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장소에 가면 다양한 안내문을 보게되고 안내문의 홍수에 직면하게 된다. 최근 이용한 깨끗한 화장실에서 '성인이용금지'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소변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유아용'이다. 안내문에 성인이용금지가 아니라 '유아용'이라고 쓰면 될 것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 신발이 울고 있어요"라는 안내문은 조금 강렬한 표현으로 많이 인구에 膾炙(회자)되는 글을 떠올리게 한다. 수년전 설명절에 농수산물도매시장 입장티켓을 뽑으려 하는데 '사용금지'안내문이 보였다. 오늘 쉬는 날인가 하면서 입장했다. 나중에 확인된 바는 설 연휴기간에 일부 가게만 문을 열기에 주차료를 받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차량 입장티켓을 뽑지않고 들어가도 된다는 표현을 고작 '사용금지'라 한 것이다. 좀 길어도 이렇게 안내했으면 했다. "우리 시장을 애용해주시는 시민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연휴기간 중에 주차장은 고객님께 무료입니다." 공원길을 산책하다가 이상한 문구의 안내문을 발견했다. "공원내 애완견 목줄 미착용 금지" 한참 만에 프랑카드 글의 내용을 이해했다. 공원에 애완견을 데려오실 때에는 반드시 목줄을 매어 주시라는 안내문이다. '미착용을 금지'한단다. 행정기관은
경기신문 지면에 송구한 마음으로 글을 쓰다보니 '어쩌다 공무원' 어공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지방자치시대 민선 단체장을 보좌하는 별정직, 계약직 공무원과 공직의 직위는 없지만 행정을 자문하는 그룹의 일원으로 사실상 공공업무에 영향을 끼치고 도움을 주는 공무원을 '어공'이라 칭한다. 어공은 단체장과 임기를 함께하면서 다양한 방법과 방식으로 업무에 힘을 보탠다. 반면, 언론사 편집부, 보도부는 사회부 정치부 기자를 거쳐서 데스크를 지키고 다시 현장에 나가면서 경력을 쌓아올린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언론사에는 기자가 있고 행정지원팀이 있는데 이분들도 호완성이 있으므로 기자가 경영을 하기도 하고 경영책임자가 편집책임자가 되기도 한다. 공직의 어공이 등장하던 초기에는 제한된 부서에만 배치됐다. 그래서 자신이 어공임을 알리고 업무를 의논하려 해도 늘공들이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늘공끼리 긴 세월을 유지해온 행정기관 내부의 관행과 전통 때문이다. 이제는 늘공과 어공이 상호 활용하는 시대가 되었다. 두 직위가 서로 역할을 분담해서 윈윈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어공은 기관장의 비서실에 많다. 비서실이란 늘공이 근무하던 1990년 중반 이전에도 주변과 외부의 비판을 받았다. 기
공자님은 노력파인가 생각한다. 공자님은 엄청난 독서가로도 유명하다. 주역을 3,000번 읽으시는 동안 책을 맨 소가죽 끈이 3번 끊어졌다고 한다. 배찬병 생명보험협회장님의 퇴임사에서 인용하는 말이다. 정말로 소가죽을 가늘게 잘라 끈으로 삼아 책을 묶었는데 책갈피를 넘길 때 끈이 닳아서 끊어지면 다시매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3번째 소가죽 끈이 끊어지자 뒷산의 대나무밭에서 봉황새가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혹시 공자님 시대에 인터넷이 있었으면 어떠했을까 상상해 보았다. 책 한 권을 3,000번 읽으시는 공자님과 인터넷의 제목만 보거나 내용 중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읽고, 문장을 그림 보듯 하는 오늘날의 젊은이들과 비교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전철에서 거리에서 모바일 액정에 빠져있는 젊은이를 보신다면 공자님은 정말로 "孔子(공자)曰(왈), 독서란, 정보란, 한 말씀..."하실 것이다. 하지만 정보의 바다를 서핑하는 오늘날과 공자님 시대를 비교하기는 어렵다. 走馬看山(주마간산)이라 한다.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경치를 보는 것이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에 임금의 명으로 일본에 가셨는데 도요토미가 사명당이 지나오는 10리 길에 진나라의 귀중한 책의 내
공무원 9급 도전은 블루오션이었고 자동차운전면허는 필요한 도전이었으며 타자학원 등록도 필요에 의한 용기였다. 특히 23세에 타자학원에 등록을 하니 학원생들은 중고생, 특히 여중생이었고 그 틈새에서 더듬거리며 2달 가까이 학원을 다닌 기간은 스님의 冬安居(동안거) 같은 인고의 시간이었다. 아시는 바대로 검지는 3~4개의 키를 담당해야 하고 그 좁은 간격안에서 발 빠르게 보다 손가락이 신속하게 찾아내어 콕콕 찍어주어야 한다. 노트북을 쓰는 경우에는 손가락의 감을 지켜주기 위해 불편해도 애완견머리처럼 가방위로 고개를 내미는 긴 키보드를 메고 다닌다. 자판이 76+6+5+3+17=107개이고 전체를 하나로 치면 108개이니 키보드 또한 108번뇌라 하겠다. 골프공이 들어가야 하는 홀컵의 지름이 108mm라는 사실도 꼭 언급해야겠다.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인천시 소재 시험장에 갔다. 경기도내 용인, 의정부, 안산 면허시험장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사무실 차량이 3대인데 운전직은 2명이므로 면허증을 가져오면 운전을 시켜준대서 도전했다. 면허취득 1년 만에 과천청사 앞에서 경미한 사고를 당하고 운전을 접었다가 쌍둥이 아이들 병원에 가기 위해 마이카를 구매했다. 어쩌다
공무원 6급때 처음으로 명함名銜이 나왔다. 1991년 인재개발원 6급 교관요원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강사섭외나 외부인사를 접견할때 자신을 소개하고 연락처를 드려야 하므로 이 부서의 오랜 전통이라며 명함 3갑을 새겨준 것이다. 이후 명함을 만들때에는 부서 발령일을 명함 제작일로 새겨넣었다. 최근에 꺼내보니 당시의 지역번호 0331이 나오고 삐삐번호가 있다. 그리고 삐삐라는 것이 신기한 물건이었다. 전화를 걸고 삐삐가 울리면 연락받을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면 상대편 기기에 이 번호가 뜨는 것이다. 그럼 나에게 긴급히 연락을 하라는 메시지로 알고 인근의 공중전화에서 통화했다. 양방향은 아니지만 급할 때 요긴하게 쓰이던 통신 수단이었다. 그 시절 ‘삐삐 받고 전화하였는데 통화 중’이라는 조크가 생겨났다. 전화를 걸라하고 다른 이와 통화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 삐삐는 3년 정도 번성하다 사라지고 시티폰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이 전화기도 일방향이다. 회사 동료나 가족이 걸어오는 전화를 받기만 하는 일종의 족쇄라 비난했다. 삐삐보다 훨씬 발전한 시스템이었지만 PCS가 나오면서 이 또한 세 돌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후 011, 019, 017, 018 등 번호가 나
어느 장터에서 장사꾼이 장사를 시작했다. 이 창으로 뚫지 못할 방패가 없다. 잠시 후에 둥근 방패를 들고 나왔다. 이 방패로 막지 못할 무기가 없다. 창이든 칼이든 다 막아내는 튼튼한 방패라는 것이다. 그러자 구경꾼 중 한 명이 그럼 세상에 뚫지 못할 것이 없는 이 창으로 세상에서 막지 못할,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방패와 겨뤄보면 어떠하겠는가 제안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듣고 보니 말하고 보니 참으로 모순된 일이기 때문이다. 矛盾(모순)이다. 矛(창모)盾(방패순). 어처구니가 없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했다. 당시 6세였던 김익순의 손자 김병연은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조부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고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공무원이 일을 열심히 해야 할 부서가 있고 적절하게 근무할 부서가 있는 것 같다. 기획부서, 예산부서,
행정기관에는 시장군수, 도지사 등 수장이 있고 부책임자와 간부가 포진한다. 행정의 기본은 실무자가 기안하고 보조결재자가 서명을 한 후 위임전결규정에 의한 최종 결재권자가 서명을 하면 성안문이 되고 이를 외부기관이나 민원인, 국민에게 보내면 공문서가 된다. 최근 코로나19와 관련하여 행정기관이 집합금지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면서 법령의 위엄과 소중함을 느꼈다. 현직에서는 늘 공무원이란 국민을 섬겨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다수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법률이 정한 바에 따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보았고 새삼 다시 알았다. 감영병예방법은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풀네임인데 제49조1항에 교통의 차단, 집회, 제례와 여러사람의 집합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도록 하고 있다. 이 같은 규정에 따라 현장에는 붉은 글씨로 집합금지명령서가 부착되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법을 위반하는 경우에 제재를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했는데 구체적으로 국민의 안전을 위한 선행적 조치를 하도록 하고 있음을 알았다. 사실 공직 초년생일 때 군청에 회의를 가면 사무관 과장님이 근엄하게 나타나서 수첩을 흘끗 보면서 당해 업무에 대한 소상한 설명과 구체적인 통계수치를 언급하며 일장 훈시를
꾸벅 꾸벅 졸며 해 따라 가던 해바리기꽃 고개 숙여 선잠 자고 있다 꽃술 떨어진 상처 사이로 지난여름 까맣게 그을린 시간들이 응고되어 촘촘히 매달려 있다 제트배송차가 잠시 멈춘 사이 헐떡거리며 아파트 출입문을 향해 달린다 제 몸보다 몇 배 큰 택배박스를 굴리고 당기며 올라가는 쇠똥구리 같이 다부진 사내 한나절 지나자 벌써 지쳐있다 계단을 내려오는 사이 새벽에 보았던 별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지고 있다 순간 아찔, 유성우를 피해 벽에 잠시 기대 본다 통로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이름 없는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물결 잔잔한 바다에서 신기루를 만났다 초록의 해연(海淵)을 따라 빌딩들이 즐비하고 공원마다 화려한 산호초들로 가득하다 오색찬란한 열대어들이 무리지어 다니고 은은하게 맥가이버 오프닝곡이 흘러나온다 딸기와 청포도 오렌지가 다문다문 박힌 크레이프 케이크에 촛불이 켜졌다 생일 축하송이 끝날 무렵 우리 아빠 최고라는 외침에 화들짝 놀라 사방을 둘러본다 땀에 젖은 배송계획서 아직 뒷주머니에 꽂혀 있다 날아라, 쇠똥구리야. 정겸 시인 1957년 경기 화성출생(본명 정승렬), 2003년 시사사 등단, 시집 '푸른경전', '공무원', '궁평항', 공무원문예대
초등학교때 교장선생님 두 분을 기억한다. 두 번째 교장선생님은 우리가 6학년때 지병으로 별세하셨다. 미술시간에 교장선생님 영정사진을 그린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합격 축하하는 5원짜리 엽서를 보내주신 담임 황인각 선생님은 당시 나이가 25세에 학생들에게 은사님을 추억하는 기회를 주었다. 교사, 교수를 거쳐 교육청 기자로, 회갑을 넘긴 나이에 경기도청 기자로 뛰고 있는 영원한 현역인 친구는 초중고 담임, 교감, 교장선생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외우는 기억력 천재다. 이 친구처럼 선생님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여 늘 송구하다. 수년전에 喪家(상가)의 옆 테이블에서 현직 교장선생님이 청룡초등학교에서 선친과 자신이 대를 이어 근무함을 자랑했다. 6학년 때 영정사진을 그린 교장 선생님의 아드님이다. 중학교 1학년때 先親(선친)을 떠나보내 마음아 아팠는데, 이분 교장 선생님은 1년 먼저인 초등학교 6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교직자로서 가업을 이어온 것도 존경할 일이고 아버지의 학교에서 대를 이어 벽지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는 효심도 존경스럽다. 우리는 TV에서 벼루, 한지, 자개장, 옹기, 유기 등 3대 이상 전통을 이어가는 匠人(장인)이야기를 보곤한다. 이야기의 주인
1960년대에 농촌에서는 ‘하다 못해 면서기라도 하라'는 말이 유행했다. 붓글씨는 아니어도 펜글씨를 잘 쓰면 면서기로 일하는 시절이었다. 지역의 유지가 면장을 하던 시절에 면장에게 부탁을 하면 글씨를 잘 쓰는가에 큰 비중을 두어 임시로 뽑아 쓰다가 잘 적응하면 이른바 정직원으로 채용했다. 당시 글씨가 중요한 이유는 타자기가 보급되기 전이었고 복사기는 물론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행정을 펜글씨로 쓰고 호적등본, 주민등록 등본과 초본에는 '기재생략'이라는 고무도장이 가득했다. 또한 당시의 호적부에는 할아버지부터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가 바글바글했다. 아들이 분가를 신청해야 호적에 분리되었던 시절이다. 호적등본상 가족이 15명이나 되니 손자손녀 취업서류를 구비하려면 3일전에 예약을 해야 했다. 신청을 받은 호적주임이 토요일, 일요일 여유시간에 따로 호적등본을 필사했다. 먹지를 대고 2부를 더 복제했다. 모든 일을 글씨로 하니 글씨를 잘 쓰면 보다 나은 보직으로 진급했다. 군청 시청과 도청의 공직에서 필체는 중요한 업무능력이었다. 인사계, 기획계, 예산계에는 명필 직원들이 발탁되고 수직승진을 거듭하여 간부가 되고 1992년 지방자치 이전까지 시장군수에 발탁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