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군 비봉면사무소에 처음 발령을 받고 만난 분은 안 선배입니다. 선배는 당시 회계담당자로서 이강석과 김OO 서기보가 발령을 받고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군청에서 읍면에 발령대상자를 2~3일 전에 미리 공문으로 알린다는 사실을 당시에 신규공무원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군수님 발령장을 들고가서 인사하면 그제서야 발령사실을 아시는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군청 공문이 면사무소에 왔을 것이고 남자 한명과 여성공무원 한 사람이 비봉면사무소에 발령된 것을 알았고 이름도 확인되었으며, 특히 이강석은 비봉면 자안1리 출신이라는 것도 파악되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본면 직원이 대부분이던 시절이니 이번에는 어느 동네에서 공무원이 오는가 하는 것도 궁금한 일이었습니다. 대략 비봉면사무소에는 25명이 근무했는데 23명은 본면 출신이고 인근의 면에서 잠시 발령받고 와서 근무하는 직원은 2명이내였습니다. 얼마후에는 다른 면에서 근무하던 본면 출신 공무원이 복귀하기도 하고 근무 중에 군대를 가거나 타 기관으로 전근을 가기도 했습니다. 안 선배에게 인사를 하고 발령 후 사무실에 출근을 하였고, 훗날 교사로 전공을 찾아간 강 선배의 후임으로 서무담당이 되었습니다. 저는 서무담당이
2000년대를 맞이하여 라디오 방송국의 역할이 커지면서 기관장의 라디오 방송 출연이 늘어납니다. 라디오는 소형 녹음기를 들고 대화하듯이 취재를 해서 편집한 후 녹음내용을 컴퓨터에 걸어두면 하루종일 각종 방송이 나가고 중간에 광고가 나가니 온종일 뉴스와 시사, 광고가 방송되는 것입니다. 신문은 지면의 제한이 있지만 방송은 하루 중 20시간 이상 보도를 하는 아주 효율적인 매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1999년에 행정의 중요 기능을 생방송 전화를 걸어 방송국 PD와 대화하면서 설명하고 홍보하는 아이템이 운영되었고 일부 효과를 보게 됩니다. 당시에는 Cell Phone이 요즘만큼 일반화되지 않았으므로 사무실 전화가 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어폰 기능이 있는 전화기를 구매하여 활용하기도 하였고 방송전용 전화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부서별 방송 날을 정하고 미리 준비한 원고를 바탕으로 방송국 PD가 질문하면 실무 공무원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15분 정도 운영하였는데 생생한 정보가 실시간 전해지는 묘미가 있었고 생방송이라 서로서로 긴장하고 열심히 임했습니다. 사실 방송의 효과를 금방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행정을 알리고 공무원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동두천시 보산동에는 동(洞)이 하나 더 있으니 그 이름은 '걸산동'입니다. 사실 걸산동은 보산동 7통지역으로 61세대 124명이 살고 있는 '걸산마을'입니다. 실거주자는 100명 내외의 장년층이고 학생은 5명으로 고등학생 2명, 중학생 1명, 초등학생 2명입니다. 과거 이곳에 미군이 지어준 걸산분교(초등)가 있어 25회 116명을 배출했으나 1999년 폐교되었고 얼마 전 교실도 철거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이 마을 학생들은 매일 아침 미국을 거쳐 한국땅 동두천에 나갔다가 오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를 거쳐 부모님이 사시는 걸산동 집으로 돌아옵니다. 승용차, 버스, 전철을 이용해 등하교합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미국땅을 넘나드는 아이들입니다. 걸산마을 학생들은 하굣길에 시간이 남으면 미국땅에서 미군의 생활상을 구경하고 우리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있으며 오가는 미군과 영어로 대화합니다. 네이티브 스피킹입니다. 그런데 부러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이곳 걸산마을에 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미군과 영어를 쓰는 이를 만나 대화할 수 있고 식사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카드로 계산하면 캘리포니아 가게이름이 찍힙니다.
강릉과 원주가 강원도, 충주와 청주가 충청도, 전주와 나주가 전라도, 그리고 경주와 상주가 경상도라 작명 되었다. 경상북도 상주군 공무원들이 상주가 되어 상복을 입고 근무를 한다는 기사가 관심을 끌었다. 1965년 상주군 인구가 26만5천명이었는데 2019년에 99,986명으로 10만선이 무너졌다. 그래서 상주군 공무원들이 인구 10만선을 지켜내자는 각오의 표현으로 상복을 입었다고 했다. 누구의 제안인지는 알 수 없다. 1978년 화성군청 소속 9급 공무원으로 비봉면에서 추곡수매 담당자로 일했다. 산촌 2개 마을을 담당하였으므로 논비율이 적어서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다. 부면장께서 '수매 담당자로서 자신의 목표량도 채우지 못했다'는 지적했다. 어렵게 출하를 독려하여 20가마니를 받았지만 수분초과로 반품되었다. 그 벼를 2등급 가격으로 구매해서 건조하여 다음번 수매일에 검사를 받으니 3등급이 나왔다. 건조하니 2가마니가 줄었다. 그 달 월급 50,000원 중 2/3를 벼 구매와 건조비로 날렸다. 이번에는 부면장님, 재무계장님을 따라서 상주군으로 달려갔다. 지인의 소개를 받아 벼를 사와서 수매물량을 채우자는 전략이었다. 그 당시의 행정은 그랬다. 하지만 상주군 면
어느 기관이나 회사나 인사발령은 큰 관심사다. 드라마에서 보면 회사의 인사발령은 로비에 종이 몇 장 붙이는 것으로 발표된다. 사원들이 삼삼오오 기웃거리며 인사발령 A4 용지를 보면서 의외의 인물이 발탁되거나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의 영을 어긴 일로 해서 좌천되는 발령에 직원들이 호들갑을 떠는 장면도 볼 수 있다. 1980년대 공직사회의 인사발령은 하나의 커다란 잔치였다. 인사발령이 나면 잘된 사람 신나서 한잔, 오리알 된 직원 격려하느라 두잔. 그래서 관가 주변은 인사발령으로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하며 당시에 근무중인 강원도청에서 모 직원이 분석한 바에 의하면 200명 인사발령은 7억원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주장한 바도 있었다. 인사작업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많은 나날을 지낸 후 어느 날 오후 사무실의 차임벨이 울리면서 인사발령은 시작된다. 그 당시 인사 담당자가 수없이 바뀌어도 인사발령 멘트는 변하지 않았다. “1987년 5월 30일자 인사발령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방송을 타는 순간 사무실은 물론 복도에 있던 직원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방송이 끝나는 순간부터 사무실은 분주해진다. 인사발령 나발을 부는 것이다. 인사발령지가 팩스를
기관장, CEO의 사진은 보통 3장이 필요합니다. 1980년대 신문에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문선공이 자료실에서 이름만 맞으면 편집부로 올렸나 봅니다. 이재창 도지사님은 그 전에 부지사를 하셨으므로 그 당시 젊고 머리를 수수하게 한 수필가 같은 멋진 사진이 도지사 취임 이후의 신문에 소개되므로 새로 찍은 사진으로 바꾸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언론사의 동판을 신판으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지사님때는 아예 신문사에 가서 동판을 달라해서 지사님께 회수결과를 보고한 일도 있었습니다. 임사빈 지사님은 사진이 잘 나오는 각도가 있으시므로 공보실 사진담당 주무관은 늘 이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신문사 사진부 기자들은 전체 구도에 더 신경을 쓰다보니 지사님의 옆모습이 게제되고 이를 개선하라고 공보담당관에게 말씀하시니 이 또한 받자옵기 쉬운 과업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티지털 카메라가 활성화되어서 특정하게 기관장님의 사진을 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공보실장은 3컷의 사진을 지속적으로 언론사에 보내야 하고 청내에서도 각종 자료에 올라가는 기관장님의 사진을 관리해야 합니다. 우선은 넥타이 매시고 정자세를 하신 사진이 있어야 합니다. 취임식때 가져오신 사진
금강산은 금강산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수 천년 이어져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봉우리 40곳을 보아야 금강산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데 겨우 두곳을 일별하고 감히 금강산을 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정이기에 글로 남겨보고자 하는 것이다. 1. 금강호 우리의 금강호는 동해바다 동해시 해안가에 선미를 남으로 하고 선수를 북으로 하여 금강산으로 통하는 동해바다 해안가를 조용히 열고 있었다. 50여년을 막았던 철조망은 푸른 파도속에 숨기고 10층보다 높은 거함은 뱃고동도 없이 북동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향한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동쪽인지를 알수는 없지만 우리는 지금 북으로 향하고 있다. 파도는 잔잔하고 하늘의 달은 뭍에서 본 그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화사하게 웃고 있다. 하늘이 맑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국토 삼천리 금수강산을 조용한 밤에만 내려다 보는 저 달도 어느 날부터 북으로 가서 3,4일 머물고 돌아오는 금강호와 그 형제들을 관심있게 보면서 좀더 많은 달빛을 쪼이고 있었을 것이다. 달은 인자하여 남에도, 북에도, 비무장지대에도 비추고 저 넓은 동해바다에도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하마평'이라면서 공무원 승진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승진의 길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게 됩니다. 공무원 승진은 임박한 발령사항을 미리 염탐해보는 정도의 과정인 것이고 정작 중요한 일은 자신이 공직에서 어떤 태도로 일하느냐가 향후, 장차에 승진의 길이 빨리 열리는가 아닌가를 가늠한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시절, "라떼시절"을 소개해 봅니다. 이 시대의 공직환경에 걸맞은 것은 아닐지라도 기본의 틀은 동서고금에 틀림이 없는 고전읽기처럼 참고하시면 뼈가되고 살이되는 '된장찌개'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세정과에 근무하면서 조성범 지적계장님과 이화수 평가계 선배님 등 3명이 매일아침에 사무실 청소를 하고 구내식당에 가서 커피를 한잔 하면서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명감, 종교의식처럼 아침마다 넓은 사무실 전체를 청소하고 차마시고 돌아오면 한분 두분 출근을 하십니다. 새벽을 서두르는 부지런한 새를 당할 수 없습니다. 부지런한 공무원을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사는 이치와 좌우명은 근면성실인데 여기에 더 보탬은 바로 부지런함입니다. 이후에도 공직생활을 하면서 늘 일찍 나갔습니다. 행사장에도 일찍 가고 사무실에도 서둘러 가고 약속장소에도 즈금 일찍 갔습니다. 도지사
이 세상에 나쁜 기사 없고 좋기만 한 기사도 없습니다. 모든 기사는 그 속에 기승전결이 있고 생노병사가 존재합니다. 한 건의 기사에는 그 주의 해당기관 스토리가 담기게 됩니다. 행정기관에서 나오는 보도자료를 해석하는 경우의 수는 그 기관을 출입하는 기자의 수보다 더 많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 얼굴을 못 본 인터넷 기자, 내근 기자들이 우리의 보도자료를 참고하여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나쁜 기사로 예상되는 사안에 대한 기자의 취재가 시작되면 적극적으로 설명하여 우리 측 의견이 기사에 반영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자는 늘 양쪽의 의견을 들으려 하고 그것은 의무이고 임무입니다. 이른바 반론권을 인정해야 그 기사로서의 형식이 갖추어지기 때문입니다. 가끔 방송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상대편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거나 통화는 되었지만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도 반론권을 인정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입니다. 여하튼 기자가 취재하는 것이 감지되면 여러가지 방법과 방식으로 대응 하여야 하는데 초기 단계에는 취재기자만 접촉하여야 합니다. 큰 건이라면 그날 아침 데스크 편집회의에서 사회면 톱으로 잡고 취재지시를 한 것이겠지만 잘잘
공무원으로서 시청과 군청, 구청의 공보실에 근무한다면 일을 잘하거나 못하거나 입니다. 공보실이라는 부서가 일 못하는 사람도 근무하기 좋고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 공무원도 할 일이 있는 곳입니다. 다시말해 열심히 하면 표가 나지만 대충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기관에 대략 90명 내외의 언론인이 출입을 합니다. 중앙 신문사, 중앙방송사, 통신사, 지방 일간지, 주간지, 인터넷 매체 등 다양한 언론 네트워크 속에서 공존하는 언론시스템은 그 전체를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공보실에 근무하는 공무원의 역량이 언론환경에 큰 변화를 주거나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공보실 역량에 관계없이 방송 뉴스는 늘 그 분량만큼 나가고 신문은 16면 또는 32면을 가득 채워 발행됩니다. 그리고 언론사 인터넷에는 각종 기사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공보실 공무원이 열심히 뛰면 좋은 기사가 올라갑니다. 놀고 있어도 기사는 보도됩니다. 어찌보면 공보실은 일을 해도 되고 안해도 무사안일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언론은 자신들이 원하는 기사를 키웁니다. 공무원이 크게 보도해 주기를 바라는 기사를 키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매일 출입하는 기관에 대한 예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