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행정기관의 접대는 하부기관의 간부가 결정하고 지역의 유명 식당이나 관광지를 안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1년에 2번 정도 내려오는 내무부 평가나 점검관은 미리 점검표를 보내오고 빈칸을 연필로 써주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본은 좀 다르다고 한다. 상급기관의 담당자가 하급기관에 점검을 위해 출장을 가는 경우 반드시 술 한 병을 준비한다고 한다. 일본 공무원은 자신이 업무를 수행할 기관에 가서 부기관장이나 간부를 만나 인사를 하고 미리 준비한 술 한병을 내어놓고 실무자를 소개받고 실무자와 일을 마치면 되 돌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 식사 대접하여야 할 경우에는 그 기관의 실무자가 대접 여부를 결정하고 내부 보고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상급기관의 출장자가 가져온 술병에는 모월모일에 중앙의 모 공무원이 가져온 술이라고 적고 이를 술저장 캐비넷에 보관한다고 한다. 이렇게 모여든 술은 연말 회식이나 부서 식사가 있을때 필요한 만큼 꺼내어 마시는데, 이때 술병을 가져온 이들의 이름과 날짜, 출장수행 업무내용, 성품 등을 회상하면서 마신다고 한다. 이때 출장온 이의 이미지가 좋은 이의 술은 기분 좋아 빨리 마시고 악질적인 인물이었다면 또한 그래
요즘에는 과거 서무담당자가 발품을 팔아야 할 일들을 인터넷이 대신해 준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팩스가 서무담당 업무를 도와주었다. 우선 팩스를 청사 내 다른 부서에 보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통신요금이 늘 부족했던 터라 외부에 전화를 하려면 주무계장의 사전 결재를 받아야 했던 터라 청내 팩스를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나 보다. 실제로 행정 전화기 중에 일반전화가 되는 것은 실과에 1대씩 지정되어 있었고 이 전화기 다이얼은 작은 자물통으로 채워서 통제를 받았다. 1980년대. 계원 9명이 근무하는 부서에 행정전화는 2대뿐이다. 실제 전화기는 6대가 있지만 전화선은 2개다. 3대의 전화기를 연결하여 사용했다. 그래서 전화를 받아 다른 직원에게 넘겨주려면 “계장님! 2번입니다”라고 말하고 계장님이 송수화기를 들을 때까지 기다려 조용히 끊어야 한다. 요즘 행정전화는 넘겨주기 버튼을 누루고 전화를 끊어야 상대편이 통화를 할 수 있다. 행정전화 1인 1대 시대는 1공무원 1PC와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것 같다. 하지만 통화량이 늘은 것인지 행정전화도 바쁘다. 더구나 공무원 모두가 개인 전화기인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데도 사무실
행정전화선이 부족하여 4개 면사무소를 행정전화선 1개에 연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행정전화 벨이 2번 울리면 甲면, 3번 울리면 乙면, 4번 울리면 丙면, 5번 울리면 戊면이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마구 울어대면 4개면 모두가 전화를 받아야 했다. 군청 담당자가 전언통신문을 보내려면 양손에 2개씩 4개의 전화기를 들고 내용을 불렀다. 16개 읍면을 동시에 연결해 알리는 것이다. 참! 傳言通信文(전언통신문)이란 긴급한 문서를 전화로 알려주고 송신자와 수신자를 적어 확인해 두는 일이었다. 해서 전언통신문을 부르다 보면 빠르게 적는 이가 있고 筆記(필기)가 느린 이도 있게 마련인데 하도 답답하여 먼저 적은 이가 잘못 듣고 헤매는 이를 위해 거들다가 군청직원에게 ‘어떤 oo이야. 조용히 해!’하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면사무소 일반전화는 자석식으로 우체국 교환을 통해 연결되었다. 서울에 전화하려면 전화기의 손잡이를 돌린 후 수화기를 들면 교환수가이 나오고 서울 번호를 대고 잠시 기다리면 연결해 주었다. 전화주문이 밀리면 20분 이상을 기다리기도 했다. 요즘의 전화는 많이 달라졌다. 우선 행정전화가 1대씩 공무원 개인에게 주어지고 이 전화기로 행정전화는 물론 일반
지금(2000년) 40대 후반 공무원이면 대부분 서무담당을 했다. 모든 조직에는 서무담당이 있게 마련인데, 그래서 계서무, 과서무, 국서무가 있었고 지금 총무과의 전신은 서무과였고 서무계가 있었다. 서무계속에서 서무담당이 있었을 것이다. 서무(庶務)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특정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반적인 사무, 또는 그런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다. 실제로 서무담당을 하다보면 그 업무의 한계가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했다. 그래서 서무 담당자들 끼리 모이면 우리는 서무용 운동화 값을 1년에 2번 정도 받아야 한다는 농담이 오갔다. 우선 청내 방송이 나오기 전에 “딩동댕”하는 차임벨이 울리고 이어서 울려 나오는 말은 “총무과에서 알려드립니다. 각실·과 서무담당자는 지금 곧 숙직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나오는 “지금 곧”이라는 말이 가슴 저리게 들렸다. 총무과 호출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또다시 들리는 방송은 “기획담당관실에서 알려드립니다. 각·실과 주무계 차석은 지금곧 기획담당관실 확인평가계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청내방송은 모든 사무실에 동시에 울리는 것일터인데 기획관실에서는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는 몰라도 주무계 차석을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사 올 당시 공무원들도 이삿짐을 꾸려 수원으로 내려왔다. 우선 간부급 공무원들은 수원시내 허허벌판이었던 지금의 고등동에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그리고 젊은 직원들의 이사터는 최근에 새로 전철역이 생겨난 수원비행장 주변의 작은 평수의 양옥집이었다. 이곳으로 신혼 살림살이를 옮겼다. 수원비행장 주변으로 이사온 젊은 직원들은 그후 근무지가 바뀌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는지 이분들의 삶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등동으로 이사 온 간부들은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거주했다. 우선은 도청과 가깝고 시간과 세월이 흐를수록 땅값도 오르고 따라서 집값도 뛰었으며 주변에 커다란 상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슷한 연령과 계급의 도청 간부들이 고등동에 장기 거주하게 되면서 사모님들 간에는 선의의 경쟁도 있었다. 남편의 도청 계급이 중요해졌던 것이다. 도청이나 시군청에도 녹지회니 해서 간부공무원 부인들 모임이 있는데 그 서열이 남편을 따라가는 것으로 인해 불협화음이 있다고 해서 최근에는 모임이 거의 없애버렸다고 한다. 여하튼 고등동 사모님들은 남편의 출세에 늘 신경을 쓰게 되었고 요직으로 옮긴 남편의 보직을 정확히는 모
옹진군청은 인천광역시에 있다. 옹진군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군청이 입주할 말한 큰 섬이 없어 지금도 군청이 인천에 있는 것 같다. 사실 양주군청이 의정부에 있었던 것과도 같은 연유일 것이다. 군청이 일을 하려면 공무원만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단체도 있고 설계사무소도 있고 건설회사, 작지만 문방구도 있어야 하니 섬마을에 군청이 이전한다면 효율적인 일처리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적극적으로 열심히 일하던 군수가 군 개청이라 처음으로 옹진군 관내 작은 섬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배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섬마을에서 군수를 맞이한 것은 섬마을 주민에 앞선 해군 수병이었다. 배를 내려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던 수병은 군수에게도 신문을 물었고 군수는 공무원이라고 답했다. 수행비서는 멀 리가 심해서 배안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수병은 공무원증을 보자고 했고 군수는 순순히 증을 보여주었다. 수병은 공무원증을 보다가 혼잣말을 했다. ‘칫, 서기면 서기지 시기관은 뭐야!’ 이 수병이 근무하는 동안 섬마을을 방문한 가장 고위직 공무원이었으니 젊은 수병이 늘 만나던 공무원은 서기나 서기보이고 서기관은 처음 접했다는 이야기다. 보
요즘은 공무원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과거에는 현재보다 개인의 능력과 판단이 행정에 던지는 긍정적 파급효과가 컷던 것 같다. 90년대 공무원은 대부분 대졸자이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력이 장년층 공무원보다 젊은 층에서 강하게 나타나므로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특히 인터넷, 이메일, 그리고 IT를 통한 정보의 전달력은 과거 문서와 입을 통해 전달되던 정보 흐름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쉽게 말해 70년대에는 모든 정보는 32절 쪽지 몇장과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모두였고 별도의 정보흐름의 시냇물이 없었다. 당시에는 ‘쪽찌보고’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의 복사지 A4보다 작은 16절지를 반으로 잘른 종이에 타자를 쳐서 8장 복사를 한 것을 총무과에서 취합(종합)하여 도지사, 부지사, 기획관리실장,(경투실장 없었음), 내무국장(자치행정국장) 등에게만 제한적으로 전달되었다. 요즘 여의도에서 돌다가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는다는 정보지(찌라시)만큼이나 궁금한 내용들이 들어있었고 많은 간부 공무원들이 이것을 보고 싶어 했다. 다시 말해 간부들은 수준 높은 정보를 독점하면서 조직내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이고 이 같은 제한적 정보의 흐름 속에서는 몇 가지 정
경기도 화성군에서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 옛날 면장님은 별정직으로서 지역유지 중에서 적정한 인물을 군수가 임명하였고 별도의 임기는 없었기에 한 1년 하신 분도 있고 9년 하신분도 있었다. 그것은 그분의 역량이었고 내무과장을 잘 모시는 것으로 장수의 비결을 삼았다. 어느 날 군수와 면장이 닭볶음탕을 먹었다. 술잔이 오가고 본격적으로 닭고기를 먹는데 중간쯤에 닭꼬리 부분을 면장이 잡았다. 본래 닭 날개는 바람난다고 해서 가족들이 통닭을 먹을라 치면 아낙네들은 신랑이 먹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비둘기 고기를 아이들이 먹지 못하게 한 어른들의 지혜는 비둘기가 달랑 2개의 알을 낳아 2마리의 새끼비둘기를 키우기에 多産(다산)을 위함이었다고도 한다. 특히 닭의 꼬리 부분은 고농도 기름기가 있어서 아주 귀한 음식으로 삼았다고 한다. 요즘에는 닭잡는 집에서 이부분의 고농축 기름끼가 몸에 나쁘다 해서 칼로 도려내고 있다. 다시 보충해 설명하면 물오리가 부리로 꼬리부분을 찍어다가 자신의 깃털 이곳저곳에 문질러 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물에 계속 뜨기 위해 고농축 기름을 바르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비싼(?) 기름끼 덩어리인 닭꼬리 부분을 잡은 면장이나 기
강화군은 1993년경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경기도민에게는 도민적 아픔이 있고 아직도 강화군의 경기도 還元(환원)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강화군은 우리나라 역사의 현장이다. 오랜 역사속에서 외우내환을 견뎌온 강화읍내를 가보면 이곳에서 고려를 느끼고 조선시대를 음미하고 열강이 한반도에 밀려들던 시절의 작은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970년대 이야기다. 젊은 군수가 내무부에서 낙하산으로 강화군수에 발령났고 신바람이 난 군수는 취임하자마자 읍·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면장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와 업무 지시를 하게 되었다. 그 순서가 “내가면”에 이르렀는데 전화를 받은 면장은 “내가 면장입니다. 아 예 군수님! 축하드리고 환영합니다.” 군수는 자신이 젊어서 면장이 반말을 하는가 싶어 다시 한번 크게 말했다. “나 새로온 군수인데, 면장이시오?” “예! 내가면장이라니까요!” ‘제가 면사무소 면장 000입니다’라는 답을 기대했던 군수는 계속 ‘내가면장입니다’를 반복하는 면장의 응대에 속이 터져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 신임 군수가 나중에라도 ‘내가면의 내가면장’임을 이해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보충> 안성시의 죽일면, 죽이면, 죽삼면이 있었는
면사무소 직원이 군청에 가면 개인의 이름이 없어진다. 군청 직원들이 읍면 사무소 직원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기 어렵기도 하겠지만 이름을 알아도 이들에 대한 호칭은 소속 읍면사무소 명이다. “어이 전곡!!! (연천군 전곡면 직원)” “이봐 죽일!!! (안성군 죽일면 직원)” 그래도 자신이 전곡읍사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이고 죽일면(지금은 일죽- 안성이 시로 승격하였으니 달라졌을 것이지만) 직원인 것을 알아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이들 읍·면직원들이 군청에 회의가 있거나 보고서를 지참하고 가려면 군청 근처에 버스가 들어설 무렵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내무과 복도 앞에서는 잠시 옷 매무새를 살펴야 한다. 수험생이 자주 소변을 보는 것처럼 군청에 올라간 신참 읍·면공무원은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동안 마음을 진정한 후에야 군청 내무과 문을 열고 들어선다. 군청 내무과에는 행정계, 통계계, 복지계 등이 있었는데 당시 군청 행정의 중심부서는 바로 행정계다. 그 행정계에는 6급 계장과 7급 차석급이 2명, 8급이 2~3명, 9급과 기능직 등이 있는데 모두 9명은 될 것이다. 행정계장 자리 옆에는 소파와 큰 책상이 있는데 이 자리는 바로 ‘내무과장’이 일하는 곳이다.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