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9급(당시 5급을류)공무원의 월급은 쌀 2가마니 값이었다. 당시 상머슴은 쌀 12가마니를 받았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12가마를 받는 머슴이나 제집에서 다니고 24가마니를 받는 공무원이나 대우는 비슷했다. 그래서 공무원을 말할 때 공복이라고도 하고 머슴이라고 칭했을까? 하지만 공무원의 강점은 호봉과 승진에 있다. 머슴은 소를 부리는 일을 하면 12가마이고 그보다 못하면 10가마, 8가마, 5가마 등 차등이 있었지만 공무원은 24가마로 시작해서 매년 호봉이 늘고 승진하면 봉급이 올랐으니 말이다. 이제 연봉 5천만원이면 쌀 한가마 20만원을 쳐서 월평균 20가마 이상을 받으니 참으로 대단한 처우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많은 공무원들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엥겔계수가 점점 작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비, 문화비, 경조비 등 부수적인 지출이 많아서일 것이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공무원들에 대한 국민의 인식속에는 ‘부수입’이라는 공식적인 단어가 떠오르곤 했다. 공무원들은 무엇인가 추가되는 수입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공무원 봉급이 오르는 데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다. 보너스라는 것이 매 분기 1회씩 주어지고 정근수당이 1년에 2번 주어졌으며 복리
1970년초 시골 초등학교의 가을소풍은 낭만이 있었다. 어른들은 소풍을 ‘원족’이라고 했다. 소풍 필수품은 나무도시락, 나무젖가락, 찐계란, 코카콜라였다. 특히 코카콜라는 돈푼이나 있는 집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소품이었다. 소풍날 아침. 아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점심과 음료(대부분 물이지만)를 준비하여 학교로 향한다. 그리 소풍가는 곳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일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어떤 학생은 자신의 집뒤에 있는 절로 소풍을 가면서 일부러 학교까지 갔다가 다시 집 근처 소풍장소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당시의 선생님들은 소풍장소 근처에 사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적었다. 무조건 학교에 와서 인원파악하고 다시 소풍장소로 출발했다. 있는집 아이들이 가지고 온 콜라 한병은 그반 아이들 모두에게 고른 혜택이 주어진다. 일단 어렵사리 뚜껑을 따고 콜라주인이 한모금 마시고 나면 친한 친구부터 한모금씩 마시게 되고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초리는 병을 거꾸로 들고 마시는 아이의 입보다는 병안에 남아있는 콜라의 양에 관심이 높다. 저렇게 줄다가 ‘뒷 순서’에 있는 나에게 한 모금, 한 방울이 돌아올 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학생에게는 콜라방울이
아마도 공무원의 여관작업은 1990년 초까지 이어진 것 같다. 남녀 공무원들이 여관의 한방에서 낮에는 물론 밤늦게까지 일하고 새벽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일하고 인근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작업하는 강행군이었다. 한번 여관작업이 시작되면 1주일에서 10일정도 걸리고 때로는 2-3일에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었고 처음에는 30여명이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304명이 남아서 최종 정리를 한다. 그리고 이중 대표선수는 중앙작업에 차출되기도 한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할 줄 안다. 이들은 이미 시군지역에서 수일간의 여관작업을 거쳐서 도 작업을 온 것이고 이어서 중앙작업까지 가게 된다. 이제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여관작업은 복잡한 행정통계를 집계하기 위해 공무원들이 여관에 모여 숙식을 함께하며 일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한방에 3-4명이 일하게 되는데 이들은 복잡한 서식이 담긴 서류와 계산기, 주판 등을 가지고 일한다. 시군에 따라서는 남녀 젊은 직원이 거들기도 하므로 36개시군이 있었던 당시 도 작업을 하게 되면 그 인원은 40명이 넘었다. 그래서 불경기에 여관작업 한팀을 유치한 여관은 돈벌이가 되었다. 40명이면 최소한 방 10개 이상이 나가기
행정기관의 정보화를 가늠하는 척도는 ‘1공무원 1PC’라는 용어로서 업무보고서에 등장하여 공무원 마음을 설레게 하던 때가 있었다. 초기에는 1개 국에 1대의 컴퓨터가 있을 뿐이어서 국 주무과 주무계에서 이 장비를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중앙정부의 미래지향적인 블루오션을 실천하신 선배공무원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는지 경기도청에 컴퓨터 1대가 보내졌다. 영화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영화 부시맨을 보면 경비행기 조종사가 먹고 버린 코카 콜라병이 부시맨 마을에 떨어지고 이를 주워 야자수 열매를 두드리다가 나중에는 신주단지로 모셔지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 콜라병이 등장한 것은 고도의 광고였고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광고에 취해서 밖에 나가서 그 코카콜라를 집어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에는 PPL(간접광고)이 포함되었다고 아예 시청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컴퓨터라는 말을 해석해 보았다. 전자 회로를 이용한 고속의 자동 계산기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이 물건은 통계부서가 써야 할 것이라는 판단이 나왔다. 통계업무 부서가 복잡한 계산을 하고 숫자를 많이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무서운 기계를 피하기 위해 통계팀에 보낸
그때에는 윗선에 이야기하면 민원이 해결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많은 민원인들은 중앙에 아는 사람의 이름을 들먹이거나 도청에 간부들을 잘 안다고 말하며 민원을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공무원들은 민원과 관련한 압력이 늘 불편한 혹뿌리였다. 그런데 아주 멋진 국장님이 한분 계서서 명쾌하게 민원을 해결하고 추가민원도 예방하는 一石二鳥(일석이조)의 효과를 올려주셨다. 그 분은 당시 경제분야 국장이셨는데 일단 민원인이 국장실을 방문하면 실무자를 부른다. 7급이나 6급 실무자는 국장실에서 민원인, 국장과 함께 3자가 앉아서 민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국장이 먼저 나서서 실무자를 야단치기 시작한다. “당신이 일을 잘했으면 이 바쁜 시간에 사장님이 여기 도청까지 오실 일이 아닌데 당신이 일처리를 제대로 못하였으므로 오신 것이 아닌가. 이를 어찌할 것인가.” 담당자는 아무 말 못하고 국장의 야단을 맞는다. 이때 화가나서 찾아온 민원인(사장님)은 만감이 교차한다. 이거 오늘 한 건으로 내 민원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여러차례 실무자와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큰일 났구나.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이는 격은 아닐까? 결국 사장님은 야단치는 국장에게 미안하다면서 실무자
1984년경 서무담당자로 근무던 때의 사무실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왼쪽 칸막이안에 과장실, 오른쪽으로 교육계, 개발계, 보호계, 마을계가 있다. 요즘 같은 파티션은 없다. 계별로 4-6대의 전화기가 있는데 번호는 2개다. 2222, 4444번인데 이번호 하나에 2-3대의 전화기가 연결되어 있다. 이를 ‘뿌라찌’전화라고 했다. 뿌라찌는 브리지(bridge)가 일본어 발음으로 변형된 이 단어라고 하는데 남의 집 안테나선에서 한 줄 더 따오거나 전기선 중간을 연결해 도전(盜電)하는 등의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그리고 책꽂이와 몇 개의 화분이 있는데 요즘 사무실과 다른 비품은 바로 대형 재떨이가 계장님 책상과 차석 자리에 비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비운 재떨이에는 티슈를 깔고 살짝 물을 부어 주었다. 아마도 먼지, 즉 담뱃재가 날리는 것을 막으려 했던 지혜인 듯하다. 하지만 오전 11시가 되기 전에 재떨이는 꽁초와 담뱃재로 채워지는데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공무원들도 그냥 피우는 사람은 피워야 한다고 생각했던가 보다. 민원인이 와서 함께 피우기도 하고 계장
요즘 공무원 수첩은 참 많이 세련되었다. 큰 수첩은 내부회의에서 쓰면 되고 작은 수첩은 출장 갈 때 요긴하다. 더구나 뒷장에는 메모지도 있어서 작은 크기로 떼내어 쓸 수도 있어서 참 편하다. 과거 공무원수첩은 좌철로서 거즈를 대고 본드칠을 한 것이어서 가을쯤 가면 너덜거렸다. 그리고 그 큰 덩치를 항상 들고 다녀야 했다. 어떤 공무원은 승용차위에 수첩을 올려놓고 주민과 대화를 나누다가 깜빡 잊고 차를 출발하는 바람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요즘에 큰 수첩을 들고 출장가는 공무원은 적어 보인다. 과거에는 공무원증을 대신하거나 공무원임을 응근히 과시하기 위해 큰 수첩을 들고 다녔지만 요즘에는 작은 수첩을 속 주머니에 넣고 가면 되고 요즘 ‘나 공무원이요’하는 경우도 적은가 보다. “구내식당서 수첩으로 밥 퍼서 먹나?” 하지만 요즘에도 구내식당에서 무슨 행사가 열리거나, 쉬운 이야기로 기관장이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시게 되면 총무, 서무과 직원들이 그 ‘수첩’을 들고 온다. 물론 식당에서도 받아 적을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메모지를 속주머니에 준비하면 될 일인데, 식당에 수첩을 들고 와서는 수첩 때문에 손이 어찌할 바 몰라 하는 경우를 目睹(목도)하게 된다. 사실 식
지방행정 초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시골에 내려와 집에서 노는 사람이 있으면 면장이 ‘와서 일좀 봐주게’하여 공무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5세 전후의 공무원들 중에는 공채가 많은 터인데 이분들의 초임시절에 대학생 출신 공무원은 좀 희한한 인물이었다. 그 이후 1970년대 경제가 살아나면서 대졸자들은 일반 회사에 취업을 하였고 9급공무원 (당시 5급 을류)은 고졸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9급 공무원 공채의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고졸 신규 공무원을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고졸자가 공무원에 들어오면 대단한 실력이 있음을 인정 할만 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70년대 서정쇄신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아 지금까지 공무원으로 열심히 일하시는 1953년생 전후의 선배들은 매년 매월 급변하는 행정환경을 용케도 헤쳐 분들로 크게 존경받아 마땅하다. 우선 이들 선배들은 전쟁 중에 태어나 어린시절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보리고개를 넘고 전염병과 싸워 살아남은 끈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다. 그리고 경제발전 초창기 월급많이 주는 공장으로 가지 않고 꿋꿋하게 펜대를 지켜온 공무원이다. 초임시절에는 전자계산기가 없었고 행정전화도 부족했고 일반전화도 맘대로 통화할 수 없었다
유신시절 공무원의 복장은 콤비양복과 카라 넓은 Y-셔츠로 상징되었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앞단추를 풀어 콤비양복 위로 카라를 꺼내 독수리 날개처럼 양쪽어깨로 펴서 입었다. 관선 군수도 그랬고 간부들이면 어김없이 이 복장을 했다. 그리고 간부들은 근무중이나 출장시에 민방위복을 입었다. 좀더 여름으로 들어서면 양복이나 민방위복을 벗고 카라가 아주 큰 양복을 입었다. 굵은 팔뚝보다 더 넓은 셔츠. 속옷이 훤히 비치는 삼베로 만든 옷도 유행했다. 관선 군수와 민선시장을 하신 원로 김기형 선배님은 군수시절 면사무소를 순시하면서 가장 먼저 들어가 보는 곳이 읍면사무소 숙직실이었다. 이부자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펼쳐놓고 총무계장을 불러 야단을 쳤다. “이게 직원들 잠자리인가? 돼지우리만도 못하다.” 이분이 무척 예의를 중시하는 분으로 생각한 부면장은 군수님 초도순시날 남직원 모두에게 넥타이를 매도록 했다. 원님이 오시니 복장을 단정하게 하고 맞아들이자는 취지였다. 아직까지 넥타이를 매본 일이 없는 한 공무원은 부면장에게 ‘저는 넥타이가 없어서 맬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고 다음날 아침 부면장님은 자신의 넥타이중 젊은 색을 골라와서 그 젊은 직원에게 빌려주었다.
면 단위에는 이른바 5대 기관장이 있다. 면장, 파출소장, 농협장, 예비군 중대장, 우체국장이다. 여기에 학교장이 가끔 참여하기도 한다. 어느 날 5대 기관장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곁들이게 되었는데 권한이 높은 지서장 앞에는 술잔이 모어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체국장에게 술잔을 권하는 이가 없었다. 사실 우체국장은 당시 호봉제로 월급을 받았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선 오지지역 면단위 우체국은 별정우체국이라 하여 전세 들 듯이 기본자금을 입금하고 우체국 운영권을 받았는데 월급의 기준은 아마도 6급 몇 호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인이 이 별정우체국을 인수하면 높아야 4호봉의 월급을 받게 되어 수익성이 떨어지는 관계로 학교 선생님을 정년 퇴직하신 분이 유사경력을 보태 6급 30호봉 정도의 월급을 받는 것이 유리하므로 교사출신이 대부분 우체국장을 하게 된다고 들었다. 하지만 郵遞局長(우체국장)은 특별한 권한이 없었다. 오가는 편지 우표만 있으면 보내고 배달해야 하고 시외전화 신청하면 연결해 주고 요금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딱히 결정하는 권한이 없고 그냥 앉아서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평소 업무 중에 이권이나 인허가권이 없으므로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