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청령포#장릉의 단종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2020년 10월 9일 한글날 휴무날을 맞이하여 영월 여행을 갑니다. 법흥사, 청령포, 한반도 지형, 장릉(단종)을 방문했습니다.

수원에서 7시반에 출발하여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려 원주 전에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국도로 나가서 법흥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같이 영동고속도로 용인, 이천, 여주구간은 늘 교통량이 많은 곳이므로 속도가 느려서 용인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탕과 국물을 드시는데 비해 나는 돈까스를 먹었습니다. 어린 입맛이지만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른 일행도 국물맛에 깊이가 있다면서 칭찬을 합니다.

 

아마도 서울의 큰 호텔 주방장이 메인쉐프를 하는가 생각한다 했습니다. 하지만 휴게소는 각각의 업소마다 주방장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압니다.

다시 차를 달려 도착한 법흥사에서 곧바로 적멸보궁으로 올라갔습니다. 적멸보궁이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법당을 가리킨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적멸보궁] 법당 내에 부처의 불상을 모시는 대신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법당으로 바깥이나 뒷쪽에는 사리탑을 봉안하고 있거나 계단을 설치하고 있다. 보궁의 기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의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를 열었던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에서 비롯된다. 궁(宮)은 전(殿)이나 각(閣)보다 우위에 있다.

 

《화엄경(華嚴經)》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十方世界) 불보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한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선정에 들었다 한다.

이때 부처 주위에 많은 보살들이 모여 부처의 덕을 칭송하였고, 부처는 법신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한몸이 되었다. 따라서 적멸보궁은 본래 언덕 모양의 계단(戒壇)을 쌓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진신사리는 곧 부처와 동일체로, 부처 열반 후 불상이 조성될 때까지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도 소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차분한 마음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을 머금은 멋진 자리에 작은 단을 차리고 그 안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습니다. 돌틈으로 부처님의 형상이 보이는 듯 합니다. 사찰 건물안에서는 보살들이 열심히 절을 합니다.

 

108배를 올리는 분도 있는 듯 합니다. 플라스틱 방석을 하나 빌려내서 밖의 돌바닥에 깔고 작은 수건으로 이마 받침을 하고 열심히 108배를 올렸습니다. 초 2개를 사서 불을 붙여 단에 올렸습니다.

절을 마치고 나왔는데 아름답고 평온한 풍광과 분위기와 기에 몸을 맡기신 일행 한분이 조금 더 부처님 앞에서 수행의 시간을 가지시므로 사찰 건물을 한바퀴 돌아보고 다시 주변을 살피면서 힐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으로 평온한 곳에 자리한 적멸보궁입니다. 이런 곳을 찾아낸 분도 멋지고 이곳에 이렇게 방문하는 신도들도 고마운 분입니다. 영월 법흥사는 아주 평온한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찾아오는 신도들을 포근하게 맞아줍니다. 넓은 주차장이 무료이고 경치와 맑은 공기, 고소한 물이 무료입니다.

점심은 강원도 음식경연에서 금상을 받으신 식당입니다. 강원도 자연식사 강원나물밥입니다. 명함에 산기운을 강원나물밥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라고 적었습니다.

 

산속의 농가맛집 친구 김성달, 조금숙 강원나물밥 요리사라 적었습니다. 영월군 북면 덕전길 132-53입니다. 네비가 끝나고도 300m더 산속으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식당이 있고 그 위쪽에 10대정도 주차장이 있습니다.

한약을 먹는 대우받는 느낌이라 평가를 하십니다. 일행 모두가 만족하는 점심인데 15,000원입니다. 다른 메뉴는 하루전에 예약을 하여야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차분하게 차려진 음식을 보약처럼 맛있게 칭찬하며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칠 즈임에 조금속 요리사님이 오셔셔 식사 후평을 경청하십니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합니다. 일행은 정말로 큰 칭찬을 하였습니다. 음식 하나하나에 정성이 가득하다는 느낌입니다. 다시 오고 싶다는 다짐이 여기저기에서 나왔습니다.

국가지정 명승 제75호인 한반도 지형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모습을 한 강이 흐르고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모습으로 완벽하게 우리나라 지형을 닮았다고 영월군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차를 하교 800미터를 걸어가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1.2km를 가고 오는 느낌이 들고 돌길이므로 등산화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한반도 지형중 제주도가 없으므로 돛단배가 제주도쯤을 지날 때 사진을 찍는 분도 있습니다. 창의적인 생각이라 봅니다.

아픈 역사의 현장 청령포로 향했습니다. 이 또한 한반도 지형을 지나는 형상의 강이 흐르는 곳인데 이곳에 단종왕이 유폐되었습니다. 국가지정 명승 제50호입니다.

 

단종의 유배지로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있고 서쪽은 험준한 함벽이 솟아 있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주위에 수백년생의 거송들이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다.

특히 천연기념물 제349호인 관음송은 수령이 600년이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이라고 영월군은 설명합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단종의 유배당시의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觀音松이라 불리어 왔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둘레5m로 지상에서 두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랐다. 수령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약 60년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의 소나무들이 한양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그 방향을 따라가면 남양주 진접의 사릉에 당도한다 합니다. 사릉은 단종의 중전 정순왕후를 모셨습니다.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의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의 무덤이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정순왕후는 1521년(중종 16) 6월 4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소생이 없어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경기도 남양주군의 시가(媤家) 묘역에 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시조 한수를 소개합니다.

천리길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왕방연의 시조비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룡포를 바라보며 읊은 시조입니다.

현장에 가보니 소나무 숲속에 이끼낀 비석이 서있고 그 사연을 적어놓았습니다. 주변에는 이름모를 고총이 방치된 듯 자리하였습니다. 조선의 아픈역사의 한자락인데 관리가 소홀해 보입니다. 그래도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있으니 다행입니다.

 

장릉은 조선 제6대 임금 端宗의 능으로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황권을 빼앗기고 청령호에 유배된 단종이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여 묻힌 곳이다.

2009년6월30일 장릉을 포함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월군의 설명입니다. 단종은 청령포와 관풍헌에서 기거하였습니다.

 

단종이 영월군(寧越郡) 남면(南面) 광천리(廣川里)국지산(菊芝山) 밑에 있는 청령포로 유배된 그 해 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자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단종은 이 관풍헌에서 지내면서 동쪽에 있는 매죽루에 자주 올라 자규시(子規詩)를 읊어 심정을 토로하였으므로 후인들이 자규루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오르막은 산등성이를 타고 가서 단종왕릉을 친견하고 내려올때는 비탈길 계단을 이용하였습니다. 이제 나이들어서 올라가면 무릎이 힘들고 내려가면 근육이 뻐근합니다.

그래도 14,000보 이상을 걸었습니다. 한반도 지형을 다녀온 1,600m와 청령포, 단종의 장릉 등 여러곳을 걸어서 축적된 거리입니다.

 

장릉 바로 앞에 송어횟집이 있습니다. 민물, 청정수에서 사는 송어인데 그 맛이 뛰어납니다. 채썰은 야채에 넣어서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버무려서 먹습니다.

정신없이 회무침을 먹고나니 송어 매운탕이 나왔습니다. 그 맛이 색다릅니다. 그동안 먹은 매운탕보다 덜 매운데 그 맛이 깊습니다. 맛을 느끼는 혀가 다양한 맛을 보았겠습니다만 처음 느끼는 색다른 맛이기에 혀도 놀라고 뇌도 번쩍합니다.

 

인체의 장기중에 열일하는 器官(일정한 모양과 생리 기능을 가지고 있는 생물체의 부분. 형태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며, 여러 개의 조직이 일정한 질서로 결합되어 이루어지며 이들이 모여 기관계를 형성하고 기관 혹은 기관계가 모여 개체를 구성한다.)이 있습니다만 혀만큼 바쁘게 인생을 사는 장기도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눈, 코, 귀, 입, 심장, 폐, 간장 등 어느기관 하나 허투루 볼 수 없겠습니다만 오늘은 특히나 혀의 입맛에 대한 스토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매운탕으로 깔끔하게 저녁을 마친 일행과 나오면서 저녁 커피를 한잔 했습니다. 평소에는 오후 3시 이후 커피를 피합니다만 오늘은 장거리 운전을 하므로 한 잔 한 것입니다.

커피성분중에 각성제가 있다고 합니다. 정신 차리고 운전을 하였습니다. 휴게소 2번 쉬면서 안성을 지나 평택을 거쳐 오산으로 나와서 귀가했습니다. 왕복 400km입니다. 전에는 장거리가 힘들었는데 요즘에는 쉽습니다.

 

오늘 달려온 길은 초행입니다. 평택-충주, 충주-제천간 고속도로인데 아주 킨 터널을 여러번 지나갑니다. 대낮같이 밝은 터널은 오히려 운전하기 편리합니다. 조명 밝고 차선도 확실하며 같은 방향으로 2차로를 달리니 앞차만 신경쓰면 될 일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이런저런 짐을 정리하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잠을 청합니다.

 

아까 마신 커피가 이제야 효과를 봅니다. 오늘 법흥사 적멸보궁, 한반도지형, 청령포, 장릉의 단종왕릉을 방문하였고 아침 용인 휴게소 식사, 점심 산속의 친구 정식, 저녁 송어회와 송어매운탕으로 맛집순회를 하였습니다.

과자, 음료, 군밤, 대추 등 간식도 풍성하였습니다. 재미있고 보람찬 문화재 탐방, 맛집 순례 소개를 마칩니다.

페이스북에 소개된 지인 홍승표 전 용인부시장님의 글을 올려드립니다.

 

단종의 애환과 恨이 서린 영월을 돌아보았습니다. 12살 때 즉위한 단종은 정통적인 혈통을 완벽하게 물려받은 임금이었지요. 그런데 수양대군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고 魯山君(노산군)으로 격하되어 이곳 영월 땅 淸怜浦(청령포)로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단종이 유배된 그해 여름에 홍수로 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겼지요. 단종은 할 수 없이 강 건너 영월부의 客舍(객사)인 觀風軒(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습니다. 그러나 17살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지요. 정말 애통한 일이었습니다.

 

단종의 屍身(시신)은 강에 버려졌으나 영월의 戶長(호장) 엄홍도가 이를 수습해 지금의 장릉으로 모셨지요. 영월은 지금 충절의 고장이라는 슬로건아래 매년 단종문화제를 열고 단종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영월이 충절의 고장으로 사랑받기를 기대해봅니다.

문득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살아가던 고관대작들의 말로는 어찌되었을까? 의문부호가 떠올랐습니다. 權不十年(권불십년)이라 했으니 그들이 갓 끈 떨어진 뒤에는 사람대접 못받았을지도 모르지요. 영월은 역사적 교훈과 참 삶을 떠올리게 하는 곳입니다.

 

한반도와 똑 같은 형상을 보여주는 지형을 보며 묵직한 울림을 느꼈습니다. 여행은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 보약 같은 시간이지요. 영월 여행은 경관도 빼어났지만 잘 산다는 게 무언지를 다시 곱씹어보게 해주는 보물같은 곳이었습니다.

단종의 일생을 정리한 자료를 얻었습니다.

단종은 1441년7월23일(세종23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이다. 8세가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예문관제학 윤상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405년2월에 세중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년5월18일 문종이 승하후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 왕에 즉위하였다.

 

계유정란 이후 1455년6월11일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불려주고 15세에 상황이 되었으며(재위기간 1452~1455), 박팽년,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 1457년(세조3년)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1457년 윤6월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후인 윤 6월28일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금성대군 유가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결국 죽음을 당해 1457년10월24일 유시에 17세 어린 나이로 관풍헌에서 승하하였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