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궐리사, 춘기 석전대제 봉행 (2014-05-12) 전통문화 계승 발전과 공자의 학덕과 유풍을 기리기 위한 춘기 석전대제가 오산 궐리사 춘계 석전대제가 지난 11일 궐리사 성묘에서 봉행됐다. 이날 춘기 석전대제에는 오산시장 권한대행 이강석 부시장, 제42대 도유사 유관진 전 오산시장을 비롯해 곡부공씨 종중회원, 일반 관람객 등 150여 명 참석했다. 이날 석전의 봉행은 초헌관이 분향하고 폐백을 올리는 전폐례로 시작해 초헌관이 첫 잔을 올리고 대축이 축문을 읽는 초헌례,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례와 같은 헌작례가 차례로 진행됐다. 이어 초헌관이 음복위에서 음복 잔을 마시는 음복례가 끝나고 제기와 희생을 치우고 난 뒤, 초헌관이 폐백과 축문을 불사르고 땅에 묻는 망료례를 끝으로 석전의 모든 의식 절차가 완료됐다. 한편, 궐리사는 조선 중종 때 문신이자 공자의 64대손인 공서린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1792년에 정조가 옛터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중국의 공자가 살던 곳의 이름과 같이 지명을 고쳐 지금의 궐리가 됐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1900년에 사당이 중건됐고 이듬해 강당이
[기고] 궐리사는 왕립학교 (2014-05-21) 화성궐리사(華城闕里祠誌) 연혁에 보면 오산시 궐동에 소재한 ‘화성궐리사’는 정조 16년 (1792년) 칙령으로 창건된 공자의 사당이다. 정조가 왕권강화책으로 신도시를 화성에 추진하는 시기에 수원지역의 고적을 탐사하던 중 중종대에 경기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한 공서린 선생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임이 확인되었다. 이 같은 역사를 확인한 정조는 수원부사에게 명하여 사당을 건립하게 하고 공자의 유상을 보내 봉안하도록 하였으며 ‘궐리사(闕里祠)’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봄가을에는 국왕의 이름으로 제사를 올리고 국왕이 친히 축문과 이름을 써서 지방관에게 주어 초헌하도록 명하였고 공씨 후손 중에 행실이 높은 자를 아헌, 종헌으로 삼았다. 궐리사는 서원이다. 궐리란 중국 곡부(산둥성)의 지명으로 공자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일반 서원이 사립학교라면 궐리사는 왕립(국립)학교다. 다시 말하자면 요즈음의 공립 중고등학교라 할 수 있다. 십수 년 전부터 궐리사에서는 교육사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서예, 경전, 민요, 다도, 우리 춤, 사군자, 대금반이 요일별로 운영된다. 학생교육도 준비되어 있다. 여름과 겨울방학에는 60명
“두 아이 키운 육아일기가 우리집 보물이죠” 경기도청 이강석씨 부부, 20년간 작성한 육아일기 ‘끼네스’ 등재 신청 (2010-06-14) 지난 20여년간 육아일기를 작성해 온 부부가 세계 또는 국내 최초, 최고, 최대, 최다 등의 가치를 가진 경기도 자랑거리를 모으는 끼네스 등재를 신청해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경기도청 체육진흥과에 근무하는 이강석 과장 부부로, 이씨와 아내 최경화씨는 쌍둥이 아이가 태어나기 전인 1991년 2월부터 육아일기를 작성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씨 부부는 “처음에는 그냥 몇 가지 소품을 기념으로 간직하기 위해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며 “하지만 쌍둥이를 키우면서 병원 방문, 약 먹이기, 똥싸기 등 다양한 육아를 위해 노트 몇장을 찢어서 적어둔 것이 고작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부부는 아이들의 예방접종, 변비, 약 투여 등이 착오없이 되도록 각각의 칸을 그리는 등 자체적으로 형식을 만들었고, 이들 부부가 만든 육아일기 형식은 현재 쌍둥이 아이들이 태어난 산부인과병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후 이씨 부부는 육아일기장에 월별로 제목을 부여하고, 봄, 자전거, 용인시 승격 등 당시의 계절이나
인기드라마에서 배우의 명대사가 떠오릅니다. "저 남자가 내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고!" 주인공 박신양이 김정은에게 외치는 말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팔을 잡아끌며 말합니다. "애기야! 가자!" 아마도 대한민국 남자중 가장 멋진 모습을 보인 사람중 한명이고 이 드라마의 머리를 장식할 신문으로 말하면 1면 기사였습니다. 주변사람들은 주인공 박신양의 멋드러진 이 한마디로 뒷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한 모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남편과 연애중인 청년들은 짐짓 주인공의 멘트를 머릿속으로 되뇌였을 것입니다. 남편은 오늘 저녁 집에 들어가서 아내에게 해보고 싶은 말이고 연애중인 청년들은 내일 애인을 만나 실감나게 대사를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드라마 제목은 '파리의 연인'입니다. 2004년6월부터 8월까지 굵고 짧고 임팩트있게 방영된 드라마입니다. 평균 시청율이 41%로 역대드라마 시청율 11위를 기록했습니다. 흑백시절의 조선왕조 드라마,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등 시청율이 높은 드라마는 당대의 이런저런 여건이 반영된 것이라면 이들 드라마보다 늦은 2004년에 높은 시청율을 보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
유권자의 눈/이강석 경기도2청 복지정책과장 승인 2006-04-24 공무원을 ‘공복’이라 하고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을 ‘심부름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시대의 지방의원이나 단체장은 우체국 기능이나 부름센터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을 한다. 지역의 여론수렴은 물론 정책결정, 조례의 제정 등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한 결정을 한다. 의원이 되면 상임위의결, 본회의 표결을 하고 단체장은 예산편성과 집행, 조직의 관리를 총괄한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의원이나 단체장이 4년간 하는 일은 단순히 4년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로부터 진행되어온 수많은 사업을 마무리함은 물론 미래의 사업을 구상하고 집행한다. 이같이 중요한 일을 하는 시의원, 도의원, 시장·군수, 광역시장, 도지사를 선출하는 선거가 5월31일에 있다. 이번 선거 과정에는 더 이상 구태가 있어서는 안된다. 유권자는 무엇인가를 받아야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선거출마자는 유권자에게 금품, 향응을 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선거운동 과정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 선거철 후보자 연설을 들어보면 자신의 정책을 이야기하고 지역발전을 위한 방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천자춘추] 30년 ‘경기일보’ 1988~2018 1980년대 지방언론사는 이른바 ‘1도1사’였다. 하나의 道에는 1개 신문사만 둔다는 언론방침이었다. 그리고 1988년에 언론통제가 풀리면서 경기도와 인천지역에 인천일보(7월15일), 기호일보(7월20일), 그리고 경기일보(8월8일)가 창간되었다. 1973년 기존의 3개 언론사를 통합하여 경기신문으로 창간되고 1982년에 경기인천을 커버하는 신문사로 개칭한 경인일보와 함께 4개 지방 신문사는 지방언론 경쟁시대를 맞이하였다. 86아시안게임에 이은 88올림픽은 지방언론을 활성화하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988년 7월4일에 7급 공무원으로 문화공보담당관실(대변인실)에 발령을 받았다. 전임자는 경인일보 ‘1도1사’의 체제에서 일했고 발령 후 며칠간은 단순한 업무로 생각하고 자료를 정리하여 기자실에 전했다. 그리고 오후에 자료로 보낸 도정업무 내용과 전화로 불러준 ‘가십(gossip)’ 기사가 활자로 보도되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데 발령받고 서류 보따리를 풀기도 전인 7월에 기호일보와 인천일보, 8월에 경기일보가 창간했다. 숫자도 멋지게 1988년 8월8일에 창간된 경기일보 출입기자 두 분을 맞았다. 기존의
공직을 마친 후 조차도 경기일보사에서 이렇게 많은 기사를 실어주신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선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어느 날 산책길에 문득 그동안 경기일보에 게재한 기고문을 정리하면 한 권의 자료집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정리해 보니 한 권의 책이 두툼하게 나올 정도로 많은 기사를 실어 주시고 拙稿(졸고)를 받아 주시고 새롭게 다듬어서 기고문으로의 숙성작업을 거쳐서 신문에, 인터넷에 게재해 주셨습니다. 기고에 더하여 행정 활동에 대한 다양항 분야의 기사를 화인하였고 이를 첨가하니 제법 두툼한 책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이를 자랑하는 바입니다. 사실 공직에서 일할 때는 물론 퇴직 후에도 겁 없이 끈 글을 부담없이 편집국에 들이 밀었습니다. 그리고 경기일보에서는 저의 지극히 부족한 글을 여러 번 지면에 실어 주었습니다. 편집회의에서 논란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拙稿(졸고)를 美麗(미려)하고 깔끔하게 편집하고 부족한 단어를 고치고 단련시켜서 포인트를 짚어 교정해 게재해 주셨습니다. 사실 草稿(초고)와 경기일보에 게재된 글을 법령과 조례를 심의하는 逐條(축조)심의 하듯이 字句(자구)까지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先親(선친)이 되십니다.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先親(선친)이라 부릅니다. 春府丈(춘부장)은 다른 이의 아버지 존칭입니다. 그래서 춘부장 어르신으로 호칭합니다. 조상의 묘비를 보면 이름 앞에 諱(휘=죽은 어른의 생전 이름)자를 씁니다. 후손들은 돌아가신 조상의 墓碑(묘비)에 이름을 새깁니다. 돌에 이름을 새기는 이유는 긴 세월 동안 그 자리에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집 대문에는 나무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문패를 달아둡니다. 손님이 오시거나 우체부, 택배를 받기 위함일 것입니다. 더러는 돌이나 비슷한 재질로 이름을 새겨서 대문 앞에 자랑스럽게 걸어둡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이의 양복주머니에는 명함이 들어있고 지갑에는 약간의 현금과 신용카드가 들어있습니다. 명함은 단단한 종이에 자신의 신분과 주소, 연락 방법으로 전화번호, E-Mail, 홈페이지, 카페주소, SNS 등 다양한 수단을 적어줍니다. 명함에 주민등록번호를 적는 예는 없습니다. 감사, 인사부서 공무원들은 명함에 사무실 전화번호만 인쇄합니다. 공직자로서 동장이 되어서는 명함에 기본사항을 넣고 말미에는 명함 제작일을 넣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자
경기도청과 화성시청에서 청년과 장년시대를 보낸 후 정년퇴직하고 나서 그동안 공무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는가, 진심으로 열심히 일하였나를 돌이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름 바쁘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데, 공직자로서 도민에게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과천청사에 있는 기재부 사무실에 가서 이틀 이상 투쟁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2000년 전후에 비수도권 기초자치단체장의 법인카드를 들고 상경한 공무원 열사들이 기재부와 중앙부처의 사무관을 만나기 위해 청사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이른바 비수도권 지방의 시청과 군청의 공무원들이 당시에 서울 광화문과 과천 정부청사에 몰려있는, 예산을 쥐고 있던 중앙부처를 방문하여 투쟁적으로 예산을 따냈다고 합니다. 예산확보는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과실을 따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지난날 호남, 영남, 충청, 강원도 공무원들은 4박5일치 짐을 미리 챙겨서 서울로 과천으로 올라왔답니다. 요즘에는 지방공무원들이 세종시로 출장을 가고 있습니다. 열정적인 공무원들은 아침과 오후에 현장으로 달려가서 중앙의 귀하신 국가 공무원에게 가난하고 인구가 줄어가는 군민 3만 규모의 기초자치단체를
우선은 인사발령장을 전달하는 행사를 ‘사령교부’라고 하는 용어부터 개선을 건의합니다. 공직 내내 그렇게 발령장을 받았으면서 이제서야 개선을 건의하는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멋지고 의미 있는, 발령장을 주는 자의 입장이 아니라 받는 공직자의 시선에서 개선해 달라는 의견을 말하고자 합니다. 1977년이면 공직에서도 권위주의가 하늘에 닿아있을 시기입니다. 화성군청 군수님을 만나서 5급을류 공무원 사령교부, 오늘날 9급 공무원 발령장을 받으러 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생으로 학원을 다니는 중에 발령이 났다는 연락을 받고 흰색 T-셔츠에 끈 없는 운동화를 신고 오산읍에 소재한 화성군청 내무과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내무과장, 행정계장은 모든 ‘공무원의 헌병’이어서 이른바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던 시절인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발령장 받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겁 없이 호랑이 굴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예상 밖의 불량하고 미흡한 발령 대상자를 본 당시의 목이 짧은 행정계장님은 ‘복장불량’을 호되게 지적했습니다. “당신은 뭐요?” “발령장 주신다고 해서 받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복장이 뭐요? 발령자 준수사항을 읽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