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위하는 삶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修道(수도)하는 마음으로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저승길에서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스토리입니다.

80세를 사신 노인은 평생 동안 남에게 베푼 것은 단 두 번의 해프닝이 있을 뿐입니다. 어느 날 아침 돼지죽을 주기위해 뜨거운 국물을 들고 나왔는데 새벽에 스님이 托鉢(탁발)을 합니다.

 

 

탁발(托鉢)이란 '바리때(공양 그릇)를 받쳐 들다.'라는 뜻으로 승려들이 공양과 보시로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가리킨다. 출가 수행자는 발우를 들고 마을로 나가서 음식을 얻는다. 이것은 단순한 구걸이 아니라 하나의 수행 방식이다. 탁발을 통해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을 없애고, 무욕과 무소유를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보시를 주는 이의 공덕을 쌓게 해 주는 역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탁발

 

노인은 식전 댓바람에 재수없게 탁발 동냥을 왔느냐면서 화를 내고 다른 집으로 가라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고승은 차분하게 念佛(염불)을 하면서 수도하는 자세로 기다립니다. 결국 화가 난 노인은 들고있던 돼지죽을 스님의 머리에 뿌렸습니다.

 

또 한 번은 어느 해에 산달을 맞이한 産母(산모)가 출산을 도와달라 청합니다. 역시나 도와줄 수 없으니 다른 집으로 가라했지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산모는 노인의 집 헛간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이때 볏짚 한 단을 주면서 아기를 낳으라 했다는 것입니다.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노인은 저승사자를 만났고 드디어 도착한 저승에서 방 배정을 받았습니다. 저승사자로부터 방 열쇠를 받아서 404호실에 들어가 보니 방안에 돼지죽 한 그릇과 짚 한 단이 있습니다. 노인은 옆방을 살펴보았습니다.

 

노인이 살았던 마을에서 가까운 마을에 살던 18살 규수의 방인데 쌀이 5섬, 옷가지, 가재도구가 풍성하게 비치되어 있습니다. 노인은 즉시 저승사자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나는 달랑 돼지죽과 짚 한 단이 전부이고, 저 방에는 나이도 어린 규수의 방에 살림이 한가득이니 불공평한 것 아니오?”

 

저승사자가 규수의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규수는 철이 들 무렵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거지가 오면 쌀을 내어주고 스님이 托鉢(탁발)을 오시면 역시 곡식이나 음식을 드렸답니다. 그 외에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꾸준히 도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쌀과 밥과 옷 등이 모이고 쌓여서 규수의 방에 전달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승에 살면서 남에게 베푼 만큼이 그대로 이곳 저승의 방에 택배로 도착하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평생 욕심을 내며 재물을 모으고 재산을 축적한 노인이 남에게 베푼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승사자들이 노인이 스님의 머리에 뿌린 돼지죽과 아이 낳는데 헛간을 빌려주고 짚 한 단을 내준 것을 善行(선행)으로 평가하고 그 노인의 저승 방에 가져다 준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여러 번 한 이야기이지만 이승에서 떠나가는 망자의 壽衣(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주머니에 넣어갈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주머니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殮襲(염습)할 때 매듭에는 나비고리를 하지 않고 옥매듭을 합니다. 한번 묶으면 다시 풀어볼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

生居鎭川 死居龍仁 (생거진천 사거용인)은 살아서는 진천땅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 땅이 좋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 혼령으로 남의 육신을 살아가야 했던 추천석을 바탕으로 옛말이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자성어의 의미는 충청북도 진천군은 물이 좋고(풍수적) 살기 좋다는 뜻이고, 경기도 용인시는 묻힐 때에(지리적) 명당으로 낫단 말로도 풀이된다.

 

진천땅에 살고 있는 농부 추천석이 가족들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저승사자가 용인땅의 추천석을 데려와야 하는데 이름과 생년월일이 같다는 이유로 그만 진천땅의 농부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다.

 

그 바람에 잘못 저승으로 간 진천땅의 농부 추천석은 이승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진천땅의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고 진천땅 추천석 육신을 땅에 묻은 뒤였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한편, 저승사자는 용인땅의 선비 추천석을 데려왔고 그 시신에 진천땅의 농부 추천석 원령이 들어갔다. 그 바람에 진천땅의 추천석은 용인땅 추천석 육신을 빌어 회생하여 곧바로 진천땅의 가족들을 만나려 했으나 용인땅의 추천석 가족들이 막았고, 아울러 진천땅의 추천석 가족들도 믿지 않았다.

 

결국 모두 관아로 끌려갔는데 사또도 역시 안타깝게도 추천석을 용인땅의 추천석으로 살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추천석은 쓸쓸하게 용인땅에서 용인땅의 추천석 가족들과 함께 살다가 떠났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에서는 추천석이 살아있는 한은 충청북도 진천군에 살다가 죽을 때에는 경기도 용인시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진천과 용인을 바꿔 기록한 듯. 즉 용인의 추천석이 진천의 추천석 몸 안으로 들어간 것임. 원님의 판결도 살아서는 육체의 주인이 살던 진천에 살고 죽어서 원래 고향인 용인으로 가라는 의미에서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나온건데?

 

다른 이야기도 있다. 옛날 충청북도 진천군에 사는 허생원이라는 사람의 딸이 경기도 용인시로 가서 남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불행히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울러 남편의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난 후, 딸은 다시 충청북도 진천군에 아들을 낳았다. 결국 아들이 두 명이 되었는데 각각 충청북도 진천군의 아들과 경기도 용인시의 아들이었다.

 

이후 허생원의 딸을 개가를 하였는데, 용인에 사는 큰 아들이 진천으로 개가한 어머니를 모시고자 했으나 진천의 작은 아들이 극구 반대했다.

 

그래서 큰 아들이 하는 수 없이 관아에 소송을 냈다. 관아에서 이렇게 판결했다.

 

“너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진천에 의부가 있으니 거기서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에 모시도록 하라.”

 

이 말은 농업이 으뜸이었던 시절에 진천은 들이 넓고 기름지며 가뭄과 큰 물이 들지 않아 농사가 잘돼 생거진천(살려거든 진천 땅에 살고) 이라 했고, 용인은 사대부들의 유택이 많은 산세가 준수한 땅이어서 사거용인(죽은 후 용인 땅에 묻히라)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다.

 

수많은 사람의 생사를 관리하다 보면 저승사자와 염라대왕도 이런 행정적 착오를 일으킬 수 있나 봅니다. 삼천갑자 동방삭의 경우에도 명부상 나이가 三十(삼십)이었는데 동방삭이 十(십)자 위에 한 획을 추가해서 千(천)으로 바꿨으므로 3,000년을 살았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삶을 살지만 누구나 천수를 누리고 떠나갑니다. 고조선시대, 발해, 가야,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사람중에 지금도 사시는 분은 이제 없을 것입니다.

 

조선시대를 1910년으로 본다면 112살 어르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나신 바입니다. 해서 말인데 이승에서 주어진 80년을 살고 그중에 제정신을 가지고 사는 60년을 너무 힘들게 하지 말자는 생각을 합니다.

 

적당하게 살면서 자신을 위하고 가족을 위하고 자식을 도운 후에 여력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삶을 돕자는 의견입니다. 그래야 저승에 가서 중급 모텔방이라도 배정받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목욕탕은 없어도 따스한 물 콸콸 나오는 샤워기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피로를 푸는데 샤워만한 것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승에 사는 동안 다른 이를 돕고 이웃을 배려하고 조금 여력이 있으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모임에 동참하는 것도 자신의 내생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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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