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영 회장님#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 태어나서』 정주영 회장님 인생을 읽고 나서 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 정주영, 1998. 3. 10 1판, 1판증쇄 2020. 12. 7 정주영 회장님은 제가 태어나서부터 아는 분이었지만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가 『이 땅에 태어나서』 라는 정 회장님의 일대기를 읽고서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경부고속도로 건설, 서산만 간척 등 우리나라 개발시대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소 떼를 이끌고 방북하실 때의 모습은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 전세계인이 감동의 눈길로 보았습니다. 이 책을 정주영 회장님 혼자서 다 쓰신 것인지 참모의 조력을 받은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습니다만, 만약에 조력자가 있다면 이분은 정주영 회장님과 여러 해 숙식을 같이하면서 속마음까지 캐취해 냈다는 생각을 합니다. 책을 읽어보니 서산농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산농장은 농장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곳은 내가 마음으로 홀로 아버님을 만나는 나 혼자만의 성지 같은 곳이다. 소 1천700마리가 크고 있는데 매일 송아지 4마리가 태어난다. 아버님은 농사 지으시고 화전을 일구시는 한편 소를
간병인이 잠을 자는 환자를 깨워서 약을 먹입니다. 옆 병상의 보호자가 보기에 얼마나 급한 약이기에 자는 사람을 깨워서 먹이는가 궁금했습니다. “무슨 약인데 깨워서 드시도록 하나요?” “네네 간호사가 시 간맞춰 먹이라는 약이에요.” “무슨 약인데요?” “수면제요.” 살다보면 불필요한 繁文縟禮(번문욕례)로 어려움을 자초하는 경우를 봅니다. 정말로 필요한 절차가 아닌데도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이같은 불필요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조처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무 잘하는 것도 정답이 아니고 눈치없이 행해도 안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에서 열심히 하여야 할 일이 있지만 더러는 눈치코치가 필요한 경우도 많습니다. 잠자는 환자에게 수면제를 먹여서 잘 자는 것을 깨우는 우를 범하면 안 될 일입니다. 흔히 蛇足(사족)이라 해서 뱀을 그린 후에 시간이 남은 선비가 뱀의 다리를 그려 넣어서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필요한 절차와 과공은 결례와 같은 일들이 빈번한 세상입니다. 그러니 필요한 일만 처리하고 담백하게 다음 처분을 기다리는 여유로운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절하기에 열중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멋지게 느끼지는 법입니다. 부처님은 개개인 마음속에 늘 존재합니다만 늘 존재감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불자나 중생이 마음을 비우고 바른 생각과 곧은 마음자세를 가질 때 부처님은 그 마음을 보여주시고 중생의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합니다. 욕심을 부리는 자의 업이 어느날 슬며시 집을 떠나 다른 착한 집안에 깃드는 것처럼 부처님 마음이 먼저 오셔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받을 준비가 된 중생의 집에 우선 오시게 됩니다. 100억 가까운 현재 살고 있는 중생을 살피고 500억이 넘을 지난날의 윤회의 언덕을 방황하는 중생중에 구제해야 할 자를 선별하는 일을 하시면서 동시에 미래의 불가에 귀의할 자를 점지하시는 일 등 전·중·후, 과거, 현재, 미래의 역할을 하시기에 바쁘신 분입니다. 분주하신 부처님께 부적 5만원 내고 잘 되어서 500만원 벌기를 바라는 욕심을 부리면 부처님이 들어주실 시간이 없으시고 관심을 기울여주실 여유조차 없더란 말입니다. 공직이나 회사에서 승진하는 사람을 보면 준비된 자입니다. 스스로 승진의 기회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 주변인과의 여유롭고 풍부한 관계성에서 승진의 후보가 되
양주 오봉산 석굴암으로 달렸습니다. 구리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다시 달려가니 1시간30분 정도에 당도합니다. 우선 가져간 갈퀴를 조립해서 마애불 주변의 낙엽을 정리했습니다.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와 갈퀴를 가져갔고 도착하자마자 작업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초 3일로서 사찰에서는 큰 행사가 열리는 날입니다. 신도들이 많이 오셔서 예불을 준비하십니다. 스님 3분이 교대로 불경을 암송하시고 신도들의 발전을 기원하십니다. 건강기원, 사법고시 행정고시 임용고시 합격, 사업 잘 되고, 부동산 거래 잘되고 교통안전을 기원하는 내용이 대부분 입니다. 스님의 낭송으로 이강석, 최경화, 이현아, 이현재 이름이 불리어지니 새로움이 있습니다. 수백명, 1,000명이 넘을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다 거명하시고 주지스님의 법문을 듣고나니 12:40분입니다. 법문을 마치고 공양간 앞으로 내려오니 주먹밥, 시루떡, 과일 등 점심 도시락을 주십니다. 아주 내실있는 구성입니다. 시간도 조금 지났거니와 산 중턱 7부능선 비탈에 자리한 오봉산 석굴암에서 점심으로 받아온 음식을 그 아래 유격장 입구의 한적한 자리에서 주차하고 받아온 음식을 하나둘 음미하면
집에서 TV를 통해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있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먼 공간을 여행하는 이야기인데 과거와 현재를 혼용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가족이 보낸 멧시지를 수십년 후에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딸의 메시지에서 아버지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날 때의 아빠 나이와 같은 나이가 되었다는 딸의 이야기가 "이제는 더이상 연락이 닿지 아니하므로 아버지를 보내준다"고 합니다. 우주 공간에서 뒤늦게 딸이 보낸 메시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일부 우주인은 동면을 통해서 생체리듬을 느리게 하여 인간세상에서보다 더 길게 살면서 우주선을 운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지구를 출발한 우주선이 화성에 착륙했다는 보도를 보았는데 과거 영화에서 이처럼 미래지향적인 내용의 스토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그냥 지구에서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 우주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상상하는 인간의 두뇌구조에 대해 다시한번 깊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시간이 100년쯤 지나면 지금의 고뇌, 갈등, 어려움은 의미가 사라질 것입니다. 살아있는 존재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최근 LH부동산 투기사건으로 2명이 자살을 하였는데 뉴스에 의하면 두 사람 다 깊이 있게 투기
많은 분들이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만 저녁에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경우나 일찍 잠을 청하는 날에도 다음날 새벽 몇 시경에 일어나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으면 그 시각에 잠에서 깨어나는 희한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새벽에도 4시반에 할 일이 있으므로 긴장을 하고 잠을 청하니 4시경에 기상하였습니다. 혹시 몰라서 4시20분으로 알람을 설정했습니다. 하지만 4시에 기상하였고 알람은 즉시 해제하였습니다. 알람 설정을 더러 합니다만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난 경우는 10번에 한번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신이 주시는 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다음날 아침의 예정 시각에 일어나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을 청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침에 잠을 자기 시작해서 저녁에 깨어나서 일터로 갑니다. 각자가 일어나야 할 시각을 정하면 신의 임무가 되고 신들이 각각의 사람의 기상 시각을 관장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큰 무리없이 돌아가는 것이겠지요. 아침에 늦게 일어난 버스 기사님은 수많은 출근 시민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일찍 정시에 기상하여 차를 점검하고
한글파일로 일기를 쓰는 경우에는 속마음을 편안하게 적어갈 수 있지만 인터넷상에서는 깊이있는 이야기를 적기가 어렵습니다. 이 글은 세상에 오픈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학생시절의 학폭문제로 스포츠선수들이 곤혹을 겪고 있고 일부는 방송에서 하차하고 선수생활에 큰 여러움을 겪고 있습니다. 연예인은 사회적인 문제로 인해 광고가 빠져나가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글은 그냥 존재할 뿐 밖으로 나가지 않지만 인터넷이라는 사이버공간은 시공을 초월합니다. 과거에 올린 글로 곤혹을 겪는 정치인이 있고 누군가를 비방하는 댓글로 수사를 받기도 합니다. 과거 공직사회에서도 홧김에 올린 글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사례가 여러 번 있습니다. 이후에는 글 올리는데 조심하게 되는 공직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과정을 겪어본 우리 이후의 세대 젊은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한계를 겪고 있고 앞으로는 정의를 주장하는 독립운동, 만세운동, 사회운동은 더이상 발휘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사회를 이끄는 선각자보다는 다른 이의 정책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이들만 즐비하게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를
일단 절을 하기 위해 엎드리는 순간에 두 손을 바닥에 대고 0.5초 정도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 순간에 머리속에는 시골에서 자랄 때 농경지를 정리하는 불도저의 무한궤도가 일단 바닥에 내려앉는 순간 2~3초간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요즘에도 공사장을 지나면서 중장비를 보면 바닥에 눕는 순간은 무한궤도의 사슬이 휴식을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원리를 따지면 누워있지만 그 궤도를 당기는 힘이 가장 강하게 가해지는 순간입니다. 무한궤도가 바퀴 위로 올라갈 때는 느슨하게 관절의 연골에 들어간 힘을 풀어서 쉬는 시간이고 바닥에 누워있는 '침대축구'같은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힘이 들어가서 불도저나 포크레인의 에너지를 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절을 올리는 순간 오체투지, 바닥에 업드리고 이마와 팔꿈치를 대는 순간이 가장 강열한 절하기 한번의 마무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으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휴식이 아니라 움직임이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과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모든 일들을 알아내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나머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각이 없고 느낌도 없으며 움직임조차 없는 절하기입니다. 절을 해도 아무런 생각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절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않은 듯 합니다. 그냥 절을 하고 있으니 몸을 움직이는 것이고 몇번 절을 하였는가를 확인하려 하지도 않고 손에 잡은 염주는 그냥 손에 잡힌 물건이고 절하는 자신은 누구인가 모르겠고 지금 이 공간이 사찰인지 집인지도 모릅니다. 화면에 보이는 해인사의 새벽예불을 보면서 지금 스님이 되어 사찰에서 새벽예불에 참여하고 있는 어느 스님 한 분을 설정하고 그 속으로 감정이입이 되어서 내가 스님인지 스님이 나인가도 분간하기 어려운 오리무중의 심경으로 절을 합니다. 이런 절을 해본 기억이 없지는 않은데 오늘처럼 확연하게 物我一體(물아일체)가 된 경우는 적습니다. 3,000배를 올리던 중에 몇 번은 자신의 존재와 주변의 삼라만상이 하나 되는 느낌이 올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근육이 있고 다리와 허벅지 속에 뼈가 있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일이 여러 번입니다. 절을 계속 하여 2,000번에 이르면 이제부턴 정신력이고 부처님의 뜻이구나 할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체력으로 절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힘으로 몸을 움직이는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건너다보니 절터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사찰은 사람이 살기에는 많이 불편한 곳을 터전으로 삼게 됩니다. 그 이유는 정신수양과 육체적 단련을 위해서 어려운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산기슭에 자리를 정한 사찰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의 절은 산 중턱의 큰 바위를 대웅전 앞에 배치하거나 큰 돌을 비스듬하게 걸쳐서 건물을 배치합니다. 아마도 스님들은 산속의 맑은 곳을 찾아서 사찰 수도를 하게 되고 주변에 불필요한 사람과의 접촉을 줄이는 효과도 보게 될 것입니다. 스님들이 중생을 구도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합니다만 대승불교, 소승불교에서 말하듯이 우선은 자신이 도를 닦고나서 훗날에 중생을 이끌어간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리하여 스님들은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불경을 읽으면서 수도의 길, 구도의 길을 달려갑니다. 그래서인가 산사에 들러도 암자에 가 보아도 스님을 뵙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스님들은 수도 중이시고 특히 스님들이 수도 중이니 조용히 하라는 안내문을 봅니다. 그 건물에서는 젊은 학승들이 깊은 밤을 낮삼아 수도와 연구에 열중하고 있을 것입니다. 더러는 20년 이상 고승들이 동안거, 하안거라 해서 100일간 1일1식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