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ne of the river side. 강가의 돌맹이라는 별명이 있다.
그리고 스스로 의인화한 애칭은 石水(석수)이다. 돌과 물이라는 의미다. 석수(이강석의 애칭)가 기억하는 나이는 5살 정도다.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경기’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지 숨이 막히고 벌벌 떠는 짓이다. 간질하고는 다르다. 어머니와 고모는 석수가 驚氣(경기)를 하면 찬물을 끼얹었다. 코를 빨아주면 경기가 풀린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기억나는 것은 고열과 토사다. 열이나면 그냥 옷을 벗기고는 업어주었다. 머리가 쪼개지듯 아프지만 아무런 대책은 없다. 그리고 토하면 엿기름을 먹였다. 이불에 토한 기억도 있다.
어려서 잘 몰라 그리했다고 지금도 반성한다. 이후에는 밖으로 나가서 토했다. 토하고 나면 속이 후련하였지만 이내 배가 고팠다. 인간하고는.
유치원이 생겼다. 그 당시 시골에는 4-H라는 것이 들어왔다. 손, 머리, 건강, 그리고 또하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농촌 계몽운동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1963년경에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나왕판자로 만든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다.
칠판은 청년들이 떼어내어 탁구대로 썻다. 화성시장을 지낸 김일수씨가 이 4-H운동을 들여왔고 우리동네에서는 심재중씨라는 분이 참여그룹의 주도자였다.
4-H운동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퍼졌다. 새마을운동 이전에 이미 시골에 회관이 생겼다. 그 당시로 표현하면 공회당이 맞을 것이다. 당시 초등(국민)학교 학생들은 여름방학 새벽에 이 마을회관에 모여서 체조를 했다.
방학숙제도 아닌데 아이들은 그렇게 해야하는 줄 알았다. 최근에 만난 이기선 아저씨는 종중의 종회장이시기도 한데 선친보다 1살 어린 분이지만 지금 92세다.
어려서의 기억으로 이기선 아저씨는 목수일을 하셨다. 소가 끌어 논을 갈아주는 쟁기를 직접 제작할 정도로 나무를 다듬는 실력이 있었다. 아마도 1963년경에 비봉면 자안1리 마을회관 건물을 지으셨단다. 그 마을회관 上樑(상량)에 건축의 글을 先親(선친) 이기승 아버지께서 쓰셨다고 알려주셨다.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해는 1965년인데 그해 이전부터 마을회관에서는 여름 새벽에 체조 구령이 들렸다. 흰 옷을 입은 아이들은 검정치마를 휘날리며 체조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출석을 부르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 참여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석수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이 체조는 없어졌다.
1964년에 이 마을회관에 유치원이 차려졌다. 동네 아이 8명정도가 유치원생이고 선생님은 고모, 동네 고모친구 등이다. 유치원이 생긴 이유는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나이였다.
한 6개월가량 운영되다가 어느날 어두운 표정의 고모는 그만 나오라고 했다. 없어진 이유도 알지 못한다. 다만 할아버지의 완고함이 원인일 것이다. 시집갈 나이에 유치원을 하고 있으니 그랬을 것이다.
1965년 봄에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다. 당시 청룡초등학교 1학년은 2반이었고 학생수는 120명 정도로 기억한다. 하지만 졸업때는 45명 정도였다. 요즘에는 한동네에서 초등학교 6개 학년을 모두 채우지 못한다고 한다. 학년당 1명이나 0명인 것이다.
1965년이면 농업이 중심이 되던 때였다. 그후 1968년부터 1971년까지 離農(이농)현상이 심화되었다. 젊은이들은 서울로 가고 결혼하면 도시로 이사를 갔다.
아이들의 부모들도 직장을 찾아 서울로 수원으로 많이 이사를 했다. 하지만 석수는 굳세게 청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비봉중학교로 무시험 입학했다.
중학교 생활은 새로운 것이 많았다. 매시간 선생님이 바뀌고 교복을 입고 그리고 홍건표 교장선생님은 일주일에 세 번 월수토에 왕자봉을 달리라 했다. 3년내내 매주 3회 달리고 뛰었다. 중학교 과정에서 유도를 배웠다. 교장선생님은 유도 8단이고 체육 장석표 선생님은 5단이었다.
학급은 A반, B반, C반으로 편성되고 B반은 남녀혼성이다. 석수는 1학년 남자반, 2학년 남녀반, 3학년도 남녀반으로 공부했다. 열심히 공부하기보다는 유도에 취미를 갖게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도 열심히 체육관에 나갔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3월31일 토요일 유도시간에 동료와 시합 연습을 하다가 왼쪽 다리 골절 부상을 입었다.
수원에 기독병원이 있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그냥 생각없이 2달반 있다가 오라해서 그냥 집에서 쉬었다. 간간히 공부도 하고 책도 보기는 하였지만 별 생각없이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중학교 3학년 1학기가 다 지나갔다.
고교 입시를 해야하는데 큰형이 수원에 있는 수성고등학교 원서를 가져다 주면서 여기가 좋겠다고 했다. 비봉중학교에서는 본교 고등학교를 들어오라고 하면서 원서를 작성해 주지 말도록 담임선생님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원서마감 전날까지 우리는 기다렸다. 결국 원서를 써주지 않아서 우리는 면 소재지에서 자장면을 사 먹고 교실에서 잠을 자면서 원서를 기다렸다.
결국 학교는 손을 들고 원서를 작성해 주었다. 고등학교에 접수하러 갔더니 당시 이병기 수성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나에게 다리 다친 것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교육청에 신청을 하면 교고 입시시험 점수에 비례한 체력장 점수를 준다고 했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때 화성군 교육청을 처음으로 가 보았다. 그리고 골절상 상태를 보였더니 통과시켜 주었다.
1974년은 고교입시 시도별 제한이 실시되었다. 즉 자신의 출신 시도에 고등학교를 가는 것이다. 서울은 물론 안되고 인천도 구분되었다. 사실 서울이나 인천에 고등학교를 갈 실력은 안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수성고등학교 입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수원시내 중학교는 반별 상위 10위권만 수성고등학교 원서를 써 주었다고 했다. 겁 없이 들이대서 어렵게 합격했다. 참 좋았다. 입시번호가 ‘한79’였는데 그 번호옆에 합격이라고 나와 있는 게시판을 보고 참 즐거웠다.
고등학교 생활은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우선 집에서 나와 송죽동 이모님댁에서 다녔다. 엊그제까지 중학생이었는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다른 가족 틈새에서 살아야 했다.
학교생활도 새로웠다. 우선 입학식한 후 교실에 들어가니 난로가 있는데 49공탄인가보다. 3개씩 들어간 난로는 참으로 따스했다.
초등학교때 솔방울을 주워다 냈던 기억이 있고 그 솔방울로 조개탄에 불을 붙이던 초등학교 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고등학생들에게 솔방울도 없고 조개탄도 없이 그냥 등교하면 뜨끈한 난로가 반겨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미리 올라와 경기도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동창들을 만났다. 즉 각 시도 출신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제주도 출신만 없는 것 같았다.
수성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수업방식이 특이하다. 수학선생님, 독일어 선생님, 영어선생님, 국사선생님, 특히 생물선생님의 암기방식이 재미있었다. 세남변편규접록갈홍차조자담선양종.... 극척척. (동물의 계통수를 외우는 방법)
고등학교를 졸업한지가 32년인데 머릿속에 남아있으니 참 대단한 교습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또 있다. 옥구에사는이옥아수포능가자. (영양소의 싸이클을 외우는 방법)
고등학교 3학년에 예비고사가 있고 본고사를 보게 되었다. 1차 본고사에서 서울에 어느 대학에 국문과를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후기대학도 국문과를 보았으나 떨어졌다.
그리고 전후기 시험 중간에 공무원시험을 보게 되었다. 당시 동네 이장님께서 5급을류 공무원 뽑는다는 면사무소 공문서를 그냥 가져오셔서 시험을 보라했다. 그래서 목표없이 그냥 공무원시험에 응시하였고 합격했다.
발령이 바로 나는 것은 아니었다. 재수생으로 서울 광화문학원을 다녔다. 이번에는 서울 성동구에 사시는 그 다음 이모님 댁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니 좀 머리가 굵어진 후이니 어느정도 분위기를 파악하는 수준이었다.
1977년 5월 어느날, 학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 전화가 왔는데 발령이 났다는 것이다.
1977년 5월 16일에 오산에 있는 화성군청으로 오라는 것이다. 사촌누나들은 반대했다. 이화여대, 서울대 출신의 두 누나는 재수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고 이모님은 중간이었다.
결국 15일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어머님이 올라오셨다. 어머니는 차마 공무원 발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동네 어르신들이 참 좋은 기회를 버리는 것이 아깝고 우리동네 출신이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신다는 뜻을 전해 주시는 정도였다.
발령을 받기로 했다. 일단 수원으로 가서 1박하고 다음날 아침 군청으로 갔다. 14명 정도가 발령을 받게 되는데 여성공무원도 2명이 있었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그들끼리는 참 친하게 대화를 나눈다. 나중에 알고보니 성적이 우수한 선발조였다. 나만 교육받지 않고 우선 발령을 받는 것이었다.
발령장을 들고 비봉면사무소로 갔다. 지금도 화성시청에서 국장으로 일하시는 선배가 ‘이서기’라고 말하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으로 치면 9급 공무원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고 현재와 비교해 보면 당시 얼마나 대단한 직장에 취직을 한 것이었던가?
한달에 100만원이 안되는 돈을 받으며 비정규직으로 8개월정도를 근무하기 위해 응시하는 자들의 면접을 보면서 절절하게 느끼는 바이다.
서무담당자로 1개월여를 근무했다. 1977년 5월부터 6월중순까지 30여일을 정신없이 근무하였는데 어느날 벼락치는 일이 일어났다. 산업계로 발령이 났는데 축산, 양정, 상공, 수산, 잠업, 관정 등 잡무를 모두 담당하게 되었다.
사표를 냈다. 재수생으로 올까말까 하다가 마지못해 발령받고 온 판에 산업계로 가라니 말도 안 될 소리다. 그 순간에도 내가 좌천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불과 한달전에 인계인수 받은 서류가 있으니 그대로 작성하면 될일이다. 먹지를 대로 미농지로 3매를 눌러서 쓰면된다. 인수자는 비우고 입회자는 총무계장으로 했다.
사표도 써서 도장을 찍은 후 봉투에 넣었다.
이렇게 썼다.
사표서!
지방행정서기보시보 이강석
위 본인은 비봉면사무소 공무원을 그만두겠습니다.
1977년6월15일 위원인 이강석(인)
비봉면장 귀하.
그날 저녁에 선배들은 이번 발령에 대한 이런저런 촌평을 하면서 두부김치에 막걸리를 마시며 면장, 부면장, 총무계장을 성토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소주가 귀했고 농주가 흔했다. 그리고 안주는 두부김치가 대부분인데 특식으로는 생돼지 비게를 넣어주었다.
선배형에게 사표서와 사무인계인수서를 던지듯 전하고 부리나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뒤에서 ‘야! 이서기!!!’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날따라 여름비는 왜 그리 구성지게 내리던지.
사무인계서 쓰고 정리하느라 시간이 걸렸던지 집에 도착하니 농사일에 힘이 드신 어머니는 주무시다가 아들을 맞이하셨다. 내 표정을 보시더니 무슨 일이 있느냐 하셨다. 그래서 공무원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이유를 말씀드리니 그러면 다시 재수생으로 서울에 올라가라 하신다. 광화문학원 책을 다시 챙겨두고 내일 아침을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서울로 올라가려고 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이 갈렸다. 첫차를 타지 않고 두 번째 차를 타기로 했던 것이다. 당시 시골에는 하루 4번 차가 지나갔다.
오전에 두 번, 오후에 두 번인데 오전 2번째 버스를 타고 비봉으로 나가서 서울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당시 서울가는 버스는 머리에 붉은 띠를 하였고 붉은 띠가없는 버스는 수원행이었다.
그런데 이제 짐을 챙겨 일어서려는 그 시각에 49CC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부면장님과 담당서기님인 권병춘 선배님이 집에 오신 것이다. 부면장님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40년 공무원 경력의 화두를 던지신다.
“어머님! 귀한 아들 데려다가, 정말 죄송합니다.”
무엇이 죄송한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낮추고 들어오시니 어머니 답변은 그 말씀에 맞춰진다.
“제가 더 죄송합니다. 아들이 제대로 일을 못해서.”
却說(각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그만두고 화제를 돌려 다른 말을 꺼낼 때, 그 첫머리에 쓰는 말)하고 다음 날 출근했다. 그리고 곧바로 면장실에 불려갔다. 거창한 1인용 소파 2개가 있는데 여기에는 면장님과 부면장님이 나란히 앉고 나는 3인용 소파 가운데에 앉았다. 여름 숙직 근무할때에 더우면 베고 누워서 시간을 보낸 소파다.
홍무표 면장님 말씀이 시작되었다.
“네가 자안리 이명의 어르신 손자로 명문가의 자손인데 우리가 잘 모시지 못한 것은 할아버지께 참으로 송구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네가 원하는 자리를 말하면 조건없이 그 자리에서 일하게 할 생각이다.”
나는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한마디 첨언했다. 정말 잘한 결정적인 한마디였다. 하지만 누구나 그 상황에서는 이 답변을 해야 했을 것이다.
“면장님께서 발령하신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래야 잘한 것으로 느껴졌다. 역시나 면장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그러면 그렇지, 네가 이명의 어르신 손자로서 그러면 그렇지, 훌륭한 집안의 자손이니, 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냥 밀어붙이시더니 대화는 이상 끝이다. 그래서 공무원으로서는 사표를 낸 해프닝이 종료되고 산업계 근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번더 사표를 내기 직전짜기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산업계에서 한 달 정도 근무하였는데 군청 잠업계에서 김기태 주사님이 출장을 와서 점검을 시작했다.
전임자는 없고 내용은 모르겠는데 잠업관련 서류, 대장, 출장결과, 지난해 실적 등 도무지 알수 없는 자료를 요구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점검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마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에 슬그머니 사무실을 나가서는 뒷산에 올라가 한 3시간 땡땡이를 치고 말았다.
저녁늦게 사무실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고 점검관도 돌아갔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별일이 없었다. 그래서 계속 근무를 하였다. 그후 사표서를 써낸 일은 없었다.
업무중에 管井(관정)이라는 것이 있다. 가뭄에 물을 대기 위해 논이나 밭을 깊이 파내어 흄관을 묻어 설치한 일종의 수원지이다. 그리고 그 물을 퍼내려면 양수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정비하고 보관하는 일은 산업계장의 임무이기도 했다.
어떤 공무원이 관정에 얽힌 사연이 있다. 이 공무원의 동생은 자신의 형이 면서기인 것이 늘 자랑스러웠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끔 면사무소 이야기를 하였던 바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생 친구들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존경과 자랑의 대상인 형이 다른 면서기들과 페인트 통을 들고 지나가는 것을 친구들과 함께 遭遇(조우)한 것이다. 저녁에 집에서 만난 형에게 동생은 아버지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형은 면사무소에서 하는 일이 페인트 칠인가봐?”
사실 얼마 안되는 예산으로 관정을 관리하려니 공무원이 페인트를 사서 직접 칠해야 했다. 관정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고 4미터 속에서 흙을 퍼내고 양수시험을 하고나서 페인트칠을 해야 일을 마치는 것이다. 요즘도 등산로에 보이는 헬기장도 이때 산 정상에 올라간 공무원들이 설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당대의 공무원들은 김종필 총리의 정치역정처럼 ‘자의반 타의반’으로 근무했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늘 공직자로서의 자긍심이 가득했다. 2022년 공무원에게 그 당시의 공무원 DNA가 조금 전해졌으면 한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