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2022. 11. 8(화) 10:00 비봉매송농협 2층
이강석은 비봉면 자안리에서 출생하여 청룡초등학교, 비봉중학교를 졸업하고 수원으로 고등학교 유학을 갔고, 1977년에 비봉면사무소, 1980년에 팔탄면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비봉면에 근무할 당시에 우리 노인대학 안희창 학장님은 직속 선배님이었고 지도편달을 받았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지요? 홍무표 면장님이 퇴임하시고 윤완의 면장님이 취임하신 날 저녁, 뒷풀이에서 당시 방위 선배와 국그릇으로 소주를 대작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회의실 천정위로 올라갔습니다.
회계주사였던 안희창 학장님은 술을 전혀 안 드시고 행사를 진행하셨던 바 제가 술에 취해 천정으로 올라가는 것을 우연히 보셨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퇴근하지 않고 숙직실에서 지냈기에, 행사 후에 제가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찾다가 천정으로 올라간 것이 생각나서 올라가 보니 난리가 나 있었답니다.
숙직실 방으로 데려다 눕혀 재워주셨고 아침에는 라면을 끓여주셨습니다. 만취했던 입맛이니 라면을 먹지 못했습니다. 라면발을 입안에 넣으니 마치 한겨울 꽁꽁 얼어버린 놑쇠 젓가락을 혀에 대에 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꾸준히 안희창 국장님과 교류하였고 오늘 안희창 노인대학장님의 소개로 여러 어르신을 만나는 인연과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무원 근무하기 전인 1975년경에는 자안2리 동네 이장님댁에 전화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전화는 비봉우체국에서 리단위로 한 대씩 배정되었는데 자안1리에는 배정되지 않았습니다.
자안1, 2리 주민들의 유일한 소통창구는 자안2리 이종근 이장님댁의 전화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수원, 서울 등지의 친척이 전할 말이 있으면 이장님댁으로 전화해서 부탁을 하면 동네 마이크로 알리고 그 가족이 와서 다시 서울, 수원으로 전화를 걸면 소통이 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자안2리 이종근 이장님댁 마이크는 늘 바쁘게 가동되었습니다.
“봉재야 봉재야 서울에서 전화왔다.”
이봉재씨는 곧바로 이장님댁으로 가서 친인척이나 사업상 통화할 분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통화가 끝나면 이장님은 교환에게 몇 통화인가 물어서 30원 50원을 받습니다.
어느 날 이장님이 사임을 하고 다른 분이 이장이 되었습니다.
면사무소에서 신 이장님에게 연락하는 방법은 舊(구) 이장님에게 전화하거나 담당직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5km를 달려와야 합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전화는 이장님이 대표성이 있어서 배정한 것이가는 한데 개인 전화였습니다. 전화가 배정될 당시에는 대표성이 있으니 가장 우선순위로 전화청약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 이장님은 면사무소 연락이나 기존의 동네사람 연락은 전처럼 하시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자안1리, 2리는 이종근 이장님댁 전화로 소통하며 살았습니다.
이후 1976년을 전후하여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들어오고 아마도 1980년 중분부터인가 가가호호 전화가 설치되었습니다.
모내기 품맛이도 전화통화로 하다보니 동네 회관이나 방넓은 집 사랑채로 마실와서 못자리, 모내기, 벼베기 날을 잡던 아름다운 추억을 사라지고 세상이 점차 각박해져 가는 듯 보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누구나 전화기를 가지고 다니고 젖먹이 아니는 스마트폰을 주면 거기에 집중해서 배고파도 울지 않고 오줌을 싸도 불편하다 울지 않는다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핸드폰운영에 대한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이 전화기는 내가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돈을 내고 운영하는 나 자신의 것입니다.
상대방이 남편이든 아내이든 친구이든 간에 전화 늦게 받은 것을 탓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전화 늦게 받는다고 상대편에게 따지듯 말합니다.
옛날 줄 전화기는 따르릉 울리면 “여보세요” 하거나 “양노리입니다”라든가, 드라마에서는 “청담동입니다”라도 말합니다만 요즘에는 “어디야?”라고 말합니다.
전화기에 누가 전화를 하였는가 알기에 여보세요가 필요하지 않고 주머니에 핸드백에 넣고 다니니 어딘가가 궁금한 것입니다. 줄 전화기는 집에서 받거나 줄을 길게 하면 정원에서 받는 정도로 거리감이 가깝습니다.
한때 집 전화기에 무선이 설치되어서 그 무거운 전화기를 주부들이 장바구니에 담고 다니며 자랑하고 으스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략 800m까지는 가능했다 하므로 동네슈퍼까지는 집전화기의 무선장치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반드시 전화를 받겠다는 생각보다는 우리집에 이런 전화기가 있다는 자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제 핸드폰이 울려도 급하게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화가 끊겨도 누가 몇시에 전화를 했는가 기록이 나옵니다. 눈이 침침하신 분을 위해 클 글씨판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전화기를 소중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불과 40여년 전에는 회갑잔치를 알리기 위해 동네청년들이 걸어서, 자전거 타고 근동을 다니면서 가가호호 방문했습니다.
이제는 카톡방으로, 문자로 한 번에 수백명에게 알릴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15일에 카카오톡 배터리에 불이나서 불통되어 온 국민이 불편을 겪은 일도 있습니다.
문명의 이기는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만 일시적으로 마비되면 큰 혼란을 가져온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 글 속의 작은 슬 ◊
[이강석의 컬럼] 모두가 아는 [스마트폰≒전화기]
1964년 유치원 나이에 시골 아랫동네 방앗간의 3줄짜리 동력선에서 아마도 110볼트 전기를 따서 영사기를 돌리는 가설극장에서 최무룡, 황정순, 박노식, 허장강 등 당대의 유명배우를 큰 화면을 통해 만났던 추억이 있습니다.
1968년경에 도회지에 가서 전기불을 처음 보았고 건물과 가로등은 정전인데 도로를 달리는 버스와 택시는 불을 환하게 켜고 다니는 것이 신기했던 아이의 추억이 있습니다. 저녁무렵에 가로등이 착착착~~~ 하나둘 켜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석양즈음 도로변에 나가 대기하였지만 신기하기만 한 컨테이너를 실은 대형 크럭에 한눈을 파는 사이에 가로등이 모두 켜지고 말았던 아쉬움도 있습니다.
화성의 북문이 돌기단만 남았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수원성 화성의 북문은 그 본명이 장안문이고 조선시대 모든 성곽중 가장 큰 문이라 합니다. 정조와 다신이 가장 큰 문을 화성의 북쪽에 설치하였습니다. 역사의 갈피속에 북벌의 의지를 담았을까요.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에 도시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도회지의 이모님댁에 가서 처음 본 것은 전화기입니다. 이모임의 집은 산기슭 양옥집에 포도농장이 딸려있는 전원주택입니다. 당시에는 농촌을 지나 산촌수준이었는데 최근에 가보니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되었습니다.
1974년 고등학교 1년생으로 시골에서 도회지로 유학와서 처음 본 문명 중 하나가 전화기입니다. 검은 플라스틱 덩어리에 동그란 번호판이 있고 손가락 검지를 걸어 당긴후, 초승달처럼 생긴 고리에 손가락이 걸리는 순간 즉시 빼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이때에 해당번호만큼 움직이면서 전화국 단자속에 상대방의 번호를 찾아간다고 합니다. 이 전화기는 가정마다 소중한 자산중 하나이기 때문에 안방 어머니 화장대 옆에 레이스가 달린 전화기 방석위에 부처님 모시듯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네다리 길게 뻣치고 선 TV가 있는데 자바라 문이 있고 동그란 열쇠가 있어서 부모님들은 외출실때는 잠가버리시니 아이들 학교에서 돌아와 TV만화를 봐야하므로 송곳으로 찔러 흠집을 낸집이 참으로 많았던 기억도 납니다. 그리고 좀 산다는 집에서는 레코드판을 돌리는 축음기, 음악을 듣는 라디오 등이 함께 셋팅되어 있었습니다.
1996년에 동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삐삐를 차고 다녔습니다. 6개월만에 무선전화기를 손에 잡았습니다. 한반도 남해안 지역의 가입자와 통화를 하면 반초정도 음이 늦게 들리는 전화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명한 가정 전화기, 손전화기, TV, 라디오, 전구, 영화를 손바닥보다 작은 스마트폰에 넣었습니다. 알라딘이 요술램프를 문지르면 연기를 피우면서 거대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흑인 하인이 나타나서는 '주인님!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 상황을 찍은 필름을 거꾸로 돌리면 우리의 문명기기가 연기와 함께 전화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국민 90%이상이 가지고 있고 돌이 지난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스마트폰입니다. 3살 아이가 그림을 문질러도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으니 그림책을 던지고 스마트폰을 두 손으로 움켜쥔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아이들의 행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그림책을 주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이제 더 이상 스마트폰은 전화기가 아닙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기기중 많은 것을 압축해서 넣어둔 요술램프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전화기를 전화기로 대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문자로 보내면 답을 할 수 있는 내용을 전화해서 장황하게 말하려 합니다. 나이든 어르신이 그러하시다면 이해를 할 수 있으나 30세 전후의 현직 공무원들이 문자로 가능한 정보전달을 전화해서 설명하려 합니다. 2시간 회의를 하고 가방속의 전화기를 열어보니 3번 부재중 전화가 왔습니다.
이제 사무실 전화번호로 문자를 송출하고 받을 수 있는 기술을 더 많이 보급해야 합니다. 바쁘게 일하는 공무원들이 전화기를 잡고 말로 설명하기 보다는 문자, 사진으로 정보를 주고 받고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통화하도록 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문자로 알려주는 것이 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담당공무원의 해명은 문자 보내는 것이 결례인듯 생각한답니다.
절대로 문자보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윗사람을 만나면 안경을 벗어야 했던 조선말의 상황도 아니고, 전화를 바꿔달라면 '죄송합니다만 누구신지요?'라고 물을 필요도 없는 시대입니다. 전화통화는 최소화하고 SNS를 적극 이용하는 공무원이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어르신 여러분,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살아오신 나날이 행복이고 앞으로도 좋은 일만 가득합니다. 가족이 건강하고 이처럼 취미활동으로 노인대학을 다니시니 행복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어려운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을 보면 더더욱 어렵습니다. 물이 부족하여 흙탕물을
먹고 속병이 나고 피부병이 생겨서 걱정이 많습니다.
20km를 걸어서 학교를 다녀야 합니다만 이는 그나마 다행입니다. 아예 학교가 없으니 교사를 양성하지 못하므로 어린이, 청년들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없습니다. 오로지 할아버지, 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는 노인이 한분 돌아가시면 도서관 한 동이 불탄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어른의 지혜가 중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도 노인이 恭敬(공경)을 받아야 합니다. 1950년 6.25를 겪은 후 살아남아서 나라 부흥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오늘의 노인입니다. 6.25당시 10살이면 1940년생이시고 올해 82세입니다. 이분들이 이 나라를 오늘의 부강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어느 장관이 노인께 적은 액수이지만 手當(수당, 정해진 급여 외에 특별한 사유에 따라 정기적이거나 수시로 지급되는 보수)을 드리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라 부흥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이기에 늦었지만 이제라도 감사를 표하는 것이 후손들의 禮儀(예의)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재벌 2세는 태어나서부터 금수저를 물었기에 세상은 다 그러한줄 알지만 흑수저 자식들은 재벌의 회사에서 몸바쳐 일할 때 금수저 자제들은 골프, 스포츠카, 기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을 하여 指彈(지탄)을 받습니다.
하지만 세월과 시간을 보내면 다시 나와서 회사를 경영하고 사회적인 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이를 우리는 재벌들의 횡포라 생각합니다.
재벌안에서 흑수저는 도저히 운신의 폭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자본이 인권을 잡아가두기 때문입니다. 인격이 말살되고 사회정의가 부서지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실력있는 젊은이들이 공직에 도전한다고도 합니다.
공직에선 공평과 정의와 평등정신이 살아있습니다. 능력있고 역량있는 청렴하고 창의적인 공무원이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최소 재벌가에서 흑수저가 이룩하지 못하는 바를 공직에서 이룩합니다.
그리하여 판검사, 변호사가 돈벌어서 출마하고 정치인이 됩니다. 변호사 출신은 시의원, 도의원에 거의 없습니다. 기본이 국회의원이고 장관이며 다양한 분야의 정치인입니다.
올림픽 등 스포츠에서 동력엔진을 쓰는 경기가 없는 것처럼 공직에서만큼은 돈이 권력을 움직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금권이 정권이고 힘인가 여겨집니다. 그래서 국민은 실망합니다.
어르신 여러분, 건강이 최고입니다. 가족이 화목하게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아이들을 위하고 가족과 소통하시기 바랍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