釀造場(양조장) 사장님이 最愛(최애)하는 ‘술조사’가 있다면 나무를 관리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山林(산림)간수’가 있습니다. 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는 경우 조사를 거쳐서 의법 조치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참고로, 양조장 사장님이 술조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密酒(밀주, 허가없이 몰래 담그는 술)를 단속하여 양조장의 술이 많이 팔리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옷을 깔끔하게 빼어 입은 사람이 집 앞에 나타나서 집안을 기웃거리며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급하게 점심을 지어 대접을 했습니다. 이 분이 산림간수입니다. 소나무 가지를 베어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벤 것은 아니고 잔가지를 잘라온 것도 안 된답니다. 1960년대 대한민국 공무원은 입법·사법·행정 3권 全權(전권)을 가졌습니다. 1977년 공직에 들어가 담당 부락에 가니 70세 할머니가 ‘담당 서기님’이라 호칭하여 크게 놀랐습니다. 19살 면직원을 이렇게 어려워하는가 생각했습니다. 선배에게 물으니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면서기의 권력의 후유증이라 했습니다. 당시에 徵用(징용)·徵兵(징병)·供出(공출)이 있었습니다. 강제노역에 끌려가고 군에 입대하고 쌀과 물품을
논밭의 풀을 죽이는 제초제가 나오기 전에는 좁은 하천에도 물고기가 가득했습니다. 폭우가 내리면 추녀 끝에 미꾸라지가 올라왔습니다. 누구는 구름 위를 떠돌던 물고기가 빗물을 타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힘 좋은 미꾸라지가 상류로 거슬러 올라오다가 폭우가 내려 물살이 강하므로 이를 치고 올라와 우리집 추녀 끝까지 당도한 것으로 봅니다. 물고기를 잡는데 큰 그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그물이나 양동이, 투망으로 고기를 잡아서 집안에 양어장을 만들어 넣어줍니다. 수초까지 장착해주면 평화로운 양어장이 됩니다. 어릴적 양어장에 키운 물고기는 붕어, 금붕어, 버들무지, 송사리, 가재 등 다양합니다. 작은 물고기를 소주병에 담아서 키우면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볼이 빵빵하게 크게 보였습니다. 유리병이 볼록렌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물고기를 키우다가 한 여름에 큰 비가 내린 다음 날에는 모두 가출해 버리곤 합니다. 비가 내려 물이 차오르면 물고기가 뛰어올라 우물가 하수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더 넓은 하천으로 나가서 강을 타고 내려갔을 것입니다. 더 큰 물고기가 되고 큰 가족을 이루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동네 웅덩이에서 수구
똥차는 언제 출발하나요??? 요즘에는 아파트를 가로지르는 마을버스가 다닐 정도로 교통기반이 확충되었습니다만 1970년대 모든 마을에 버스가 운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향마을에 버스가 들어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인 1972년쯤입니다. 마지막 버스는 시골마을 방앗간 앞에 주차하고 밤을 지낸 후 다음 날 아침 첫차가 되어 콩나물 시루처럼 한가득 학생들을 싣고 읍내로 나갔습니다. 한번은 버스가 고장이 나서 1시간 늦는 바람에 상급반 고등학생들이 해명을 부탁하여 버스 기사님이 차를 세워두고 학교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사과를 한 일도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에 청년이 종점에서 시간을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서 땀을 흘리며 기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똥차는 언제나 떠나나요?” “아, 예, 똥이 차야 떠나지요.” 자신이 타고 갈 버스를 “똥차”라 하니 기사님은 넌지시 한 방 먹인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확인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와 주기를 바랄 뿐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데는 인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시골마을 버스는 하루 4번 운행했습니다. 아침 출근, 낮 11시경, 오후 2시경, 그리고 저녁 퇴근시간에 한번 운행했
시대를 앞서가고자 노력했던 신식 아버지 先親(선친)은 가족의 건강을 위해 대형 목욕탕을 만들었습니다. 집안에 1칸 면적의 공간을 확보하여 대형 무쇠솥을 걸고 장작불을 피웠습니다. 물이 따스한 것 이상으로 솥의 바닥은 뜨거웠으므로 나무판을 만들어 뗏목처럼 띄우고 올라갑니다. 나무판이 솥 바닥 아래까지 내려가게 되고 이를 발판 삼아서 들어앉으면 뜨끈한 탕물이 온몸을 달구고 1년 묶은 때가 퉁퉁 불어나서 슥슥 문지르면 국수발이 후드득 떨어졌습니다.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을 뜨겁게 데운 것이니 아들 삼형제, 아버지, 삼촌 등 남자들은 순서없이 이 탕에 몸을 담그고 물이 부족하면 찬물을 채우고 차가워지면 장작불을 피웠습니다. 이후 동네 청년들이 장작을 들고와서 목욕을 했습니다. 물이야 지하수이니 별도의 비용문제가 없는 것이고 불을 피우는 장작을 집에서 챙겨와 아궁이 불을 피웠으니 연료비만 부담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벌초와 시제에서 만나는 아저씨가 장작을 들고 수건을 목에 걸고 목욕을 하러 오셨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자, 한겨울에 장작불을 때서 물을 끓인 후에 일단은 솥 밖에 서서 뜨거운 물로 몸을 지지고 비누칠을 한 후 헹궈낸 후에 아이들을 탕 안에 들
桑田碧海(상전벽해)란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1960년대에 시골 마을 산기슭에는 뽕나무를 심었습니다. 누에고치가 완성되면 뜨거운 물에 삶아서 외국에 수출하던 시절입니다. 누에고치는 누에가 4잠을 자고나서 몸속의 진액을 비단실로 뽑아내어 자신의 羽化(우화)를 준비하는 방을 만듭니다. 이를 우리는 누에고치라 하는데 통으로 삶아서 수출하였다 합니다. 더러 가정에서 고치를 끓는 물에 넣어 첫 번 가닥을 잡아내어 비단실을 뽑아내기도 하였습니다. 비단천을 만드는 실이 나옵니다. 한 번에 몇 개의 고치실을 잡아당겨서 돌돌 말아내면 비단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제조 기술이 부족하였으므로 고치를 통으로 출하를 하고 정부가 수매하여 외국에 수출하여 달러를 벌어와 석유를 사다가 산업발전에 투입했다고 들었습니다. 누에는 일시적으로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는 농사입니다. 그래서 시골 마을 아낙네들의 손길이 많은 집에서 누에를 쳤습니다. 기른다 말하지 않고 누에를 친다 했습니다. 누에씨 1장에는 수 천마리의 씨누에가 있습니다. 이를 받아다가 뽕잎을 잘게 썰어 먹였습니다. 한잠을 자고 뽕잎을 먹고 두 잠을 자고 뽕잎을 먹었습니다. 네 잠을 자고 나서는 엄청
요즘 젊은이들은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돌리며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는 빨래방을 갑니다만 시골 아낙들의 대화방은 빨래터였습니다. 이런저런 빨래를 가득 머리에 이고 와서 빨래를 합니다. 아기가 똥을 싼 기저기는 맨 아래로 내려가서 우선 휘휘 지어 걸러내고 애벌 빨래를 한 후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서 비누칠을 한 후 다시 문질러 줍니다. 그 아랫마을 아낙들은 내려오는 시냇물이 청정수인양 빨래를 했습니다. 당시 시골 하천 주변에는 풀과 나뭇가지, 자갈, 모래등이 있어서 자연적인 정화작용이 가능했습니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상하수도관으로는 불가능한 정화과정을 자연은 아주 당연스럽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마을 아래로 내려가면 하천은 다시 새로운 개천으로 탄생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의 아낙들은 빨래를 할 때 양잿물 비누를 썻습니다. 양잿물이란 화공약품인데 이를 물에 끓인 후에 쌀겨를 넣어서 응고시킨 것입니다. 이를 맨손으로 잡아서 빨래에 문지르니 그 손이 거칠어지고 심한 경우 손바닥에 구멍이 날 정도입니다. 그래도 밭일로 논일로 단련이 된 손이라서 웬만한 양잿물 비누는 견뎌내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더러는 손바닥을 보이시는데 양잿물로 손바닥은 닳았고 손등은
땅을 놀리는 것은 농부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논뚝에도 콩을 심었습니다. 논 뚝에 콩을 심으면 꿩이 와서 파먹으므로 싹이 날 때까지 꿩을 쫓기 위해 허수아비를 세웠습니다. ‘허수아비의 아들’은 ‘허수’라는 조크가 크게 통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꿩이나 새들도 시골 할아버지가 대충 만든 허수아비에 놀라서 논두렁 밭두렁에 심은 콩을 꺼내어 먹는데 어느 정도 부담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독수리 모양의 연을 날려도 새들은 가짜임을 다 알아차리고 농작물을 쪼아먹습니다. 요즘 농부들이 더 이상 독수리를 키우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아차린 모양새입니다. 그 시절에는 논두렁에 콩을 심었습니다. 푸른 잎이 무성하게 자라는 콩이 파랑 주머니를 달고 익어갈 무렵에 동네 아이들은 논두렁 근처에 불을 지피고 콩튀기 놀이를 합니다. 불 위에 파랑 콩을 익혀서 알콩을 꺼내먹는 것입니다. 알콩달콩하다는 말이 여기에도 어울릴 것입니다. 그 맛이 참 좋았습니다. 살짝 익은 콩은 흰 밥 위에 올려진 그 콩맛을 내기에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입가는 물론 콧구멍까지 검정으로 물들었습니다. 검은 재 속에서 익어가는 콩을 주워서 껍질을 까고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
신혼부부에게서 깨가 쏟아진다고 하고 참기름 냄새가 난다고도 합니다. 정말로 농부로서는 참깨 수확하는 행복은 신혼부부의 사랑과 견줄만하다 해서 깨가 쏟아진다는 말을 붙인 것 같습니다. 우선 참깨는 팔각모양의 사찰 탑처럼 생긴 씨방에 8줄 깨알이 한 줄로 늘어섭니다. 한여름에 참깨밭에 15줄기씩을 베어 묶어서 세워 말려둔 참깨를 수확하러 갑니다. 행정용어로는 小束立乾(소속입건)입니다. 작은 단으로 묶어서 세워 말린다는 말입니다. 잘 마르면 할머니는 검은 천과 부지깽이 막대를 가져갑니다. 세워둔 참깨 묶음 바로 옆에 검은 천을 펼치고 두 손으로 정숙 보행하여 묶음을 이동시켜 검은 천 안에 안착시켜 줍니다. 그리고 나서야 묶음을 거꾸로 들고 준비한 부지깽이로 톡톡 건드려줍니다. 한여름 태양열에 바싹하게 마른 씨방안의 흰 깨알들이 소르륵 쏟아져 나옵니다. 농부의 수확의 기쁨이란 이런 것입니다. 신혼부부의 행복입니다. 들깨는 회생의 동그란 씨앗입니다. 참기름은 고소하고 들기름은 향긋합니다. 들깨는 자라면서 깻잎을 제공합니다. 삼겹살에 싸 먹는 쌈 중에 깻잎은 들깨잎입니다. 참깨잎은 타원형인데 작기도 하거니와 거칠어서 쌈으로 먹지 않습니다. 특히 참깨잎은 장어나 삼겹살을
냉장고의 냉동칸과 냉장박스에 들어가면 "모든 식품이 영구히 안전하다"는 타성에 젖은 우리는 음식을 만들어서 그릇에 담아 냉장칸에 넣고 하루, 이틀, 사흘동안 꺼내어 먹고 다시 넣고 다시 꺼내는 셔틀냉장을 이어갑니다. 어느집 냉동칸은 음식을 담은 비닐이 흰 벽을 구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식재료마다, 음식과 반찬마다에는 나름의 유효기간이 있을 것인데 우리는 그냥 냉장에 넣으면 보름은 가고 냉동에 넣으면 다시 한해가 바뀌어 그날이 다시와도 탱탱 얼어있으니 문제없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위생당국에서는 유효기간과 유통기간을 정하고 단속을 합니다만 이는 편의점 등 오픈된 장소에서는 수시로 행해지는 행정지도단속이지만 정작 식품을 만드는 큰 공장에서의 위생에 대해서 편의점만큼 알뜰하게 관리하는가에 대한 확신은 부족하다 봅니다. 대형공장에서 제조일자, 유통기한, 유효기간의 일자를 쉽게 확인하기 어려운 부위에 흐릇하게 찍어내어 마트, 편의점 등에 공급하고 소비자들은 그 날짜를 확인하면서 작은 두뇌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유통기한 만료일이 임박한 제품은 진열대 앞에 놓고 조금 여유있는 물건은 뒷편의 꺼내기 어려운 곳에 전시합니다. 이에 소비자들은 일단 구매할 제품을 정하면 앞부분의
시골동네에서 양조장 집 딸 다음으로 패션을 리드하는 2·8청춘 처자는 방앗간 집 딸입니다. 양조장 집 딸은 부모님이 돈이 많으니 풍족하게 패션을 꾸밀 수 있는 것이고 방앗간 집 딸은 나름의 용돈 전략이 있습니다. 방앗간 집 딸은 친구와 함께 2인1조로 삭대를 이용한 쌀 수집을 합니다. 삭대란 장성의 지휘봉을 예리한 칼로 아랫부분을 대각선으로 내리친 결과물로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손에 잡고 있으면 점 없는 느낌표입니다. 끝부분을 곡식이 든 가마니를 찌르면 소량이 흘러내립니다. 아버지가 낮술을 하시고 주무실 때에 허리에 찬 방앗간 쇳대를 잠시 빌리는 것입니다. 친구와 함께 방앗간을 열고 들어가면 어제 오늘 방아를 찧어서 쌓아둔 쌀 포대가 가득합니다. 삭대로 쌀과 보리 등 곡식의 포장망을 찔러서 내용물을 조금씩 꺼냅니다. 주인집 딸은 삭대를 찌르고 그녀의 친구는 삼태기를 들고 따라가면서 쌀을 받는 것입니다. 30분 동안 300번을 찌르면 쌀 2말이 나옵니다. 쌀 2말을 자루에 담아서 동네 쌀가게에 가져가면 큰 돈을 내어 줍니다. 이 돈으로 읍내에 나가서 삼원색 원색이 들어간 원피스를 살 수 있습니다. 너풀거리는 원피스 자락을 흔들면서 온 동네를 청소합니다. 아랫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