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의 하루는 아침 출근은 평온하나 밤늦게 찬란합니다. 조간신문을 기준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석간신문이 많았지만 이제는 석간 신문은 줄었고 대부분 조간입니다. 그러므로 기자의 출퇴근 시간은 아침 늦게, 저녁 늦게 입니다. 공무원이나 직장인들은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는 일찍 퇴근하기를 바라겠지만 기자는 취재하고 편집하고 교정보고 마무리하는 과정이 밤까지 이어지므로 저녁시간 이른 퇴근을 기대할 수는 없는 운명입니다. 더구나 편집기자는 기사가 들어오는 오후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신문제작 작업을 할 것이고 사진기자는 행사가 열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가지 현장을 누벼야 할 것이고 그 중간에 대형 화재, 교통사고, 사건사고, 검찰 출두 등이 있을 때 시각에 맞추어 현장에 달려가야 하는 재미있지만 힘든 직업입니다. 사진 기자들이 재미있어 하는지는 모르지만 행사장에서 수십 번 이상 셔터를 눌러대는 것을 보면 자신의 직업에 큰 자부심을 갖는 것은 확실합니다. 편집기자들이 계속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면 편집 또한 묘미와 재미와 자부심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편집기자상을 받으신 분들이 그 성과를 보면 참으로 예능작가, 예능PD가 탐낼만한 재치와
기자들의 선후배는 나이보다 학교보다 언론에 입문한 연식을 기준으로 합니다. 언론인 간 선배는 참으로 중요 위계로서 군대의 계급 이상으로 그 위력이 강합니다. 언론인은 편집국장조차 "先輩(선배)"라고 부릅니다. 만약에 국장이나 부국장에게 '선배!'하지 않고 국장님이라 부른다면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고 보면 맞습니다. 특히 술을 마시면서 취기가 오르면 자신들의 내부 선배는 물론 동석한 공무원이나 다른 기관 부서장에게도 "선배, 선배!!!"하면서 이런저런 고충을 이야기 합니다. 사실 기자만큼 고충이 큰 직업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 기자는 기사 쓰면 쓰고 말면 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저녁으로 아침으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사건이 없다고 신문 3면이 백지로 나가는 것 아니고 큰 사건이 많아도 지면이 늘지는 않습니다. 지면이 잠시 늘어나는 경우라면 대부분 창간 기념일 일 것입니다. 즉 늘 18면 신문 32면에 기사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면별로 기사를 채우고 기사가 부족하면 사진을 늘리고 기사 넘치면 사진을 조금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기사 몇 개를 버리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제공하는 보
1988년 어느날, 아침 출근한 기자는 무슨 일을 할까요. 우선 출근하여 부장, 차장에게 인사를 하고 커피도 마시고 복도에 나가 담배도 피웁니다. 과거 한참 시절에는 기자 책상위에 대형 유리 재털이가 있어서 오전에 한 웅큼 채운 후 비우고 오후에 출입처에서 돌아온 3~4시부터 6시까지 한 번 더 채워준 후 오늘 밤에도 한 번 더 피울 요량이었습니다. 끽연자의 천국이랄 수 있는 1980년대에는 공무원 책상위에도 재떨이가 있고 기자 책상위에도 재떨이가 있다는 사실이 공통점이라면 저녁 8시 이후 공무원 책상위에는 전화기만 달랑 남아있는 반면 기자님 책상 위 자료는 3년4년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기자 책상위의 자료들은 정치부에서 사회부, 경제부에서 문화부로 발령 나야 잠시 정리되었다가 후임자가 와서 1개월 쯤 지나면 본모습 그대로 자료가 쌓이게 마련입니다. 이는 출입처 기자실에도 마찬가지인데요 10년 이상 한 기관에 출입한 기자의 책상 위 자료가 쌓인 모습을 보면 마치 地質(지질)학자가 쌓이고 싸인 모래 퇴적층에서 고생대 중생대를 구분해 내듯이 갱지와 복사지가 연대별로 쌓이면서 太陽熱(태양열)에 의한 숙성 정도에 따라 그 자료 단면의 색이 초코렛 색에서 연한 홍차
이 세상에 나쁜 기사 없고 좋기만 한 기사도 없습니다. 모든 기사는 그 속에 起承轉結(기승전결)이 있고 生老病死(생로병사)가 존재합니다. 한 건의 기사에는 그 주의 해당기관 스토리가 담기게 됩니다. 행정기관에서 나오는 보도 자료를 해석하는 경우의 수는 그 기관을 출입하는 기자의 수보다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아직 얼굴을 못 본 인터넷 기자, 내근 기자들이 우리의 보도자료를 참고하여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나쁜 기사로 예상되는 사안에 대한 기자의 취재가 시작되면 적극적으로 설명하여 우리 측 의견이 기사에 반영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자는 늘 양쪽의 의견을 들으려 합니다. 이른바 반론권을 인정해야 그 기사로서의 형식이 갖추어 지기 때문입니다. 가끔 방송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상대편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거나 통화는 되었지만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도 반론권을 인정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입니다. 여하튼 기자가 취재하는 것이 감지되면 여러 가지 방법과 방식으로 대응 하여야 하는데 초기 단계에는 취재기자만 접촉하여야 한다. 큰 건이라면 그날 아침 데스크 편집회의에서 사회면 면 톱으로 잡고 취재지시를 한 것이겠지만 잘잘한
언론인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니 공무원으로서 모시고 근무했던 계장님을 선배님이라 존칭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1988년 임사빈 경기도지사 재임시에 저는 세정과에서 문화공보담당관실로 발령을 받아 언론인에게 행정업무의 홍보 자료를 기사문으로 작성하여 전달하는 이른바 '아이템 담당자'로 일했습니다. 이 자리는 누구의 결재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료를 받아 자료를 작성한 후 기자실에 배포하면 다음날 석간에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한 기사가 인쇄된 신문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아주 재미있게 일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도지사님 주재의 간부회의시에는 상황실 뒷 편에서 오디오를 청취하던 중 의미있는 말씀이 나오면 간단히 메모한 후 지방 신문사 기자에게 전화로 알려주면 원고지 1매 이내의 가십기사가 오후 2~3시경 윤전기를 통과하는 석간신문에 실리니 이 또한 밤나무 아래서 3개 또는 2개의 초콜릿 알밤을 줍는 기분입니다. 취재와 기사 보도과정이 1:1로 마감되는 것이 공무원 초짜(공무원 11년차)로서는 얼마나 신명나는 일이겠습니까. 특히 당시의 임사빈 경기도지사로 말씀드리면 정말로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양주군에서도 본 양주에서 출생하시어
기관장은 물론 간부의 사진은 보통 3장이 필요한데 1980년대 신문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문선공이 자료실에서 이름만 맞으면 편집부로 올렸나 봅니다. 이재창 도지사님은 그 전에 경기도 부지사를 하셨으므로 당시 젊고 머리를 수수하게 약간 퍼머끼가 있는 멋진 사진이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도지사로 취임하신 후 새로 찍은 말끔하게 빗어넘긴 정말로 멋지고 행정적인 사진으로 바꾸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요즘에는 사진파일을 보관하면서 필요할 때 신문에 편집합니다만 당시에는 사진을 동판으로 찍어서 관리했습니다. 도지사 사진이 필요하면 자료실에서 동판을 꺼내어 활자사이에 끼워넣어 편집하였습니다. 그 언론사의 도지사님 사진 동판을 신판으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지사님 때는 아예 신문사에 가서 동판을 달라 해서 지사님께 회수결과를 보고한 일도 있었습니다. 임사빈 지사님은 사진이 잘 나오는 각도가 있으시므로 공보실 사진담당 주무관은 늘 이를 신경 썼지만 신문사 사진부 기자들은 전체 구도에 더 신경을 쓰다 보니 지사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옆모습이 게재되고 이를 개선하라고 공보담당관에게 말씀하시니 이 또한 받자옵기 쉬운 과업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티지털
1988년 경기도청에 주재하는 중앙사 기자들은 수시로 수원역에 갑니다. 사무실에서 100자 또는 200자 원고지에 기사를 써서 기사 관련 사진과 함께 봉투에 담아 본사 지방부 기자 앞으로 보냅니다. 팩스 전송도 용이하지 않은 시절이므로 인편에 원고와 사진을 직접 보내는 것입니다. 서울역에 도착한 기관사는 부산에서 대구 대전 천안을 거쳐 수원역까지 올라오는 동안 정차역마다 수집한 언론사 원고를 서울역사 안 각 언론사 사서함에 넣어 줍니다. 본사의 역송 담당자는 오전에는 2시간에 한번 서울역에 사송을 다녀옵니다. 석간 신문사는 오후에 신문을 내놓아야 하므로 점심을 먹고 나면 더더욱 바빠져서 매시간 단위로 서울역 사서함을 열고 자료를 받아와서 해당부 기자에게 전합니다. 그리해서 그날 저녁에 기사로 나가거나 늦으면 다음날에야 신문에 빛을 보는 것입니다. 물론 팩스라는 기계가 있어서 원고를 보내기도 하고 기계실에 가면 둥근 통에 사진을 감고 기계를 돌려서 긴 선으로 사진을 보내면 본사 기계실에서 지진계 돌아가듯이 사진을 이른 바 주사선으로 돌려받으므로 오차가 나면 톱니바퀴체 잘린 듯 촛점 흐린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보면 과거의 추억이겠지만
1989년 어느날. 중앙사 K기자는 100자 원고지에 살살 내려쓴 후 팩스 보내고 데스크에 전화하면 끝입니다. 그날 송고해야 할 기사를 난로가에서, 소파에서 머리 속으로만 구상한 후 이제다 싶으면 자리에 앉아 플러스 펜으로 초서처럼 내려쓴 후 다시 읽어보지도 않고 팩스에 밀어 넣습니다. 잠시 후 본사 지방부에 전화를 해서 도착 여부만 확인하면 끝입니다. 생각 2시간 기사작성 3분, 송고 2분이면 끝입니다. 다른 중앙사 L기자는 원고지 200자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아침 10시에 보도 자료를 배포하면 앞으로 자신에게는 8시 반에 미리 달라 하십니다. 자료를 받으시면 즉시 기사작성을 시작합니다. 우선 제공된 보도자료에 검정색으로 수정 가필한 후 읽어봅니다. 다시 100자 원고지에 옮겨 적고 붉은색으로 가필한 후 청색으로 고치고 검정색으로 첨삭합니다. 또다시 수정하는 원고지 위에 교통지도, 도로망도가 그려진 듯 복잡합니다. 글씨를 쓰시는데 심혈을 기울이십니다. 참으로 바쁘고 치열합니다. L기자님은 점심시간 맞추기도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석간이므로 오후 1시경 지방판이 마감됩니다. 점심을 제때에 맞추지 못하고 늘 바쁘십니다. 수차례 수정과 加筆(가필)을 거듭한 끝
경기도청 최초의 아웃소싱 공무원으로 말하자면 잠사계장과 잠업특장과장을 역임하시고 퇴직 하신 후 수원시 문화원장, 민선 수원시장, 국회의원을 역임하신 심재덕 전 수원시장님을 들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가 비단을 생산하는 누에고치를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 산업경제의 기반에 도움을 주었는데 이를 적극 추진하기 위해 당시 고등학교 교사인 심재덕 시장을 특채하여 파격적으로 사무관에 임명하고 이후에는 과장에 승진보직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웃소싱의 원조가 되셨습니다. 이후 심 시장님은 특히 세계 화장실협회 초대회장을 하셨으며 수원시는 물론 우리나라 화장실 문화의 선진화에 크게 기여하셧습니다. 이후 경기도청에 외부 전문가가 자리한 직위는 비서실장, 여성국장, 공보관이었으며 1999년 홍보기획팀장으로 발령받았고 J공보관을 만난 다음 날 기존의 업무가 바뀌면서 새로운 홍보기획이라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그 자리는 언론인과 접촉하는 자리로서 발령소식에 동료들이 술 많이 먹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해 주었지만 정작 근무 내용은 서면접촉을 할 뿐 언론인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술을 마실 기회도 없습니다. 부서의 역할을 바꾸신 J공보관은 부임 초부터 새로
공무원과 언론인의 끝없는 말싸움은 자료를 달라하고 못준다 하는 것입니다. 자료를 주라는 법이 없으니 심한 경우 '정보공개청구'를 하라고 합니다. 대외비가 아닌 문서라면 달라하고 내가 처리한 문서를 기자에게 줄 수 없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이는 닭과 계란의 문제이고 부산까지 달려도 늘 평행선인 좌측 철길과 우측 레일입니다. 숫자 2는 곱해도 4, 더해도 4이듯이 언론인과 공무원의 대화는 늘 평행선입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모든 보도 자료는 공보실을 통해서 주고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각 부서는 공보관실이 요구한 자료를 공보관실 직원에게 전달하고 공보관실은 그 자료를 기자에게 전하니 각각의 책임부담을 조금씩 분담하는 것입니다. 공보관실 직원도 공무원이니 자료의 내용을 파악하고 나가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사업부서에서도 자료를 제공하면서 기자에게 나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 마음속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기자들도 무턱대고 행정기관의 자료를 보도하기에는 나름 규율이 있을 것입니다. 언론이 폭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언론보도의 수위가 있으니 말이다. 사회적 공익적 책임이 있습니다.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조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