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독수리의 평균수명은 40년인데 38세경에 큰 결심을 하고 혁신에 나서면 새로운 30년을 살지만 혁신이 두럽고 무서워서 포기하면 그렇게 40세의 생을 마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혁신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과정이라 합니다. 38세 독수리는 불필요한 장식용 깃털이 늘어서 무거워졌고 부리와 발톱의 파괴력도 떨어졌습니다. 이것으로는 이 험난한 세상을 타개하지 못할 것이므로 추운 겨울날에 설산 암벽에 올라가 스스로 킷털을 뽑아냅니다. 다시 부리를 쪼아서 빼버리고 마지막으로 발톱을 바위에 긁어서 뽑아냅니다. 이런 상태로 30일간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내면 깃털이 나고 발톱과 부리가 새롭게 나서 가볍고 빠른 독수리로 재탄생합니다. 가벼운 깃털과 빠른 날개,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의 힘을 이용하여 사냥에 나서고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세월은 또다른 30년이 됩니다. 이렇게 혁신을 이룩한 독수리는 70년을 살고 현실에 매인 경우에는 40년으로 마감하는 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혹시 익숙한 것과 편안한 것으로 인해 변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은 아닌가 늘 반성할 일입니다. 글을
2살때 정글에서 체포되어 서크스단에 끌려온 코끼리가 곡예를 배우고 8년이 되는 10살때에 단장님은 코끼리를 옭아매고 있던 쇠사슬을 풀어내고 부드러운 천연 새끼줄로 묶어 둡니다. 8년간 속박되어 살아왔고 여러가지 곡예를 배우면서 단장과 친해진 코끼리는 연약한 줄을 끊어내지 않습니다. 2살, 3살 어릴 때에는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쇠사슬을 풀기 위해 매일매일 몸부림쳤습니다만 세월이 흐르고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8년간 자신을 묶었던 쇠사슬이 풀렸지만 그 범위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길들여지고 그 선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는 모험심도 있었고 마음껏 달리던 정글이 그리웠지만 긴 세월동안 서크스단에 길들여진 코끼리는 고향마을도 망각했고 지금의 현실이 편안하고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직이나 직장에 길들여지는 것은 짧은 기간으로도 가능하겠습니다. 가끔 공직 42년을 자랑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도 혁신이나 변화에 대한 열망이 없었나 되돌아보게 됩니다. 공무원을 하면서도 여러가지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변명처럼 여러가지 이유를 댈 수 있지만 그 사연보다 더 많은 혁신의 기회를
동료·후배는 계단까지, 10년이내 선배는 현관, 10년 이상 연장 어르신은 차량까지 안내한다는 기본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권고하고 싶은 좌우명입니다. 감성이 풍부한 혈액형 A형인 경우에는 반드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어르신을 뵙고 말씀 나누고 나가시는데 다음번 오신 분이 아주 급한 이야기라 하시므로 그냥 사무실로 되들어갔습니다. 그렇게 급한 일이 아닌데도 자신은 급하다 하시니 판단의 기준은 없겠습니다만, 조금전 앞에서 말씀 나누고 나가신 분에게는 많이 송구했습니다. 그 송구한 마음이 일주일 이상 가슴을 아리게 했습니다. 이후부터 손님을 맞이하는 일보다 배웅하는 자세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30분 이상 대화를 나눴다 해도, 원하시는 바를 어느 정도 채워드렸다 하여도 가실 때 배웅이 정중하지 않다면 실패한 만남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누군가를 만나서 대화를 하면 그리하고자 하며, 차를 태워다 드려도 가급적 차에서 내려 인사드리고 있습니다. 복잡한 도로변에서 짧은 시간에 내려드리고 바로 떠나야 하는 경우에는 차안에서 상황을 말씀드리고 인사하고, 내리신 후에는 창문을 열고 다시한번 인사를 드립니다. 인사를 여러 번 했다고 구박을
보안관, 군인, 강도 모두가 허리에 권총을 차는데 의사봉은 담당자가 준비하고 위원장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위원장이 직접 의사봉을 챙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자 합니다. 핸드폰과 지갑은 반드시 챙기면서 의사봉은 실무 주무관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의사봉을 들고 다니면서 회의를 진행하고 위원회를 마친 후에는 의사봉을 챙겨와 사무실에 보관했습니다. 의사봉 손잡이에 끈을 매서 출입문의 눈높이에 걸어 두었습니다. 회의를 위해 나갈 때 한 번 더 확인하고 외부 출장시에도 의사봉을 지니고 다니는 자세로 모든 업무에 적극성을 보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위원회 참석을 위해 의사봉을 들고 10분전에 입장하면 먼저 참석하신 외부위원들이 살짝 미소짓습니다.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뽑듯이 의사봉을 꺼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짝 의사봉 3타를 연습한 후에 옆자리에 둡니다. 이것은 작은 소통입니다. 우선 외부위원의 입장에서 보면 10분전에 도착한 위원장이 자신들을 대우한다는 느낌을 받을 것으로 봅니다. 대부분의 위원장(부시장)들은 정시에 뚜벅뚜벅 걸어와서 인사하고 악수하고 회의를 시작합니다. 회의가 끝나면 제일 먼저 퇴장합니다. 오늘 위원회에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청내행사 10분전, 관내행사 20분전을 기본으로 지켰습니다. 행사장에 미리가면 더 많은 시민과 관계자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행사시각에 임박해서 도착하면 의전적이고 경직된 분들만 만나게 됩니다. 도무지 소통되지 않는 분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장님, 도지사님께도 각종 행사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조금 일찍 가셔서 공식적인 행사 이전에 도민, 시민, 주민, 관계자들을 만나서 인사를 나눌 것을 권합니다. 지방자치법에서 도지사, 시장군수는 3번 당선될 수 있고 4년을 쉬면 다시 출마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관단체장 당선일은 곧바로 선거 시작이다 생각하셔야 합니다. 4년하고 그만둘 것이면 그 어려운 선거과정을 왜 진행하였습니까. 12년 열심히 하고 영광스럽게 퇴임식을 한 후 4년을 기다려 체력과 의기가 허락되면 4선에 도전하셔도 좋습니다. 주민, 유권자, 선거구민이 원하는 것은 공사현장일 수도 있지만 선거에 뽑힌 단체장을 만나고 그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악수하고 눈을 맞추는 것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뽑은 단체장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도로를 개설하고 포장을 하고 테이프를 끊어대는 행사가
서울역~용산역 구간 기차안에서 홍익회 회원들이 계란을 팔고 있습니다. 삶은 계란, 삶은 계란! 승객중에는 인생에 회의를 느껴서 기차여행을 통해 사색에 잠겨보고자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홍익회원의 "삶은 계란"이라는 외침을 듣고 '인생을 계란처럼 둥글게 살기로' 마음먹고 수원역에서 하차해 정착했다고 합니다. 조선 정조시대에 수원 팔달산 주변에 유명한 학자가 살았다고 합니다. 정조는 사람을 보내서 이분을 모셔오라 했습니다. 높은 벼슬을 주어서 조선을 잘 통치하기 위한 인재영입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학자는 왕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화공을 보내서 이분 학자가 살고 있는 곳의 그림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요즘이면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카카오톡으로 보내면 될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IT는 없었고 사람이 오가고 봉화 불 4개에서 뿜어대는 연기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습니다. 화공이 그려온 그림을 본 정조는 이 지역은 참으로 四通八達(사통팔달)하니 살기 좋은 곳이고 그래서 이분 학자가 입궐을 하지 않으시는구나 하면서 더 이상 초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불러만 주시면 달려가는데 조선시대 학자들은 剛斷(강단)이 있었나 봅니다. 저 역시도
[덕혜옹주를 기억하며] 물 두 병을 등짐에 지고 가 편지와 함께 두고 출근하였습니다. 덕혜옹주님 묘역을 문화재청이 개방하였습니다. 영화 덕혜옹주 관객이 500만을 넘어서면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므로 비공개였던 덕혜옹주님 묘를 공개해 주심으로써 울타리 너머로 스마트폰을 넣어 사진을 찍던 안타까움을 해소하고 편안하게 묘역을 둘러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016년 9월13일, 추석연휴 전날의 쾌거입니다. 그래서 10,000원짜리 국화분 하나를 사들고 가서 묘소에 드리고 절을 올렸습니다. 이 국화향기가 더 넓게 퍼지고 국민들께 전해서져 아픈 역사가 보람찬 역사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보았습니다. 더러는 덕혜옹주님, 영친왕에 대해 비판을 하십니다만 易地思之(역지사지) 생각해 보면 무조건 잘못이라 할 수 만은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일본에 의해 왜곡된 기록, 잘못된 이야기만 듣고 영화의 내용에 비판을 가하는 것도 옳은 판단은 아닌 줄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나온 이야기가 실제로 발생하였을 수도 있는데 일본이 기록을 삭제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보는 것입니다. 지난주 화요일에 올린 국화는 봉우리 수준이었는데 일주일만에 먼발치로 바라보니 만개하였습니다. 분홍빛 꽃송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다산의 하피첩은 2010년10월에 보물 1683-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하피첩은 다산이 강진의 다산초당에 유배되어 18년을 보내면서 아들과 딸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입니다. 유배가서 고생을 하는 남편을 걱정하는 마음에 아내는 시집 올때 입고 온 치마를 곱게 접어 인편에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아내의 남편사랑을 받아든 다산은 이를 가위로 잘라서 종이에 붙이고 여러가지 필체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남양주 조안에 살았던 아들과 딸은 글씨와 그림을 잘 보존했고 8대에 걸쳐서 이어왔습니다. 순조롭게 보전되어 이어온 하피첩은 을축 대홍수(1925)에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종손은 한강물이 집안으로 차오르자 다락방에 보존된 하피첩 뭉치를 목숨을 걸고 건져냈습니다. [인터넷 자료] 남양주 8경 중 1경인 정약용 유적지 입구 다산문화의 거리에는 수원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가 전시되어 있고 선생이 집필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이 동판에 새겨져 있으며, 유적지 한쪽 드넓은 마당 한편에는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與猶堂)’이 있다. 본래 생가는 1925년 을축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했을 때 유실되었다가 1986년 전통 한옥 구조로 복원했다. 생가 뒤편
[회의실 출구] 오산시청에서의 일입니다. 회의실에 라운드테이블이 설치되었고 마이크선과 전선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회의 테이블이 사각을 막고 있으니 가운데로 들어가는 경우에는 테이블을 타넘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로 들어가야 하는 경우는 행사 진행중 촬영기자와 공보실 사진담당자, 그리고 회계과의 청소 용역하시는 분들입니다. 공보실 사진담당은 남성이니 쉽게 넘어갑니다만 여성 카메라 기자들은 난처합니다. 그래서 몸을 기울여서 사진촬영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회계과 주무관과 함께 테이블 하나를 빼고 통로를 만들자 했습니다. 자리가 부족하다면 미국 보안관 영화에 나오는 술집 테이블처럼 들고 판을 들어가서 다시 내리는 방식으로 만들자 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작업을 해서 개선을 하고나니 회계과 소속의 여사님들이 크게 환영하십니다. 전에는 무거운 청소기를 들어올려서 작업을 하고 화분을 들이고 내는데 어려움이 컸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개선에 감사인사3를 하십니다. 공무원들도 내 소관이 아니고 어쩌다 한 번이니 불편해도 감수하자입니다. 사진을 찍어서 훗날에도 교육자료로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회의실 화면] 그 회의실에서 공무원 간부회의를
▩ 장자강의 = 김해영 박사 ▩ 장자강의 등 중국철학, 한국철학의 명저를 쓰신 김해영 박사님의 수요일 저녁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어느 날 수업중에 학생들이 발표하는 시간을 갖겠다 하십니다. 강의는 열심히 들으시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발표하라하면 손을 드는 학생이 없다하십니다. 적극행정 강사로서 기어이 손을 들었습니다. 할 말을 요약한 종이 한 장을 파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 내용을 어찌 정리할 것인가를 여기에 미리 글로 작성해 보고자 합니다. 제목 : 삶의 습관 / [2022년 9월 14일(수) 19:00~19:40] 김해영 박사님의 장자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수원시 태장마루도서관 지하 1층 강의실에서 10여명의 학동들이 만나고 있습니다. 강의에 참여하기 이전부터도 김 박사님이 학동들에게 개인의 생각을 강의를 통해 이야기해달라 주문을 해 왔던 바인데 대부분 나서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강의 1시간을 받아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저(이강석)는 농촌 마을에 태어났습니다. 농촌마을의 막다른 길가에서 성장했습니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까지의 기간중에 고압철탑이 건립되었고 1975년에 면 전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