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렵게 힘들게 수성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시골 중학교를 나와서 도시 수원의 공립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은 약간의 모험이었습니다. 비봉중학교에서 6명이 진학했습니다. 지금 수원에 송죽동은 과거 솔대라 불렀습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서 솔대라 했으므로 한자 그대로 松竹洞(송죽동)이라 작명했습니다. 율전동은 밤밭입이다. 밤나무가 많은 곳이라 해서 밤의 밭, 밤밭이 된 것입니다. 일본식, 왜식 작명의 흔적이 보이기도 합니다. 밤밭, 송죽동에 이모님이 사시고 사촌형님, 형수님은 교사를 하셨습니다. 이모님 덕분에 3년동안 불편없이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이모부 돌아가셨을때 상가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종사촌들이 고등학교 3년동안 이모부와 함께 했으니 펑펑 울만도 하다 했습니다. 2012년에 이모님이 돌아가셨을때는 아주대 병원에 이들동안 상근하고 장지에 갔습니다. 이모부와 나란히 잘 모시는데 동참하고 걸어내려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노인 요양원에 갔었습니다. 나이를 들면 그런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교회 열심히 다시시던 '한권사'님은 하느님 앞으로 평온하게 가셨습니다. 요즘 어머니 모습에서 한권사님의 그
1976년 10월 8일에 수성고등학교 3학년 문예반 학생으로 경희대학교 전국 고교생 백일장대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코'라는 과제를 받고 원고지 10장을 적어내고 4등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2등까지는 무시험 1학기 장학생으로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는 특전이 있었지만 참방 4등으로 상장과 한자사전을 상품으로 받았습니다. 경기도 안성출신 조병화 선생님을 직접 만나는 영광도 얻었습니다. 제출한 글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는데 심사위원들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제목을 듣는 순간 생각한 문장을 적어냈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창의력보다는 순간의 순수한 생각을 주제로 삼았던 기억이 납니다. 코는 후각으로서 처음에는 확실하게 냄새를 맏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마취되어 냄새를 모른다는 점을 압니다. 그래서 시골 재래식 화장실에 가서 처음에는 냄새가 나서 조금 불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후각이 마취되어 냄새가 사라진 것처럼 편안해 집니다. 그런데 코의 기능은 이처럼 냄새를 맏으면 되는데 다른 쪽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나는 콧구멍이 뻥 뚫린 것이 유난히 표가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이 화장실에 가서 코를 아래로 자꾸 잡아
5급으로 들어와서 23년만에 5급이 되었다는 조크가 있었습니다. 1977년 당시에는 5급 공무원이라도 들어가라 했습니다. 5급을(9급), 5급갑(8급), 4급을(7급), 4급갑(6급=주사), 3급을(5급=사무관), 3급갑(4급=서기관), 2급을(부이사관=3급)로 비교됩니다. 그래서 9급 공무원에 들어왔습니다. 초기에는 대학교 국문과 재수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에 집중하게 되고 피동적으로 끌려가면서 스스로의 주관 없이 시간과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한 그해 2월에 응시를 했고 1977년 2월17일에 경기도인사위원장 직인이 박힌 합격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당시 응시지역은 화성군이고 도내 시군 전체의 공무원 채용을 경기도가 총괄 대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해 1977년 5월에 5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6년11월23일에 다시 5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비봉면사무소에서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도 일을 가르치지 않고 너도 지금 나만큼 공무원에 대해 안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냥 일의 앞뒤 설명없이 진행하라 합니다. 물어볼 선배가 사무실에 없습니다. 모두가 현장에 나갔고 부면장님이 전화기를 잡고 사무실을 지키면서 군청의 지시를 대기하고 있습니
1978년은 공무원 2년차로서 몇가지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국문과를 나와서 중학교 교사를 하겠다는 꿈이 살아있었지만 현실은 아니었고 그래서 방송대 1학년에 입학하였구 9년동안 다녀서 5년제 학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공무원 2년차에는 산업계의 다양한 업무를 했습니다. 달달달 외웠습니다. 축산, 양정, 상공, 수산, 잠업, 농정, 관정, 그리고 잡다한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월 20일이 되면 월말 기준 보고서 독촉이 옵니다. 특히 축산업무에 월보가 많았습니다. 답리작 사료작물, 서강사료 생산실적을 보고하고 젖소 마릿수, 육우와 한우 통계자료를 제출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숫자를 대한민국 정부의 농림수산부 통계로 쓰면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 전작 업무도 흔들림이 보였습니다. 수도는 수돗물 나오는 배관이 아니라 벼농사이고 육도는 밭농사입니다. 이는 차석 업무입니다. 군청 농산과는 논농사를 위해 존재하고 읍면은 농사짓는 현장 사무실입니다. 가뭄이 오면 안보적 차원에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통일벼를 심어야 했고 노풍은 크게 실패했습니다. 산업계장님이 20세 젊은 직원 둘을 데리고 시골마을에 갔습니다. 그리고
1978년에 비봉면사무소에서 양정담당을 하였습니다. 양정이란 추곡 쌀과 하곡 보리를 담당하는 업무입니다. 추곡수매는 정부가 농민들이 생산한 벼를 매입하여 정부양곡으로 비축하는 일입니다. 하곡수매는 보리를 사들이는 것입니다. 보리농사는 적으니 나오는 대로 사들이면 되는 것이지만 벼농사는 정부가 쌀을 사들였다가 쌀값이 오르면 비축 양곡을 시장에 내놓아서 적정 가격을 유지하도록 하는 정부 정책이 중요하게 작용하던 시절입니다. 이 양곡정책은 수년후 정부가 벼를 사들이지 않는 반대정책으로 바뀌었습니다만 1978년에서 1980년대 초까지는 공무원을 동원하여 벼를 사들이느라 힘들게 일했습니다. 제가 담당한 비봉면 상기리는 지금 봉담읍 상기리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습니다만 산촌마을이어서 추곡수매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면장님이 양정담당 부락도 목표량에 미달하는가 지적을 하십니다. 그래서 수분 오버로 수매에 들어지 못한 벼 20가마를 제 월급으로 구매를 해서 비봉면 소재지 건조소에 위탁하여 13.5%이던가 수분 함량기준에 통과하도록 건조 포장하여 출하했습니다. 그런데 20가마니를 말리니 19가마로 줄었고 나중에 알았는데 20가마중 2가마 정도가 쭉정이를 담았던
1980년은 성숙의 해입니다. 공직 2년 근무하고 국방의 의무를 시작했습니다. 1980년 4월에 근무를 마치고 공무원에 복직하여 팔탄면사무소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이곳에서 회계담당을 하였습니다. 두달 후에 총무계장님이 새로 오셨기에 지출원용 도장 하나를 새겨 드렸습니다. 첫 결재를 받고자 할때 이 도장으로 결재를 하시라 드렸습니다. 표정이 참으로 밝으십니다. 기분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산업계 분야에 오래 근무하시다가 총무계장이 되셨으므로 행정다운 행정도 하시고 도장을 찍어 예산을 집행하는 맛도 있었던 바입니다. 1년을 근무하고 1981년8월10일에 화성군 태안읍 소재 농민교육원으로 부서를 이동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20일 봉급날인데 후임자는 오지 않았으므로 15일부터 며칠간 팔탄면으로 퇴근하여 봉급계산 업무를 지원했습니다. 19일 저녁에 회계서류를 다 만들고 수표까지 작성하여 결재만 하시면 지출이 가능하도록 마련해 드렸습니다. 이 일로 계장님은 아주 여러곳에서 자랑하십니다. 우리 이서기가 태안읍으로 발령나서 가고 후임자가 없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며칠밤에 퇴근해서 봉급서류를 만들어주어 참으로 고마웠다 하십니다. 후임자가 있어도 와서 도울 일인데 계장님 혼자서
▩ 팔탄에서 병점으로 ▩ 1980년말에 (1980년10월13일)에 경기도청 전입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팔탄면사무소에 5월10일 복직 발령을 받아 회계담당으로 일하던 중에 총무담당 오영진 서기가 시험을 보라면서 군청 공문서를 보여주었습니다. 전입시험 응시원서입니다. 경기도청에서 도내 시군 읍면동 공무원을 대상으로 9급 전입시험을 보라는 것입니다. 당시 생각으로 경기도청이 300명쯤 근무하는 군청 정도의 기관으로 생각했었고, 다만 우리 집 비봉면 자안리에서 수원으로 가는 시내버스 노선중 수원세무서 앞에 하차하여 조금만 걸어가면 팔달산 도청 건물에 도착하니 출퇴근이 편하겠다는 생각에 전입시험에 응시했습니다. 과목을 미리 알려주는 바도 없었고 알아볼 길도 없으니 그냥 볼펜하나 들고 시험날 도청에 갔습니다. 요즘에야 시험내용을 미리 인터넷을 통해 검색 가능하겠지만 달랑 전입시험 응시표에 화성군 팔탄면 지방행정서기보 이강석이 응시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여 우편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경기도청 고시계 앞으로 보냈는데 나중에 보니 인사계에서 전입시험을 주관합니다. 그리고 훗날 만나게될 심재인 선배가 이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1980년 10월에 9급으로 전
1982년 2월1일에 다시 8급에 승진하였습니다. 보통은 강임이라 해서 승진한 급에서 한급 아래로 내려갔다가 모든 후보자에 우선하여 승진하는 제도가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군청과 도청간의 소통이 부족하여 발생한 사안으로 강임은 아니었고 승진 취소였습니다. 물론 경기도에서는 9급 전입시험으로 선발하였으니 9급 발령이 맞습니다만 합격후 10개월이 경과하였으니 화성군의 8급 승진을 경기도가 인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행스럽게 6개월후에 8급으로 승진하였고 승진기념으로 새마을교육계에서 서무계로 부서가 바뀌었고 잔일이 늘었습니다. 새마을계는 교육진행 보조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서무계는 모든 일을 하는 곳입니다. 庶務(서무)란, 별로 생색이 나지 않는 잡스러운 일이라 합니다. 문서를 다루는 書務(서무)라는 직무는 없습니다. 한자 변환에도 書務(서무)는 나오지 않습니다. 서무계에서 일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필요한 것이 운전과 타자입니다. 당시 농민교육원(지금의 일자리재단 직업학교)은 지금 농업기술원과 함께 있었는데 국도1호선 병점까지 2km, 수원시내까지는 12km를 차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3대의 차량에 운전직원은 2명이므로 늘 차량이용에 어려움이 컷습니
아마도 공무원으로 들어와서 공보실 사무관 7년 근무 다음으로 격정적인 시기는 농민교육원 8급 3년간의 기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농민교육원에서 1982~1984년까지 신바람 근무를 했습니다. 운전을 배우고 타자를 익히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모든 일은 계장님께 보고하면 만사OK로 싸인을 해주시므로 밖에 나가서나 사무실에서나 즐겁게 일했습니다. 각 부서에서 해달라는 일은 다 해줍니다. 서무계 일인지 교학계일인가 구분하지 않고 부탁하는 일은 모조리 지원했다고 자부합니다. 교육생이 약을 사달라 하시면 곧바로 차를 몰아 수원시내에 가서 사왔습니다. 도청에 가서 이 일을 해달라면 달려가서 처리했습니다. 숙직을 대신 해 달라면 그날이라도 대직을 했습니다. 식당이 별도로 없으므로 교육이 없으면 스스로 밥을 해 먹었습니다. 그리고 1983년 말에 서무계 송년회가 열렸고 이날 저녁이 사망 직전까지 가는 대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서무계 인원은 모두 합하면 12명이었습니다. 수원 북문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당시 소주가 25도였습니다. 함께 근무한 선배는 소주 5잔이 상한선이었는데 그날 열잔을 드시는 듯 했습니다. 한바퀴, 두바퀴 돌았으면 20잔을 먹었을
글이 길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몇 분 계십니다만, 재미있게 읽고 있으며 다음편이 기대된다는 지인도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므로 용기를 내서 올려봅니다. 1984년은 참으로 바쁘고 신바람 나는 한해였습니다. 연초에는 농민교육원 서무계에서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업무에만 열중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책 장사가 사무실에 찾아와서 구매를 권유하고 일주일 후에 여러권의 전집 책이 도착하며 다시 한달후부터는 다른 분이 매달 봉급날에 10,000원씩 수금을 하려 왔습니다. 책은 표지만 읽고 갈피를 다 섭렵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젊은 청춘이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전집을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 의무감,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짚차 운전도 익숙해지고 담당 업무도 대략 파악된 바라서 업무부담은 적기에 더더욱 신나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1981년 8월10일에 와서 1984년 8월이 지나니 만3년을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1982년 2월 1일에 8급 승진한 것을 반영해 생각해 보아도 2년 넘게 사업소인 이곳 농민교육원에 근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인사기록 카드가 캐비넷 뒷편으로 넘어갔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필요하지 않은 재직증명서를 신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