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속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보다 더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표현하는 공동의 무대위에서 열연하는 배우과 관객의 융합적 만남을 소설이라거나 시, 수필, 컬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신문에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 상대와 독자를 공감시키는 일이므로 공동의 주제를 택하고 거기에다가 현실에 맞는 논리를 펼쳐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최근에 경기일보에 올린 몇개의 글 중에서 특히 등산로 거리표기 방식에 대한 글은 제목부터 참 잘했다는자평을 합니다. 군청 등산로 담당자 전상서. 담당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 글입니다. 시작이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담당이 기안을 잘 해야 중간층에서 보강을 하고 최종 결재권자가 싸인을 함으로써 정책이 세상에 나오는 것입니다. 한자 말에 완벽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빌려온 구슬을 잘 쓰고 그 숫자와 품질에 瑕疵(하자)없이 반환했다는 말입니다. 完璧. 잃어버린 목걸이를 진품으로 사서 반환하고 열심히 일해서 갚았는데 빌려준 주인으로부터 그 당시부터 가짜 제품이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을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것이라는 평가를 하고자 합니다. 삼국지를 초등학교 5학년
首丘初心(수구초심)이라는 말은 여우가 죽을때 고향 언덕을 바라본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인데 많은 동물중에 여우가 고향언덕을 향한다는 표현에 동원된 이유는 아마도 잔재주가 많아서 고향에 대한 애정이 부족할 것이라는 점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고향이라 자랑을 하고 불리하면 슬쩍 고향임을 감추는 어느 정치인의 행태를 비유한 것 같기도 합니다. 어느 국회의원 후보자는 이 지역에 장모님이 사셨던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에 출마하는 국회의원이 많습니다. 중앙당에서 전봇대 세우듯이 나름의 후보를 각 지역에 배분하기 때문입니다. 중앙집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기초자치단체장도 불쑥 건물 옮기듯이 중앙에서 활동하던 분에게 공천장을 들려서 보내고 거시에서 당선되기도 합니다. 정치란 더이상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요즘 방송에 자주 나오시는 100세 김형석 교수님 말씀중에 정치는 과정이고 수단이지 목적이고 결과가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정치가 목표인양 잘못 인식되는 사례가 있다고말씀하십니다. 정치는 시민, 도민
안방에 수납장이 들어옵니다. 어제저녁에 벽 장식장을 교체하기 위해 정리했습니다. 33년 동안 함께 해온 장식장을 내보내고 새로운 서가를 들여옵니다. 목재 장식장을 철거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이를 재홀용으로 가져가는 비용이 5,000원입니다. 전에 시골에서는 그냥 화목으로 활용하였고 나중에 재를 걷어내면 그 속에서 고승 진신사리 찾아내듯이 못과 나사를 찾아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이 재를 밭에 뿌리니 더러는 김을 매다가 대못을 발견하여 다시 집으로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경기일보에 쓴 정승의 고철 저축은 아닐지라도 가끔은 시골 길가에서도 쇠붙이를 주우면 집으로 가져와 광속 나무박스에 담아 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쇠붙이가 어느 날에 임자를 만나면 적재적소에 활용된다는 점을 알기 때문입니다. 혹시 사람도 언젠가는 적재적소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청와대 개편이니 정부 개각의 소리가 들이니 일부 논공행상에서 소외돈 사람들이 그 기대감을 가지고 귀를 크게 세우고 전화기를 한번 더 들여다 볼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오늘 수납장이 들어오면 이런저런 소품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될 것으로 기대를 합니다. 그리하여 좀더 정리되고
1977년 19세 철 모르던 시절에 불쑥 공직에 발을 들인지 42년만에 L원장이 퇴임했다. 공무원으로 40년, 공기관에서 2년을 일했다. 19살 청년은 60 회갑이 되어서야 공직을 벗었다. 이를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解官(해관)이라 했다. 매년 경기도청에서만 수백명이 명퇴, 정년퇴직 하겠지만 L원장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른바 언론을 아는 공무원이다. 기자에게 감히(?) ‘행간의 의미’를 안다고 자임하곤 했었다. 영화배우 김하늘이 주연한 국정원 직원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7급 공무원'이 2009년에 개봉되어 400만 관객을 기록한데 이어 요즘 새삼스럽게 6급 공무원과 5급 별정직 공무원이 부각된다. 1984년 공보실. 당시에도 짱짱하던 6급 공무원은 가끔 사업부서 계획서 하나 얻어다가 '1도1사'경인일보 기자에게 건네주면 다음날 세로쓰기로 신문 짝 만하게 기사가 났다. 칼로 오려서 민선 도지사에게 올리면 싸인펜으로 체크해서 내려 보낸다. 도지사에게 점수를 땄으니 우리 과장님은 다음번 인사에서 관선군수로 나가겠다며 자화자찬을 했었다. 그래서 공보실 직원을 '관선기자'라고 불렀다. 1988년에 경기일보가 기호일보, 인천일보와
9급 공무원으로 처음 들어왔을 당시에는 모든 이들이 어려운 상사였다. 1977년 면사무소에 근무할 때 보조원으로 함께 일하던 사환이 있었지만 직장 선배이므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20년 넘게 공무원으로 여러 부서, 다양한 과에서 일하는 동안 같은 팀 구성원과 조를 이루어 일하고 있다. 모든 부서에는 부서장이 있게 마련인데 행정기관에서는 과장을 조직의 기초단위로 본다. 도청이나 시청이나 과장은 '전결'이라고 해서 결재권한을 위임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읍면동 사무소에도 5급 읍면동장과 6급 사무장, 과장, 계장이 있고 각각이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1984년에 상사가 지시를 하면 따르고 결재를 올려서 고치면 수정해서 일처리를 했다. 조직의 힘은 상사와 소속직원간의 유대에서 나온다. 조직의 세포라 할 수 있는 개인과 계조직, 과구성이 탄탄하게 연관성을 맺고 움직일 때 그 조직은 큰 힘을 발휘할 것이며 그 연결고리가 약하거나 불협화음이 난다면 그 부서는 약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부하직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은 상사의 세심한 지도력이다. 어느 직원이 바쁘고 어려운가를 확인하고, 그 직원의 능력을 파악하고 적절한 지도
윗집은 일주일에 한번이상 전투가 벌어지곤하였는데 그 세월이 1년반쯤 되는 것 같습니다. 주로 밤 11시~3시 사이에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큰 목소리가 칼지게 들여옵니다. 그리고 쾅하고 문을 열고 나가는 소음이 납니다. 그래서 두 번인가는 집앞에 가서 그 소음을 녹음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한달에 5번 이상 소음에 시달리게 되자 관리소에 신고를 하였습니다. 공동주택의 층간소음으로 사건사고가 많이 나는데 이는 그 해결방법의 차이점으로 사건이 크기도 하고 작게 해결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직접 상대하는 것 보다는 관리사무소를 통하는 것이 좋습니다. 층간 소음이 심하다고 직접 올라가서 따지지 않고 관리사무소에 이웃간 소음에 조심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두번을 관리사무소에 신고를 하자 결국 10일 전에 엘리베이터 벽면에 안내문이 나붙었습니다. 늦은 시각에 큰 소음이 나서 이웃간에 불편하니 서로서로 주의해 달라는 관리소장 명의의 글이 붙은 것입니다. 그래서인가는 모르겠지만 오늘아침, 2019년 1월27일 아침 7시부터 짐을 옮기는 소리가 크게 나더니 8시경에 이삿짐 센터의 차가 도착하고 긴 사다리를 주루륵 올려 윗집 베란다에 척하고 걸쳤습니다. 이제
도서관 책에서 본 말의 기술에 대한 내용이 공감을 줍니다. 퇴근 임박한 시각에 일감을 주는 상사에게 "지금 퇴근해야 하는데 일을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답변과 "제가 오늘 내일 하는 일이 많아서 이 일을 내일까지 처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라는 대응은 크게 다르다고 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주고 받는 말은 참으로 중요한 삶의 구성요소입니다. 앞의 예에서 보는 것 처럼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말이 있고 편안하게 하는 대꾸가 있습니다. 그러니 같은 말도 어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잘한다는 말은 정말로 잘하는 가수나 선수에게 하는 말이지만, 술판을 벌이며 흐드러지는 사람에게 잘한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비아냥입니다. 그러니 같은 말, 동일한 단어도 상황과 장소에 따라, 상대에 의해서 달리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10년전에 의원님 모시고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했을때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대응으로 공직 42년을 온전하게 마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저력이었습니다. 당시에 옆사무실 담당관이 진행하다가 바쁜 일로 나에게 대참하도록 한 업무에서 발생한 '미스매칭'으로 금요일 배표가
전에도 시 랍시고 몇편 쓰고 문예지에 송고하여 활자로 인쇄로 나온 바도 있지만 그것이 시인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냥 글 장난이거나 흉내 내기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자님께서 수백편의 시를 읽으시고 시는 '思無邪'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시는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고 하신 말씀에 공감을 합니다. 고전이나 현대시이거나를 불문하고 시는 내면의 생각을 일부 골라내어 글로 적은 것입니다. 누구의 시도 모두가 하나같이 가슴속의 생각을 말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쓰는 시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시인들은 외롭거나 괴롭거나 힘든 환경에서 시를 써냅니다. 흔히 표현하는 것처럼 누에가 비단실을 뽑아내듯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4잠을 자면서 뽕잎을 먹고 또먹고 고치가 되기 위해 수백만번 채머리를 흔들어 고치를 완성하고 서서히 구름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처음 고치를 짓기 시작한 누에의 모습이 서서히 안개가 끼고 뭉게구름속으로 우주선 사라지듯이 흰 색으로 사라집니다. 누에고치는 초콜릿색이어서 뻔데기라는 아이들 영양식으로 1960년대 ‘뻔뻔뻔’ 부부를 탄생시켰고 요즘에도 전통시장이나 등산로 입구에서 연탄화덕위에 위태롭게 올려진 회색 양푼에 담겨져 나무 주걱
이 그릇을 만나 함께한 세월이 10년이 넘었을 것인데 오늘 새벽 會者定離(회자정리)의 상황을 맞았다. 식탁에 놓인 밥그릇과 물컵을 동시에 옮기다가 밥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밥그릇 모양의 밥 덩이가 함께 뒹구는데 밥 아래 부분에 깨진 그릇 조각들이 여러조각 붙어있다. 순간이었다. 두 손으로 두 개의 물건을 들고 빨리 이동시키겠다는 생각에 집중한 나머지 손가락 지문의 접착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을 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3초정도 '동작그만'을 한 후에 차분히 비닐봉지를 준비하여 덩어리 큰 것을 우선 정리하고 비로 싹싹 쓸어모았다. 그리고 깨진 사기 밥그릇 조각을 주워담은 후에 물티슈로 문질러 담았다. 다시한번 억새꽃 핀 후의 가느다란 꽃술로 만든 비로 쓸어담았다. 다시 물티슈로 파편이 튀었을 주변 반경을 모두 닦았다. 다시 물걸레로 전체를 청소한 후 물걸레 천을 돌돌 말아 목욕탕 물속에서 세척했다. 억새꽃 비자루도 물에 씻어 말리는 중이고 세척한 욕조 역시 쎈 물로 여러 번 닦아냈다. 미세한 조각 하나도 바닥에 남지 않도록 정리했다. 깨진 밥공기 파편을 담은 비닐봉지는 버리는 쓰레기봉투에 돌돌만채 넣어 묶었다. 아내가 다른 쓰레기를
- 함께 소통하며 꿈을 향하여 - 여러분 반갑습니다. 만나서 행복합니다. 저는 오늘 참으로 무거운 심정으로 여러분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1998년부터 생연4동에서 2년간 근무했습니다. 당시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이 저에게 넥타이를 선물하였으며 지금도 자주 매고 있습니다. 우리시를 떠나 다른 기관에서 공무원을 하면서 이 넥타이를 매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 타이는 동두천시를 더더욱 가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촉매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러 개의 넥타이를 걸어 놓고 번갈아 선택하겠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는 날이면 이 ‘동두천표’ 타이를 매곤 했습니다. 이후 13년의 시간이 흘렀고 타이의 가장자리에 실밥이 보이고 몸통 윤기가 처음보다 다소 약해졌지만 이 타이가 저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강해져만 갔습니다. 그런 마음의 끈이 오늘 여러분을 뵙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공직자 여러분! 공직생활은 봉사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늘 주변의 선후배와 시민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변의 후배나 선배를 도와드린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공직자 여러분의 도움을 또 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제 공직생활 전체를 통해 제가 받은 도움 이상의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