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 안정환의 미국전 헤딩 동점골 순간에 사무실에 혼자 있었습니다. 혼자서 방방 뜨면서 기뻐했던 모습을 지금 생각해 보아도 생생합니다. 모든 선수와 스탭이 엉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날은 하루종일 슛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인터넷으로 다시보기를 해도 그날의 감동이 떠오릅니다. 당시 업무는 도지사님 인터뷰입니다. 방송국, 신문, 월간지, 주간지, 일간지 등 모든 언론에서 오는 인터뷰를 섭외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는 임무입니다. 참으로 다양하고 재미있는 일입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몇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중앙지가 도지사 인터뷰를 싣는 경우는 연초에 시도별로 돌아가면서 박스 기사 기획을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급한 것은 아닙니다. 중앙사로서는 반드시 16개 시도를 돌아가면서 한번은 인터뷰 기사를 올리는 것이니 바쁘면 늦추고 가능하면 서둘러도 됩니다. 두번째로는 현안이 있을때 인터뷰를 요청하게 되는데 이는 중요한 기회이고 공보관실에서 미온적이면 인터뷰가 킬 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중간에 있는 간부들이 중앙사와의 인맥을 통해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도정 전반보다는 최근 어필하고 싶은 분야
1996년에 예산부서에서 예산 배정 등 업무를 담당하던 중에 1996년4월3일에 경기도지방공무원교육원에 발령되었습니다. 지금은 인재개발원으로 개칭되어 과거 내무부 소속 지방혁신인력개발원(연수원)의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여 확대개편하였습니다. 경기도인재개발원이 쓰던 사무실에는 경기연구원, 경기관광공사, 경기복지재단, 여성가족개발원이 입주했습니다. 이곳 공무원교육원 교재연구담당관실에 사무관 요원으로 배속되었습니다. 발령후 1개월여만에 사무관 승진교육 대상자를 선정하는데 전국적으로 인원이 많아서 3월31자로 끊는 바람에 교육은 가을로 밀렸습니다. 그리하여 교재제작 업무를 하면서 6개월을 기다려 1996년11월23일에 지방행정사무관에 승진, 임관하였습니다. 1977년 5월16일에 공직에 들어왔으니 19년이 걸렸습니다. 요즘에는 20년 이상 걸린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교재제작 담당과 교관으로 지정되어서 '창의력 신장'이라는 과목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창의력에 대한 다양한 교재와 교안을 보면서 다양한 창의에 대한 생각을 키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림으로 보는 창의력이 있고 글로 이해하는 창의성도 있습니다. 그동안 행정조직 안에서 부분 부품처럼
1996년 사무관 승진 교육을 연말에 받은 이유는 전국적으로 별정직 읍면동장이 일반직으로 전환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초까지 읍면동장은 지역의 유지급 인사들이 취임해서 지역사회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고향동네의 경우에도 지역 어르신 홍 면장님이 10년이상 면장을 하셨고 1977년 가을에 당시 우리 면의 예비군 중대장을 하시던 윤 면장님이 취임하셨습니다. 대부분 읍면동장은 당의 간부나 지역의 유력인사를 추천받아 군수가 임명하였는데 제도가 바뀌어 6급 공무원이 조기 퇴직하여 별정5급 읍면장 발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일반직(행정, 농림, 토목, 건축, 환경 등) 공무원을 임명하였다가 다시 본청의 과장으로 배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97년초부터 전국적으로 읍면동장이 사무관에 승진하기 위한 교육수요가 크게 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996년 4월3일자로 직무대리 발령을 받았던바 3월말로 교육대상자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3일 차이로 다음 교육을 기다려서 1996년11월22일에 제4기 초임관리자 과정 교육을 마치고 11월23일에 사무관에 승진하였습니다. 6개월 정도 늦었지만 행복했습니다. 사무관이라는 직함을 받으니 힘이 났습니다. 조상님 묘역
도청 출신 조금 선배들은 6급에서 사무관 직무대리를 받고 동두천시청에 와서 과장 보직을 받고 공부를 해서 사무관 시험을 보았습니다. 주관식 사무관은 논술을 본 분들이고 객관식 사무관은 5지선다형 시험을 통과해서 사무관에 임용된 분들입니다. 하지만 1996년, 1997년에는 6급에서 5급 보직을 받고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에서 6주간 교육을 받으면 사무관에 승진했습니다. 그러니 1997년부터 동두천시청에 발령받고 온 사무관들은 오는날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으므로 시 공무원들과 시민들은 전임자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셨습니다. 더구나 3명이 한 숙소에 기거하면서 매일 만나 시정에 대해 토론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면서 근무했습니다. 그 숙소는 폐지된 배수지 탱크 옆의 청경 근무초소였습니다. 방3개를 어렵게 원룸처럼 꾸미고 살았습니다. 가끔은 시청 간부를 초청하여 삼겹살을 구워먹었습니다. 재료를 구매하여 직접 구워 먹으면 더 맛있고 적은 금액으로 많이 먹을 수 있습니다. 윤영우 부시장님을 초청하여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시고 택시를 잡아타고 관사로 가시는 모습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세명의 사무관은 생연1동장, 생연4동장, 상수도사업소장입니다
지난해 수해복구를 마치고 본격적인 동장으로서의 임무를 계속했습니다. 1998년 말이 되면서 수해피해, 상공업 기반의 부족, 구시가지의 한계점 등으로 인해 우리 동 인구 5,000명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회계담당이며 지금 시청 간부인 오천명씨 혼자서 동사무소를 감당하여야 한다는 농담을 했습니다. 동생은 오정명, 형은 오천명인데 우리동 주민수는 4천대로 내려갔습니다. 결국 1998년11월30일에 생연3동과 생연4동을 합하여 중앙동이라 하고 3동 이상용 동장님이 통합 중앙동 동장이 되시고 저는 시설사업소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동 사무장도 시설사업소 운영계장으로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정들었던 동사무소 동료들도 중앙동, 다른 동, 시청 등으로 떠나갔습니다. 과거 동두천읍 시절의 중심지가 공동화 현상으로 인하여 통합되는 아픔을 겪은 것입니다. 1999년에 들어서서 시민회관, 종합운동장, 도서관을 관리하는 시설사업소장의 임무에 흥미를 가지고 일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수원 집으로 왔다가 일요일 오후나 월요일 새벽에 시청에 올라가서 간부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상수도사업소장 신 소장님과 교대로 차를 운행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서수원 집으로 가서 신소장을 태운 후
2000년은 공보실 근무의 최고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공직에서 이만한 성취와 보람의 시대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 가는 길이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다른 사례를 빌려다가 우리의 업무에 접목하고 창의적으로 일감을 찾아내어 우리 방식으로 추진했습니다. 도정홍보를 위해 젊은이들의 도정홍보 광고문안 콘테스트를 열었습니다. 도정에 홍보가 되는 것이라면 선거법에 위방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다양한 일을 추진했습니다. 홍보컨설팅을 받아보니 전문가가 따로 있습니다. 글 한줄, 이미지 하나가 독자와 도민의 마음에 큐피트의 화살처럼 꽃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고정관념으로 일방적 홍보를 해왔던 우리의 방식에 큰 수술이 필요했습니다. 변화는 계속되었고 공보기능에서 홍보기능이 강화되었고 공보형의 신문게시에서 광고성 홍보문구를 신문에 실었습니다. 도지사님 인터뷰를 물량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지역지에서 지방지, 중앙지, 월간지, 주간지, 특수지 등 모든 매체에 도전하였고 방송도 뉴스는 물론 교양프로그램에 경기도정을 끼워넣은 전략을 고민했습니다. 영화촬영지가 시민들에게 큰 관심을 갖게 하는 점을 착안하여 이벤트성 공간을 마련하는 방안도 추진했습니다. 공무원이나 공기관의 모
2003년3월3일 오후 15시에 홍보기획팀장에서 언론담당으로 발령되었습니다. 언론담당은 도정홍보자료를 언론에 제공하고 언론인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운용하는 담당 사무관입니다. 홍보기획팀에서 4년간 근무하면서 3명 언론담당 사무관이 일하시는 모습을 잘 보았으므로 크게 참고가 되었습니다. 수륙양용이라는 군사용어가 있습니다. 육지를 달리다가 강이나 호수를 배처럼 건너가는 탱크를 말합니다. 공직에서도 주야겸용이 있습니다. 낮에는 언론인과 도정홍보를 추진하고 저녁에는 식사를 하고 소주도 한잔 합니다. 폭탄주는 술을 덜 먹기 위한 전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장군이 주재하는 술자리에서 장교들이 장군에게 잔을 집중하므로 장군이 일괄 폭탄주를 만들어 나누고 함께 마시면 동등하다는 계산입니다. 사실 폭탄주는 소주 한잔에 맥주 반잔이므로 알소주 3잔을 마시는 것보다 가볍습니다. 그리고 상호간에 친목과 소통을 다지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늦게까지 이어지면 여러가지 부담이 생기므로 늘 저녁 식사장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 출근을 생각해야 합니다. 언론인 중에는 술에 강하거나 약해서 아침에 늦게 출근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공무원은 아침 7시50분에는 사무실에 들어가야 뻘
밀레니엄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2000년에 모든 컴퓨터가 1900년과 2000년을 구분하지 못하여 인터넷 대란이 일어난다고 걱정을 했지만 큰 문제없이 2001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986년에 아시안게임, 1988년 88올림픽, 그리고 제70회 전국체전 준비 등 행정은 늘 준비를 합니다. 준비하는 내용도 꽃길, 가로청소, 환경정비 등 실제 체육행사는 아니고 주변적인 업무입니다. 각종 체육행사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출전하는 종목과 경쟁 상대선수, 그리고 경기장이 대부분 들어차있을 것입니다. 경기장 주변에 코스모스가 피었는지, 사루비아가 붉게 피었는가는 큰 관심사항이 아닐 것입니다. 경기장이 준비되고 선수와 관객이 타고 오는 버스와 승용차의 통행에 차질이 없으면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우리는 본경기보다 주변의 환경정비에 돈을 투자하고 공을 들였습니다. 물론 외국의 마라톤 경기 중계를 보면 가끔 하늘에서 내려다 보이는 환경불량 구간이 보이기는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1등으로 들어온 선수가 2시간 몇분대에 들어왔는지, 인간의 한계가 1시간 59분59초에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중앙
공보실 2년차 배움의 시기입니다. 우선은 신문이 중요합니다. 신문에 기사가 나면 방송이 받아갑니다. 방송이 특종으로 도정을 보도하는 경우는 연중 몇번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에 부정적 보다가 나가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언론은 비판하는 기능으로 존재하고 도정은 홍보하는 입장으로 가다보니 늘 힘이 들었고 지금도 모든 공무원들이 힘들어 합니다. 오늘은 가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중앙지 가판이란 가두판매가 아니라 조간으로 나갈 신문을 전날 저녁에 미리 일부층에 판매하는 신문을 말합니다. 형태는 신문으로 나오고 서울 동아일보사 인근의 길에서 중요 고객에게 팔려 나갑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신문이 최종으로 인쇄되어 나갈 때에는 가판기사가 일부 부드럽게 조정되어 가정에 배달됩니다. 부드럽다는 말은 기사편집 내용과 아침 보도기사의 제목일부나 내용의 수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가판에서 "경기도 행정 식물인간"이라는 제목이 다음날 아침 "경기도 행정 일부 차질"정도로 완화된다는 말입니다. 이를 위해 밤늦게까지 전화가 오가고 그 시각에 윗선에 보고되기도 합니다. 신문활자 2자를 놓고 공보관과 중앙지 데스크가 2시간 이상을 전화를 걸고 받으며 싸우는(
지방혁신인력개발원에서 1년간의 장기교육을 마치고 경기도의회사무처 공보담당관실에 배치되었습니다. 집행부에서 근무하다가 처음으로 의회사무처에 근무하였지만 공보담당관실은 역시 언론과의 업무이니 집행부 근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업무 책임자, 부서의 장으로서 마음가는대로 일을 하면 그것이 먹혀 들었습니다. 그래서 언론담당때의 경험과 그당시 다하지 못한 행정에서의 액션을 시작했습니다. 우선은 노인학대예방조례, 경기도헌혈조례의 공포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열었습니다. 당시 경기도의회 의장단에서도 적극 참여하여 노인학대 예방조례를 널리 알리기 위한 퍼포먼스로서 효도를 다하지 못하면 경기도의회 의사봉이 징벌을 내린다는 상황극을 연출하였고 신문은 물론 방송에서 크게 다루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경기도청 기자실보다 더 많은 카메라가 의회 로비와 1층 사무실에 집결하였습니다. 불효자를 징벌하는 의사봉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못자리 비닐롤 속에 박힌 지름 10cm 종이대롱을 연결한 후 초콜릿 페인트를 뿌려서 완성했습니다. 공보실 동료들이 스스로 불효자 역을 자청하였고 행사장에 두 손 들고 벌을 서는 불효자를 의장, 부의장, 위원장, 조례를 발의하신 의원과 경기도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