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청에 근무하면서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다산의 하피첩은 2010년10월에 보물 1683-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하피첩은 다산이 강진의 다산초당에 유배되어 18년을 보내면서 아들과 딸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입니다.

유배가서 고생을 하는 남편을 걱정하는 마음에 아내는 시집 올때 입고 온 치마를 곱게 접어 인편에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아내의 남편사랑을 받아든 다산은 이를 가위로 잘라서 종이에 붙이고 여러가지 필체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남양주 조안에 살았던 아들과 딸은 글씨와 그림을 잘 보존했고 8대에 걸쳐서 이어왔습니다.

순조롭게 보전되어 이어온 하피첩은 을축 대홍수(1925)에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종손은 한강물이 집안으로 차오르자 다락방에 보존된 하피첩 뭉치를 목숨을 걸고 건져냈습니다.

[인터넷 자료] 남양주 8경 중 1경인 정약용 유적지 입구 다산문화의 거리에는 수원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가 전시되어 있고 선생이 집필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이 동판에 새겨져 있으며, 유적지 한쪽 드넓은 마당 한편에는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與猶堂)’이 있다. 본래 생가는 1925년 을축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했을 때 유실되었다가 1986년 전통 한옥 구조로 복원했다. 생가 뒤편 언덕에는 정약용 부부가 함께 묻힌 묘소가 있다.

그리고 6.25피난길에 후손들은 이 하피첩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남하하다가 수원에서 분실하였다 합니다. 이후 폐지를 모으는 분의 손수레에 실려 사라지기 직전에 이를 알아본 사람이 폐지 2일치 값을 지불하고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KBS 진품명품에서 방송 사상 최고가로 평가되었고 훗날 경매에서 750,000,000원에 낙찰되어 국가기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강석 기고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차를 좋아해서 호를 다산(茶山)이라 하였고 한강을 의미하는 열수(洌水)라고도 했다. 혁신군주 정조(1752~1800)는 10살 후배 정약용을 중용했다. 다산은 정조를 보좌하면서 한강에 배 다리를 건설하고 1793년 31세 나이에 화성을 설계했다. 현재의 경기도청이 자리한 팔달산에 화성을 축성하는 공사를 총괄했다. 거중기라는 과학적 장비를 활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기중기 원리를 다산이 화성축성 공사에 적용한 것이다.

다산은 평생동안 저술에도 힘을 기울여 492권을 집필했다. 이중 ‘일표이서’라 불리는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를 통해 군주권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내용으로 하는 왕권강화론을 제시했다고 한다. 경세유표(1817년)는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한 관제, 토지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한 정책서이다. 흠흠신서(1819년)는 저술한 형법서다. 죄수에 대해 신중히 심의하는 欽恤(흠휼) 사상에 입각해 재판하라는 뜻으로 관리들이 참고 할 수 있도록 지은 책이다.

목민심서는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해배(解配)되던 해인 1818년에 완성했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해 치민(治民)과 관련된 자료를 뽑아 수록함으로써 지방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 책속에서 ‘해관’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퇴직을 2년 앞둔 공직자나 직장인에게 반드시 읽어볼 것을 권한다.

1800년 승하하신 정조대왕과 1801년에 강진으로 귀양가 정치권에서 밀려난 다산 정약용 두 분에게 10년 정도 왕과 신하로서의 역사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다면 조선 후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큰 혁신과 발전을 도모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에 언론을 통해 알려진 하피첩(霞帔帖)은 다산이 귀양지인 전남 강진에서 쓴 글씨첩이다. 하피첩(霞帔帖)은 2010년10월에 보물 1683-2호로 지정됐다. (참고로 보물 1683-1호는 ‘정약용행초다산사 경첩’이다. 강진에서 행서체로 쓴 칠언율시) 부인이 보낸 치마에 종이를 붙여 만든 것으로, 아들인 정학연과 정학유에게 보내는 편지글 등이 담겨있다. 하피첩이라는 이름은 첩(帖)을 만들 때 사용한 홍씨의 치마를 비유한 것으로 ‘노을빛 치마로 만든 첩(帖)’이란 뜻이라고 한다.

하피첩 서문에는 ‘아내가 보내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잘라 작은 첩을 만들고, 경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이에게 준다’는 글이 적혀 있다. 본문은 선비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나 삶의 태도 등 아들들에게 교훈을 줄 만한 내용이다. 하피첩은 행서(行書)와 행초서(行草書)각주2) 등 여러 문체로 쓰여있어 정약용의 전형적인 행초서풍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하피첩은 12×16cm로 작은 수첩 크기다.

이처럼 소중한 역사인 하피첩은 정약용의 후손들이 남양주 생가에서 보관하다 6.25 전쟁 당시 분실되어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2005년 수원에서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의 손수레 위에서 사라지기 하루 전에 발견됐다. 다음날 폐휴지 더미에 던져질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이처럼 민간소유로 돌아다니던 하피첩이 2006년4월 방송 프로그램 진품명품에 나왔고 깜짝 놀란 전문가들이 1억원으로 평가했다. 2015년 9월 국립민속박물관이 옥션경매에서 하피첩을 7억5천만원에 낙찰받았다. 경매에 참여한 경기도는 6억, 강진군은 4억5천만원을 적어냈다.

하피첩의 일부 내용을 소개해 본다. 병든 아내가 치마를 보내 천 리 밖에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쳤는데 오랜 세월 홍색이 이미 바랜 것을 보니 서글피 노쇠했다는 생각이 드네. 잘라서 작은 서첩을 만들어 그나마 아들들을 타이르는 글귀를 쓰니 어머니 아버지 생각하며 평생 가슴속에 새기기를 기대하노라.

다산은 18세기에 태어나 18년간 벼슬길에 올랐고 18년동안 유배를 갔다가 1818년에 해배되었다. 고향인 남양주 한강변으로 돌아와 여생 18년동안 저술에 힘쓰다가 1836년에 별세했다. 2016년에는 다산서세 180주년 추모제향이 남양주시 주관으로 기관단체장, 다산의 8대손과 종부가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했다.

이제 다산의 생애와 역사가 있는 남양주시에서 다산의 하피첩을 이어가야 한다. 잃어버린 4첩의 내용이 궁금하다. 알 것 같은데 글로 쓰이지 않는다. 남양주시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매년 한시 백일장을 열어야 한다. 비어 있는 하피첩 네 번째 글의 자리를 원로들의 지혜와 집단지성으로 채워야 한다. 아마도 애국심과 효심,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인 자료가 오늘날까지 보존, 보관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변을 살펴보고 여행을 하면서 유심히 살펴보니 고택과 고문서 보존의 힘은 종부, 종손에게 있으며 이들의 에너지는 물려지는 토지의 힘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宗婦(종부)가 올바른 역사관, 문화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서 고택을 관리하고 고문서나 집안의 역사를 이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종손은 혈연이니 운명적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 책임감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집안에서 시집온 종부의 종부로서의 자세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덕혜옹주#영화]

 

덕혜옹주 영화를 남양주시 홍보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옹주의 일대기가 영화로 개봉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개봉하는 날 시청 간부들과 버스를 타고 영화관에 가서 주변식당의 갈비탕으로 저녁을 먹고 단체관람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벤허, 싸베지, 쿼오바디스, 골드 등 당대의 외화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방화도 단에로 보았지만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한국배우가 나오는 영화에서 고등학생이 큰 감명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음사전] Quo Vadis쿼바디스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솅키에비치의 장편소설(1896).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도피 중 그리스도의 환영을 보고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한 말이다.

중고생 시절에 해야 할일 몇가지를 제시하라면 부모님과의 여행, 영화관람, 사색, 독서라고 말하겠습니다. 간부들과 영화를 보면서 고교생 시절에 학생 단체로 영화 본 기억과 단독으로 영화를 보았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영화 덕혜옹주는 슬프지만 자랑스러운 내용이었습니다. 시나리오나 감독의 의견이 가미되었다고 합니다만 대한독립을 위해 각자의 처한 상황에서 노력하는 모습이었고 일본군 막사가 폭발하는 순간에 가슴 찡함은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작은 애국심이 심장 주변에 머물러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관람한 다음날 오전에 간부들로부터 관람소감을 모았습니다. 거기에 이런저런 자료를 첨가한 인쇄물을 만들어서 영화사와 배우들 주소로 발송했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남양주시청을 방문해 달라 초청했습니다.

당시 용석만 공보담당관이 지속적인 노력과 접촉의 결과 영화 제작자와 감독, 스텝 등 9명이 시청을 방문하여 이석우 시장님께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영화 덕혜옹주는 600만 관객이 관람했습니다.

(참고자료 : 누적관객수5,599,995 명 /2022. 09. 11, 역대 91위,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시장님 감사 인사 후에 점심을 대접하고 덕혜옹주 묘역 참배를 제안했습니다. 현장에서 얼결에 "덕혜옹주님께 묵념!"을 외쳤고 이를 용석만 담당관과 팀장이 촬영하여 언론에 보냈습니다.

이후 신문과 방송에서 경쟁적으로 남양주시에 덕혜옹주의 묘역이 있고 영화에 나온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영친왕이 잠들어 있음을 알렸습니다.

이 같은 홍보의 결과 다소는 엄격하고 관료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왕릉관리사업소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은 조선왕 27분의 왕릉사진을 전시했습니다.

덕혜옹주 묘역을 지나 영친왕 묘를 돌아가면 홍유릉으로 연결됩니다. 홍유릉은 홍릉과 유능이며 홍릉에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유능에는 순종황제와 두 분 황후님을 모셨습니다.

그 산책로에 설치된 조선왕릉의 사진전은 많은 시민과 관광객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언론 보도를 보고 경향각지에서 관람객이 몰렸습니다. 특히 초중생들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유독 선조왕의 이름위에 등산스틱의 스크라치가 많이 난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성곽관리사무소는 전시회를 마친 후에 그동안 비공개구역이던 덕혜옹주와 의친왕의 묘역을 일반에 개방하였습니다. 철조망 문을 열고 언제나 방문해서 덕혜옹주의 恨(한)을 함께하고 조국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게 하고 있습니다.

개방 기간동안 덕혜옹주 묘역에 올린 국화에 물을 보충해 달라는 편지를 써서 걸어가는 출근길에 입구 관리동에 전했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