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보실#기자실#138개월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전 경기도청 언론담당)

1988년 당시 공보실에 근무하는 홍승표 선배가 구내식당에서 커피 한 잔 하자고 청합니다. 사금파리 흰 잔에 검붉은 커피 한 사발을 주는데 200원이었습니다. 5잔을 마셔도 1,000원에 해결되는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연봉이 1천만원을 넘지 못하였으니 당시 500원이면 최근 코미디에서 한때 인기를 누린 '궁금하면 500원'보다는 더 비싼 돈이었습니다. 3명이 앉아서 3잔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는 공보실에 와서 일해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제안에서 가장 의미깊은 말은 고등학교 3년동안 문예반 활동을 한 것이 1순위요. 두 번째는 전임 세정과 보다는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일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사실 지방행정주사보 7급에 승진하여 세정과에 가니 매일매일 하는 일이 전자계산기 두드리기였습니다.

 

36개 시·군(현 31개 시·군)의 세외수입 보고서, 하천점용료 부담금, 그리고 본청 각 부서의 세입보고서를 집계하여 안전행정부에 전화로 불러주고 다음날 보고서를 제출하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공무원 7급에 대한 기대가 서서히 식어갈 즈음인데 아주 샤프한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더구나 세정과 근무기간도 2년이 흘렀으니 이즈음에 부서를 이동하는 것도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니 청내방송이 나왔고 문화공보담당관실 보도계에 배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임자의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청내 각 부서를 다니며 자료를 받아 보도자료로 작성하고 그 내용을 다시 해당과에 전하고 검토를 받아 출입언론인에게 전하는 이른바 '아이템'담당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9개월을 근무하고 6급에 승진하여 인재개발원으로 전출되었습니다. 자연과 배움의 전당인 인재개발원에서 흥미롭게 1년을 근무한 어느날 도시개발과로 발령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행정직으로서 도시개발 부서에 간 것이 조금 서글펐습니다. 더구나 1년전에 7급으로 신바람나게 근무한 전임지 공보관실에 6급 2명이 전출되고 승진동기생 2명이 전입되었으니 말입니다. 공보관실에서 7급으로 근무하는 동안 열심히 일한 공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6급 재직기간 중에는 공보관실에 근무하지 못하고 5급공무원이 되어 동두천시에서 동장으로 2년간 근무하고 소방재난본부를 거쳐 다시 공보관실 홍보기획팀에 들어와 3년 9개월간 일하다가 같은 공보관실 언론담당에서 2년11개월을 근무했습니다.

 

사무관으로 6년 8개월, 햇수로는 8년을 공보관실에서 일했습니다. 그 기간이 참으로 길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나이 40대 초중반의 세월이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은 공보부서 근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지방행정연수원에서 1년 장기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곳이 의회 공보담당관실입니다. 이곳에서 존경하는 박신흥 처장님으로 모시고 헌혈조례 제정기념 언론이벤트, 노인학대예방조례 이벤트, 수도권규제 규탄 언론플레이, 비수도권의 경기도의회 배척 규탄 성명 등 이채롭고 재미있는 언론홍보 업무를 재미있게 수행합니다.

 

또 다시 더이상 공보실에서 일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도청 대변인실 언론담당관에 근무를 명 받습니다. 동두천시 전출로 6개월 단명이었지만 ABC제도 논란, 새로운 대변인 발령 등 작은 변화와 잘잘한 사건을 만나면서 근무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회고해 보면 공보가 아닌 다른 부서에 발령받았다면 또 다른 일을 하였을 것이고 그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흔히 공직에서 기획 예산 인사 조직 등 반드시 거쳐야 하는 라인이 있다고 하는데 예산부서 2년반 근무 외에는 핵심조직 문고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행정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자성을 합니다. 다만 경험을 통해 후배들에게는 이른바 '보직관리'를 권합니다. 좀 무리를 하고 오버를 해서라도 핵심부서라 칭하는 자리에 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토목 건축직의 경우도 조직내 국이나 과의 핵심부서에서 8급, 7급 때 근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 드립니다. 이제는 공보부서에 11년6개월, 공직기간 1/3을 근무했다는 자랑만 있을 뿐 5급 이후의 보직관리에 있어서 공보실 11년반의 경력이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1988년은 언론의 변혁기입니다. '1도1사' 체제에서 '1도 다사'로 전환되면서 기호일보, 인천일보, 경기일보가 차례로 창간을 하게 되고 경기도청 기자실에 언론인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우선은 공무원의 눈에 거의 보이지 않았던 언론인들의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는 점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과 저과를 직접 취재하는 기자가 늘면서 공무원들은 처음 맞닥뜨리는 언론인의 취재가 당황스러웠습니다.

 

이전까지의 상황은 이른바 공보실 선전계에서 전략적으로 언론과 조화를 이루면서 취재독점의 시대를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공보실 직원은 언론이라는 특별한 우산 아래에서 선택적으로 도정을 홍보하였습니다. 요일별로 월, 화, 수요일에 나갈 보도자료를 미리 정해두고 그날에 그 자료를 꺼내어 배포하면 기사가 나고 스크랩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당일의 보도자료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내일 모레에 배포할 자료를 준비하고 있고 오늘 나가야 할 보도자료는 이미 배포담당자에게 넘겼습니다. 당일 아침에 팡팡 돌아가는 복사기에 15부를 돌려서 오전 10시경에 기자실에 배포하였습니다.

 

자료를 받은 도청 출입기자들은 지방신문, 중앙신문, TV방송의 아이템에 맞게 재구성하여 모사전송(FAX)를 이용하여 본사 지방부, 정치부에 송고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1988년 당시 사진자료는 수원역에 가서 서울역에 비치된 본사 사서함으로 연결했습니다.

 

중앙지는 기사가 많아 지방기사가 보도되는 지면이 좁기 때문에 핵심중심으로 기사를 정리하여야 합니다. 반면 지방지는 면에 여유가 있으니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추가 취재를 해서 좀더 색다른 기사로 맛을 내기위한 작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방사 기자중 젊은 기자들의 취재열기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고참 부장급은 국장실을 돌면서 굵은 기사제목을 잡아내기 위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중앙지나 지방지 모두 이른바 고십(까쉽)이라는 고정면이 있어서 요일을 정해놓고 도정을 쥐락펴락 하는 참으로 오묘한 힘이 작용하였습니다. 내무부(현 행정안전부)와 청와대에 항상 안테나를 세우고 살았던 당시의 L도지사님, 또 다른 L도지사님, Y도지사님 등은 지방지와 중앙지의 고십에 의해 윗선의 전화를 받으신 바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보실 간부들은 나쁜 고쉽 안나게 하고 반면에 좋은 가십이 나도록 이른바 작업(!)을 한 후에 그 공적을 내부 윗선에 정보보고하는 등으로 성과를 올리는데 힘을 쓰는 상황도 보였습니다.

하루종일 기사를 쓰고도 석간신문이나 다음날 석간에도 기사 손맛을 못보는 강태공 기자가 있고, 슬쩍 던져넣은 빈 낚시바늘에 월척이 걸려드는 재수좋은 釣士(조사)기자도 있었습니다.

 

어느 편이 기자정신인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꿩 잡는게 매'라면 가쉽이든 기획기사이든 신문에 검은색 잉크냄새 풍기며 기사를 올리는 편이 승자라 할 것입니다.

 

결국 이래도 저래도 1년은 지나가고 1988년 당시에도 종무식 행사에서는 늘상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보냈던 것입니다. 사실 도정이든 시정에서 多事多難(다사다난)은 대부분 언론을 통해 시작되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마무리되던 시절이었습니다.

 

혹시나 도민들은 잘 모르시는데 공무원과 언론인 사이의 신경전으로 1년을 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가져보았지만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보면 언론의 직필정론, 목탁으로서의 역할, 소금으로서의 간제미의 소임을 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보실 근무자는 다른 부서의 발탁 대상에서 빠져있었습니다. 언론인과 조화롭게 근무하는 어느 7급, 6급 직원을 빼가는 것은 언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던 당시의 행정 분위기로 인해 더러는 인사상 도움을 받았다고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장기근속으로 이어져서 혜택을 받은 것인지 아닌지도 모호한 상황이 되어서 결국 승진할 연식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공보실을 벗어나는 묘한 정황도 보이더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공보실에서 공무원과 언론인과의 중간 역할을 하였던 이른바 '관선기자'들은 스스로 작은 모임을 통해 당시를 회고하고 앞으로의 우의를 다짐하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최근 경기도청을 보면 1987년당시 직원 9명의 계가 하던 홍보업무를 대변인 3급 계약직이 지휘하는 局(국) 단위 부서에서 일하고 그 옆에는 소통담당관이라 해서 공보기능의 일부를 새로운 업무로 개척하여 만든 조직이 함께 힘을 합하고 있습니다.

 

1984년 경기도청 복도를 소리없이 차분하게 거니는 연합뉴스 기자 한분은 그 복장이나 행동반경이 공무원과 비슷하므로 대부분의 직원들은 이 분이 어느 과의 사무관(계장)으로 생각하였답니다. 실제로 이 기자님은 각 부서의 계장님석에 마실가듯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고 복도에서는 참 여유로운 사무관 걸음으로 어디론가 가시는 모습이 목격되었습니다.

 

 

지금은 연합뉴스인데 당시에는 연합통신이라 했습니다. 사무관들과 나눈 대화와 간단한 자료 하나를 챙겨 사무실에 가시면 하나의 기사를 올렸던 것입니다. 이후 '연합뉴스'로 개명된 당시의 연합통신(연통)이 기사를 쓰면 중앙지, 지방지, 중앙방송 등이 이 기사를 돈을 내고 받아보았고 이를 근거로 부족한 기사를 채우거나 기자를 보내지 못한 중앙 정치권, 서울의 경제뉴스, 그리고 지방의 사건사고 중 꼭 보도해야만 하는 기사를 전제하여 기사로 작성하여 올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기사말미에 [연합]이라고 적힌 기사는 이 연합통신에 돈을 내고 기사를 받아 자사의 신문에 보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모든 기사는 '연통'(연합통신)에 연기가 나므로 기사가 된다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전혀 아니라고 해도 어느 순간 연통에 연기가 나면 아궁이에 불을 지핀 것이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아니땐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니까요.

 

죽, 강한 부정, 이중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이 언론계 정설입니다. 청문회나 국회와 의회 답변에서 '절대 아니다'라는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나, 구속되기 직전에 취재 기자에게 '일면식도 없다'고 답하지만 이 분이 그 업체에서 돈을 받은 사실은 영수증까지 신문기사로 확인되는 것이 작금의 세태인 것입니다.

 

특히 회사의 모든 부서를 입막음했지만 당일 어느 건물 주차장에서 박스를 건넨 정황이 차량 운행일지에서 밝혀지는 이른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시는 바이겠지만 '어처구니'란 맷돌의 나무손잡이 입니다. 두부를 만들기 위해 불린 콩, 간수, 도마, 보자기 등 모든 셋트를 준비하였는데 정작 두부를 갈기 위한 맷돌의 손잡이가 없는 황당한 일을 당하면 우리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고 합니다. 큰 일은 잘 준비되었지만 작은 곳에서 아주 미미한 실수로 인해 전체가 진행되지 못하거나 행사 자체를 망치는 경우를 말합니다.

 

혹시 63빌딩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비상계단을 걸어서 내려왔는데 자동차 키를 63층 사무실에 두고 왔을 경우에도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아주 급하게 비행기 시간에 맞춰서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는데 여권을 어머니 가방에 넣어둔 엄친아 아들이라면 이 또한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해외여행을 많이 하는 시대이니 '어처구니'를 '여권없다'로 바꿔도 좋을 법 합니다.

 

도청 사무실에 기자들의 활동이 늘어나면서 발생한 미스매칭 사건을 한번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시 도청 사무관조차도 언론사가 상호 경쟁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공무원들은 국민들에게 알려야 할 일을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된다는 마음이었나 봅니다. 요즘같이 인터넷뿐 아니라 스마트폰 등에 의한 각종 SNS가 활보하는 시대와는 좀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내무국의 어느 과에서 계장님(지방행정사무관)이 참 좋은 시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K언론사 S기자와 의논한 결과 문답형식의 홍보문안을 제공합니다. 목요일자에 편집을 하기로 내부회의까지 마쳐둔 상황에서 계장님은 최근 창간된 또 다른 신문사 젊은 기자에게 이 자료를 또 한 번 넘겨줍니다.

 

자료를 받은 젊은 기자는 그날 저녁 즉시 편집을 하여 수요일자에 정말로 신문짝만하게 보도합니다. 목요일에 기획기사를 준비하고 다른 기사를 취재하던 S기자는 경쟁사 신문에 신경을 쓰면서 수요일 신문을 읽었을 것이고 그 신문에 난 기획기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그리하여 자료를 제공한 계장님에게 가서 왜 타사에도 이 자료를 주었는가 따지듯 물었던바, 계장님은 수요일에 나간 신문은 나갔고 내일 목요일에 또 나가면 좋은 일 아닌가 반문합니다. 그리하여 S기자의 어필은 과장님까지 올라갔고 영문을 모른 과장님은 일단 항의를 하므로 미안하다는 답을 하였지만 왜 미안한지는 이해하지 못 한듯 하였다는 전언입니다.

 

이처럼 1988년은 올림픽이 개최된 해이지만 지방자치단체에서의 언론에 대한 이해도는 많이 낮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4사 언론과 소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관선기자를 포함하면 5명 기자가 도청이라는 언론 밀림의 숲에서 야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좋은 자료를 먼저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입니다. 신문사 기자가 먼저 취재한 자료는 풀 보도자료로 내지 않는 신사협정 비슷한 상황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취재원을 찾아다니는 야생의 현장에서 생존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기존 신문사 기자들은 풍성한 지방행정사무관 계장과 행정사무관 과장의 지원을 받으며 기사취재를 이어갔고 신진 언론인들은 악어가 세렝게띠 공원에서 누를 사냥하듯이 치열한 취재현장의 소리없는 전쟁을 이어갔습니다.

 

관선기자는 도지사 비서실, 부지사실, 발간실, 문서실의 중앙문서 접수와 발송 장부를 확인하면서 좋은 기사의 냄새를 찾아다녔습니다. 최근에도 찾아가고 공무원 퇴직 후에도 가끔 마실을 가는 '경기도청 발간실'은 취재원의 천국이었습니다. 발간실에는 결재가 완료되어 시군청이나 민간에 발송을 기다리는 따끈한 '기자의 먹이감'이 책꽂이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악어가 사는 강 뚝 여울목으로 꽃사금이 단체로 물을 마시러 온 격입니다. 일단 발간실장님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저는 공보실에 근무하는 이강석입니다. 도정 홍보자료를 구하러 왔으며, 이 자료의 제목만 적어가서 해당과의 동의를 구해서 자료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당시 김 아무개 실장님은 약간 걱정을 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승낙해 주셨습니다.

 

2년 반 동안 보도자료 먹잇감이 떨어지면 찾아가는 초원, 풀밭은 발간실이었습니다. 활자라는 풀이 대자연 위에 펼쳐진 곳입니다. 그 풋풋한 야생초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해서 동두천시청 동장을 하다가도 이곳에 와보고 북부청 과장을 하다가도 왔습니다. 최근에도 발간실에 들러서 추억을 이야기하고 옛날 선배들을 추억했습니다.

 

30년 전 도청 공보실을 돌아보고 당시의 기자실을 회고해 보면서 참으로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그 세월의 흔적도 이곳저곳에 많이 간직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신문이라는 흔적이야말로 역사의 소중한 부분이고 방송보다 신문

이 정보전달에 앞장섰던 시절이었으므로 신문기자가 대부분이었던 당시를 행복하게 추억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1988년에 근무하였던 그 사무실은 보도담당관실이 차지하고 있지만 세 분의 계장님, 차석님 동료들이 생각납니다. 골프장 보도를 막다가 열심히도 막다가 스트레스로 쓰러져 우리 모두를 울리고 안경을 분실할 정도로 술을 마시게 한 고인이 되신 계장님을 추억합니다.

 

지금도 성남시 공원묘역 어느 중턱에 영면하신 계장님. 오늘처럼 참 추웠던 1989년 12월31일 道廳葬(도청장)을 기억하는 이가 대부분 경기도청을 떠나신 듯 합니다. 이제는 작은 글로 1988년 1989년 경기도청 공보실과 기자실을 기록하고 저 또한 사무실을 떠났습니다.

 

모든 공무원, 언론인, 도민들께 감사드립니다. 1991년 4월 24일에 적어둔 글을 2020년에서야 첨삭 정리했습니다. 그동안 시간과 세월이 많이 흐르고 주름살이 늘었지만 자신을 돌아보는 능력은 조금 신장되었습니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경기도민회장학회 감사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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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