멍멍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운동기구가 설치된 공원을 지나갑니다. 이어서 70년생 소나무가 자리한 산이 시작됩니다. 오른쪽 깊은 숲속에 의친왕이 영면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길가에 작은 묘가 보입니다.

“大韓 德惠翁主之墓(대한 덕혜옹주지묘)”

고종황제가 60에 이르러 얻은 고명딸입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볼모로 일본에 유학가고 일본에서 오빠 영친왕과 살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혼과 딸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었고 조현병 상태에서 귀국합니다. 해방 후 곧바로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정치권에서는 조선왕조의 부활을 꺼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기귀국을 의도적으로 막았다고 합니다. 영화 덕혜옹주를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안타까운 역사이고 한번 더 가슴에 새겨야 할 이야기입니다.

출근길에 만나는 덕혜옹주님은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되는 날 간부들과 갈비탕을 먹고 영화를 관람한 후 다음날 영화감상 소감문을 모아서 자료집으로 만들어 영화사, 감독, 배우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공보실을 통해서 덕혜옹주의 역사를 이야기했습니다. 전통을 이어가기로 단단한 왕릉관리사무소에서 움직였습니다.

덕혜옹주묘역 앞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을을 홍보하는 판넬을 설치한 것입니다. 공보실의 홍보자료입니다.

 

'덕혜옹주 묘역 ‘門前成市(문전성시)’

- 추석연휴 덕혜옹주 묘역 방문자 2,400명 성황

-15일 축석날에만 900여명 방문

- 초중고생 방문코스로 운영 검토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가 영화 ‘덕혜옹주’개봉을 계기로 남양주시 덕혜옹주 묘와 의친왕 묘를 무료 개방한 추석 연휴기간 동안 총 2,400명이 묘역을 방문했다.

영화 덕혜옹주 개봉으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자 문화재청이 발 빠르게 덕혜옹주 묘와 의친왕 묘역 공개를 결정함에 따라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9월13일부터 일반에 무료개방을 시작하였고 영화와 역사에 관심있는 시민들과 인근지역 시민들의 발길이 모아지고 있다.

개방 첫날인 13일에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 권석주 소장, 동부지구관리소 김태영 소장 등 정부의 관계공무원이 현장에 대한 최종 점검을 실시했고 남양주시청 공무원 등도 일부 현장을 살펴봤다.

시민들은 홍·유릉 관리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두고 홍·유릉을 관람한 후 도보로 약 1.2km를 걸어가 영친왕의 영원을 관람한다. 홍·유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홍릉), 순종황제릉(유릉)이다. 홍·유릉에서 도보로 10분(1,000m)을 가면 영친왕을 모신 영원이 나온다. 영원의 관전포인트는 재실이다.

영원을 나오면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을 사진을 볼 수 있다. 이 사진들은 문화재청이 묘역 개방과 함께 탐방길에 덕혜옹주, 의친왕, 고종황제, 그리고 태조 이성계(건원릉) 부터 26대 고종황제(홍릉)와 27대 순종황제(유릉)까지 사진과 설명문을 담은 판넬 55점이다.

조선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보면서 200m를 걸어가면 덕혜옹주묘와 의친왕 묘역을 만난다. 특히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 사진, 일본으로 가기 직전의 사진, 일본에서의 유학생활, 결혼, 그리고 귀국모습(1962)을 볼 수 있어 영화 덕혜옹주를 본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이번 추석 연휴기간동안 덕혜옹주 묘 관람자수는 모두 2,400명이다. 13일 70명, 14일 130명, 추석날인 15일 900명으로 최고를 기록했고 16일 400명, 17일 500명, 18일 400명이다.

덕혜옹주 묘역을 방문한 시민들은 “영화를 보고 그 주인공의 묘역을 방문하니 더욱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일부 관람객들은 사실과 조금 다르게 연출된 영화내용에 대해 이견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덕혜옹주가 어린나이에 일본에 의해 강제로 유학을 갔고 나라가 힘을 잃은 상황임을 알고 있으며 이점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덕혜옹주 묘 개방을 계기로 남양주시는 관내 초중고 학생들의 현장학습의 장으로 소개할 방침이다. 인근 시군의 학생들도 버스나 전철을 이용하여 한나절 일정으로 방문을 권고할 계획이다.

한편 문화재청의 덕혜옹주묘, 의친왕묘 임시개방은 2016. 9. 13부터 11월말까지(월요일은 휴무일로 비공개)이며 홍·유릉 입장료는 1,000원이고 영친왕묘(영원), 의친왕묘, 덕혜옹주묘 입장은 무료이다.

 

[개방에 대한 문의 : 031-591-7043/ 동부지구관리소, 홍릉/유릉]

[자료작성 : 남양주시청 홍보기획과 031-590-2061]

나비효과라고 합니다. 공무원 한사람이 덕혜옹주에 대한 관심을 갖게되면서 남양주시에 홍유릉이 있고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의 묘역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 것입니다.

명성황후의 친정이 경기도 여주인 것을 많은 분이 아시겠지만 고종황제와 남양주시 소재 홍릉에 모셔진 것을 더 많이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명성황후에 대한 조선말 역사 이야기를 들었고 드라마 명성황후, 오페라 명성황후 예고편을 방송에서 시청한 바 있지만 남양주 왕릉에 모셔진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덕혜옹주에 대한 관심은 영화감독과 제작자가 559만 관객을 자랑하면서 이석우 시장님께 관심에 대한 감사인사를 오게 되었고 이들에게 덕혜옹주 묘역 방문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묵념을 올리는 사진을 언론에 배포하면서 이번에는 TV와 언론, 방송에 알려졌습니다.

결국 이 같은 언론의 관심과 시민적 열정으로 문화재청은 비공개구역이던 덕혜옹주, 의친왕 묘역을 공개구역으로 바꾸게 됩니다. 평소에도 누구나 묘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연합뉴스 보도] “덕혜옹주 묘 남양주 명성황후 옆에 있습니다”

남양주市, 영화 단체 관람후 소감문 모아 자료집 발간

영화 ‘덕혜옹주’(감독 허진호)가 지난 주말 극장가를 장악하는 등 인기를 끌면서 경기도 남양주시가 시와 덕혜옹주, 나아가 조선 마지막 황실 간 관계에 대해 적극 홍보에 나섰다.

남양주시 공무원들이 최근 ‘덕혜옹주’를 관람한 뒤 소감문을 모아 자료집을 내고 이를 영화사와 문화단체 등에 배포했다.

시 관계자는 8일 “슬프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 역사인 만큼 덕혜옹주를 기억하고 덕혜옹주의 묘가 남양주에 있는 것을 알리고자 자료집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덕혜옹주의 묘는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인근에 있으며 홍릉에는 덕혜옹주의 아버지인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다.

남양주시 공무원들은 이를 계기로 영화 개봉일인 지난 3일 단체로 관람했다. 소감문에서 한 직원은 “황실의 옹주로서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사던 10년도 채 안 된 삶이 37년 동안의 일본 억류 생활을 통해 산산조각나고 짓이겨졌다”며 “황제의 총애를 받다 조국의 버림을 받기까지 최고·최저점을 찍은 아픈 역사의 아이콘”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다른 직원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힘들게 자리를 지켰다”며 “과거나 현재나 역사에 대해 재조명을 함에 있어 우리 정부의 대응 방안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함을 또 한 번 생각하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이강석 부시장은 “덕혜옹주는 힘들지만 치열한 삶을 살았고 우리가 모르는 대한민국 마지막 황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미래를 향한 큰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다”고 감상을 적었다.

이번 영화 관람에는 고종의 증손녀인 이 홍(41) 씨도 동참했다. 이씨에게 덕혜옹주는 고모 할머니가 된다.

이씨는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났다”며 “남양주 공무원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해 더욱 의미가 컸다”고 말했다.

시는 영화사와 문화단체 등에 이 자료집을, 출연 배우들에게는 편지를 전달했다.

주연을 맡은 배우 손예진 씨에게는 “감격스러운 장면이 많아서 모두 적어두지 못 하지만 이 시대 대한민국 국민에게, 특히 청년들의 가슴 속에 조국이라는 커다란 마음속 글씨를 새겨 준 장면의 연속이었다”며 찬사를 보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홍·유릉은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다. 홍릉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묘이고 유릉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묘다.

덕혜옹주의 묘는 홍·유릉 인근에 의친왕과 영친왕 그리고 마지막 황세손인 이 구 씨의 묘와 함께 있다.

덕혜옹주의 묘 현판에는 ‘고종황제와 귀인 양씨의 고명딸인 덕혜옹주(1912∼1989)의 묘이다. 덕혜옹주는 9세가 될까지 복녕당 아가씨로 불리다가 1921년 덕혜옹주로 봉해졌고 1925년 일제가 유학이라는 명분을 세워 일본으로 데려갔다’고 적혀 있다.

게재 일자 : 2016년 08월 08일(月) <연합뉴스>

 

남양주시청 근무 기간 중에 국화 화분 하나를 덕혜옹주 묘역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출근길에 패트병 2개를 관리인이게 전했고 낮 시간 뜨거울 때 국화에 물을 뿌려달라 부탁했습니다.

 

[이강석이 관리인에게 보낸 편지]

 

이 물을

덕혜옹주님 국화에

보슬비처럼 뿌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출근길에 물을 가져왔습니다.

오랫동안 국화꽃이 피어서

은은한 국화 향이 옹주님 주변을

감싸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역사의 길

덕혜옹주길 홍유릉 길

걷기 좋은 회상의 길

평온한 마음이 자리하는

참 좋은 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아침 이 길을 걸어 갑니다

 

사색의 길

역사를 반성하는 길

이 길을 차분히

한 걸음 한 발짝

앞으로 나갑니다.

 

관리인이 적당한 시각에 국화에 물을 주었습니다. 매일매일 지나가면서 화분을 보면 하루하루 또렷하게 꽃이 피어나기에 관리인의 정승을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아 관리인은 딱 한번 인사를 드렸지만 화분은 긴 나날 동안 덕혜옹주의 마음속에 자리했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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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