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산마을에서 기다림 하늘 공주가 진주를 잃었다 장수가 지상에 내려와 공주의 진주를 찿으려 이리파고 저리 파고 손자국은 산줄기가 되고 발자국은 호수가 되었다 그 중 엄지 손가락이 만든 마을 걸산동은 태초에 더 높은 산이었다 지금은 산이다 둥굴게 감싼 산자락에 자리한 집집집 한눈에 보이는 집은 다섯채 사는 이 보이지 않지만 주민등록 들여다보니 124명 면적설명에 비교되는 여의도의 3배반 크기라는데 여의도 사람수 34만명 오늘 우리는 걸산동 새아기 탄생을 기다리고 타이탄 짐 싣고 귀농하는 청년을 보고싶다 하늘나라 공주의 귀환을 기다린다 1박2일 4가족의 자연친화 걸산체험을 권고한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조선시대 임금 중 효성을 상징하는 분은 정조대왕이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며 임금에 오르지 못한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아들이다. 장헌세자와 정조의 능은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있다. 왼쪽의 융릉은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와 동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고, 오른쪽의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동비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장헌세자의 능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당시에는 양주의 매봉산)에 있었으며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정조 13년(1789년)의 일이다. 그 후 한해에 수차례씩 아버지의 능참길에 올랐던 정조는 때때로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비 오는 날에는 ‘아버지가 얼마나 추우실까’라는 생각에 사람을 시켜 무덤에 가보게 했더니 전날 밤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능참봉이 능 앞에 엎드려 있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능참봉이 스님을 만났는데 ‘오늘 살아남으려면 능앞에서 부복하여 일어나지 마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조가 부친의 묘소를 옮긴 후 능 주변의 소나무에 송충이가 번식, 솔잎을 갉아 먹는 것을 보고 진노해 송충이를 잡아 입에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고 꾸짖고
옛날에 의좋은 형제가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하나씩 주웠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 형은 주머니에서 조금전 길에서 얻은 금덩이를 꺼내어 강물에 던졌다. 깜짝 놀란 동생이 그 이유를 묻자 형은 ‘아무래도 네가 주은 금덩이가 큰 것 같아서 형제간 의가 상할까 걱정이 되어 강물에 버렸다’고 대답했다. 금덩이보다 형제의 우의를 중요하게 생각한 동생도 금덩이를 강물에 버렸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옛날이야기다.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정말로 금덩리를 버리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초등학교 교과서에 올라간 것은 아닐 것이다. 형제간의 의리는 황금과도 바꿀 수 없고 세상의 무엇보다도 존귀함을 강조하고자 함일 것이다. 경제개발을 위한 목표에는 인식을 함께 하면서도 수도권과 비수도권간의 견해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경기도는 도내 인프라를 활용한 경제 활성화 정책을 강조하는 반면 비수도권 지역에서는 수도권 규제를 통한 비수도권의 균형발전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경기도와 수도권을 규제한 결과 투자를 희망하는 기업은 외국으로 가고 있다. 규제를 피해 강원, 충청과 경기도 경계지역에 입지하고 있다다. 의좋은 형제가 금덩이 크기가 다르다고 해서 강물에 버릴
[2002] 인터넷이 다운되면 = 우리는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터넷과 인공위성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종군기자의 용기를 바탕으로 전쟁상황을 TV와 인터넷을 통해 아주 빠른 시간안에 볼 수도 있다. 1492년 10월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룩이 발견되었는데 이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언제쯤일까? 19세기 중엽부터 한반도 연안에 서양 열강의 배가 출몰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사람들은 이 배를 모양이 이상하다 하여 ‘異樣船(이양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넉넉히 계산해서 1850년께 외국 문물이 타의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졌다고 보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사실이 한반도에 전달되기까지에는 350년 정도 걸린 셈이다. 동서양간 역사적 사건이 전달되는 만큼은 아니지만 전화가 일반화되기 전까지 시골에서 喪(상)을 당하면 청년들은 가장 먼저 초등학교 등사실에서 철필로 訃告(부고)를 써서 등사한 다음 얇고 노란 봉투에 넣어 근동에 돌리고 다니는 일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요즘에는 전화 한통화로 상세히 알리고 여러 가지 의논까지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가까운 동네도 한나절은 걸려야 부음을 전달 할
嚆矢(효시) =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는 박에스더(본명 김점동)이고 최초의 약사는 차순석으로 1924년 조선 약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최초의 여배우는 박월화이며 출연영화는 ‘월하의 맹서’인데 그 내용은 저축을 권장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첫 비행사는 안창남이고 첫 여성 비행사는 권기옥이며 최초의 아나운서는 이옥경, 최초의 치과의사는 함태석이고 공식적인 골프장은 효창공원의 효창원에 건립된 6홀 코스로 1921년 6월에 개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초로 개국한 라디오방송국은 1926년 2월 16일 첫 전파를 발송한 경성방송국이며 개국 당시 라디오는 275대였다고 한다. 우리는 최초라는 것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있지만 어느 것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효시라는 것이 반드시 대단한 것만은 아니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어린시절에 보았던 만화주인공으로 나오는 로봇은 첫 번째 목소리의 주인공을 주인으로 모시게 되어 있었다. 그 목소리가 로봇으로서는 처음 듣는 인간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여하튼 최초를 이룩한 사람들은 인류에게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과학과 문명이 발전하면서 새롭게 효시를 만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이동전화기를 처음
인터넷 뉴스를 보니 전보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전보는 1885년에 서울과 인천사이에 전신시설이 최초로 개통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제전보는 2018년에 종료되었고 이제 2023년말에는 국내전보가 마무리된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참으로 긴세월을 버틴 바이기는 하지만 전화기 보급이 활성화되고 개인전화, 핸드폰, 스마트폰이 초등생에게까지 보급되는 전화 전성기에도 잘 버텨온 바인데 드디어 선진국의 추세에 따라 우리도 폐지수순에 들어간 것입니다. 미국은 2007년에 전보가 중단되었고 독일은 2023년 1월에 전보를 중단하였다고 합니다. 전보는 우체국에서 보내면 받는이의 우체국에서 수신하여 타자를 치거나 글로 적어서 주소지로 자전거를 타고가서 전하는 첨단과 전통이 융합되는 통신수단입니다. 그래서 전보는 조부모가 별세하신 경우 도시에 사는 손자들에게 부음수단으로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한글자마다 전보요금을 계산하므로 단문으로 적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사이버공간에서 단문을 많이 쓰는 이유는 손가락 타자를 최소화하기위한 전략인 것에 비해 당시에는 요금을 아끼기위한 노력이었으니 단문의 의미에는 나름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보는 짧은 글로 요약해서 한자
[소쩍새, 접동새와 쪽빡바꿔주새] 우리 조상들은 소쩍새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해 농사의 풍작과 흉작을 점쳤다고 한다. 봄철에 '소쩍당 소쩍당'하고 우는 소리는 '솥이 적으니 더 큰 솥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알고 우리 조상들은 그해의 풍작을 기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새가 '소탱 소탱'으로 울면 '솥이 텅텅 비었다'는 의미로 그해 농사는 솥이 텅텅 빌 정도로 농사가 안 되어 흉년이 될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서쪽새는 두견새로도 불리는데 나라를 빼았기고 쫓겨나와 그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던 촉나라의 망제(望帝)라는 임금이 죽어서 두견이라는 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를 부르짖어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조(怨鳥)라고도 하고 두우(杜宇)라고도 하며, 귀촉도(歸蜀途) 혹은 망제혼(望帝魂)이라 하여 망제의 죽은 넋이 화해서 된 것이라고 하였다. 또 두견새는 귀촉도라고 하기도 하고 소쩍새라고도 하는데, 거기에는 '솥이 적다'에서 유래된 가난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접동새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옛날 어느 곳에 10남매가 부모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의붓어미가 들어왔는데, 의붓어미는 아이들을 심하게 구박하였다.
MBC 인기 프로그램 “느낌표”[!!!]에서 추천한 도서중 ‘아홉살 인생’은 어린시절의 기억과 추억을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한동안 손 았던 나의 독서열기를 지피우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바쁜 일상으로 인해 잠시 잊었던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향기, 추억, 동네 어귀의 소나무를 다시 생각하고 지금쯤 얼마나 자랐을까 가늠해 보는 여유까지 가져다 주었다. 장년이 된 사람들 누구에게나 있었던 ‘아홉살 인생’은 세상 사람들의 얼굴모양보다도 더 복잡다양할 것인데 작가 위기철 선생만이 이 책을 썻다는 것이 신비롭고 책갈피마다 흐르는 어린시절에 대한 맛깔스런 표현이 부럽다. 그리고 강원도길 산마을처럼 간간이 나타났다 지나가는 연필로 그린 듯한 삽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감동시킨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사는 이들은 유년시절 기억을 많이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동차는 빠른 이동수단이지만 우리의 마음까지 바쁘게 만들었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우체국은 정성드려 쓴 편지 대신 광고지나 은행카드 청구서를 나르는 기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어머님 전상서...’로 시작하여 ‘조석으로는 제법 쌀쌀한 날씨에...’로 이어지던 안부편지를 쓰는 이가 요즘에는 얼마나 있
우리나라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줌마가 있다는 말이 있다. 아줌마는 아주머니의 준말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주머니는 ‘부모와 같은 行列(항렬)인 여자, 한 항렬되는 남자의 아내, 부인네를 높이어 정답게 부르는 말로 설명된다. 그리고 비슷한 말로 ’아주버니‘가 있는데 이는 남편과 같은 항렬이 되는 남자, 또는 시숙(媤淑= 남편의 형제)을 말 한다. 그런데 아줌마라는 용어는 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도 실제 우리 사회에서는 자주 사용되고 있다. 흔히들 아줌마 부대라고도 하고, 식당에서 음식을 추가로 주문하려면 ‘아줌마!’를 연호하게 된다. 그리고 일행중 옆 좌석의 손님은 ‘아가씨!’라고 불러야 빨리오고 좋은 반찬을 내준다며 조언을 하기도 한다. 또, 우리나라 TV광고에 보면 아줌마는 강하다는 인상을 주는 면이 있다. 이미 출발한 통학버스를 추월하여 아들에게 물건을 건네주는 아줌마의 무릎이 튼튼한 연유를 광고하고 있다. 유머 속의 아줌마는 조금 안타깝다. 하이힐 신고도 뛸 수 있으면 아가씨, 운동화를 신고도 못 뛰면 아줌마란다. 미장원에서 파마할 때 예쁘게 해달라면 아가씨요, 오래가게 해달라면 아줌마라는 것이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손님이 내려 자리가 비었을 때
(2002년) 가장 짧고 쉽게 지나간다는 가을을 맞이했다. 명심보감에서 ‘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少年易老學難成), 한순간이라도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노력하라.(一寸光陰不可輕)!’는 말이 있다.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라는 말도 있다. 하루가 3년 같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짧은 시간이 지났는데 매우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진다는 뜻이다. 주로 뭔가를 애타게 기다릴 때 쓰이는 말인데,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루를 천 년처럼 기다렸습니다’고 하는 일일천추(一日千秋)로도 많이 쓰인다. 여기서 추(秋)는 한 해를 나타내는 연(年)과 동의어다. 그러나 요즘 날씨를 일러 정말로 ‘짧은 가을‘을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가을인가 했더니 갑자기 영하권 가까이 기온이 내려가는 이상기온 현상을 보인다. 혹자는 앞으로 가면 갈수록 봄과 가을이 짧아질 것 같다는 예단을 한다. 방송에서 들었는데 가을이 짧은 것은 많은 이들이 가을을 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했다. 정말로 올가을은 짧게 지나가려나 보다. 그런데 공무원에게 있어서 가을은 어쩌면 느낄 수조차 없는 시기이다.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벌써 올해를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