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는 것을 등산이라 합니다만 登山(등산)을 하고나면 반드시 下山(하산)을 해야 합니다.
산 정상에서 근무하는 구조구급 요원이나 3박4일 등정을 하는 경우라면 오늘 등산하고 그대로 머물 수 있지만 당일치기 등산가는 어느 방향이든 그 산을 다시 내려와 도시, 평지나 해안가에 자리한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등산을 하면서 하산을 하면서 인생을 되짚어보는 기회로 삼습니다. 조금전에 힘들게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갈때는 참으로 수월합니다.
힘들게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온화한 미로소 인사를 합니다. 열심히 올라가시면 정상을 만나고 그곳에서 잠시 머문 후에 다시 이 길을 따라 내려오시라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모든 등산객들이 그러합니다. 이는 마치 인생을 살아가면서 대략 60을 정점으로 생각하면 65세쯤에는 산을 내려오면서 열심히 땀흘리며 정상을 향에 걸음을 옮기는 50대 후반들의 모습을 보면서 10년전 자신의 모습을 겹치게 보면서 마음속으로나마 응원을 보냅니다.
그리고 2시간 전에 이 등산로를 오를때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듯이 내려 갈 때에도 굴곡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산길에서 만나는 또다른 의미의 오르막은 짧고 걷기에 쉽습니다. 온몸이 등산으로 내공이 쌓여있기에 웬만한 하산길 오르막은 쉽게 잡아챌 수 있습니다.
운전할 때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면 내리막에서도 가속을 해서 부드럽게 오르막을 지나가면서 이를 잡아챈다고 합니다. 자전거의 경우에는 더더욱 적정하게 발휘해야 할 테크닉입니다.
등산했다 하산하여 주차장에 도착하면 3시간전 그 차량이 주인을 기다리고 손목시계에는 13,638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통상 10,000보를 걸으면 온몸이 개운한데 조금 더 채웠으니 기분좋은 뻐근함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니 역시 집이 좋습니다.
인생은 늘 오늘을 살고 이 순간을 맞이합니다. 과거는 기억되지만 갈 수 없는 공간이고 미래는 예측은 하지만 사전 방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초침과 분침을 꾸준히 모아서 24시간을 걷고 숨 쉬고 밥 먹고 생각하며 보낸 후에야 다음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등산로를 걸었던 것은 지난 과거, 오전의 일이고 이런 기록을 남기는 시각은 그날 오후입니다. 벌써 2시간 이상이 또 지나갔습니다.
몸은 등산의 효과를 바탕으로 뻐근 시원하고 정신은 맑아지니 할 말을 정리해서 훗날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 하루는 아름답게 인생위에 축적되고 있습니다.
아내와 차를 타고 융건릉을 참배하고 주변을 산책하였습니다. 220년전 조성된 (정조대왕, 1752~1800, 제22대) 두분 왕릉은 최근에 여러번 내린 비를 맞아 잔디조차 윤기있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관리된 소나무는 그 긴 세월의 축적된 年輪(연륜)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잘 자란 소나무 숲길을 거니는 것은 아마도 화성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힐링의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략 250년 전후의 소나무가 풍겨주는 중후한 멋과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는 어떤 영향력이 이 길을 차 타고 표 사고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하고 조금도 손해스럽지 않은 이익스러운 일임을 자임하게 해 봅니다.
일상의 무료한 삶에서 잠시 외출하여 가까운 이곳에서 즐기는 늦은 여름날 오후의 멋스러움에 스스로 빠져드는 모습은 마치 南柯一夢(남가일몽), 一場春夢(일장춘몽)에 나오는 작은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여유스런 결정을 한 오늘의 산책에 큰 만족을 느끼는 바이기도 합니다.
[인터넷] 남가일몽 南柯一夢 : 남쪽 가지 아래의 한바탕의 꿈. 한갓 허망한 꿈 또는 꿈과 같이 헛된 한때의 부귀와 영화를 비유하는 말이다.
당(唐)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술을 좋아하고 작은 예절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어느 생일날, 홰나무 아래서 술자리를 차리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대취해 쓰러지자 친구들이 그를 집에 들여다 행랑에 눕혀 놓았다.
그런데 보라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오더니 괴안국(槐安國) 왕의 명을 받들어 모시러 왔다고 말했다.
순우분은 사자들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홰나무 아래의 큰 굴속으로 들어갔다. 굴속에 들어가니 또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수십 리를 가자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번화한 성읍이 나타났는데, ‘대괴안국(大槐安國)’이라는 금색 현판이 걸려 있었고, 승상이 나와 영접을 했다.
순우분은 왕궁에 들어가 왕을 알현하고 그 자리에서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남가군(南柯郡) 태수로 임명되었다.
순우분은 남가군에 부임하여 30여 년 동안 다스리며 위로는 왕의 총애를 받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5남 2녀를 두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단라국(檀羅國)이 쳐들어왔다.
순우분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맞아 싸웠지만 연전연패하고 말았고, 공주도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는 낙담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서울로 왔는데, 그의 명성을 기리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세력이 날로 커지자 괴안국 왕은 불안을 느끼고 순우분에게 말했다.
“그대는 집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으니 잠시 고향에 다녀오는 것이 어떤가? 자손들이 여기에 남아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3년 후에 그대를 맞이해 오겠네.”
왕이 순우분에게 물었다. “저희 집은 여기인데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자네는 원래 인간 세계의 사람으로 집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네.” 두 명의 보라색 옷을 입은 사자가 순우분을 배웅했다.
순우분은 동굴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자기가 행랑에서 자고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일어나 보니 하인은 정원을 쓸고 있었고, 친구들은 옆에서 발을 씻고 있었다. 순우분이 사람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모두 기이하게 여겨 홰나무 아래를 파 보니 커다란 개미굴이 하나 있었는데, 개미들이 가득 모여 있었고, 커다란 개미 두 마리가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의 서울이며, 커다란 개미 두 마리는 국왕 부부였다. 또 하나의 구멍이 남쪽 가지 쪽으로 뚫려 있어 파 들어가니, 남쪽 가지 사십 척쯤 거리에 개미 떼가 또 있었다.
여기가 순우분이 다스리던 남가군이었다. 순우분은 구멍을 원래대로 고쳐 놓았다. 다음 날 아침에 가 보니 밤에 내린 비로 개미굴은 허물어지고 개미도 없어졌다.
다시 융건릉과 연결되는 용주사에 들어가서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대웅전에서 9배를 올리며 다시 삼성각에서 3배 인사를 하는 여유를 가져봅니다.
심야에 불탄 孝成殿(효성전)이 다시 건립되어 정조대왕의 효심을 우리의 가슴속에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터넷] 용주사 효성전 [龍珠寺 孝誠殿]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용주사에 있는 건물이다. 조선시대의 장헌세자(사도세자)와 정조, 효의왕후의 위패가 있는 곳이다.
용주사는 정조가 부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했기 때문에 일반사찰과는 달리 ‘효(孝)’와 관련된 건물과 유물이 많은데, 효성전도 그런 곳 중 하나이다.
효성전에는 정조와 사도세자의 위패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위패도 있다.
내부 벽에 ‘부모은중경’의 내용이 도배되어 있으며, 건물 밖에 부모은중경탑이 세워져 있다. 용주사 효행박물관에는 정조가 출간한 불설부모은중경 판본이 보관·전시된다.
지인께서 선대에 이곳 융건릉의 陵參奉(능참봉) 벼슬을 하셨다 자랑하십니다.
그래서 전설로 전해지는 이야기중 능참봉이 벌 받지 않고 오히려 큰 상을 받은 스토리를 말씀 드렸습니다.
[인터넷] 정조는 "수원 능참봉은 한 끼에 닭 한 마리"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무덤을 돌보던 능참봉에 관한 민담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이러하다.
왕씨 성을 가진 능참봉이 지나가던 점쟁이에게 관상을 보았는데 며칠 뒤에 죽을 상이라 하였고, 이어서 대책이랍시고 알려준 게 밤중에 묘를 껴안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혹은 밤중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서 알려줬다고도 한다. 하여튼 이 말대로 하였다.
그런데 궁궐에 있던 정조는 비가 오는 것을 보고 문득 "내 아버지는 비 오는데 추운 무덤 안에 누워 계시는데, 능참봉이라는 놈은 따뜻한 방 안에 편히 누워 있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선전관을 보내 "능참봉이 방 안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불문곡직하고 죽여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선전관이 와서 보니 능참봉이 기특하게도 비를 맞아 가며 무덤을 지키고 있었고,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니 정조는 무척 기뻐하며 상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융릉에 송충이가 창궐하자 이를 본 효자 정조대왕이 "아무리 미물이지만 어찌 아버지의 산소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면서 송충이를 깨물어 죽이니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소나무에 있는 송충이를 모두 제거했다고 합니다.
효심을 강조하기 위한 스토리텔링이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합니다만 그 정도 미담은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젊은 청년들을 만나서 화성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융건릉과 용주사를 소재로 20분 정도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수원시와 의왕시 경계인 경기도인재개발원 인근의 지지대고개, 지지대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만 하겠습니다.
그렇게 평온하게 부부가 오후의 여유로운 산책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 차분하게 저녁을 먹으니 이처럼 하루가 지나갑니다. 부부의 세월은 차분히 흐르는 강물, 비 온지 일주일 지나 안정된 시냇물과도 같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