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1994년은 예산부서에서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기입니다. 한여름에 예산편성을 시작하여 겨울 크리스마스를 지내야 마감되는 대정정의 기간입니다. 6월경에 편성 기초를 시작하여 8월, 9월에 열정적으로 업무를 진행합니다. 추석을 맞아 이틀을 쉰후에 겨울이 될때까지 금토일 모두 출근했습니다. 한여름에는 작업실 에어콘이 없으므로 옆사무실 에어콘을 켜고 찬바람 출구에 못자리에 쓰이는 통비닐을 연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찬바람이 배달되는 비닐통로가 지나는 구간에 물방울이 맺혀서 바닥에 우두득 떨어지므로 장시간 에어콘 바람을 수송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을이 되어 본격적인 일을 하게되면 판장모 내듯이 예산과목별로 하루하루 작업을 진행합니다. 일반운영비, 여비, 재료비 등 각 항목을 실국, 실과, 부서, 사업소까지 정리하여 일괄처리한 후 기본경비에 대한 예산은 기획관리실장님 전결로 결정을 합니다. 이어서 지역개발비 등 예산액이 큰 사업비에 대한 편제에 들어가서 개별 사업별로 도지사님의 결재를 받았습니다. 중간에 부지사님께도 5시간 이상 장시간 보고를 드립니다. 예산내용은 전산프로그램에 입력하고 이를 심사한 후 최종액이 결정되면 자동으로 계산되어 예산규모를 정하게 됩니다.
예산업무에 종사하다 보니 새로운 용어, 중요한 규정에 접하게 되었고 이를 모아보니 작은 책자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예산용어집을 만들었습니다. 정말 바쁘게 일하다 보니 1권 보존을 했어야 하는데 지금 집어디에도 그 자료집이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이 자료집을 보고 참고하여 공부하고 도움을 받았다는 동료, 후배 공무원들의 격려를 조금 들은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을 회고해 보면 예산의 구분, 계속비, 명시이월, 사고이월, 예비비 등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산안의 편성, 심의, 의결, 집행의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예비비란 예측하지 못한 지출 수요에 충당하기 위하여 일반회계 예산의 1% 범위내에서 정하도록 한 예산입니다. 예비비 지출은 집행부에서 하고 차기 의회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지방재정법 제43조(예비비) ①지방자치단체는 예측할 수 없는 예산 외의 지출 또는 예산 초과 지출에 충당하기 위하여 일반회계 예산 총액의 100분의 1 범위 내의 금액을 예비비로 예산에 계상하여야 한다. 명시이월과 사고이월은 논의, 논쟁사항이었습니다. 예산을 편성하였는데 당해연도에 원인행위를 하지 못한 사업을 예산서에 표기하여 이월하는 것을 명시이월로
2002년 월드컵 안정환의 미국전 헤딩 동점골 순간에 사무실에 혼자 있었습니다. 혼자서 방방 뜨면서 기뻐했던 모습을 지금 생각해 보아도 생생합니다. 모든 선수와 스탭이 엉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날은 하루종일 슛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인터넷으로 다시보기를 해도 그날의 감동이 떠오릅니다. 당시 업무는 도지사님 인터뷰입니다. 방송국, 신문, 월간지, 주간지, 일간지 등 모든 언론에서 오는 인터뷰를 섭외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는 임무입니다. 참으로 다양하고 재미있는 일입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몇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중앙지가 도지사 인터뷰를 싣는 경우는 연초에 시도별로 돌아가면서 박스 기사 기획을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급한 것은 아닙니다. 중앙사로서는 반드시 16개 시도를 돌아가면서 한번은 인터뷰 기사를 올리는 것이니 바쁘면 늦추고 가능하면 서둘러도 됩니다. 두번째로는 현안이 있을때 인터뷰를 요청하게 되는데 이는 중요한 기회이고 공보관실에서 미온적이면 인터뷰가 킬 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중간에 있는 간부들이 중앙사와의 인맥을 통해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도정 전반보다는 최근 어필하고 싶은 분야
1996년에 예산부서에서 예산 배정 등 업무를 담당하던 중에 1996년4월3일에 경기도지방공무원교육원에 발령되었습니다. 지금은 인재개발원으로 개칭되어 과거 내무부 소속 지방혁신인력개발원(연수원)의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여 확대개편하였습니다. 경기도인재개발원이 쓰던 사무실에는 경기연구원, 경기관광공사, 경기복지재단, 여성가족개발원이 입주했습니다. 이곳 공무원교육원 교재연구담당관실에 사무관 요원으로 배속되었습니다. 발령후 1개월여만에 사무관 승진교육 대상자를 선정하는데 전국적으로 인원이 많아서 3월31자로 끊는 바람에 교육은 가을로 밀렸습니다. 그리하여 교재제작 업무를 하면서 6개월을 기다려 1996년11월23일에 지방행정사무관에 승진, 임관하였습니다. 1977년 5월16일에 공직에 들어왔으니 19년이 걸렸습니다. 요즘에는 20년 이상 걸린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교재제작 담당과 교관으로 지정되어서 '창의력 신장'이라는 과목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창의력에 대한 다양한 교재와 교안을 보면서 다양한 창의에 대한 생각을 키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림으로 보는 창의력이 있고 글로 이해하는 창의성도 있습니다. 그동안 행정조직 안에서 부분 부품처럼
1996년 사무관 승진 교육을 연말에 받은 이유는 전국적으로 별정직 읍면동장이 일반직으로 전환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초까지 읍면동장은 지역의 유지급 인사들이 취임해서 지역사회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고향동네의 경우에도 지역 어르신 홍 면장님이 10년이상 면장을 하셨고 1977년 가을에 당시 우리 면의 예비군 중대장을 하시던 윤 면장님이 취임하셨습니다. 대부분 읍면동장은 당의 간부나 지역의 유력인사를 추천받아 군수가 임명하였는데 제도가 바뀌어 6급 공무원이 조기 퇴직하여 별정5급 읍면장 발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일반직(행정, 농림, 토목, 건축, 환경 등) 공무원을 임명하였다가 다시 본청의 과장으로 배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97년초부터 전국적으로 읍면동장이 사무관에 승진하기 위한 교육수요가 크게 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996년 4월3일자로 직무대리 발령을 받았던바 3월말로 교육대상자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3일 차이로 다음 교육을 기다려서 1996년11월22일에 제4기 초임관리자 과정 교육을 마치고 11월23일에 사무관에 승진하였습니다. 6개월 정도 늦었지만 행복했습니다. 사무관이라는 직함을 받으니 힘이 났습니다. 조상님 묘역
도청 출신 조금 선배들은 6급에서 사무관 직무대리를 받고 동두천시청에 와서 과장 보직을 받고 공부를 해서 사무관 시험을 보았습니다. 주관식 사무관은 논술을 본 분들이고 객관식 사무관은 5지선다형 시험을 통과해서 사무관에 임용된 분들입니다. 하지만 1996년, 1997년에는 6급에서 5급 보직을 받고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에서 6주간 교육을 받으면 사무관에 승진했습니다. 그러니 1997년부터 동두천시청에 발령받고 온 사무관들은 오는날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으므로 시 공무원들과 시민들은 전임자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셨습니다. 더구나 3명이 한 숙소에 기거하면서 매일 만나 시정에 대해 토론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면서 근무했습니다. 그 숙소는 폐지된 배수지 탱크 옆의 청경 근무초소였습니다. 방3개를 어렵게 원룸처럼 꾸미고 살았습니다. 가끔은 시청 간부를 초청하여 삼겹살을 구워먹었습니다. 재료를 구매하여 직접 구워 먹으면 더 맛있고 적은 금액으로 많이 먹을 수 있습니다. 윤영우 부시장님을 초청하여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시고 택시를 잡아타고 관사로 가시는 모습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세명의 사무관은 생연1동장, 생연4동장, 상수도사업소장입니다
지난해 수해복구를 마치고 본격적인 동장으로서의 임무를 계속했습니다. 1998년 말이 되면서 수해피해, 상공업 기반의 부족, 구시가지의 한계점 등으로 인해 우리 동 인구 5,000명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회계담당이며 지금 시청 간부인 오천명씨 혼자서 동사무소를 감당하여야 한다는 농담을 했습니다. 동생은 오정명, 형은 오천명인데 우리동 주민수는 4천대로 내려갔습니다. 결국 1998년11월30일에 생연3동과 생연4동을 합하여 중앙동이라 하고 3동 이상용 동장님이 통합 중앙동 동장이 되시고 저는 시설사업소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동 사무장도 시설사업소 운영계장으로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정들었던 동사무소 동료들도 중앙동, 다른 동, 시청 등으로 떠나갔습니다. 과거 동두천읍 시절의 중심지가 공동화 현상으로 인하여 통합되는 아픔을 겪은 것입니다. 1999년에 들어서서 시민회관, 종합운동장, 도서관을 관리하는 시설사업소장의 임무에 흥미를 가지고 일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수원 집으로 왔다가 일요일 오후나 월요일 새벽에 시청에 올라가서 간부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상수도사업소장 신 소장님과 교대로 차를 운행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서수원 집으로 가서 신소장을 태운 후
2000년은 공보실 근무의 최고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공직에서 이만한 성취와 보람의 시대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 가는 길이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다른 사례를 빌려다가 우리의 업무에 접목하고 창의적으로 일감을 찾아내어 우리 방식으로 추진했습니다. 도정홍보를 위해 젊은이들의 도정홍보 광고문안 콘테스트를 열었습니다. 도정에 홍보가 되는 것이라면 선거법에 위방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다양한 일을 추진했습니다. 홍보컨설팅을 받아보니 전문가가 따로 있습니다. 글 한줄, 이미지 하나가 독자와 도민의 마음에 큐피트의 화살처럼 꽃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고정관념으로 일방적 홍보를 해왔던 우리의 방식에 큰 수술이 필요했습니다. 변화는 계속되었고 공보기능에서 홍보기능이 강화되었고 공보형의 신문게시에서 광고성 홍보문구를 신문에 실었습니다. 도지사님 인터뷰를 물량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지역지에서 지방지, 중앙지, 월간지, 주간지, 특수지 등 모든 매체에 도전하였고 방송도 뉴스는 물론 교양프로그램에 경기도정을 끼워넣은 전략을 고민했습니다. 영화촬영지가 시민들에게 큰 관심을 갖게 하는 점을 착안하여 이벤트성 공간을 마련하는 방안도 추진했습니다. 공무원이나 공기관의 모
밀레니엄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2000년에 모든 컴퓨터가 1900년과 2000년을 구분하지 못하여 인터넷 대란이 일어난다고 걱정을 했지만 큰 문제없이 2001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986년에 아시안게임, 1988년 88올림픽, 그리고 제70회 전국체전 준비 등 행정은 늘 준비를 합니다. 준비하는 내용도 꽃길, 가로청소, 환경정비 등 실제 체육행사는 아니고 주변적인 업무입니다. 각종 체육행사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출전하는 종목과 경쟁 상대선수, 그리고 경기장이 대부분 들어차있을 것입니다. 경기장 주변에 코스모스가 피었는지, 사루비아가 붉게 피었는가는 큰 관심사항이 아닐 것입니다. 경기장이 준비되고 선수와 관객이 타고 오는 버스와 승용차의 통행에 차질이 없으면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우리는 본경기보다 주변의 환경정비에 돈을 투자하고 공을 들였습니다. 물론 외국의 마라톤 경기 중계를 보면 가끔 하늘에서 내려다 보이는 환경불량 구간이 보이기는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1등으로 들어온 선수가 2시간 몇분대에 들어왔는지, 인간의 한계가 1시간 59분59초에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중앙
세상의 아름다움은 더 많은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후 그 자리에 남아있는 흔적의 일부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기가 예쁜 이유는 모태로 생명수, 영양을 받은 탯줄이 있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이어가는 아름다운 흔적을 인간 모두가 간직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성선설로 선하고 이 세상의 인간사회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름답지만 그 속에서 발생하는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종교인들이 살신성인, 나를 버리고 중생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흰 연기가 되어 산 언저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해안가에 외롭게 서있는 저 바위가 처음 이 세상에 나왔을때는 수천의 돌기둥이 함께 했었지만 바람과 파도와 세월의 흐름속에 바닥으로 내려와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되고 물고기의 비늘이 되어 바다를 떠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바위는 매년 찾아오는 가족들이 고래의 지느러미, 또는 작은 물고기의 비늘이 되어 있음을 알기에 바위아래 따스한 작은 동굴속으로 고기들을 품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 하루를 행복하게 살기 위해 100년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계산하는 詩"라는 제목으로 한수 읊어 보겠습니다. 하루를 행복하기 위해 100년을 버리는 인생, 하루를 즐겁기 위해 10년을 모아가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