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5시경 SNS로 부부가 합의했습니다. 아침 6시에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를 향해 출발하여 배 타고 건너가서 어소, 엄흥도소나무, 노산대, 망향대, 관음송, 금표비 등 단종의 역사와 흔적을 다시한번 현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녁 일찍 잠을 청했지만 여행여정을 미리 네비게이션처럼 달리느라 복잡한 꿈을꾸다가 새벽 3시경 일어났고 다시 잠을 청하기도 애매하여 아침까지 정신을 차리고 6시반에 부부가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대략 165km를 운전하여 청령포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배표를 받아들고 뚝방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니 청령포 전경이 나오고 2대의 배 중 한 대가 지금 막 청령포에 도착하여 손님을 내려주고 돌아오고 있습니다. 벌써 7번 이상 오간 것인가 추정해 봅니다. 새벽공기를 가르고 달려온 영화팬들이 우리 부부와 같은 생각으로 영화속에서 만난 청령포와 단종과 엄흥도를 현장에서 한번 더 만나고 보고 느끼고자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간간이 새어나오는 이야기를 엿들어보니 영화의 어느 장면과 현장을 매칭시키는 부부, 연인, 가족의 대화내용이 잘 들립니다. 흔히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아는만큼 들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청령포의 모래 한 줌, 자갈 한개, 작은 굽는 소나무, 큰 긴 소나무, 그리고 가장 크고 웅장한 관음송까지 어느하나 놓칠 수 없는 영화의 소품이 되고 있습니다.
머릿속에 영화필름을 돌리면서 청령포의 소나무를 만나고 단종의 어소를 기웃거리고 금표비를 슬프게 바라봅니다. 관음송의 가지위에 어린임금 단종이 걸터앉아 한양을 향해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하는데 훌쩍 커버린 저 관음송 소나무위에 누군가가 앉으려면 아마도 키 3m의 거인이 될 것이라 가정해 봅니다.
청령포는 영월군의 설명대로 “육지속의 작은 섬”입니다. 국가지정 명승 제50호입니다. 설명을 들어보세요.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 국가지정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1456년 박팽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고변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고 다음해인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당시에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여름 장마철이 되면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현재 청령포 경내에는 영조 2년(1726)에 세운 금표비(禁標碑)와 영조 39년(1763)에 세운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遺址碑)가 옛일을 전하고 있다.
부부는 지난날에 3번인가 청령포를 방문한 바이고 오늘이 4번째이지만 <엄흥도 소나무>가 담장을 지팡이 삼아 단종이 머물렀던 어소에 이처럼 지극정성으로 절하는 모습은 이번에 처음 발견하게 됩니다.
영화가 온 국민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경쟁적인 유투버들의 활약으로 깨알정보를 많이 획득한 바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양한 작은 이야기는 이 글 내내 가끔 끼어들 것입니다.
소나무밭을 돌아보고 뒤편 언덕을 올라가 한양을 바라보니 당시 어린 왕이 그리워한 정순왕후와 신하들에 대한 애틋함이 가슴을 적십니다.
좁은 길을 여러 날 오갔을 같은 인물 단종과 노산군을 생각했습니다. 이제 청령포의 소나무, 둥근 자갈, 검은 기와, 초가집, 기와집 모든 소품이 소중해지는 순간입니다. 눈에 넣고 마음에 새기고 발자취에 함께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청령포 동강을 건너는 배표의 뒷면에 인쇄된 설명자료입니다.
청령포. Cheongnyeongpo Meandering Stream (명승 Scenic Site)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영월읍에서 남서쪽으로 2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세조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뒤 단종을 이곳 청령포에 유배시켰다.
청령포는 삼면이 깊은 강이고 뒤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단종은 2개월 정도 지내다가 홍수로 인해 영월읍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Located in Gwangcheon-ri, Nam-myeon, about 2kin southwest of downtown Yeongwol, Cheongryeongpo is the place to which DanJong the six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was banished, surrounded on three sided by water and on the fourth by a steep cliff, DanJong spent about two lonely months here until a flood forced his removal to Gwanpungheon in the center of Yeongwol.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청령포로 133청령포 관리사무소 033) 372-1240
여기는 이제 장릉입니다. 조선 제6대왕 단종의 능이라고 영월군에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莊陵(세계유산, 사적) : 단종(1452-1455 재위)은 제5대 문종의 아들로 1452년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승하하니 12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의 출산 후유증으로 출산 후 하루 만에 승하하였고, 단종의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1453)으로 권력을 잡자 단종 3년(1455) 세조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이 시도한 단종 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세조3년(1457)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명승)로 유배되었으며, 여름철 장마에 잠길 우려가 있어 객사 관풍헌으로 거쳐를 옮겼으며, 영월 유배 4개월만인 음력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17세의 로 일기승하하였다.
중종 11년(1516) 장릉은 비로소 왕릉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고, 숙종 24년(1698)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2012년에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연수원 1년 장기교육중에 전체 교육생 40명이 청령포와 장릉을 방문했습니다. 동료 교육생들이 전주이씨 왕손 대표로 앞에나가 절을 하라 추천하여 그리한 바가 있습니다.
이처럼 그동안 살면서 청령포와 장릉을 묶어서 방문한 바 여러번인데 오늘은 그 중에도 각별함이 있습니다. 영화를 본 부부가 영화의 주인공이 남긴 흔적, 역사에 남겨진 현장을 가보자는 의견일치에 의해 전격적으로 방문했기 때문입니다.
입장료는 일반 2,000원, 65세이상 무료입니다. 장릉 입구에 들어서면서 오른쪽 정자를 향해 인사를 한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누군가가 올린 글을 찾아냈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합니다.
배견정(拜鵑亭)은 1792년 영월부사 박기정이 세운 것으로, ‘배견(拜鵑)’은 ‘두견에게 절하다’라는 뜻인데, 단종 사후 동강 절벽에서 투신한 시녀들이 죽은 후에도 단종을 고장(藁葬)했던 동을지(冬乙旨)에 와 문안을 드렸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네요.
여기에서 잠깐, 고장(藁葬)이란 시체(屍體)를 짚이나 거적에 싸서 장사(葬事)를 지냄, 또는 그 장사(葬事)를 말한다 하니 단종의 장례절차에 부족함이 많았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지극정성은 다른 왕의 국장절차에 부족함이 없다는데 공감하게 됩니다.
우리 부부는 우선 배견정을 관람했습니다. 평범한 정자인데 단종을 추모하는 역사적인 스토리가 있으므로 더욱 소중해집니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단종과 함께한 영혼들이 이곳에서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이 사연을 아는 영월의 사람들은 장릉에 들어서면 우선 오른쪽 배견정을 향해 인사를 한다는 유투버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제 장릉으로 올라갑니다. 산줄기가 저 높은 곳에서 시작하여 부드럽게, 좁게 내려와서 이곳 배견정에서 평지와 연결됩니다. 그 산줄기로 오르는 작은 길이 있습니다. 계단으로 시작해서 보도가 되어 장릉까지 연결됩니다. 영월군에서 군수님의 배려로 시멘트 포장을 했습니다.
영월군에서 봉직한 조선시대 군수영감도 여러명일 것이고 정부수립후 지방자치 시행인 1995년 6월30일까지 대통령, 내무부장관, 행정안전부장관의 손으로 임명된 이른바 관선군수도 많을 것입니다. 이분들, 그리고 공무원, 영월군민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보존되어온 장릉입니다. 그런 감사한 마음을 품고 차분히 따스한 봄길같은 2월하순의 왕릉가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 길의 오른쪽에 남양주소재 정순왕후 왕릉, 思陵(사릉)에서 이식한 소나무가 서 있습니다. 표지석에 <精靈松> '1999. 4. 9 남양주문화원, 사릉에서 이전식수'라고 적었습니다. 정령송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백승훈 시인의 글을 인용합니다. 사릉은 단릉으로 웅장하지도 호화롭지도 않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했고 석양과 석호를 줄였다. 하지만 왕릉으로서 기품만은 잃지 않았다. 문석인·석마·장명등·혼유석·망주석은 작게 조성하고, 홍살문·정자각·비각도 서 있다. 사릉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소나무다. 이곳에는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각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 사업소가 있다. 특히 이곳 소나무 묘목은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인 준경묘와 영경묘의 낙락장송 후손으로,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소나무다. 1999년,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 심어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고 못다 한 정을 나누게 했는데 그 소나무가 ‘정령송(精靈松)’이다. [사색의향기] 사릉(思陵)의 가을
1999년부터 오늘까지 27년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긴 세월동안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정을 영혼으로 연결해주는 나무라 생각합니다. 장릉을 방문한 다정다감한 모든 사람에게 작은 사랑과 삶의 의미를 전해주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무에 관심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각목버드나무>는 이제 그 스토리가 3년차이지만 30년안에 수원에서는 의미있는 장소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수원 원천천변 중앙에 자리한 각목위에서 잔뿌리가 뿌리를 내리고 생장하던 것을 시청 베테랑 팀장의 도움으로 영통구청 앞 공원에 이식한 나무입니다.
치열한 생명력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여 각목버드나무라 이름짓고 수필집을 한권 출간했습니다. 초기에는 자주 들러서 물을 주고 주변의 잡초를 뽑았습니다. 이제는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생장, 성장하는 중입니다. 이 버드나무가 잘 크면 노후에 기념사진을 찍어볼 생각입니다. (Bookk.co.kr 각목 버드나무 구하기/수원시 베테랑팀장 이야기 참조/이강석 2024. 3. 22 출간)
나무와 관련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우선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애절함이 담겨있는 경기도 양평 용문산 용문사 경내의 1,020년 은행나무가 있고, 600년전 묘목으로 심겨진 석송령은 예천군청에 세금을 낸다고 합니다. 1900년대 땅 주인이 반을 잘라서 나무앞으로 토지소유를 등재해 주었다고 합니다. 주변에 식당 영업이 잘 되어서 관광객 수입으로 토지세를 낸다는 스토리입니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정2품송은 세조의 가마가 걸리지 않도록 가지를 들어올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아마도 나무중에 증명사진이 가장 많이 찍힌 기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중고생 수학여행, 일반 관광객의 사진속에는 한두장 정2품송이 있을 것입니다.
세월이 가면 남양주에 모신 정순왕후의 사능에서 출발하여 단종의 유배길을 거쳐서 이곳에 이식된 이 나무 <정령송>이 정2품송 만큼이나 여러번 많이 기념사진의 주인공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이제 만났습니다. 단종 임금을 만났습니다. 엄흥도와 그 아들의 손길로 한밤중에 모셔진 자리라고 합니다. 맹열한 유투버의 설명에 따르면 추운 겨울날에 동강에 시신이 버려졌고 “이를 수습하는 자 3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어명이 떨어졌다 했습니다.
어명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엄흥도 부자들이 단종을 모시고 산에 오르니 노루 한 마리가 숲에 앉아있다가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주변의 땅이 얼어서 묫자리를 팔 수 없었는데 노루가 지정해 준 자리는 녹아서 땅을 팔 수 있었다 합니다.
1457년 11월에 조성되었다는 단종의 묘는 평범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平葬(평장)으로 하고 낙엽으로 덮었을 것입니다. 훗날에 엄흥도의 아들 중 한명이 돌아와서 그 자리를 확인해 주었고 역대 왕조에서 왕릉을 조성하고 관리했습니다.
장릉 입장표 뒷면에 인쇄된 소개의 글입니다.
장릉. Jangneung Royal Tomb(사적 Historic Site) 장릉은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의 능이다. 단종은 문종의 외아들로 세종23년(1441년) 에 태어나 12세인 1452년 조선 제6대 임금에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즉위 3년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 후 1457년 세조에 의해 영월 청령포로 유배 되었고 그해 10월 24일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 하셨다. 장릉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을 향해 절하듯이 굽어있어 경이로움을 더한다.
Jangreung is the royal tomb of King DanJong. the six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Danjong ascended to the throne in 1452 at the age of 12. but was overthrown by his ambitious Suyang(King Sejo) after only three years on the throne. In 1457, he was demoted to prince and exiled to Cheongryeongpo in Yeongwol, In October of the same year, he was forced to drink poison and died at the age of 17. It is a wonder that the pine trees in the area all lean toward the grave, as if in reverence.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장릉 관리사무소 033) 372-3088
남양주시청에 근무할 때 영화<덕혜옹주>를 본 공무원들의 소감문을 강제로 원고청탁하여 열정으로 만든 자료집을 허진호 감독과 스텝앞으로 보냈던바 훗날에 시장님께 감사인사를 위해 방문하는 결과를 끌어낸 바 있습니다.
시청을 방문한 감독 일행과 점심을 먹고 실제 <덕혜옹주>묘역에 가서 인사를 드리자고 제안합니다. 멋진 감독님이 승낙을 하시고 부근에서 주차하고 걸어서 묘역에 오릅니다. 그리고 <일동 덕혜옹주님께 묵념!!!>을 외쳤고 발 빠른 공보팀장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무실에 돌아와서 이 사진과 감독의 <덕혜옹주>묘역 방문소식을 보도자료로 뿌려댑니다. 연합뉴스에 이어 이를 받아든 KBS기자가 뉴스로 <영화, 덕혜옹주>와 감독의 시청방문소식, 그리고 덕혜옹주의 묘역에 대한 모습을 상세하게 보도합니다.
이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 소환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서 2016년에도 남양주시에서는 오늘의 이만한 파장은 아니지만 아주 작고 미세하지만 의미있는 물결이 있었음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덕혜옹주>개봉을 계기로 남양주시에 옹주님의 묘역이 있음을 시민과 국민에게 알렸고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이 남양주에 모셔진 사실을 홍보했습니다. 그리고 단단한 행정조직으로 소문난 왕릉관리사업소 소장 국비 서기관님이 결재를 해서 27명의 조선왕의 왕릉 사진을 전시하는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평소 철조망 문을 닫아버렸던 덕혜옹주와 의친왕묘역을 일반에 개방하는 성과도 덤으로 얻어냈습니다. 이에 힘입은 당시의 부시장은 (물론 저를 말합니다만) 덕혜옹주 묘역과 홍유릉을 돌아가는 토지를 구매하여 이 자리에 조선왕 27분의 <왕릉미니어쳐>를 세우자는 제안을 합니다. 토지의 형상대로 U자형으로 꾸미고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정종, 단종, 세종, 정조왕릉은 따로 자리를 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같은 왕릉 미니어처 제안은 다산 정약용의 편지 <하피첩>의 분실된 4첩의 글을 국민 백일장, 한시백일장을 열어서 후손들이 채워나가자는 생각과 맥이 통하는 정책제언이라고 자부합니다. 당시에 언론에 발표한 기고문입니다.
<홍유릉과 덕혜옹주> 1919년 3월에 우리 남양주시에서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독립만세를 부른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1919년에 승하(昇遐)하신 고종황제는 사후에 대한민국 백성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3·1운동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고종황제(1852~1919)와 명성황후(1851~1895)를 홍유릉(洪裕陵·사적207호)에 모셨습니다. 홍릉(洪陵)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모셨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왕릉에 등을 기댄 듯 위치한 유릉(裕陵)에는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순정황후가 영면하십니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고종과 국정을 논의하는 파트너였으며 당시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가문의 배경이 없는 분이라서 황후(왕비) 자리에 올랐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홍유릉을 지나 뒷산으로 가면 영친왕을 모신 영원(英園), 이구 황세손을 모신 회인원(懷仁園)이 자리합니다. 의친왕묘가 같은 자락에서 마주하며 특히 고종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묘가 참으로 단아하게 우리를 맞아줍니다.
고명딸 덕혜옹주(1912~1989)의 교육을 위해 고종황제께서는 덕수궁에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幼稚園)을 설립했다고 합니다. 정략결혼과 따님을 잃으신 안타까운 사연을 가슴에 품고 양지바른 산자락에 외롭게 자리하신 덕혜옹주의 묘역앞을 걸어가면 누구나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됩니다. 욕심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평정을 얻는 역사 思索(사색)의 오솔길 입니다.
남양주시와 포천시를 감싸 안은 광릉은 산림이 우거진 곳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인데 그 산림 속에 자리한 광릉(사적197호)은 세조의 능입니다. 남양주시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릉(思陵·사적207호)은 단종의 비인 정순황후를 모셨는데 릉(陵)주변 소나무가 지금도 영월의 장릉을 향하고 있다 합니다. 강원도 영월 장릉(사적196호)에 모셔진 단종이 돌아가신 淸泠浦(청령포)의 觀音松(관음송)과 주변의 다른 소나무도 단종을 모신 신하에 비유되며 지금도 한양을 향해 허리를 숙인다는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합니다.
출·퇴근길에 홍유릉길을 걸으면서 역사여행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마음속에 참 좋은 생각이 자리합니다. 남양주시 홍유릉 아래 역사의 오솔길이 지나는 자리에 터를 잡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미니어처를 꾸미고 국내외 관광객을 모신다는 발상입니다. 평범한 미니어처(miniature)가 아니라 보고 듣고 느끼고 감동하는 생생한 조선왕릉의 입체적, IT적, 감동적, 역사적인 작품을 구상하자는 제안을 대한민국 문화재청에 드리는 것입니다.
경기도와 서울특별시 땅 모양을 축약하여 이곳에 옮겨놓고 태조 이성계 건원릉부터 고종황제, 명성황후, 순종황제의 능과 덕혜옹주의 묘를 만들고 각각에 스토리텔링 간판을 달고 싶습니다. 왕릉 앞의 홍살문과 재실로 가는 신도(神道)와 어도(御道)에 대한 설명문, 재실에서 아주 높게 왕릉이 자리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이어폰을 통해 각국의 언어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건원릉(이성계)의 봉분 벌초를 하지 않는 이유, 정조대왕이 융릉 소나무를 갉아먹는 송충이를 깨물며 야단친 사건, 대빈묘 언론보도 사연, 그리고 유릉에 등장하는 코끼리, 낙타에 대한 설명을 붙여서 초중고생 교육에 도움을 주게 되기를 바랍니다. 왕릉그룹에서 조금 멀리 자리한 융건릉(장조, 정조), 여주에 모셔진 영릉(세종), 장릉(단종)이 강원도에 조성된 사연 등도 학생들에게는 꼭 필요한 역사 속 해설이 될 것입니다.
훗날에는 이곳 홍유릉과 함께하는 역사가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이 될 것입니다. 남양주에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일들을 남양주시민과 경기도민,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 또 한 번 해내야 하는 역사적인 과업이 될 것입니다.
이 정책제안을 다른 언론을 통해서 현직 시장님을 수신인으로 하는 기고문 형식으로 보낸 바가 있습니다. 남양주시청 간부들에게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무소식, 무반응입니다.
장릉을 살펴보면서 그 안에 세워진 10개가 넘는 시설들이 쉽게 설치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합니다. (2026- 1455= 571) 570년전에 왕명을 거부하고 목숨을 건 용기를 내서 엄흥도와 그 아들들이 조성하고 설치한 평장묘역에서 출발하여 오늘의 장릉이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왕과 관리와 백성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고 여러가지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지어지고 헐리고 개수하고 무너지고 불타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니 그속의 애환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자료를 살펴보니 장릉의 주요시설은 배견정, 박충원 낙촌비, 단종역사관, 단종릉, 배식단, 홍살문, 향로, 어로, 영천 등이 있습니다.
靈泉(영천)은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祭井(제정)으로 사용했던 우물이라 하고 박충원 낙촌비는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라고 합니다.
이외에도 자료집 소개를 보면 수라간, 정자각, 단종비각, 수복실, 장판옥, 엄흥도 정려각, 재실이 있습니다. 이중 장판옥은 충신 32인, 조사위 186인, 환자군노위 44인, 여인위 6인, 총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랍니다.

여인위 6인은 아마도 단종, 노산군의 유배길에 자청해서 동행한 궁녀라고 들었는데 영화에서는 이중에 한 명 매화(배우 전미도)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단종이 승하한 후 이들은 청령포 낙화암에서 강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스타 장항준 감독은 궁녀 6명을 모두 출연시키려면 영화 2시간이 꽉 찰 것이니 대표로 한사람을 출연시킨 것이라는 조크를 날렸더군요. 생략법도 영화구성의 전략이라 할 것입니다. 영화에서 세조는 나오지 않고 한명회를 살찌워서 두 사람의 역사인물 역할을 하도록 했더군요.
영화를 위해 캐스팅 한명회는 살찌우고 노산대군 단종(배우 :박지훈)은 다이어트를 했다고 합니다. 풍선효과라고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튀어나오는 것과 맥이 통하는 모습입니다.
설명자료에 나오는 대로 <조선 제6대왕 단종의 능 영월 장릉>앞에서 여러장 사진을 찍었습니다. 부부가 나오기도 하고 장릉의 모습만 담기도 했습니다.
장릉에서 내려다보이는 靈泉(영천)은 주변의 풍성한 나무들과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영천은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祭井(제정)으로 사용했던 우물입니다.
영릉의 여러 구성요소들은 마치 요즘 종편방송의 <나는 자연인이다>의 작은 집 한 채가 있을법한 산자락, 그 계곡이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대왕의 여주 영릉만큼은 아니지만 중후하게 자리잡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모습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관리들의 고민과 결정, 공사진행을 위한 노고가 느껴집니다. 이 시대 각종 공사현장이 지연되는 것을 보면서 과거에도 계획수립, 기획, 예산확보, 집행, 결산 등 다양한 행정, 재정적 절차로 인해 참으로 많은 관리와 백성들의 노고가 함께했을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위패에 모셔진 268명 한분 한분의 인생과 그분들이 행한 단종을 위한 노고와 희생에 대한 이야기도 잘 풀어내야 할 후손들의 임무가 보입니다. 위패에 빼곡하게 잔 글씨로 이름과 직책을 새겨낸 후손, 어느 관리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엄흥도 정려각 현판을 보니 훗날에 큰 벼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旌閭(정려)란 충신, 효자, 연려등을 그 동네에 旌門(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이라고 합니다. 정려각의 현판을 보니 1759년에 <공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876년에는 충의공 시호를 받았습니다.
<영월문화원 자료> 엄흥도(嚴興道) 조선전기의 문신, 지사, 시호는 충의(忠毅). 영월의 호장으로서 단종이 시해되자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충의공은 이 고장 호장직(戶長職)에 있었다.
밤낮으로 대왕의 거소(居所) 청령포를 바라보고 대왕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 대왕의 거소에서 슬프고 애끊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대왕은 울음을 멈추고 “이 심야엔 웬 사람이 나를 찾는가?” 하고 물으니, “소신은 이 고장 영월호장 엄흥도이옵니다”라고 대답하고 옥안을 바라보니 대왕은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비조불입인 이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하고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후 호장 엄홍도는 매일 밤 풍우를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대왕은 청령포 어소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에 침소를 옮기게 되어 밤마다 객사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를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승하하니, 그 옥체는 동강물에 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후일에 낙화암이라고 함)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하였는데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호장 엄흥도는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므로 성사치 못하자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하였다 옥체를 인양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가족들과 같이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支山)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호장 엄흥도의 충성은 인정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늘이 내렸다하여 후세인들이 그를 항상 추모하였다.
1759년 (영조 34년) 그 벼슬을 공조판서로 추봉하여 사육신 정렬에 배향하고 육신사(六臣祠)에 봉안·치제케 했다.
그후 1516년 (중종 11년)에 어명으로 노산묘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후인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노산료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건립,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에 배합향배(配合享배)케 하고 정려치제(旌閭致祭)케 하였으며, 1833년(순조 33년)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 시호를 내렸다. 지금의 묘소는 영월읍 팔괴리 창평산 186번지에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어린 왕의 선위와 이별의 아픔, 왕위 찬탈, 신하들의 경쟁 등 여러 방향성을 가지고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역사는 역시나 온고이지신입니다. 과거를 살펴서 오늘의 배움이 있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가 의견의 일치와 아름다운 합으로 현장을 탐방했습니다. 마침 남양주에 모셔진 정순왕후의 슬픔이 담긴 사능에 대한 스토리를 아는 바이고 강원도 영월에 잠든 단종과의 이별이야기는 부부의 마음을 짠하게 합니다.
그래서 12시간 동안 청령포, 장릉, 법흥사와 적멸보궁, 명성황후 생가를 방문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배려하면서 참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적멸보궁에서 3년만에 108배를 올렸습니다. 과거 장년시절 8년간 매일아침 108배를 올린 바이고 4번 3000배를 올린 자부심이 있지만 법흥사 적멸보궁에서의 108배 또한 행복했습니다.
적멸보궁에 합장하고 들어서는 순간 부처님께서 오랜만에 108배를 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군말없이 절을 시작하니 54배에서 환한 미소가 보입니다. 108의 절반은 54입니다. 늘 그러하듯이 108배를 마치고 3배를 추가했습니다. 혹시 숫자에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살피는 마음으로 3번 더 절하는 참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한 여행, 영화를 보고 감동받아 달려온 청령포, 장릉 등 영월여행, 그리고 귀가길을 조금 우회하여 들른 사찰의 적멸보궁의 평온함이 잘 어우러졌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인생은 하모니입니다. 융합이 경쟁력입니다. 그냥 청령포를 여행하였다면 이 같은 감흥을 얻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 좋은 영화와 공감, 감동, 배우 유해진의 활줄을 당기는 듯한 연기에 눈물 흘린 관객, 그리고 부부의 소통으로 하룻만에 이루어진 청령포 여행이라서 모든 것이 보람이고 행복의 힘과 그 원천이었습니다.

이 감동을 잘 연결해서 주변의 지인들이 공감하는 글자료가 되도록 다듬고 보충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단종왕과 정순왕후의 명복을 빕니다. 단종앞에 심어놓은, 두 분을 연결하는 소나무가 잘 커서 후대에게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따스하게 전해주기를 바랍니다.
<판서 엄흥도>의 중후한 삶에 공감하고 동참하고자 합니다. 그 자손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왕과 사는 남자>의 감독, 배우, 스텝, 여러 관계자의 더 큰 발전을 소망합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