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6월18일, 새벽 5시20분까지 연수원에 가야합니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역사현장을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인천공항에서 8시20분에 출발하면 2시간반안에 중국에 도착합니다. 중국에 가면 버스타고 4시간, 기차타고 5시간 등 장거리 여행이 많고 우리나라보다 약간은 이른 봄날씨라고 합니다. 가서 많이 보고 느끼고 고구려 역사의 숨결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백두산과 고구려/발해의 땅』 [시작하는 말] - 교수님 강의자료 “빼앗긴 땅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빼앗긴 역사까지 망각할 수는 없다. 그 역사에는 지금 우리라는 존재의 근본이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만주는 우리가 처음으로 역사를 탄생시킨 터이고 그 태가 묻힌 곳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만주가 어디이며, 어떤 역사를 지녔으며, 한민족에게 무엇인지, 또 앞으로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많지 않다. 백두산은 북한의 양강도 삼지연과 중국 길림성 안도현(安圖縣) 이도백하진 사이에 있다. 높이는 2,774m(공인)로서 최고봉은 장군봉이다. 해발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가 있다. 정상에는 칼데라호(caldera lake)인 천지가 있는데 면
19번째 책에는 산과 섬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2008년경 경기도의회사무처 근무 때 그동안 이리저리 출장 다니면서 만난 현장 이야기를 파일에 정리해 두었던 것을 이제야 출간합니다. 평소에 글을 쓰면서 언젠가는 책을 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었었는데 드디어 부크크(BOOKK)사가 꿈을 이룩해 주셨습니다. 임직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제목을 가지고 이런저런 행정적인 이야기를 모아보았습니다. 공무원의 1970년대 모습과 1980년 이후 실제로 겪으면서 만난 상황을 가볍게 정리했습니다. 이런 작업이 훗날에는 작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 봅니다. 후반부에 올라있는 편지 몇편도 인터넷과 에스엔에스로 우표가 팔리지 않는 이시대의 젊은이에게 작은 종소리를 울려주고 싶습니다. 편지지에 적어서 봉투에 담아 정성스럽게 보내고 받는 편지의 시대를 다시 열었으면 합니다. 모든 분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감사드립니다. 2021년 9월 10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강석 서재에서 드림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 해서 칠십세 생신 잔치를 古稀宴(고희연)이라한다. 당나라의 시성 두보(杜甫)의 곡강시에 '인생 칠십은 고래로 드물도다(人生七十古來稀)'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려서 본 기억으로 61세 회갑을 맞으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흰 머리카락에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많았다. 회갑 잔치상을 받은 분들은 나이가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로 느꼈다. 하지만 요즘에는 69세에도 할머니라 하면 싫어하신다. 사모님, 여사님으로 호칭되기를 원하신다. 아마도 1990년대까지 회갑잔치가 있었고 10년을 기다려서 칠순잔치를 여는 분도 많았다. 회갑잔치에는 부조금을 가져갔다. 그런데 칠십 고희를 맞은 잔치에서는 봉투를 받지 않는 분들이 많았다. 결혼해서 살아오는 동안 신세를 진 분들에게 70세 장수를 하였으니 감사의 잔치를 베푼다는 해석을 들었다. 하지만 요즘의 신세대 어르신들은 회갑을 부부여행으로, 칠순은 집안잔치로 치룬다. 그래서 칠순잔치에서 신명나게 노래하며 즐기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팔순잔치를 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르신의 나이를 표현하는 한자가 재미있다. 傘壽(산수)는 80세다. 傘자를
글을 쓰고 교정보고 신문사에 보내는 일도 매주 건수가 늘어나니 일이 되고 부담이 됩니다만 그래도 다른이의 글을 보고 부러워할뿐 시기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것이 고맙습니다.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보고 고치고 첨삭해 보아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림으로 말하면 덫칠이고 결국 호랑이도 고양이도 떠나간 텅 빈 캔버스가 남습니다. 글은 어느 순간 포인트가 잡힐 때 훅 써 내려가는 경우에 秀作(수작)이 나옵니다. 의무감으로 쓰려하면 의무는 책임을 지라하고 책임지기 싫으니 의무없는 이야기만 나열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각자 돌아다니는 월남 안남미 밥처럼 빙빙돌아 가니 융합이나 조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최소한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데 시작은 창대하고 결과는 미미한 용두사미가 됩니다. 용의 머리를 그렸으나 꼬리는 뱀이 되었다는 말이니 출발점에서의 큰 포부는 사라지고 아주 조악한 결론을 맺고 마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다가 뱀의 그림에 다리를 그리는 사족이 늘어납니다. 정해진 원고맷수가 있으니 부족한 생각으로 한두장 부족하게 되므로 문장 중간을 다니면서 부연달 생각을 합니다. 부연이란 며느리의 창의적인 생각에 포인트를 두어야 하는 것인데 요즘 사람들은 불필요한 추가
생연4동장으로 일하다가 3, 4동이 통합되면서 시민회관, 도서관, 운동장을 관리하는 시설사업소로 전근되면서 동단위 유지분들께 보낸 150여장의 편지중 아마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7통 김방남 통장님의 편지를 기증받았습니다. 어제 동두천시청에 업무차 갔다가 잠시 생연로에 어르신을 뵈러 갔습니다. 말씀중에 1998년에 받으신 편지를 보여주시므로 반갑게 읽어보고 아예 내어주시므로 봉투에 담아 품에 간직해 집으로 돌아와 밤새워 필사하고 통장님께 감사장을 만들어 오늘 발송하고자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야 그냥 종이한장이겠지만 목숨을 걸고 일했던 동장 2년의 추억이 이 편지한통에 올옷이 담겨있는듯 하여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감사장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단편의 글로 정리했습니다. 다른 이의 편지를 가지고도 이렇게 글을 쓰는 능력과 역량이 있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편지내용] 안녕하십니까? 그간의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생연4동이 중앙동으로 거듭나는 경축분위기 속에서 이렇게 인사 드리게 되니 1년10개월 근무기간 동안의 기억들이 한 번에 머리속에 떠오릅니다. 그 기억속에서 가장 큰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지난해 8월의 수해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밤낮으로,
오늘 강원도 영월군의 단종왕 장릉과 청령포를 둘러보고 법흥사 적멸보궁에서 108배를 올리려 했지만 하루 200mm폭우가 온다는 예보가 있고 이미 어제까지도 큰 비가 내렸으므로 일주일 연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일주일 후에는 폭우도 없고 더위도 조금 지나갈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방문을 위한 예약이나 현지의 약속이 없으니 여행자끼리 논의를 하면 연기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편히 연기하고 오늘 토요일은 집에서 쉬기로 했습니다. 혹시 법륜사에 가거나 더 가까운 봉령사에서 절을 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200mm폭우가 와도 고속도로나 국도는 안전하고 비로인해 교통량이 줄어서 평온하게 운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비내리는 강원도 영월의 풍광을 볼 기회가 비내리는 날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비가 오는 낭만적인 풍경속에서 시상을 얻고 글의 소재를 발굴하는 기회도 얻은 것이지요. 도전하는 자에게 얻음이 있는 것이니 다른이들의 사건사고에 밀려서 일정을 미루는 것이 반드시 정법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는 합니다. 하지만 배부른 소리이고 안전이 제일입니다. 안전해야 다음이 있습니다. 작은 안전사고로 넘어지기라도 해서 팔다
그동안 언론에 써 올린 글에 댓글을 달기도 하고 서로서로 격려하는 사이인 문제열 박사의 글에 찬사의 말을 적어올렸습니다. 품앗이라고도 하고요, 커피점에서 서로서로 날씬해졌고 예뻐졌다고 칭찬하는 소녀들의 대화와도 같다 하겠습니다. 사실 자화자찬보다는 다른 이의 마음을 빌려서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는 것도 필요한 시대입니다. 독불장군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므로 후대에 전해지는 스토리가 없습니다. 격투기 중계를 보면 낯익은 선수가 대개 승리합니다. 낯이 익다는 것은 자주 출전한 것이고 승리를 해야 다음 토너먼트에 올라가고 최종 대결에서 챔피언이 되는 것입니다. 얼굴이 시청자들에게 익혀진 선수는 승률이 높다는 말입니다. 경기에서 이기니 방송에 자주 나가는 것이고 인상적인 승리의 장면을 시청자들이 기억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분들도 주변의 지인이나 네티즌들의 댓글이 필요합니다. 페이스북에서 글 한 번 올리면 좋아요 200, 댓글 80은 기본인 몇 분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특징은 다수의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좋아요’든 댓글이든 꾸준히 품앗이를 한다는 점입니다. 본인이 남에게 들인 정성만큼 거두어 들인다는 역사적 진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실천하지 못합니다. 내
생연동 4동사무소 인근의 어르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김방남, 윤명구, 목영달, 이상국, 오병용, 김기준, 목공어르신(91세), 이강석, 최경화입니다. 춘천 감자탕이라고 동장때 새마을지도자 하신 분이 지금도 부부가 운영하시는데 코로나19의 상황에서도 손님이 많습니다. 중짜 3, 라면, 밥3공기, 소주3명을 드셨습니다. 3분만 소주를 드십니다. 목공어르신은 부시장으로 다시와서 반가웠는데 어느 날 스르르 전근을 가서 섭섭했다 하십니다. 동장으로 근무하다가 떠날 때는 모든 어르신께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부시장을 마치는 날 생연로에 인사를 다녀왔지만 그날은 목공어르신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손을 잡고 가시자 했습니다. 치아가 없으시니 못드신다 하셨지만 감자탕이니 부드러운 고기와 면발은 드실 수 있다며 손을 잡아끌고 모시고 갔습니다. 외롭게 사시니 사람이 반가운 것입니다. 어르신들은 사람이 그립습니다. 준비해간 백세주는 다음에 드시라 드리고 목영달 사장님이 주신 마늘, 감자 자루를 싣고 수원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동장 때 다닌 길이 아니라 새로 건설된 고속도로 몇 개를 갈아타고 시원스레 달려왔습니다. 그렇게 동두천시 방문을 마쳤습니다. 지난번 동장이임 편지를 보관
고찰을 바라보면서 이 사찰에서 수도생활을 하신 고승들이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에 이를 것이고 소실되어 재축하는 과정에서 고된 공사장 생활을 하신 스님도 참 많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주변의 이름없는 민초들이 불심으로 달려와서 공사를 돕고 평생을 이곳 주변에 살다가 부처님의 나라로 가셨을 것입니다. 중생이 아무리 건강하고 불심이 높아도 90세 전후에는 떠나게 되고 이제는 조선시대의 어르신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1910년생이면 이제 111세이시니 최근 별세하신 100세 어르신이나 101세에 강의를 다니시는 분들도 1920년대생이고 1919년 3.1운동 이후에 태어나신 분이니 조선시대의 어르신은 없습니다. 1958년에 태어나 보니 조선시대 인물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1905년생으로 기준하면 1958년에 53세이니 당시 시골동네 어르신 대부분이 조선시대 인물이었습니다. 고종황제를 임금으로 모시고 살았던 분들입니다. 해방을 맞이하고 남북간 분란을 목도하시다가 6.25전쟁으로 엄청난 고생을 하신 분들입니다. 전후의 어려운 시기, 개발행정시대, 오일쇼크, IMF사태, 금융실명제, 금모으기 쇠붙이 모으기에 동참하신 분들입니다. 이제 살만하다 하니까 요즘 코
어느 장터에서 장사꾼이 장사를 시작했다. 이 창으로 뚫지 못할 방패가 없다. 잠시 후에 둥근 방패를 들고 나왔다. 이 방패로 막지 못할 무기가 없다. 창이든 칼이든 다 막아내는 튼튼한 방패라는 것이다. 그러자 구경꾼 중 한 명이 그럼 세상에 뚫지 못할 것이 없는 이 창으로 세상에서 막지 못할,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방패와 겨뤄보면 어떠하겠는가 제안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듣고 보니 말하고 보니 참으로 모순된 일이기 때문이다. 矛盾(모순)이다. 矛(창모)盾(방패순). 어처구니가 없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했다. 당시 6세였던 김익순의 손자 김병연은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조부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고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공무원이 일을 열심히 해야할 부서가 있고 적절하게 근무할 부서가 있는 것 같다. 기획부서, 예산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