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군청은 인천광역시에 있다. 옹진군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군청이 입주할 말한 큰 섬이 없어 지금도 군청이 인천에 있는 것 같다. 사실 양주군청이 의정부에 있었던 것과도 같은 연유일 것이다. 군청이 일을 하려면 공무원만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단체도 있고 설계사무소도 있고 건설회사, 작지만 문방구도 있어야 하니 섬마을에 군청이 이전한다면 효율적인 일처리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적극적으로 열심히 일하던 군수가 군 개청이라 처음으로 옹진군 관내 작은 섬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배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섬마을에서 군수를 맞이한 것은 섬마을 주민에 앞선 해군 수병이었다. 배를 내려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던 수병은 군수에게도 신문을 물었고 군수는 공무원이라고 답했다. 수행비서는 멀 리가 심해서 배안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수병은 공무원증을 보자고 했고 군수는 순순히 증을 보여주었다. 수병은 공무원증을 보다가 혼잣말을 했다. ‘칫, 서기면 서기지 시기관은 뭐야!’ 이 수병이 근무하는 동안 섬마을을 방문한 가장 고위직 공무원이었으니 젊은 수병이 늘 만나던 공무원은 서기나 서기보이고 서기관은 처음 접했다는 이야기다. 보
요즘은 공무원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과거에는 현재보다 개인의 능력과 판단이 행정에 던지는 긍정적 파급효과가 컷던 것 같다. 90년대 공무원은 대부분 대졸자이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력이 장년층 공무원보다 젊은 층에서 강하게 나타나므로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특히 인터넷, 이메일, 그리고 IT를 통한 정보의 전달력은 과거 문서와 입을 통해 전달되던 정보 흐름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쉽게 말해 70년대에는 모든 정보는 32절 쪽지 몇장과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모두였고 별도의 정보흐름의 시냇물이 없었다. 당시에는 ‘쪽찌보고’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의 복사지 A4보다 작은 16절지를 반으로 잘른 종이에 타자를 쳐서 8장 복사를 한 것을 총무과에서 취합(종합)하여 도지사, 부지사, 기획관리실장,(경투실장 없었음), 내무국장(자치행정국장) 등에게만 제한적으로 전달되었다. 요즘 여의도에서 돌다가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는다는 정보지(찌라시)만큼이나 궁금한 내용들이 들어있었고 많은 간부 공무원들이 이것을 보고 싶어 했다. 다시 말해 간부들은 수준 높은 정보를 독점하면서 조직내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이고 이 같은 제한적 정보의 흐름 속에서는 몇 가지 정
경기도 화성군에서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 옛날 면장님은 별정직으로서 지역유지 중에서 적정한 인물을 군수가 임명하였고 별도의 임기는 없었기에 한 1년 하신 분도 있고 9년 하신분도 있었다. 그것은 그분의 역량이었고 내무과장을 잘 모시는 것으로 장수의 비결을 삼았다. 어느 날 군수와 면장이 닭볶음탕을 먹었다. 술잔이 오가고 본격적으로 닭고기를 먹는데 중간쯤에 닭꼬리 부분을 면장이 잡았다. 본래 닭 날개는 바람난다고 해서 가족들이 통닭을 먹을라 치면 아낙네들은 신랑이 먹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비둘기 고기를 아이들이 먹지 못하게 한 어른들의 지혜는 비둘기가 달랑 2개의 알을 낳아 2마리의 새끼비둘기를 키우기에 多産(다산)을 위함이었다고도 한다. 특히 닭의 꼬리 부분은 고농도 기름기가 있어서 아주 귀한 음식으로 삼았다고 한다. 요즘에는 닭잡는 집에서 이부분의 고농축 기름끼가 몸에 나쁘다 해서 칼로 도려내고 있다. 다시 보충해 설명하면 물오리가 부리로 꼬리부분을 찍어다가 자신의 깃털 이곳저곳에 문질러 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물에 계속 뜨기 위해 고농축 기름을 바르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비싼(?) 기름끼 덩어리인 닭꼬리 부분을 잡은 면장이나 기
강화군은 1993년경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경기도민에게는 도민적 아픔이 있고 아직도 강화군의 경기도 還元(환원)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강화군은 우리나라 역사의 현장이다. 오랜 역사속에서 외우내환을 견뎌온 강화읍내를 가보면 이곳에서 고려를 느끼고 조선시대를 음미하고 열강이 한반도에 밀려들던 시절의 작은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970년대 이야기다. 젊은 군수가 내무부에서 낙하산으로 강화군수에 발령났고 신바람이 난 군수는 취임하자마자 읍·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면장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와 업무 지시를 하게 되었다. 그 순서가 “내가면”에 이르렀는데 전화를 받은 면장은 “내가 면장입니다. 아 예 군수님! 축하드리고 환영합니다.” 군수는 자신이 젊어서 면장이 반말을 하는가 싶어 다시 한번 크게 말했다. “나 새로온 군수인데, 면장이시오?” “예! 내가면장이라니까요!” ‘제가 면사무소 면장 000입니다’라는 답을 기대했던 군수는 계속 ‘내가면장입니다’를 반복하는 면장의 응대에 속이 터져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 신임 군수가 나중에라도 ‘내가면의 내가면장’임을 이해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보충> 안성시의 죽일면, 죽이면, 죽삼면이 있었는
면사무소 직원이 군청에 가면 개인의 이름이 없어진다. 군청 직원들이 읍면 사무소 직원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기 어렵기도 하겠지만 이름을 알아도 이들에 대한 호칭은 소속 읍면사무소 명이다. “어이 전곡!!! (연천군 전곡면 직원)” “이봐 죽일!!! (안성군 죽일면 직원)” 그래도 자신이 전곡읍사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이고 죽일면(지금은 일죽- 안성이 시로 승격하였으니 달라졌을 것이지만) 직원인 것을 알아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이들 읍·면직원들이 군청에 회의가 있거나 보고서를 지참하고 가려면 군청 근처에 버스가 들어설 무렵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내무과 복도 앞에서는 잠시 옷 매무새를 살펴야 한다. 수험생이 자주 소변을 보는 것처럼 군청에 올라간 신참 읍·면공무원은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동안 마음을 진정한 후에야 군청 내무과 문을 열고 들어선다. 군청 내무과에는 행정계, 통계계, 복지계 등이 있었는데 당시 군청 행정의 중심부서는 바로 행정계다. 그 행정계에는 6급 계장과 7급 차석급이 2명, 8급이 2~3명, 9급과 기능직 등이 있는데 모두 9명은 될 것이다. 행정계장 자리 옆에는 소파와 큰 책상이 있는데 이 자리는 바로 ‘내무과장’이 일하는 곳이다. 사실
행정에서 불필요하거나 내부 조직을 운영하는데 치중하는 행정을 펴는 경우를 일러 전시행정이니, 레드테이프이라 하고 한자로 쓰면 번문욕례(繁文縟禮)가 된다. 1970년대 행정에는 형식에 치우친 이런 레드테이프가 많았다. 레드테이프(red tape)의 사전적 설명은 번거롭다, 규칙, 예절, 절차 따위가 번거롭고 까다로움을 이르는 말이다. 실전에서 보면 기관장의 연설문을 매는 끈이 있는데 이것이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기관장에 따라서는 연설문의 내용보다는 누구의 글씨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많은 공무원들은 자신이 모시는 기관장이 선호하는 분의 글씨를 받기 위해 줄을 명필가를 초빙하고 여러 가지 대접을 하면서 글씨를 받았다. 특히 붓글씨로 쓰던 시대에는 먹을 갈고 글씨를 받고 붓글씨가 마르기를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급하면 선풍기를 돌리고 다리미로 다리고 부채로 부치면서 마른 수건으로 연설문의 물기를 말려야 했다. 그래서 공직 내내 글씨만 쓰다가 퇴직하신 분도 있고 글씨를 잘 써서 군수와 시장까지의 고위직에 빨리 오른 분들도 많았다. 한번은 농조 조합장 교육의 수료소감(소원수리)을 보게 되었는데 굵은 싸인펜으로 쓰신 글들이 예사롭지 않아 고참에게 물었다. “
봄철에 가물어서 물이 부족하면 양수기가 동원된다. 1970년대 읍면사무소에는 대일(對日)청구권에 의해 들어온 양수기가 20대 정도씩 배정되어 있었다. 창고안에는 양수기 고유번호, 상태 등이 적힌 꼬리표를 단 양수기들이 노랑색 페인트 옷을 입고 춥고 긴 겨울을 지내고 봄을 기다린다. 그리고 양수기와 짝을 이루는 것이 관정이다. 논 중간에 흄관을 묻어놓은 우물인데 피자를 반으로 자른 듯한 시멘트 구조물의 뚜껑이 있고 거기에는 철근을 ㄷ자로 구부려 만든 손잡이가 있다. 이 뚜껑은 아주 무거워서 초등학생 한 두명이 들기에는 버겁고 어른이 두 손으로 힘을 써야 조금씩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안전사고를 위함일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물은 노랑색으로 페인팅되어 있고 검정글씨로 코드번호, 채수량, 점검일시 등이 적혀 있다. 면사무소 담당자의 업무중 ‘관정·양수기’가 있는데 이것은 대개 토목담당이 맡게 되고 토목직이 없으면 농업직이 담당한다. 그리고 매년 군청으로부터 관정 정비예산을 받아 바닥으로 흘러든 모래와 자갈을 퍼내고 지상으로 나온 부분에는 페인팅을 했다. 그리고 중앙정부와 도청직원으로 구성된 듯한 합동점검반이 매년 읍면동에 점검을 나온다. 관정에 대한 점검은 뚜껑
1977년 봄. 자그마한 체구의 손재식 도지사. 그 유명한 민방위복을 곱게 다려입는 손재식 도지사가 한해 대책 현장 점검에 나섰다. 군청과 면사무소에는 비상이 걸렸다. 일단은 양수기로 물을 퍼 올리는 장면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는 양수작업을 중단했다. 하천의 모래를 파내고 건수가 모이기를 기다려 퍼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중고생을 동원해 양동이로 물을 날라 모자리에 뿌린다. 당시에는 논농사는 곧 ‘안보적 차원’에서 추진하는 총성없는 전쟁이었다. 도지사가 통과할 예정시간이 임박해지자 공무원들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도청에서 도지사 차가 출발하면 군청으로 알려주고 군청에서는 면사무소로 연락한다. 그러면 면사무소에서는 부락당 1대뿐인 이장집 교환전화를 통해 알린다. 면직원은 이장집에서 오토바이로 대기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으면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와 도지사의 도착시간을 알리는 작전이었다. 임진왜란때 ‘M1소총’ 1정만 있어도 7년전쟁을 일주일 전쟁으로 쉽게 이겼을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당시 삐삐 1개만 있어도 이런 번거로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헛소리는 이 정도로 접고, 도지사가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는 연락이 오자 5마력 양수기는 힘차게 돌아간
▧ 30년 공직 표창을 받기 위한 공적서 위 공무원(이강석)은 1977. 5. 16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에서 9급 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하여 팔탄면, 경기도청 농민교육원, 새마을지도과, 세정과, 문화공보담당관실에 근무하였다. 6급에 승진하여 공무원교육원, 도시개발과, 예산담당관실, 공무원교육원, 동두천시, 소방재난본부, 공보관실, 복지정책과, 감사담당관실에 근무하였다. 2008. 1월부터 의회 공보담당관실 담당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지방행정 발전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친절봉사 및 도민편의 행정을 구현하고자 노력해온 공무원으로서 그동안의 주요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980 ~ 1990년대(8급 ~ 7급) 1981년 도 농민교육원으로 전입한 후 1987년까지 교육환경시설 개선, 일하는 분위기 조성, 부서를 넘나드는 활동으로 서무담당으로 일하면서 각 부서 자료 요구시 당일처리를 목표로 업무에 진력하면서 주변 선배들의 칭찬을 받았다. 1986년 7급으로 승진하면서 세정과 세외수입계에 보임되어 경영수익사업 증진에 노력하고 적정한 채권채무관리로 이자수입 증진에 기여하였다. 1988년 문화공보담당관실 보도계로 이동하여 도정홍보자료를 수집하여 보도자료로 작성한
정원 5인승 승용차에 5명이 타는 것이 이제는 버거워졌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7명이 타도 차가 넓었는데 이제는 정원이 승차해도 좁다고 한다. 가운데 타는 이도 힘들고 양쪽 자리에 앉아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우리는 출발했다. 7월30일 오후 1시에 집을 나서 중기센터 앞에서 주유하고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려 여주에서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달린다. 현재 담임선생님의 고향이 안동이어서 새롭게 얻은 노선이다. 선생님의 추천 코스는 수원- 영동고속- 여주휴게소 - 중부내륙고속 - 문경IC - 예천 - 하회마을 - 봉정사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최고의 (오래된) 목조건물이란다. 병산서원도 추천코스이고 하회마을은 당연 과목이다. 일단은 안동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기로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시각이 12시경이요 준비하여 출발한 것이 1시경인데다가 영동고속도로는 강원도로 가는 휴가 차량들인지 승용차가 길 안에 가득하여 좀처럼 발을 옮기지 않는다. 둥근 타이어인데도 구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여주를 지나 현재 담임선생님 코스는 시원하게 길을 열어 주었다. 그냥 편안하게 100km를 달리는데 이곳은 최고시속이 110km다. 도착한 숙소는 아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