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녕사에서 108배를 올리고 우리 부부는 어제 다녀온 화운사로 달려갔습니다. 종무소에가서 불가 기부금 영수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만남을 주선해 주신 가장 먼저 만남의 장을 마련해 주신 고모님과 고모부님을 추모하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영가등"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1951년 전사하신 삼촌을 추모했습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라든가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이른바 회자정리, 거자필반은 윤회의 굴레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일이 다 인연속에서 불가에 완벽하게 귀의하지 못하여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앞에 당도하는 성불의 길을 가기 위해 수많은 인간이 애쓰고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윤회의 굴레속에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강아지로, 송아지로, 나무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08배를 통해 윤회의 길을 벗어나 열반의 길로 가고자 합니다. 정성을 다해서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노력합니다. 과거의 인연이 ‘만수산 드렁칡처럼’ 얼키고 설키고 이른바 갈등하는 모습으로 우리의 삶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털어내는 열반의
18명으로 시작한 병우회 회원이 14명으로 줄었나봅니다. 어제 모임은 10명 부부 20명이 가보정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술잔을 크게 돌리지도 않았고 4명씩 앉아서 고기 구워먹고 냉면, 된장찌개에 밥을 먹고 각자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갔습니다. 까마귀 떼가 그네를 타는 고압전선 아래 주차한 이oo 회원 부부의 차에 동승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회원님의 차를 세운 자리에 수원시청에서 설치한 프랑카드가 있습니다. 까마귀떼가 차량을 오염시킬 수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가보정 주변의 주차난으로 어렵게 확보한 자리이니 까마귀 똥 맞은 기념으로 로또를 사시라 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군가가 예기치 않게 넘어지면 뻘쭘해 하므로 이 땅이 비싸다고 말합니다. 넘어진 자리의 땅을 사면 좋은 징조라는 의미입니다. 유럽에서는 옆 사람이 기침이나 재치기를 하면 '오 주여'하면서 주님의 강림을 축하하기도 합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살펴보니 아내의 건강으로 한 분이 못 나오시고 최근에 다른 회원의 아내가 아프시다고 합니다. 다른 회원은 아내의 직업상 함께 나오지 못하여 회원 탈퇴를 하시겠다고 완곡하게 장문의 편지를 단톡방에 올렸습니다. 개인사정으로 오래전에 물러난 분도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속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보다 더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표현하는 공동의 무대위에서 열연하는 배우과 관객의 융합적 만남을 소설이라거나 시, 수필, 컬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신문에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 상대와 독자를 공감시키는 일이므로 공동의 주제를 택하고 거기에다가 현실에 맞는 논리를 펼쳐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최근에 경기일보에 올린 몇개의 글 중에서 특히 등산로 거리표기 방식에 대한 글은 제목부터 참 잘했다는자평을 합니다. 군청 등산로 담당자 전상서. 담당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 글입니다. 시작이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담당이 기안을 잘 해야 중간층에서 보강을 하고 최종 결재권자가 싸인을 함으로써 정책이 세상에 나오는 것입니다. 한자 말에 완벽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빌려온 구슬을 잘 쓰고 그 숫자와 품질에 瑕疵(하자)없이 반환했다는 말입니다. 完璧. 잃어버린 목걸이를 진품으로 사서 반환하고 열심히 일해서 갚았는데 빌려준 주인으로부터 그 당시부터 가짜 제품이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을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것이라는 평가를 하고자 합니다. 삼국지를 초등학교 5학년
首丘初心(수구초심)이라는 말은 여우가 죽을때 고향 언덕을 바라본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인데 많은 동물중에 여우가 고향언덕을 향한다는 표현에 동원된 이유는 아마도 잔재주가 많아서 고향에 대한 애정이 부족할 것이라는 점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고향이라 자랑을 하고 불리하면 슬쩍 고향임을 감추는 어느 정치인의 행태를 비유한 것 같기도 합니다. 어느 국회의원 후보자는 이 지역에 장모님이 사셨던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에 출마하는 국회의원이 많습니다. 중앙당에서 전봇대 세우듯이 나름의 후보를 각 지역에 배분하기 때문입니다. 중앙집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기초자치단체장도 불쑥 건물 옮기듯이 중앙에서 활동하던 분에게 공천장을 들려서 보내고 거시에서 당선되기도 합니다. 정치란 더이상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요즘 방송에 자주 나오시는 100세 김형석 교수님 말씀중에 정치는 과정이고 수단이지 목적이고 결과가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정치가 목표인양 잘못 인식되는 사례가 있다고말씀하십니다. 정치는 시민, 도민
안방에 수납장이 들어옵니다. 어제저녁에 벽 장식장을 교체하기 위해 정리했습니다. 33년 동안 함께 해온 장식장을 내보내고 새로운 서가를 들여옵니다. 목재 장식장을 철거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이를 재홀용으로 가져가는 비용이 5,000원입니다. 전에 시골에서는 그냥 화목으로 활용하였고 나중에 재를 걷어내면 그 속에서 고승 진신사리 찾아내듯이 못과 나사를 찾아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이 재를 밭에 뿌리니 더러는 김을 매다가 대못을 발견하여 다시 집으로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경기일보에 쓴 정승의 고철 저축은 아닐지라도 가끔은 시골 길가에서도 쇠붙이를 주우면 집으로 가져와 광속 나무박스에 담아 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쇠붙이가 어느 날에 임자를 만나면 적재적소에 활용된다는 점을 알기 때문입니다. 혹시 사람도 언젠가는 적재적소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청와대 개편이니 정부 개각의 소리가 들이니 일부 논공행상에서 소외돈 사람들이 그 기대감을 가지고 귀를 크게 세우고 전화기를 한번 더 들여다 볼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오늘 수납장이 들어오면 이런저런 소품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될 것으로 기대를 합니다. 그리하여 좀더 정리되고
1977년 19세 철 모르던 시절에 불쑥 공직에 발을 들인지 42년만에 L원장이 퇴임했다. 공무원으로 40년, 공기관에서 2년을 일했다. 19살 청년은 60 회갑이 되어서야 공직을 벗었다. 이를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解官(해관)이라 했다. 매년 경기도청에서만 수백명이 명퇴, 정년퇴직 하겠지만 L원장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른바 언론을 아는 공무원이다. 기자에게 감히(?) ‘행간의 의미’를 안다고 자임하곤 했었다. 영화배우 김하늘이 주연한 국정원 직원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7급 공무원'이 2009년에 개봉되어 400만 관객을 기록한데 이어 요즘 새삼스럽게 6급 공무원과 5급 별정직 공무원이 부각된다. 1984년 공보실. 당시에도 짱짱하던 6급 공무원은 가끔 사업부서 계획서 하나 얻어다가 '1도1사'경인일보 기자에게 건네주면 다음날 세로쓰기로 신문 짝 만하게 기사가 났다. 칼로 오려서 민선 도지사에게 올리면 싸인펜으로 체크해서 내려 보낸다. 도지사에게 점수를 땄으니 우리 과장님은 다음번 인사에서 관선군수로 나가겠다며 자화자찬을 했었다. 그래서 공보실 직원을 '관선기자'라고 불렀다. 1988년에 경기일보가 기호일보, 인천일보와
그 길을 걸어가면서 느낀 삶과 내세에 대한 생각을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상가에서'라는 제목의 8개 시중 한편을 낭송하는 것으로 술안주 삼았다. 그러니까 아주대 영안실을 가거나 조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텅빈 마음, 헐렁한 손안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삶과 최근의 생을 관조하던 추억을 말했습니다. 사실은 1월말 언론사방문을 자랑하는 자리인데 그냥 이야기 소재로 상가에서는 늘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점을 강조해서 시 한수를 낭송한 것입니다. 그 시의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상가는 그러하더이다. 많은 이들이 이제 떠나는 어느 노인을 배웅하는 그런 자리 같기도 하고 아님 모든 인간들이 자신이 출연하게 될 빈소이며 무대라고 칭하고 리허설을 하는 것 같기도 합디다. 그리고 부모를 보내는 자식이나 그 손자손녀들이나 무조건 슬픈건 아니고 아버지 할아버지는 죽어서도 오랜만에 일가친척을 만나는 그런 새로운 만남의 장을 만들어 주시는군요. 2006년 어느날 아주대 상가를 다녀와서 적어둔 글입니다. 어제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지난날 용처없는 자료를 이것저것 바인더에 담아두었는데 그 것이 30년 세월의 이슬을 맞아 부엽토가 되어서 문학의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9급 공무원으로 처음 들어왔을 당시에는 모든 이들이 어려운 상사였다. 1977년 면사무소에 근무할 때 보조원으로 함께 일하던 사환이 있었지만 직장 선배이므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20년 넘게 공무원으로 여러 부서, 다양한 과에서 일하는 동안 같은 팀 구성원과 조를 이루어 일하고 있다. 모든 부서에는 부서장이 있게 마련인데 행정기관에서는 과장을 조직의 기초단위로 본다. 도청이나 시청이나 과장은 '전결'이라고 해서 결재권한을 위임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읍면동 사무소에도 5급 읍면동장과 6급 사무장, 과장, 계장이 있고 각각이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1984년에 상사가 지시를 하면 따르고 결재를 올려서 고치면 수정해서 일처리를 했다. 조직의 힘은 상사와 소속직원간의 유대에서 나온다. 조직의 세포라 할 수 있는 개인과 계조직, 과구성이 탄탄하게 연관성을 맺고 움직일 때 그 조직은 큰 힘을 발휘할 것이며 그 연결고리가 약하거나 불협화음이 난다면 그 부서는 약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부하직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은 상사의 세심한 지도력이다. 어느 직원이 바쁘고 어려운가를 확인하고, 그 직원의 능력을 파악하고 적절한 지도
지난해 말 39년 8개월 공직을 마감하게 되었을 때 마음속 흔들림과 당혹함이 적지 않았는데 어느 날 새벽 1시에 잠에서 깨어나 손에 잡은 책이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牧民心書(목민심서)로 흔들림을 잡은 바 있다'고 했다. ‘관직이 교체되어도 놀라지 마라. 수령직은 교체됨이 있는 것이니 교체되어도 놀라지 않고 관직을 잃어도 연연하지 않으면 백성이 그를 존경할 것이다. 평소에 문서와 장부를 정리해 두어서 청렴하고 명백하게 하여 후환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지방행정 기관의 공무원에 대한 인사는 여건상 단기간에 진행됨이 현실이니 현재 공직에 몸담은 1962년생쯤 나이에서 다산 선생님의 해관을 생각하고 그 글을 읽으면서 공감해 봄 직하다 하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햇수로 3년이 흘렀다. 공기관에 근무하면서 두달에 한번 [천자춘추] 원고마감에 관심을 갖다보니 참으로 빠르게 2년이 지나 두번째 해관을 맞았다. 공기관에서의 근무를 마치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만 2년, 햇수로는 2017~2019년 1월까지 3년을 일했다. 공직에서는 본의아닌 규제와 관리에 치중했다면 이곳 공기관에서는 '능률과 소통'으로 일했다. 경기테크노파크가 잘하는 일로는 1,2위를 다
언론사에 ‘퇴직인사’… 경기테크노파크 이강석 원장 2019년 1월 31일 퇴직하는 이강석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의 '퇴임 인사차‘ 언론사를 방문했다. 퇴직하는 공직자가 언론사에 인사를 오는 것은 의외다. 19세 고졸사원으로 화성 비봉면, 팔탄면에서 공직을 시작한 그는 1981년 경기도청에 전입하여 88년부터 7급 공무원으로 공보관실에서 언론인과 마주했다. 이 원장은 1988년 지방언론이 재점화되는 시기에 공보실에서 경인일보, 경기일보, 기호일보, 인천일보 출입기자들과 당시 7급 공무원으로서는 독학(!)수준으로 공보 현장을 함께 뛰었다. 보도자료 발굴을 위해 도지사실 결재대장을 열람하여 홍보자료를 발굴하고, 결재가 난 도정정책 자료를 시군에 배포하기 위해 인쇄를 하는 '발간실'의 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동장으로 2년간 근무하면서 일선 행정경험을 체득한 이 원장은 다시 1999년부터 도청 공보실에서 7년간 언론관련 사무관으로 일했다. 2008년에는 도의회 공보과장으로, 2011년에는 경기도 언론담당관으로 일했다. 이 원장의 공보부서 근무 총 경력은 11년6개월로 다른 공무원에 비해 길다. 이 원장은 7급, 5급, 4급으로 공보실에 근무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