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경 행정기관 사무실중 발간실은 기계음과 종이 돌아가는 소리가 겹쳐 나오는 한편의 오케스트라 또는 오페라 공연장이었다. 하지만 요즘 발간실은 대부분이 기계화되었고 장비도 발전해서인지 클래식 연주처럼 조용, 고요하다. 그래서 36년 전 발간실의 모습을 청사진 실루엣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발간실의 주 기능은 갱지에 공문서를 인쇄하는 일과 각종 회의 자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선 각 부서에 보낼 문서를 인쇄하여야 하는데 공문서 표지는 각 부서의 문서시행 담당자가 청색의 원단에 타자를 쳐서 가져온다. 그리고 첨부될 문서는 발간실에서 인쇄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초기에는 가리방과 타자가 공존했는데 일본어인 듯 한 가리방은 말미에 언급한다. 우선 청색 타자 원단에는 미세한 그물망 같은 것이 있고 양초 성분의 막이 있는데 여기에 타자를 하면 글씨가 새겨지고 인쇄 잉크를 문지르면 갱지위에 검정색 글씨가 새겨지는 것이다. 요즘 말하면 실크인쇄 원리와 비슷하다. 그리고 첨부되는 지침서, 회의서류 등은 발간실에서 청타를 찍어 교정을 본 후 인쇄를 거친다. 청타는 앞의 공문서 작성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데 글씨체가 打字(타자)체와 다르다. 인쇄활자를 찾아서 신문처럼 찍
▣ 아재 조크 어느 사장님이 컴퓨터를 열심히 치다가 비서를 불렀다. 사장 : 김 비서!!! 당신 알고 있는 새 이름을 말해 보아라. 비서 : 예 사장님, 비둘기, 까치, 참새가 있습니다. 사장 : 야 그것들 말고 흔하지 않은 새 이름을 알아봐라. 비서 : 왜 그러십니까? 사장님. 사장 : 글쎄 내가 새로운 문서를 저장할 때마다 '새 이름'으로 저장하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새 이름은 다 쓰고 없다. 어찌하면 좋은가?
이야기의 시작은 크리스마스 다음날 우리 팀 회식장입니다. 당시 사업소는 6급 팀장과 7급 차석, 8급서무(저요 저), 그리고 9급, 전문직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7급이 주축이 되어 일을 추진하고 연말에는 단합을 위한 회식을 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서무계에는 6급 팀장이 공석이었습니다. 9살 위인 7급 차석은 술이 약한 편이어서 회식을 할 때면 늘 신경을 쓰게 되는 분이었는데 이날도 소주 5잔을 드시면서 취한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집까지 잘 모셔 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당시 25세 미혼이었고 공무원 연금공단이 지은 임대아파트에서 월세 50,000원을 내던 시절이므로 집에 일찍 가는 것은 그리 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1년을 회고하면서 현장에서 고생한 선배들을 위로하는 회식은 말 그대로 연말 강추위를 녹일 기세입니다. 더구나 당시의 소주는 지금처럼 19도 20도가 아니고 25도짜리 두꺼비 진로소주입니다. 정말로 소주 한잔을 들이키면 나도 모르게 꺄~~~소리가 절로나는 상황이었으니 아무리 젊은 나이라 해도 술에 장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워낙 추웠으므로 조금 과하게 술을 마셨어도 밖에 나오니 많이 춥습니다. 그리하여 다들 잘 가라고 인사를 한 후 선
▣ 공(○)치는 날 외상을 긋는다는 말은 1900년대에 선술집에서 잔술을 외상으로 거래하면서 생겨난 외상장부를 지칭한다고 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선술집 주모는 외상으로 잔술을 마시고 모아서 갚아주는 신용있는 거래자의 특징을 벽에 그렸습니다. 코가 큰 사람, 얼굴에 점이 있는이, 키가 큰 작업반장 등 각각의 특징을 벽에 그리고 그 옆에 외상술 숫자를 막대로 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상을 긋는다고 표현합니다. 요즘에는 신용카드가 외상을 대신하고 있으니 산골마을 가게가 아니라면 외상은 없을 것입니다. 외상장부를 대신한 것은 대형 벽걸이 달력이었습니다. 1960년대 공사장의 함바집에서는 이 달력에 급식인원수를 기록하였습니다. 글자와 숫자를 쓰는 함바집 주인은 달력 여백에 아침, 점심, 저녁에 급식 숫자를 기록하고 열흘 한달 단위로 외상급식 대금을 정산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비가 오면 공사장에서 일을 못하므로 함바집 급식도 없으니 달력의 그날 날짜에 동그라미를 그렸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博物(박물)장수들도 글을 몰라서 거래처 시골집 대문 문설주에 자신만의 祕標(비표)로 외상 금액과 다음번
▣ 奧妙(오묘)한 워드프로세서 2016년 현재 모든 공무원이 책상위에 마우스와 키보드의 깔끔한 디자인으로 제작된 PC를 한 대 이상 보유하고 있고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테블릿피씨 등 첨단 장비로 부장하고 있는 가히 ‘람보’급으로 중무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공직 상황은 많이 다릅니다. 1984경, 30여년전으로 돌라가보면 상황은 이러 합니다. 우선 계장님 양수책상을 중심으로 차석과 삼석이 비행기 대형으로 양 날개를 달고 이어지는 7급 8급의 책상이 도열해 있습니다. 천정에서 내려다보면 항공모함이 동해바다를 항해하는 형상입니다. 그리고 책상에는 검은색 전화기가 2대1조로 배치되어 총 8대가 있지만 전화번호는 2개입니다. 대개 행정전화 번호는 2422, 6422입니다. 이 전화기는 계장님 책상위에서 시작되어 서무담당에게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흔히 앞 번호로 2번 전화 6번전화로 칭합니다. 그리고 책상위에 서류가 몇 장 쌓여있습니다. 결재판과 고무명판이 보입니다. 계장님의 명패와 이름 석자, 그리고 기결미결보류 함, 특히 당시에는 당당하게 자리한 대형 재떨이가 있습니다. 오전에 한 수북, 오후에 한 수북 담배꽁초가 쌓이곤 합니다. 컴퓨터는 없습니다. 컴퓨터가
▣ 독도여행 미스매칭 2008년 8월에 경기도의회 부의장, 당대표, 상임위원장, 재선이상 의원 40여명을 모시고 공무원 8명이 묵호항을 거쳐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하여 일본의 중등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땅이라 주장한 것을 규탄하는 '독도수호 결의대회'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2016년에도 일본 교과서 70%가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도일정 방문에 있어서 이른바 '미스매칭'이 발생하였습니다. 도의회 의원단은 묵호항 1박, 울릉도 1박의 2박3일 일정을 잡았는데 여행사간 미스매칭으로 울릉도 2박으로 판단하여 금요일이 아닌 토요일 배표를 확보하였고 일행은 금요일에 다시 돌아오는 일정으로 알고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도의회를 출발한 버스 2대에 도의원과 공무원이 탑승하였는데 1호차와 2호차에 공무원 4명씩 분승하기로 하였으나 1호차에 의원님이 다수 승차한 관계로 공무원은 저 혼자만 남게 되었고 공무원 7명은 2호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한참을 달리자 생수를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고 물병과 휴지 등 이런저런 소품을 나르는 저에게 부의장님께서 "직원들도 함께 나르지"하시는데 "공무원 7명이 의원님께 자리 내드리고 2호차에 탑승 하였습니다"라고 답했
금강산은 가슴속에 북한땅은 마음속에 금강산은 금강산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수 천년 이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봉우리 40곳을 보아야 금강산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데 겨우 두 곳을 일별하고 감히 금강산을 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정이기에 글로 남겨보고자 하는 것이다. 1. 금강호 우리의 금강호는 동해바다 동해시 해안가에 선미를 남으로 하고 선수를 북으로 하여 금강산으로 통하는 동해바다 해안가를 조용히 열고 있었다. 50여년을 막았던 철조망은 푸른 파도속에 숨기고 10층보다 높은 거함은 뱃고동도 없이 북동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향한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동쪽인지를 알수는 없지만 우리는 지금 북으로 향하고 있다. 파도는 잔잔하고 하늘의 달은 뭍에서 본 그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화사하게 웃고 있다. 하늘이 맑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국토 삼천리 금수강산을 조용한 밤에만 내려다 보는 저 달도 어느 날부터 북으로 가서 3,4일 머물고 돌아오는 금강호와 그 형제들을 관심있게 보면서 좀더 많은 달빛을 쪼이고 있었을 것이다. 달은 인자하여 남에도, 북에도, 비무장지대에도 비추고 저 넓은 동해바다에도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공직에서 5급 공무원, 사무관이 된 후 시군 교류에서 조금 먼 동두천시청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동두천시청 생연4동에 근무하면서 생태와 두부를 사다가 찌개를 끓이고 밥통의 밥을 퍼서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3개 기관 공무원과 가족초청 체육행사를 하면서 드럼통 연탄에 삼겹살을 구워서 먹이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산 중턱 초소막사를 방으로 꾸미고 한겨울 추위와 싸우며 지냈지만 이곳을 절처럼 생각하고 도를 닦는 심정으로 지냈습니다. 인생의 모든일들이 지나가면 추억이 되고 미래는 꿈이 되나 봅니다. 살아가면서 생각한 일들이 꿈인 줄 알았는데 현실이 되고 그것을 모아서 추억이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습니다. 운명 지어진 삶을 행복하게 살고 그 속에 쌓이고 모인 금싸라기 같은 추억을 모아 여기에 정리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모아보니 더 큰 꿈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꿈을 꾸는 청년이 되어 여기에 적어 봅니다. 아이들을 위한 피아노 학원, 바이올린 학원이 있고 헬스클럽, 빙상장, 수영장이 있으므로 초보자들이 가서 배우고 익혀 음악가가 되고 스포츠맨이 되는데 공무원을 25년 해도 막상 동장이라는 자리에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미리 배우는 학원이 없
▣ 아버지와 아들 #불이야 한밤중에 불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소리쳤습니다. "아들아!~!! 소방서에 신고해야 하는데 119가 몇 번이냐?"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들이 잠결에 대답합니다. "아버지!~!! 소방서가 몇 번인지 제가 114에 물어봐야 하는데 제 전화가 몇번이지요?" 부자의 대화를 들어보니 화재 신고하기 전에 이 집의 등기부상 명의가 누군가 확인하기 위해 등기부등본을 발급받으러 갈 것 같습니다. #아비 덕이다 이번에는 거지 부자가 어느 마을에 동냥을 가는 길인데 초가집에 불이 나서 온동네 사람들이 양동이에 물을 퍼서 불을 끄기고 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집이 없으니 불날 걱정은 없군요." 아버지가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게 다 아비 잘 만난 덕인 줄 알아라." #남편 덕이다 거지 부부가 12월31일 밤에 다리 노숙인 거처에서 쉬고 있습니다. 다리 위로 수많은 우마차가 오가므로 그 연유를 알아보니 새해가 되기 전에 빌린 물건을 돌려주고 꿔온 쌀을 되갚아 주는 운송행렬이라고 합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는 누구에게 빌린 것도 없고 꿔준 것도 없으니 갚을 것도 없고 받아올 물건도 없군요." 다리 밑 기둥
1963년 6살 때 아버지는 시골 태행산 중턱에 토담집에 사셨습니다. 산 아래에 4칸 드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안채 행낭채와 창고를 갖춘 집이 있습니다만 맑은 공기를 만나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산속에 집을 짓고 조림과 벌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쌀 등 잘잘한 심부름 목록을 들고가서 하루나 이틀을 자고 다시 집으로 내려오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낮 동안 벌목을 하시고 그 나무가지를 철사줄에 매달아 산 아래로 내려보내는데 철사줄을 이용하였습니다. 산중턱 굵은 나무에 쇠줄을 맨 후 아래로 끌고 가서 다시 더 큰 나무 중간에 줄을 매달면 마치 가을날 방패연을 날리는 실처럼, 한옥의 추녀처럼 그 철사줄이 아름다운 곡선이 됩니다. 그리고 산 중턱에서 나뭇가지를 묶은 후 철사고리로 매단 후에 내려보내면 처음에는 천천히 가다가 이내 가속도가 붙어 내 달리다가 목적지에 다다르면 다시 원만한 속도를 유지한 후 정지합니다. 위에서 10번 정도 내려보낸 후 잠시 쉬면 아래에서 일하시는 아저씨들이 매달린 나무등걸이를 풀러서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당시에 이미 짚와이어 장치를 고안한 것입니다. 지금도 짚 와이어를 타고 내달리는 관광객을 볼 수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