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을 통해 이어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후대에 전해지지 않습니다. 기록이 없으니 전설이라고 합니다. 구전으로 전해 온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수천의 입으로 전해진 역사보다 그 근거가 되는 비석, 금석문, 묘지, 성곽이 얼마나 확실한 역사입니까.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을 머리가득 담았다 해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상상과 생각은 잠시 머물뿐 남아있지 않으니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사그라지는 연기 같은 것입니다. 기록하지 않은 생각은 혼자만의 상상의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남아있지 않으니 후대의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과학자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두었을 것이고 그중에 아주 일부가 현실에 나타나고 인류를 위해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을 보존하고 보호하는 일에도 인간의 생각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각을 즉시 바로 기록으로 남기고 전에 있었던 일들은 자료로 관리해서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행위중 중요한 일이 책을 쓰는 일입니다. 과거에는 종이가 귀해서 한두권에 적어서 자자손손 전했지만 요즘에는 인쇄술이 발달하고 종이의 질이
조금 서둘러서 출발했습니다. 오늘은 서울 관악산 자운암에 가기로 합니다. 며칠전부터 아내가 인터넷을 찾아서 자운암 가는 길을 걱정하기에 일단 관악산 자운암 인근까지는 네비가 가는 것이고 가서 암자를 찾는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했습니다. 수원을 출발하여 의왕-과천-사당에서 우회전하여 관악역으로 가는 긴 터널을 지나 U턴하고 돌고 돌아 서울대학교 정문으로 들어섯습니다. 구비구비 관악산 자락에 자리한 서울대학교 구내를 들어갔습니다. 1978년 78025-13251번 방송통신대학을 다닌 곳입니다. 이후에 동국대학교가 협력학교로 지정되었고 전문과정을 마친후 학사과정은 인천 인하대학교를 다녔습니다. 방송대, 서울대, 동국대, 인하대, 경기대를 다녔고 지금은 효인성대학원 휴학생입니다. 네비는 자운암 인근까지 안내한 후 할일을 다했다며 나가버리고 가을경치 풍성한 고갯길에 차를 세우고 이리저리 자운암을 찾다가 고개를 넘어가면 등산로가 있을 것이라 보고 500m를 걸어갔습니다. 드디어 등산로 입구를 찾았고 가을 낙엽을 밟으면서 산길, 돌길을 차분히 올라갔습니다. 가면서 등산객 3명한데 길을 물었습니다. 마지막 등산객이 확신에 찬 답을 주기에 좌측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어제 저녁에 지인의 출판기념회에 다녀왔습니다. 분기에 한번정도 만나는 분입니다. 공직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저자는 소통의 리더십으로 살아온 삶을 역사적 인물과 현장을 연결해서 참으로 무게감있게 정리한 책을 내셨습니다. 드림은 '다른이에게 전함'이라는 말 이상의 큰 뜻이 담긴 용어이고 또 다른 드림은 꿈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꿈을 이룩하는데 나 혼자 나만을 위해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베풀고 전함으로써 그와 나의 꿈이 함께 이룩된다는 의미로도 이해되었습니다. 책 제목이 "드림으로 드림하라"입니다. 평생을 봉사의 정신으로 살아오신 분이니 늘 마음속에 다른 이를 향한 봉사와 희생의 화두가 담겨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주변에 참 좋은 분들이 함께하십니다. 출판기념회에서 나온 워딩 그대로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오신 선배, 후배, 동료, 지인들이 1층과 2층의 자리를 채우고 함께 박수를 보내고 같이 공감하면서 자칫 무미건조할까 걱정하신 사회자의 저자와의 대화시간이 오히려 재미를 더하는 멋진 '북콘서트'장이 되었음을 즐겁게 기록하는 바입니다. 부부가 나와서 흔쾌히 참석자의 나이에 맞는 선곡으로 윤시내 가수의 노래로 축가를 부르고, 남편은 목이 불편하여
마곡사의 대웅전 가운데 기둥의 재질이 싸리나무라고 합니다. 소나무중 금강송이 대략 300년동안 자란다고 하는데 이 싸리나무는 요즘의 나무와 비교해 본다면 200년 넘게 살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요즘 싸리나무는 대략 여건이 좋은 곳에서 지금 10cm정도면 더이상 크지 않는 이른바 '떨기나무'인듯 보이는데 500년, 700년전에는 이처럼 지금이 1m넘게 잘 자랐던가 봅니다. 사실 사방사업에 쓰이는 수종으로는 아카시아, 싸리나무, 오리나무 등이 있습니다. 사방사업이란 산의 흙이 밀려내려오는 것을 막는 나무심기 작업으로서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이 온통 붉은 산으로 황폐화되어가자 정부가 산림녹화 5개년계획을 여러번 추진하여 오늘날 푸른 강토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에 사방사업을 하면서 황무지에서 생명력을 발휘하였던 아카시아를 심었는데 이 나무들이 최근에 돌아보면 모두 사라졌습니다. 왕성한 생명력이 50년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시골 고향마을 앞산에도 이 아카시아 나무가 번창했습니다만 불과 40년만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남은 나무들은 잎파리에 힘이 없고 병들어 있습니다. 애국가에 나오는 소나무가 1,000년을 이어왔는데 요즘 힘들어 합니
대입 수능의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젊은이들의 미래의 방향을 잡아주는 참으로 중요한 전환의 아침입니다. 60세인 저는 18세에는 예비고사라는 것이 있어서 그 점수를 반영하는 대학에 원서를 내고 다시 본고사 시험을 보았습니다. 예비고사 점수의 반영비중이 높은 대학은 예비고사 성적 우수자가 수위를 차지했습니다. 인생은 대학에서 결정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에는 특히나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대학을 가고 졸업해서 취업을 준비합니다. 취업준비는 또하나의 수능이고 과거의 예비고사 기간입니다. 취업이 쉽지 않고 취업을 해도 본인의 적성에 맞는 것인가 판단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과연 이 직장에서 평생을 다해 일할 것이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판사, 검사, 변호사, 회계사, 변리사 등은 거의 99%가 평생 직장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들의 영역에서 최대한 일하고 나름 준비를 하면 정치에 나서기도 하고 사업 수완으로 큰 기업을 이룩하기도 합니다. 자격을 얻는 고시나 "士字(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은 평생을 갑니다. 80세에도 의사를 하고 82세에도 회계사 사무실에서 직원을 채용하여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공무원으로 39년8개월을 근무하고 공기관에서 24
생각이 참으로 많은 아침입니다. 조금전 적어둔 글을 여기에 올리고자 합니다. 최근의 거취에 대한 결정을 돌아보면서 그냥 스스로 잘했다는 자평을 하기는 합니다. 주변에서 이야기를 전해들은분, 직접 대화로 상황을 이해하신 분들이 참 좋은 결단이었다는 칭소을 합니다. SNS로 근황을 말씀드리면 또한 잘한 결정이고 결단이라 말씀해 주십니다. 퇴직하신 선배도, 현직의 후배들도 그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다른이의 칭찬에는 인색하다가 일단 당사자를 만나면 평가가 좋으신데 더 머무시기를 바란다는 덕담 정도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쉽지않은 무대이고 녹록하지 않은 구조입니다. 작은 선물 한 두개가 큰 반향으로 다가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이라도 음주운전을 하면 지난날의 40년 경력이 공든탑 무너지듯 합니다. 삼국시대 이래로 조선까지 공든탑은 무너지지 않는 줄 알고 있고 이것이 유교의 기본정신이겠지만 현대에는 공든탑 뿐 아니라 시멘트로 기초를 다진 탑도 지진이나 폭우로 인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스르르 무너지는 사례를 참으로 많이 보았으니 하는 말입니다. 평생을 통해 이룩한 것들을 순간에 날리는 미국판 토네이도와 같습니다. 정말로 그런 사건사고를 많이
경기테크노파크에 근무하는 이강석입니다. 그동안 부족하고 미력한 저를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 주시고 격려 해주셔서 부족하지만 어렵게 원장직을 마칠 수 있게 성원해 주신데 대하여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이제 공직 39년 8개월, 경기도 산하 공기관인 경기테크노파크 근무 24개월을 합해 41년7개월의 공직을 마감하는 마음의 준비와 부분적인 짐 정리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지나고 보니 인생도 훅~ 지나가고 공직도 공기관에서도 참으로 행복하게 일했고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이 모든 공직의 과정 속에서는 수많은 선배 후배 동료들의 화수분 같은 성원과 도움을 받았고, 이에 보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공무원 공직과 공기관 공직을 모두 마치게 되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상황을 보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지는 못했어도 조직 안에서 차분히 적응하면서 눈치껏 일해 왔구나 하는 자평을 하게 됩니다. 거듭 생각해 보아도 공직은 수많은 선배들의 내리사랑과 동료애, 그리고 上敬下愛(상경하애)의 정신으로 이어온 경기도청과 시군청 공직사회의 분위기가 용기를 키워주었고, 사랑과 관심의 아름다운 에너지가 큰 힘이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상가는 그러하더이다. 많은 이들이 이제 떠나는 어느 노인을 배웅하는 그런 자리 같기도 하고 아님 모든 인간들이 자신이 출연하게 될 빈소이며 무대라고 칭하고 리허설을 하는 것 같기도 합디다 그리고 부모를 보내는 자식이나 그 손자손녀들이나 무조건 슬픈건 아니고 아버지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할머니는 당신의 몸을 불사르는 공양미로 자식들에게 마지막 역할로 일가친척을 만나는 그런 인정의 장을 만들어 주시는군요. 그뿐이 아닌 것이 또 있으니 넥타이맨 사람들은 조문을 하자마자 두리번 거리는데 그 이유는 따로 있는 듯 하오 아는 이를 한사람이라도 눈에서 놓칠까 걱정하는 그런 눈치말이오 고인의 타계를 애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상주에게 예를 차리고 친구와 이웃에게 나도 상가에 왔음을 알리고 싶은 속물근성이랄까 솔직히 상가에서 아는 이를 만나게 되면 다른 행사장에서의 만남과는 색다른 면이 있었거든 무었인가 뿌듯하고 꼭 악수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곤 했던거야 하지만 그 상가의 빈소에서 소주병을 기울이며 밤이 늦도록 무슨 이야기든 쏫아내지만 그들도 어느 날 소리 없이 신발을 벗고 저 자리에 누워 살아있는 이들의 수다를 듣게 되겠지 그런데 삶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내 부
역사시간에 배운 향약, 두레, 노동요 등은 힘을 합치고 일시에 노동력을 발휘하도록 한다는데 중점이 있다. 공사장에서 무거운 돌을 이동할 때 여러 명이 함께 '하나 둘 셋~!'하면서 힘을 모은다. 혼자서는 하루를 고생해도 안 될 일을 3명이 힘을 합치면 일거에 작업을 끝낼 수 있다. 창작이나 예술 분야에서는 혼자서 작업을 해내지만 이 세상 대부분의 일들은 혼자보다는 여러 명이 힘을 합치면 쉽게 마무리할 수 있다. 그중에 가래질에 대한 어린 시절의 관찰기억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이 있다. 적은 힘을 들여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의 기회를 놓쳐 큰 힘을 들이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현대적 버전으로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고 바꿔야 할 것이다. 호미는 손으로 잡고 밭고랑을 파고 농작물을 심는 개인도구다. 가래는 최소 3인이 호흡을 맞추는 협동의 장비다. 가래의 특징은 2인의 힘과 1인의 조율에 의해 흙을 깊게 파서 멀리 보내는 농업 인력 활용과 협업의 최고경지를 보여주는 조상들이 개발한 농기구다. 어린 시절 관심있게 본 가래질 과정을 보면 말하지 않아도 가래의 삽날을 땅에 대는 순간에 1번줄과 2번줄이 어
1958년생으로서 2000년에 42세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초등학교 5학년경에 머리속에 담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어려서 기억나는 연대는 1965년에 초등학교 1학년(국민학교)에 들어간 해입니다. 그리고 1974년에 고등학생, 1977년에 공직에 들어와 2017년 마감하고 2018년말을 맞이하면서 그간에 스치듯 지나간 세월속의 시간을 돌이켜 봅니다. 결혼 33년에 아이들이 장성하고 주변의 많은 분들이 멀리 떠나가셨습니다. 주변의 동료들도 여러명이 떠나고 직장을 떠나고 1955년 형아들도 이미 60중반의 어른으로서 집안에서 이런저런 일을 돌보며 70세를 향해 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저로서는 시간의 야속함을 탓하기 보다는 그냥 순응하는 길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합니다. 집사부일체라고 예능 프로그램에 올해 70세이신 (1949) 김수미 선생이 화려한 옷을 입고 단풍잎에 누워서 영정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단풍이 아름다워서 오래도록 살고 싶다 했습니다.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이라 말했습니다. 요즘에 읽고 있는 '아프리카의 지혜'(차승정 지음)에서 읽어보니 조선시대의 삶이나 아프리카의 그시절 생활이 많은 부분에서 비슷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