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영박사의 장자강의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 장자강의 = 김해영 박사 ▩

 

장자강의 등 중국철학, 한국철학의 명저를 쓰신 김해영 박사님의 수요일 저녁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어느 날 수업중에 학생들이 발표하는 시간을 갖겠다 하십니다. 강의는 열심히 들으시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발표하라하면 손을 드는 학생이 없다하십니다.

 

적극행정 강사로서 기어이 손을 들었습니다. 할 말을 요약한 종이 한 장을 파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 내용을 어찌 정리할 것인가를 여기에 미리 글로 작성해 보고자 합니다.

 

제목 : 삶의 습관 / [2022년 9월 14일(수) 19:00~19:40]

 

김해영 박사님의 장자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수원시 태장마루도서관 지하 1층 강의실에서 10여명의 학동들이 만나고 있습니다.

 

강의에 참여하기 이전부터도 김 박사님이 학동들에게 개인의 생각을 강의를 통해 이야기해달라 주문을 해 왔던 바인데 대부분 나서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강의 1시간을 받아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저(이강석)는 농촌 마을에 태어났습니다. 농촌마을의 막다른 길가에서 성장했습니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까지의 기간중에 고압철탑이 건립되었고 1975년에 면 전체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었습니다.

 

저는 박지만 세대(학군)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는 해에 모든 학생은 관내의 중학교로 진학하라는 지침이 떨어져서 4km 거리의 중학교를 걸어 다녔습니다.

 

고등학교는 수원으로 유학을 했습니다. 중학교 담임선생님, 교무주임 선생님은 너희들이 본교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야 학교가 발전할 수 있다면서 원서접수 마지막 날 아침에서야 원서에 직인을 날인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수원으로의 유학길에 올라서 3년간 다니면서 유선 선생님, 이학재 선생님의 문학 강의를 들었습니다. 수성고등학교 1학년때 문학동아리 ‘야생초’의 창립멤버가 되었습니다.

 

수원성, 화성의 의미도 새기고 화성에 대한 시를 제출하여 화홍문화제에서 가작 상, 3등상을 받았고 그 여세로 경희대학교가 주최한 전국 고교생 백일장대회에서 4등상을 받아서 스스로 문학에 소질이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기대학과 후기대학 사이에 화성군청 5급을류, 지금의 9급 공무원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전후기 대학을 낙방하여 서울 광화문학원에서 재수생으로 재미있는 학원강의를 듣던 중 1977년5월16일에 발령을 받고 고향 비봉면사무소에서 공직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경직된 공무원 사회에서 42년간 근무를 하고 퇴직했습니다.

 

퇴직후에 여러가지 도전을 했습니다. 강원도 감사담당관 도전, 경기도체육회사무처장 도전, 수원시 행정2부시장 도전, 경기도 공보관에 도전했지만 모두 낙방하였습니다. 공직에 다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계약직을 뽑는 과정은 늘 그만한 前後(전후)와 左右(좌우)에 정해둠이 있습니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동안에 결정적인 사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일은 독도에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는 2박3일 행사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여름 휴가중에 연락을 받은 내용은 다음주에 도의원님을 모시고 독도 출장을 다녀오라는 것입니다.

 

이를 담당하는 과장이 있는데 이번주에 휴가를 가야하니 저에게 代打(대타)로 다녀오라는 협조요청을 받고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여비를 주면서 출장을 가는 것이니 반대할 일은 아니고 찬성할 이유가 아주 많았습니다.

 

목요일에 강원도 묵호항에서 1박하고 다음날 울릉도에 도착한 후 배를 바꿔타고 독도에 가서 일본의 교과서를 통한 부당한 역사 歪曲(왜곡)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糾彈(규탄)행사를 열었습니다.

다시 울릉도로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2일차를 맞이했습니다. 다음날 오전에 울릉도를 돌아보고 저녁 4시반경에 배를 타기위해 도동항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배표를 수령하러 간 주무관이 오지 않습니다. 출항 30분전이면 승선을 합니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배를 타고 기다리는데 우리 일행의 배표는 오지 않았습니다.

의원님들이 안내를 담당하는 담당관에게 빨리 배표를 가져와야 할 것이라 採根(채근, 어떻게 행동하기를 따지어 독촉함)을 하십니다.


그래서 컨테이너박스에 마련된 울릉도 여행사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가보니 여행사 젊은 직원과 우리측 주무관, 사무관이 대치중입니다. 대치가 아니라 茫然自失(망연자실)입니다. 배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없는 배표를 달라하고 없는 배표를 어찌 주는가 하는 상황입니다.

 

그 상황을 정리해보니 울릉도 여행사는 토요일 오후에 배를 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의회사무처의 여행계획은 수·목숙박하고 금요일에 돌아오는 2박3일인데 울릉도 여행사는 목·금 숙박을 하고 다음날 토요일에 승선하는 것으로 여행계획을 잡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여행사는 1일차, 2일차로 여행일정을 잡고 구체적인 일정이 잡히면 날짜와 요일을 수정해서 최종 여행계획표를 확정하는 줄 압니다.

 

그러니 2박3일은 안양 여행사나 울릉도 여행사의 입장에서도 맞는 바인데 우리는 강원도 묵호1박, 울릉도1박이었고 울릉도 여행사는 목요일과 금요일에 울릉도에서 숙박을 한 후 토요일 오후 배를 타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의원님들이 짐을 들고 기다리시는 항구로 돌아와 섬돌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오늘 배표가 없습니다. 저녁을 드시고 조금전에 나오신 숙소로 다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여성 의원 5분이라도 배를 타시겠다 합니다만 당대표가 단호하게 말합니다.

 

"죽어도 같이 죽는 거야!"

 

결국 50명은 배를 타지 못했습니다. 혼란속에 오후 6시가 되었으므로 항구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시는 동안에 우선은 의회사무처장님께 보고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무처장임은 교육동기인 경상북도 기획관리실장에게 배편을 부탁하고, 총무담당관은 역시 교육동기인 울릉군 부군수에게 돌아올 방도를 알아봅니다.

 

여기에서 저는 공보담당관입니다. 공보담당관이라 관명을 알리고 현지의 군부대 정문, 파출소에 달려가서 배편을 알아보았습니다. 군부대를 통화해 보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급한 마음, 황송한 생각이 말 그대로 東奔西走(동분서주), 左衝右突(좌충우돌)하면서 대책을 알아보았지만 모두가 不可能(불가능)합니다. 이미 퇴근시간이 지나고 있습니다.

 

방방을 다니면서 내일의 계획을 설명드리고 만나는 의원님마다 ‘죄송하다’ 말했습니다. 이처럼 큰 사건에 봉착한 것은 1998년 동두천 생연4동장으로 근무할때 11통중 10통의 집과 사무실이 침수된 이후 처음인 듯 생각합니다.

 

그렇게 밤 11시까지 동분서주, 좌충우돌하다가 어느 방에선가 쓰러져 잠이 들었고 새벽에 일어나서는 어묵과 김밥을 공수해서 아침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긴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오전에 울릉군수님과 부군수님이 위로방문을 오셨습니다.

 

경기도의회에서 의원님들이 울릉도에 오셨는데 이처럼 황망한 사건에 처하신데 대하여 군수님과 부군수님이 위로하시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냥 감사한 일입니다.

 

어제 총무담당관 교육동기이신 부군수님이 군수님께 보고드려서 함께 오신 줄 생각합니다. 사무실에 돌아와서 부군수님께 감사편지를 보냈습니다만 답변은 듣지 못했습니다. 답장을 하지 않으셔도 될 일입니다.

 

우리가 카톡으로 인사하다보면 여러 번 감사인사를 반복하는데 누가 먼저 마무리를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연장자가 마감하는 것으로 나름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울릉군수님이 대형버스를 지원해주시고 점심을 사주십니다. 오후에는 행정선을 타고 죽도에 가서 더덕과 우유를 갈아낸 더덕즙을 맛있게 시원하게 먹었습니다. 평생 오지 못할 竹島(죽도)에 온 것은 여행사의 미스매칭이 가져다준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최근에 방송을 보니 독도의 부속섬인 竹島(죽도)에 父子(부자)가 농사를 지으며 사셨고 부친 별세 이후에는 아들이 결혼을 해서 살고 아들을 낳아서 잘 키우고 있습니다. 더덕즙을 갈아준 이가 바로 厚德(후덕)하게 생기신 아버지의 아들, 아들의 아버지, 아내의 남편인 그 분이었던 것입니다.

 

상가에서 웃을 수 없듯이 이처럼 비상상황에서 다른 상상을 하는 것조차 송구한 일입니다만 운명적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미 오래전에 이런 사건이 정해져 있었고 그래서 竹島(죽도)에 올라와서 더덕즙을 마시게 되어 있었다고 운명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오후가 되어 일행은 24시간전 금요일의 그 모습으로 모두 도동항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배가 출발을 준비를 하는 상황에서 배표를 기다립니다. 역시 배표를 수령하러 간 주무관과 사무관이 오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의원님들이 애원을 하십니다.

 

"담당관! 어찌 배표를 가져오지 않는가?"

 

조급한 마음에 여행사로 달려갔습니다. 이번에도 여행사 담당자와 주무관, 사무관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행사 직원의 손에 배표 한 뭉치가 들여있습니다. 사무관에게 물었습니다. 빨리 배표를 나눠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여행사 직원은 배표를 쥐고 있습니다. 어제 묶은 호텔숙박비와 아침 식비를 내야 배표를 줄 수 있다고 합니다. 턴키(turn-key contract, package deal contract, all-in contract) 여행이니 여행사에서 숙식, 배표를 모두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 직원은 숙박, 식비를 받아야 표를 내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300만원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무관(2022년 지금은 서기관 4급 공무원)과 함께 농협 ATM이 설치된 농협으로 달려갔습니다. 금요일이 지나서 토요일이니 농협은 휴무이고 대신에 기계는 돌아갑니다. 왜 수표로 뽑지 않았는가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생각이 짧았습니다.

 

10,000원권 300장이면 장수를 세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제가 150만원, 주무관 150만원을 뽑아서 300을 만들어 여행사로 뛰었습니다.

 

허겁지겁하면서도 우리가 이렇게 해야하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사가 미스매칭으로 이같은 대 사건이 발생했으니 여행사 사장이 와서 사과하고 토요일 배표를 직접 드리면서 인사를 하고 그 경비의

 

는 다음에 사무처 공무원하고 조율하면 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훗날에도 양측 어느 여행사가 우리 경기도의회사무처에 와서 사과를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양 여행사, 울릉도 여행사는 큰 회사로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여행사 흥망에 도움을 주거나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을 알기에 과감히 속마음을 표현합니다.

 

300만원을 주고 배표를 받으려 하는 순간에 전화를 받은 여행사 직원은 그 아래 다른 식당에서 드신 식대 186,000원이 더 있다는 것입니다.

 

마침 개인 용돈으로 쓸까 해서 20만원을 뒷주머니에 넣고 왔습니다. 1만원을 제한 19만원을 여행사 직원에게 주었습니다. 직원은 더듬거리며 19장을 세어보고 있습니다. 그 순간 사무관은 표를 받아서 배전으로 달려갔습니다.

 

여행사 직원은 만원짜리 19장을 더듬더듬 세어보고는 책상서랍에 흐트러진 천원짜리 4장을 천천히 주워 모아서는 넘겨줍니다. 숨이 막히는 순간입니다. 배는 떠난다고 뱃고동을 하염없이 울려대는데 4천원을 거스름돈으로 받기 위해 기다리는 이내 마음은 타 들어갑니다.

 

평생에 정말로 이런 일은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돈 4천원을 여행사직원 책상위에 내 던지고 말았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군요."

 

저의 행동과 말에 語弊(어폐, 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오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잘하는 것을 일러 '잘 한다'하기도 하고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잘들 하는 짓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천신만고, 승선을 하여 배는 떠나고 4시간 정도의 여유를 갖게되자 의원님이 주신 양주 한병을 5명이 나눠마시면서 잠시의 휴식을 갖습니다. 그리고 다음을 걱정합니다. 우리의 배가 묵호항에 저녁 8시경 도착하니 이미 저녁 식사시간이 지나게 됩니다.

 

그런데 항구의 식당에 저녁을 예약하면 일행중에는 술을 드시는 분이 있을 것이고 밤 1시에 도착하면 대리운전 등 여러가지 쉽지 않은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항구에 도착하면 곧바로 짐을 들고 사무실에서 달려온 버스에 올라서 고속도로에 진입하도록 했습니다. 고속도로에서는 술을 팔지 않습니다.

 

손학규 도지사님을 모시고 강원도 동해시에 수해복구 지원을 갔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오후까지 열심히 복구지원사업을 펼친 공무원들이 버스 3대에 올랐습니다. 손 지사님이 버스를 돌면서 수고했다 격려를 하십니다.

 

버스안에서 도지사님은 총무팀장에게 말하기를 장거리 버스여행을 해야하니 가는 길에 소주 한 잔씩 권하라 하십니다. 총무팀장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준비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이사람아 고속도로에서 어찌 술을 파는가?

 

맞습니다. 고속도로에서는 음식을 팔고 음료수는 팔지만 주류는 판매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정해져 있나 봅니다. 이때 처음 알았습니다. 고속도로에서는 술을 팔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발지에서 승용차를 동원하여 인근의 가게에서 소주를 구매하여 차에 싣고 출발하였고 서울방면으로 가는 길이니 도지사님 승용차는 따라오도록 하고 버스에 오른 손학규 도지사님이 소주 반잔을 권했습니다. 돌아가서 차를 운전하는 직원은 받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아마도 도지사님은 다른 저녁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만 버스에 올라 봉사활동에 참여한 공무원들에게 소주 한잔을 권했던 것입니다.

 

소주를 권하면서 당시 홍보기획팀장이었던 저에게 손학규 도지사님은 ‘구라를 안치나?’물으셨습니다. 구라라는 말은 아마도 거짓말을 의미합니다. 농담으로 ‘구라를 친다’고도 합니다. 조크로 쓰는 거짓말을 의미합니다.

 

이는 긍정의 거짓말을 의미한다고 나름 해석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날 오전에 봉사활동을 점심을 먹으면서 동료, 선배들에게 몇가지 才談(재담)을 늘어놓았는데, 먼저 식사를 마치신 도지사님과 간부 일행이 저의 재잘거림에 귀를 기울이신 바입니다.

 

당시 이희웅 공보관이 ‘저 친구가 곁말을 잘 씁니다’라고 소개하였고 인터뷰 등을 통해 몇 번 접하면서 경기도청 사무관으로 일하는 것을 대략 아시는 바였습니다. 소통의 달인이신 손지사님은 참 재미있다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여기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경기도 소속이었다가 1995년 3월 인천광역시에 편입된 강화군에 ‘내가면’이 있습니다.

 

어느 해 어느날 토요일 오후에 내무부 출신 젊은 군수가 발령을 받고 기분이 업(up)되어서 읍면 행정전화를 통해 읍장과 면장과 인사를 나눴습니다. 일종의 신고식인데 누가 신고를 하고 누가 신고를 받는가는 당시의 문화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부정적 의미의 權威主義(권위주의)가 팽배하였던 시절이니 아마도 군수가 기강을 잡고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전화를 받은 면장은 군수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내가 면장입니다.”

 

당연히 군수에게 ‘제가 면장입니다’라고 전화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자신이 나이가 어려서 나이 든 면장이 ‘내가’라는 용어를 쓰는가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젊은 군수는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오늘 발령받은 郡守(군수)요!”

 

面長(면장)이 답했습니다.

 

“군수님 축하드립니다. 강화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내가 면장입니다”

 

면장은 ‘내가면(內可面, Naega-myeon)장’이라 말하는데 군수는 ‘내가 면장’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나씨성과 전씨성이 만나서 인사를 나눈 후에 언쟁을 벌였다는 조크와도 같습니다. 홍길동과 임꺽쩡이 만나서 인사를 한다고 가정해 봅니다. 홍길동은 나씨요, 임꺽정은 전씨로 설명합니다.

 

“나 길동이요.”

 

“전 꺽정입니다.”

 

길동이 반말로 인사하고 꺽정은 존대로 답하는 상황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체 높은 군수님이 전화를 했는데

‘제가 면장입니다’해야지 ‘내가 면장입니다’하니 거듭 들어도 반말로 들리고 젊은 사람이 군수로 와서 나이든 면장이 반말을 하는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사소한 언쟁은 몇 번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이후 상황이야 누군가 지어낸 말이니 결말을 알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그 명칭이 한자에서 나온 것이라면 다른 좋은 의미를 담아서 개칭함이 필요하겠습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경기도 안성시의 일죽, 이죽, 삼죽면입니다. 과거에는 죽일, 죽이, 죽삼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音質(음질)이 떨어지는 군청~면간의 전화통화에서 죽일면, 죽이면, 죽삼면 하는 말이 듣기에 거북했다 합니다. 그래서 이를 바꿔서 일죽면, 이죽면, 삼죽면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군부대가 많은 抱川郡(포천군) 군수님이 사단본부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위병소를 통과했습니다. 수행비서가 창문을 열고 ‘포천군수님이십니다’소개를 하니 위병은 본부에 전화를 걸어서 ‘포천군수 참모님 들어가십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군부대의 장교는 인사참모, 작전참모, 군수참모 등이 있으니 위병은 ‘포천군수’라는 설명이 군수참모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옹진군청의 어느 섬에 처음으로 군수님이 출장을 갔습니다. 수행비서가 배 멀미를 해서 자신도 챙기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군수님은 혼자서 배를 내려 군부대 검문을 통과했습니다.

 

수병이 일일이 주민등록증을 검사하는데 군수님은 주민등록증을 소지하지 않았고 수명에게 ‘나는 옹진군수’라고 말했습니다. 수병은 군수가 무엇인가 물었고 옹진군청 공무원이라 답하니 공무원증을 보자 했습니다.

 

결국 군수님은 공무원증을 제시했고 이를 받아든 수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군수? 공무원? 그런데 서기면 書記(서기)지 書記官(서기관)은 뭐야?”

 

이 섬에는 그동안 서기급 공무원이 출장와서 업무를 보았던 바인데 서기관은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웅평 조종사가 미그기를 몰고 귀순하면서 북한군의 장교 계급이 소개되었습니다. 소좌, 중좌, 대좌 등을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전경이 시민들에게 이른바 不審檢問(불심검문)을 통해 신분증을 검사했습니다. 마침 당시의 내무부 공무원중 5급 공무원이 신분증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공무원증에는 ‘토목기좌’라고 직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요즘으로는 토목사무관입니다. 당시 내무부 근무하시는 분들은 내무부라하지 않고 ‘본부’라고 했습니다.

 

경찰청의 전신인 치안본부가 본부이어서 내무부도 본부라 지칭한 것인가는 몰라도 내무부장관의 직접 지휘를 받는 치안본부는 장관은 물론 내무부 공무원들도 극진히 모시던 시절이었다 합니다.

 

그러니 내무부 공무원증만 보이면 경찰이 거수경례를 하던 시절입니다. 사실확인이 된 바는 치안본부장 출신 도지사 두분의 공관앞 파출소장은 늘 승진 1순위였다는 말도 돌았습니다.

 

실제로 공관앞에서 좌회전해서 출근하는 도지사 차량을 교통 통제를 통해 안내하고 경기1가1000번 차량 뒤편에 거수경례하는 파출소장님이 많았습니다.

 

도지사 사모님은 명절이나 행사가 있을 때 파출소 직원을 각별히 챙겼다는 후일담도 들었습니다. 도지사님이 공관으로 출퇴근하는 바로 오거리 앞에 파출소를 건립한 것도 나름 큰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내무부 사무관(토목기좌)는 공무원증 껍질만 보여도 不審檢問(불심검문)을 통과하는 것은 물론 거수경례를 받아야 할 처지인데 오히려 전경은 북한에서 온 사람으로 오해를 합니다.

 

토목기좌라는 직급명이 북한군의 중좌, 대좌와 매칭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분이 내무부 내부 토론의 기회에 참석해서 그날의 사례를 설명했고 제도의 개선을 건의합니다.

 

이 해프닝으로 제도가 바뀌어서 지금은 행정사무관, 토목사무관, 건축사무관, 보건사무관으로 개칭하였고 기좌(5급), 기정(4급)이라는 명칭은 사라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동료와 선배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뒤편에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들으신 도지사께서 재미있는 말을 한다는 통칭으로 ‘구라’라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명수 실장이 ‘구라계장’이라는 별칭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다시 동해시 수해복구 지원에 나선 버스로 돌아왔습니다. 이날 이렇게 구라계장이 되고 고속도로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는 것을 과거 손학규 도지사님의 사례를 통해 알게 되었던 바입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울릉도에서 추가 1박을 하신 도의원님들이 저녁에 술을 드시지 않도록, 술을 드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전략을 펴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술을 드시면 속마음을 표하게 되고 이 말이 일파만파가 되어서 전반적으로 집행부의 잘못을 성토하는 상황까지 가게 될 것을 우려한 바입니다.

 

저녁시각 9시에 가까워지니 첫번 휴게소로 들어갔습니다. 추측하는 바이지만 메뉴가 적습니다. 다음으로 주문을 하면서 의원님 메뉴가 먼저 나오도록 관리했어야 합니다.

 

공무원들은 지치고 송구스러워서 가장 쉽고 간편한 떡라면을 주문했습니다. 의원님중 다수가 좀 복잡한 메뉴를 주문했습니다. 공무원이 먼저 주문표를 넣었으니 떡라면이 나오고 그 다음에 의원님 식사가 나왔습니다. 공무원들은 10분 동안 충분히(?) 불린 떡라면을 떡처럼 먹었습니다.

 

버스를 달려서 의회에 도착하니 새벽 1시입니다. 어제 오후 5시에 비상걸려 나오신 사무처장, 담당관, 전문위원 모두가 24시간+8시간을 기다린 것입니다.

 

현장에 함께한 분들이야 이 과정을 겪어낸 바이지만 사무실에 비상걸려 나온 공무원들은 딱히 하는 일도 없이 하루에 8시간을 기다린 것입니다.

 

본 사건은 이렇게 토요일을 지나 일요일 새벽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습니다. 이후 언론 보도사건이 있었습니다. 더 크게 번지는 것을 함께 다녀오신 부의장님의 만류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종종 공무원 강의 소재가 됩니다. 더러는 주인정신을 강조하는 교보재가 되기도 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지만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로 위기를 넘기고 의원님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평생의 공직을 원만하게 마무리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여행사 직원은 자신의 일만 잘한 사람이라 평가합니다. 사장이나 간부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것은 비겁한 일이며 사업수원이 없는 이들이라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장, 간부가 찾아와서 사과하고 함께 했다면 다수의 도의원들이 울릉도 여행을 올 때 다시 연락을 하고 주변사람들에게 소개했을 것입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형상입니다. 큰 사건을 잘 마무리하니 신뢰가 높아지고 세상사를 깊이있게 深思熟考(심사숙고)하는 역량이 개발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여행사도 이 같은 상황에서 뒤로 숨을 것이 아니라 정면 돌파를 했어야 합니다.

 

여행사 직원은 배표를 볼모잡고 숙박비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배로 달려와서 한분 한분에게 배표를 드리면서 사과하고 안내했어야 맞습니다. 그것이 큰 인물이 되는 기회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나 봅니다.

 

2008년 8월의 일이니 2022년으로 따지면 14년전의 일입니다. 그동안 코로나19도 있고 여러가지 악재가 많아서 여행업이 힘들다 합니다만, 울릉도 여행사가 잘 되고 그 직원이 대리, 부장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현장에 나오지 않고 숨어있던 사장님은 더 큰 여행사로 키웠기를 바랍니다.

 

총무담당관을 대신하여 여행을 안내하였다고 마음속으로는 변명하려 했지만 의원님들께 잘못했음을 설명드리고 나름은 최선을 다한 바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훈장을 받고 정년퇴직하여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당시의 아찔한 상황속에서 책임성, 주인정신을 발휘했다고 강의에서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몇 번 강의소재로 이야기하고 주인정신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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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