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 묘소를 깔끔하게 하고자 형제들이 벌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이미 둘째형이 고조부 벌초를 마쳤고 증조, 조부, 아버지 등 넓지 않은 묘소의 벌초를 남겨두었다 하므로 이번주 일요일에 날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에게 다른 일정이 들어왔으므로 다시 형과 날을 조절해야 하는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닌듯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예초기 빌려주는 곳이 많다고 하므로 수원의 농기계 가계가 밀집한 매교동 공구상가에서 기계를 빌렸습니다. 이 기계는 전날 토요일에 직장 동료 결혼식이 있었고 집에서 5km정도를 걸어서 교회 혼례식장에 참석하여 지인 선배와 점심을 먹고 예식장에 올라가 축하했습니다. 이어서 매교동으로 이동하여 적정한 기계를 찜하고 다시 수원천변을 잉어와 붕어, 그리고 오리와 물새를 친구삼아 찬찬히 걸어 세교에서 전철을 타고 수원시청역을 지나 매탄권선역에 도착한 후 집에가서 차를 운전하여 다시 가서 예초기를 차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5시에 출발하였습니다. 신나게 내달리다가 주유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양노2리 발이골이라고 중학생시절 걸어다니던 길에 주유소가 있는 것이 기억나므로 가보니 아직 5시반이라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말 중에 유치원에 가보니 선생님 책상에 PC가 있었다 합니다. 아침에 집앞에서 노랑버스를 타고 신호등을 지나 어디론가 빙빙 돌아 내려주는 곳에서 가방메고 들어가면 그곳이 유치원이고 식판들고 줄을 서면 밥을 줍니다. 선생님이 가라 하면 가고 버스타고 달리는 차창가 가로길 구경하다 보면 아침에 탄 그 자리에 내리라 해서 내리면 엄마가 나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갑니다. 집에가면 집 전화, 핸드폰 5대, TV2대, 냉장고 3개가 있으므로 먹고 마시고 놀고 보다가 저녁먹고 다시 재롱 부리다 이 닦고 잠자면 다음날 아침이 옵니다. 요즘 아이들은 밤새 누가 전기를 보내주는지 가스를 공급하는지 군인 아저씨가 지켜주시는지, 경찰관이 야간 순찰을 하시는지, 소방관이 방호활동을 하는지, 공무원이 동향보고를 하는가는 알 필요가 없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런 문명의 근원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의 유치원과 엄마와 동네마트와 대형매장에서 물건 고르고 카운터에 신용카드 내밀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밥은 밥상위에 있고 음료는 냉장고를 열면 나옵니다. 우리집은 도깨비 방망이로 지어진 그런 곳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비가오면 우산을 들고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시제란 음력 2월, 5월, 8월, 11월에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와 음력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를 의미한다고 사전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년시절부터 할아버지, 아버지를 따라가서 산소에 벌초를 하고 3일후쯤에 조금 마른 풀을 갈퀴로 긁어모아서 집으로 가져와 아궁이에 불태운 기억이 있습니다. 시제, 시향날에는 과일과 떡, 적과 전을 준비하여 선산으로 올라가서 조상님께 올리고 절하고 축문을 읽으시는 80세 전후의 어르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한때는 직계 5대까지의 조상님 벌초하는 일이 큰 부담이었습니다. 시골 읍내에서 버스를 내려 비포장길 5KM를 터벅터벅 걸어가서 산 중턱의 여러곳을 오르내려며 산소의 풀을 깍는 일이 중노동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고조, 증조할아버지 산소를 우선 벌초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산소에서 작업을 하도록 진행해 주셨습니다. 어떤해에는 도시락을 가져갔지만 차라리 일찍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조상님을 모시는 벌초나 시제가 축제의 분위기가 아니라 부담스러운 업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해에 5대 문중이 의논
(뉴스폼) 이천시는 한국의 첨단농업과 첨단 산업, 스마트 방위산업과 전통문화 유산을 통섭하며 ‘작은 대한민국’의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체 면적의 71% 이상인 농경지와 임야 등 비옥한 토지에서는 쌀, 도자기, 복숭아 등 대한민국 명품 농특산물을 생산하고, 이제는 반도체 중심도시로 새롭게 인식되며, 전통과 첨단이 융합된 스마트시티로 전진 중이다. 모든 분야의 경계가 사라진 디지털 시대를 맞아 작은 대한민국 이천시는 다양한 도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민했고, 이를 위해 현실과 똑같은 가상현실 세계를 디지털 트윈 기술로 도입했다. 도시의 어려운 문제들을 디지털로 해결하고자 다른 도시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전통과 첨단 산업을 융합해 최고의 시너지를 창출하는 스마트 시티의 선진행정 모델을 개발해 해외의 도·농 복합도시에 해당 모델을 수출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이러한 비전과 방향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천시는 지난해 11월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첨단미래도시추진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디지털 트윈 시스템 도입과 국가적 역점사업인 드론, 모빌리티, 도심항공교통(UAM) 등 스마트 도시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천시는 디지털 트윈 구축을 통해
함흥차사(咸興差使)란 심부름 간 사람이 돌아오지도 않고,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출전] 조선 초기, 방석(芳碩)의 변(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에 은거했다. 그 후 형제들을 살해하면서까지(2차 왕자의 난) 왕위를 차지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은 분노한 태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함흥으로 차사를 보냈으나 태조가 번번이 활을 쏘아 차사들을 죽이거나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함흥차사’는 심부름 간 사람이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에 대한 전고는 다음과 같다. 「태조가 만년에 왕업을 일으킨 함흥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북궐(北闕)로 행행하고 나서는 대궐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 매번 돌아오도록 청하였으나 청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후로 보낸 사자만 10여 명이었는데 모두 돌아오지 못하였다.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박순(朴淳)이 비분강개하여 자신이 가기를 청하였다. 함흥에 이르러 멀리 행궁이 바라보이자 일부러 새끼 말은 나무에 매어 두고 어미 말을 타고 가는데, 말
요즘 방송에 나오는 자연인, 갈데까지 가보자 등에서 현대문명 몇가지를 포기하는 대신에 자연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얻는다는 스토리를 보게 됩니다. 문명에서 벗어나 신석기시대로 돌아가면 전기가 없습니다. 전기는 불을 밝히는 것은 기본이고 냉장고, TV등 가전제품을 움직입니다. 야채를 갈아주는 믹서기도 가동되지 않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프로그램에서는 자전거 발전기에 믹서기를 연결하거나 선풍기를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인간의 동력으로 움직이라 합니다. 선풍기를 내 힘으로 발전하여 돌려서 시원함을 얻으면 운동효과는 극대화 될 것이지만 시원함은 부족할 것입니다. 차라리 자전거 페달을 돌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더 나을뻔 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에너지의 중요성과 화석 연료를 줄이자는 캠페인으로는 성공적입니다. 자연속에 들어가 원시생활을 해도 키보드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1970년대 처럼 타자기를 들고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전기없는 산속에서 컴퓨터 키보드를 치려면 배터리가 있어야 합니다. 시내에서 먼 곳이니 일주일에 한두번 배터리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어렵다고 하면 태양광을 이용한 축전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낮에 축전지를 채우고 밤에 글을 쓰
돌아가신 본인의 아버지를 先親(선친)이라 한다고 들었습니다. 손학규 도지사님께서 월례조회시에 사회자가 살아계신 아버지를 선친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바로잡아 주신 기억이 납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당신께서'라고 존칭하기도 합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제가 중학교 1학년 1학기 다닐때 42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중학생으로서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학기 기말고사를 준비한다고 저녁에 책을 보고 있는데 고모님들이 울면서 옷을 챙겨 입으라 하셔서 집을 나서 비봉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수원에 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성빈세트병원 영안실에 모셔졌습니다. 낮에 야외에 나가셔서 업무를 하시다가 땀을 많이 흘리셨는데 병원으로 모셨지만 돌아가신 것입니다. 수원에서 이틀을 보내고 시골로 모셨습니다. 1971년 당시에는 상가에는 온 동네 분들이 오십니다. 아이들은 상가에서 도시락을 챙겨서 학교로 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상가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동네의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상가에서 일을 돕기 때문입니다. 3일되는 날 아버지는 동네 뒷산 좋은 자리에 모셔졌습니다. 장례를 모시고 다음날부터 매일아침 상복을 입고 절을 올렸습니다. 집에서
사무실에서나 가정에서나 금고는 그 존재로만으로도 큰 의미를 갖습니다. 금고 안에는 귀중품이 들어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고속에는 귀금속이나 금전, 채권 등이 들어있으므로 금고라 하는 것입니다. 사무실 금고에는 중요한 계약서나 소중한 자료 등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팔탄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회계담당을 하게 되었는데 아주 오래된 금고가 하나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하였는데 어느 날 총무계장님께서 수첩 안쪽에 글씨를 보시면서 금고를 열어서 서류를 꺼내십니다. 그리고 두달 정도 지나자 회계담당인 저에게도 그 금고 다이얼 번호를 알려주시면서 서류를 꺼내라 하시고 다시 넣으라 하십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시간이 나기에 금고속을 상세히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문을 열고 서류와 내용물을 살펴보니 오늘날 이해하는 비밀문서, 을지연습 문서 등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폐기된 직인함, 기타 고무인 등이 있습니다. 내용물 확인이 끝나고 나서 금고의 내부시설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니 인간의 머리로 이해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일본제 금고인 것 같습니다. 우선 다이얼이나 손잡이가 금색입니다. 바닥과 외벽에는 많이 녹슨 부분이 있지만
제복, 유니폼을 입은 군인이나 경찰을 만난 국민들은 이분들의 얼굴을 보기전에 계급장에 먼저 눈길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니폼은 계급으로 위계를 정하고 스포츠 유니폼은 동질감을 강화합니다. 조기축구 경기에서도 노랑조끼와 빨강조끼를 입도록 해서 상대방과 우리편을 구분하도록 합니다. 패스의 상대방을 빨리 찾아내도록 돕기위해 색상이 다른 조끼를 입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직사회 행정파트에서도 경찰관이나 소방관처름 어깨에 계급장을 달고 근무하면 어떠하겠는가 하는 농담을 한적이 있습니다. 공직자중 제복을 입는 분야에서는 내부의 위계가 있고 대외적으로 국민을 상대하면서도 어느정도 제복이 주는 권위로 압도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행정에 익숙한 주민들이 어느날 사무관 동장님이 무궁화 3개를 어깨에 달고 들이닥치면 말문이 턱하고 막힐 것입니다. 그러니 현행대로 군인은 별, 무궁화, 하사관, 병장의 계급장을 달도록 하고 소방관과 경찰관 역시 무궁화꽃 뭉치 8개든 5개, 4개, 3개를 달고 일하도록 해야합니다. 주무관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통합된 계급장을 달고 무궁화꽃을 피울 날을 기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소방이나 경찰의 경우 굳이 7급이하를 구분하는 것이 불편해서
1977년에 공직에 들어와 비봉면사무소에 근무했습니다. 당시에는 지방행정의 중심에는 새마을운동이 있었습니다. 면사무소 총무계의 고참 7급직원이 새마을운동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당시에 모친께서 동네 부녀회장을 하셨는데 면 새마을담당 선배님의 추천으로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하셨습니다. 1박2일 행사이고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당시 축사를 보니 격세지감이 있습니다. 1978년 행사의 축사내용중에는 '지난 8년동안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1천만건 이상의 새마을사업을 위하여 정부는 무려 9천700억원 이상을 투입했으며, 3천600만 우리국민 모두가 적어도 스물네번이상 사업장에 나가서 일한 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국에 투자한 새마을사업 1년 예산이 1조원이 되지 않는데 무려 큰 예산을 투입하였다고 연설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연설문중 비교가 될법한 말씀은 '호당 농가소득은 80년대초의 목표 140만원을 이미 작년에 넘어섰고, 금년에는 178만원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는 대목입니다. 기억하기로 1977년 9급 공원 월급이 5만원이었으니 연봉은 60만원. 4인가족이 140만원이니 대략 계산이 맞아가는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