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4세 공무원 6급으로 예산부서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예산편성은 전투적이었습니다.
도의회에 예산안을 제출하는 날은 법령에 정해져 있으므로 8월부터 시작해서 11월초에 마무리되어야 하는 대 役事(역사)입니다. 아주 대단히 큰 일입니다. 지금도 숫자로 쓰고 있는 당시의 예산규모를 외우고 있습니다.
2022년 화성시 추경예산이 4조원이라는데 1992년, 30년전에 경기도 일반회계 예산규모가 2조원을 조금 넘었습니다. 지난날의 돈과 오늘의 재산은 상호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결혼식에 10,000원을 내면서 큰 돈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100,000원을 내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금액적으로는 그러하겠지만 업무적으로는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일하는 방식이 요즘의 공직사회와는 달랐으니, 당시는 마치 군부대의 중대장, 선임하사, 교관, 보초병, 소총수가 깊은 산속에 자리한 군 막사에서 벌어지는 군대와도 같았습니다.
특히, 업무에 열정이 넘치는 선임이 그런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이분이 떠난 후에는 일하는 방식이 변하고 주사보, 7급 중심으로 업무의 중심이 이동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무관이 팀장이 되는 부서가 증설되면서 파트별로 업무를 분장하였습니다.
2022년 현재의 예산편성이나 집행이 과학적이라 평가합니다만, 당시에도 예산편성은 사업을 면밀하게 분석하는 사업카드가 있었습니다. 특히 시설공사의 경우 기본설계, 실시설계, 감리 등 용역, 시설공사비, 토지매입비, 시설부대비 등 예산의 쓰임에 대한 상세한 분류를 했습니다.
이 사업은 언제 시작되었고 이미 투자한 금액은 얼마이며 올해예산에 얼마를 반영하며 앞으로 예산을 더 투자하여 준공한다는 계획을 한눈에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지사, 도지사는 사업계획서를 보고 결재를 하고 결재가 나면 그 내역에 따라서 예산을 편성합니다. 예산항목에 맞춰서 금액을 써넣은 작업을 예산의 조립이라 했습니다.
처음 예산부서에 들어가서 보니 예산편성은 하지 않고 사업카드 작성에만 열정을 보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예산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산사업에 대한 분석에만 수개월째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일주일 정도 날을 잡아서 기획관리실장 결재를 받고 부지사를 거쳐서 드디어 도지사 결재를 받았습니다. 1992년이면 대략 지방자치가 시작되는 해입니다.
이전까지는 (유신)憲法(헌법) 부칙에 따라 지방의회는 통일될 때까지 구성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헌법이 개정되었고 지방자치법, 지방재정법에 예산편성과 의결의 규정이 신설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지방의회 기능을 상급기관이 대행했던 것입니다. 시군의 예산편성에 대해서는 도지사가 결재하여 승인했습니다. 우선은 시군예산 승인과정을 보겠습니다.
아마도 연말 10월부터 시군 예산계 실무자 2명정도는 팔달산 도청 인근의 감포여관, 대도여관, 설악산장여관에서 장기 투숙을 하면서 예산 심의를 받았습니다.
이들 장기투숙과 작업전문 여관에는 보르네오섬에수 수입해온 나왕나무로 만든 작업 식탁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잔치할 때 쓰는 교잣상 모습이지만 폭이 좁고 가로가 더 길어서 긴 서류를 올려놓고 주판으로 계산하기에 편리합니다.
이 상위에 서류와 부책을 올려놓고 숫자 작업을 하기도 하고 다방커피를 주문해서 마시며 쉬기도 하고 더러는 자장면을 먹었습니다.
종이를 칼로 잘라서 편집작업을 하기에도 유용했습니다. 상바닥이 칼에 긁혀도 크게 마음 아프지 않은 다용도 장비입니다. 여러가지 용도에 쓰이는 작업용 밥상위에서 밤 늦게까지 일을 하다가 3개를 3층으로 포개놓고 남은 공간에 이불을 펴고 잠을 청한 후 새벽에 일어나서 또다시 숫자 더하기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경기도청 인근의 여관에서는 돈을 들여서 멋진 교잣상을 제작하고 시군청 공무원을 초빙했습니다. 도청 여러부서에 비공식적인 홍보전략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장기작업에 편리하고 가끔 도청에 올라가기에 편리한 인근의 여관이 성업했습니다.
공무원들은 여비를 받아 숙박비를 지불했고 작업기간이 길어지면 도청 관련부서에서 과장 결재를 받아 기간을 연장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 작업은 비교적 가까운 시청의 공무원 3명정도가 남아서 종결지었고, 그 경비를 하루전 미리 집으로 퇴근하는 동료 공무원들이 醵出(갹출, 같은 목적을 위하여 여러 사람이 돈을 나누어 냄)한 돈으로 처리하였습니다.
다른 부서에 7급으로 근무할 때에도 세입을 합산하는 여관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팀장님, 5급 사무관께서 왜 여관에서 일하는가 하십니다.
도청 회의실을 활용하면 될 것이라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시군 공무원들은 도청 인근에서 숙식을 하는 작업을 명받고 왔습니다.
사무관님은 낮에 도청 회의실에서 작업을 하고 저녁에는 각자 여관에서 잠자고 다시 출근하는 방법을 제안하셨습니다. 하지만 대단히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결국 사무관께 건의해서 여관에서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시군청 공무원들도 찬성했습니다.
도청 회의실을 작업실로 확보하는 것도 여려운 일이지만 하루종일 딱딱한 의자에서 일하기 보다는 이불 펼치고 베개를 등받이로 쓰면서 두 발 펴고 일하는 여관작업이 효율적입니다. 피곤하면 잠시 낮잠을 자기도 하고 밖에 나가서 자장면을 먹으면서 체력을 보충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공무원들은 대부분 여관작업을 하였습니다. 이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가족들은 도청, 시청에 근무하는 아버지들이 왜 여관작업을 하는가 궁금해 했습니다. 이런 여관작업은 행정기술중 하나인 엑셀프로그램이 보급되면서 크게 줄었습니다.
엑셀이라는 프로그램을 시군청에 보내고 수식을 입력한 후 경기도내 31시군의 것을 하나로 합산하면 수분안에 끝나는 일이 된 것입니다. 이후 여관작업은 기획부서, 사진 등 보고서 작성, 조례개정 등 일반 행정 업무의 경우에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예산편성과 심의과정에서의 에피소드입니다. 앞서서 시군 예산을 도에서 승인한다 설명드렸습니다. 시군청 예산을 편성하여 검토한 후 도지사 결재를 받아서 승인합니다.
그래서 과거 임명직 도지사는 12월31일 오후 2시에 이른바 '종무식'을 한 후 각 부서를 돌면서 막걸리나 가벼운 술 몇 잔을 하신 후에 그해 마지막 업무로 가장 중요한 시군 예산을 승인하는 결재를 했습니다.
당시에 예산을 관리하는 부서는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기획관리실 예산계에서는 본청과 도청 사업소 예산을 관장하였습니다. 내무국 지방과 기획예산계에서는 시군예산을 검토, 조정, 승인하는 업무를 했습니다.
예산계(기획관리실)에서 도가 시군에 보낼 예산을 정해주면 기획예산계(내무국 지방과)에서 보조내시를 합니다.
보조내시란 이만한 금액을 이런 사업용으로 보낼 것이라는 추정액을 공식 문서로 알리는 것입니다. 시군청은 도지사의 보조내시 사업을 우선 반영합니다. 보조내시에는 반드시 시군예산 부담을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보조내시서에 따라서 편성된 예산안을 기획예산계가 수개월동안 검토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꼭, 하필, 왜 그랬는가 몰라도 법령에 의한 도지사 승인 결재는 종무식 이후에 진행되었습니다.
거창하게 준비한 서류와 자료를 진열한 도지사실에서 염보현 지사가 호기있게 결재를 진행합니다. 수개월동안 100여명이 작업한 결과입니다. 사실 예산편성 과정에는 재직 공무원의 50% 이상이 수개월간 참여하는 큰 행정 업무입니다.
도지사님이 싸인펜을 들고 호기있게 질문을 합니다.
"내년도 도와 시군의 예산은 얼마인가?"
"도가 3조원, 시군이 5조원입니다"
"그럼 이것을 내가 결재를 해야 하나?"
"예, 지사님! 내년도 사업을 잘 추진하겠습니다“
”음~ 그러면 싸인을 해야겠구먼.“
사실 종무식날 반드시 결재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다음날인 1월1일부터 시장·군수가 업무추진비를 집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업비는 1월 3일 시무식에 집행을 시작해서 1년내내 공무원들은 매일매일 예산회계 업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급식비 등 일상적인 비용을 대부분 현금으로 집행하였습니다. 물론 카드로 집행하는 경우라도 예산이 배정되고 회계장부에 현금이 들어와있어야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파악해 보니 법인카드는 집행당일 현금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대략 10일 정도의 여유기간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부서나 비서실에 예산 배정이 있다면 도지사의 승인이 없어도 법인카드로 필요한 경비의 집행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정한 공무원들은 장부에 예산이 배정되고 회계부책에 돈이 들어와 있어야 집행을 하게 됩니다. 여러명의 실무자와 책임 결재권자가 합동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엄중한 시스템속에서도 수십억을 말아먹은 공무원의 비리사건이 보도된 바 있습니다. 회계비리 공무원이 대단한 것인지 감독자가 소홀한 것인가는 각각의 경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만 요즘에는 보안시스템이 보강된 것일까, 큰 사건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예산의 승인과정은 광역자치단체인 도와 내무부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도가 시군의 예산을 승인하는 것처럼 서울특별시, 경기도의 예산은 내무부장관이 승인하였습니다. 내무부는 과거 총무처를 흡수하고 행정안전부였다가 행정자치부였다가 이제 다시 행정안전부입니다.
2022년 최근에 행정안전부가 경찰국을 크게 신설하면서 경찰청과 충돌하고 전국적인 반대시위, 삭발투쟁이 벌어졌습니다만 결국 정부의 권력, 장관의 힘은 막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정안전부장관이 대학과 고등학교의 지방이전을 발표해서 또한번 혼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기획관리실 예산계 실무자들은 내무부의 예산승인을 받아서 차를 타고 달려와 도지사에게 이 기쁜 소식을 보고하고 각 부서를 불러 모아서 다음해 예산을 배정해 주면서 전장에서 승리한 병사처럼 호기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내무부 작업방은 필운여관이 유명했습니다. 이곳에서 3개월정도 도청 인근 여관과 같이 보르네오 나왕 교잣상에 일한 결과가 예산안의 승인이라는 열매인 것입니다. 전산시대 요즘에는 행안부 승인이 아니라 의회의 승인을 받습니다.
그래서 의회의 예산승인 과정에 대한 기억을 모아 보겠습니다. 8월부터 편성작업을 시작해서 마무리하여 조립한 예산안은 대략 11월초에 도의회에 제출합니다. 예산안을 제출하고 도지사가 시정연설을 통해서 그해의 도정의 성과를 말하고 다음해의 예산규모와 투자 우선분야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도지사가 분야별 예산투자의 방향을 말하고 각론은 기획관리실장이 본회의장에서 설명을 합니다. 정부도 국회에서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하고 예결위에서 각부장관이 해당 예산을 설명하는 것처럼 도에서도 도지사의 보고에 이어 상임위원회별로 실국장이 예산내용을 설명합니다.
실국과 상임위간의 예산설명이 끝나면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시작됩니다. 예결특위라고 줄여서 표현하고 상임위는 예비심사, 예결특위는 본심사입니다. 상임위에서 증감한 예산내용이 예결위로 보내지지만 각 상임위원회에서 2명씩 추천된 예결특위 위원들은 원점에서 다시 예산안을 검토합니다.
예결특위 위원들이 국장의 설명을 듣고 예산내용을 파악한 후에 소위원회 5인을 구성합니다. 소위원들은 특위 위원들이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나눈 국장과의 대화내용을 바탕으로 조율을 시작합니다.
지방자치법에서 의회는 집행부가 제출한 예산안의 금액을 삭감, 축소할 수 있지만 증액의 경우에는 집행부, 즉 경기도 기획관리실장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기획관리실장은 의회의 증감내역을 도지사에게 보고하고 증액부분을 동의하겠다는 사전 결재를 받습니다. 도지사의 의사를 기획관리실장이 대신 전달하는 것입니다. 의회는 집행부의 동의를 받아 증액하고 감액해서 예산안을 예산으로 의결하여 집행부로 보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당시 예산계장님들의 시군 예산안 심의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규모가 유사한 4개시를 나란히 앉혀놓고 101 급여부터 마무리 지원제비까지를 逐條審議(축조심의, 한 조목씩 차례로 모두 심의함)합니다.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비교하고 평가해서 결정을 내리는 과정입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