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붓으로 기안하고 펜으로 결재하던 시절의 문서를 보면 “수제지건에 대하여”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首題之件(수제지건)이 맞는가 모르겠지만 늘상 공문서를 시작할 때 수제저건이라 쓰고 이를 결재하여 달라는 뜻으로 통용된 말이었단다. 법원이나 검찰의 용어가 어려워 여러 차례 개선을 도모한 일이 있다. 경찰관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일반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많이 고쳤다. 그래서 행정이나 검경을 통털어 어려운 말들은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지만 많이 개선되어 편안해진 편이다. 70년대 용어 중 제일 먼저 접한 것이 ‘庶政刷新(서정쇄신)’이다. 서민을 위한 행정의 쇄신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서민들은 이 용어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서정쇄신은 나쁜 공무원 잡아가고 목 자르는 일쯤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서정쇄신으로 퇴직한 공무원도 많지만 이로해서 벼락 승진한 공무원도 많고 지금쯤 3급에 이른 간부들은 아마도 이때의 공직 숙청 속에서 살아남고 오늘의 영광을 이룩하였다 할 것이다. 다음에는 계절별 사자성어를 열거해 보고자 한다. 늦겨울에 진행되는 토입답압(土入踏壓)은 무엇일까? 논보리, 밭보리는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은 나야 씨앗을 맺는데
면서기는 툇마루에서 찬밥을 주고 농협서기는 안방에서 씨암탉 대접한다. 70년대 시골동네의 풍경중 하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면서기는 늘 規制(규제)와 지시를 하는 공무원이고 농협서기는 貸出(대출)과 비료, 농약을 공급하는 좋은 기관이다. 사실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하나의 面 동네에는 아주 많은 기관이 있다. 면사무소를 비롯해 순경들이 근무하는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다 예비군 중대장도 높은 기관의 하나다. 이들 기관 중 가장 주민들과 밀접한 기관은 면사무소와 농협이었고 결국 농협 직원들은 좋은 공무원으로 (농협은 공무원이 아니지만 서기라는 직함이 있음) 평가되고 공무원인 면서기는 귀찮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한번은 22세 공무원이 추곡수매 담당을 하면서 수매현장에 혼자 출장을 나갔고 농협에서는 영농부장, 수매담당, 출납담당등 5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다. 주민이 50대 나이의 농협 영농부장에게 물었다. 다음번 수매에는 현금을 주나? 영농부장은 저 사람, 면직원에게 물어보라 했다. 주민은 “저 어린 직원이 뭘 알겠어!” 하면서 영농부장의 답변을 요구하였다. 결국 면직원은 영농부장에게 다음번 수매일정과 방법 등을 설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도청과 시군청에는 거리가 멀거나 업무상 필요에 의해 출장소를 두고 있고 일부의 경우에는 면사무소의 출장소를 두어 주민편익을 도모하고 있다. 한 번은 의정부 소재 3급 경기도북부출장소장이 파주군 관내 면사무소의 출장소를 들렀다. 오지이기도 하지만 지나는 길에 3급 소장이 들른 출장소 소장은 7급이었다. 소장을 수행한 5급 사무관이 출장소에 3급 소장을 모시고 들어갔지만 7급 소장은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도 없고 삐삐조차 없던 시절이라 이리저리 연락을 해서 7급 소장이 어슬렁거리며 사무실에 돌아왔다. “이분은 경기도북부출장소장이십니다.” 사무관이 소개하자 7급 소장이 응수했다. “아 예, 그러십니까. 자 앉읍시다.” 7급 소장은 3급 소장이 비슷한 소장이므로 같은 급으로 생각하고 자리를 권하며 앉기를 권했다. 그 이후 상황이나 결말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7급소장에게 3급 소장을 소개한 국비사무관도 도청과장이니 2000년대로 요즘으로 치면 서기관 4급이니 파주시청의 국장과 같은 급이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우리나라 행정기관의 접대는 하부기관의 간부가 결정하고 지역의 유명 식당이나 관광지를 안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1년에 2번 정도 내려오는 내무부 평가나 점검관은 미리 점검표를 보내오고 빈칸을 연필로 써주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본은 좀 다르다고 한다. 상급기관의 담당자가 하급기관에 점검을 위해 출장을 가는 경우 반드시 술 한 병을 준비한다고 한다. 일본 공무원은 자신이 업무를 수행할 기관에 가서 부기관장이나 간부를 만나 인사를 하고 미리 준비한 술 한병을 내어놓고 실무자를 소개받고 실무자와 일을 마치면 되 돌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 식사 대접하여야 할 경우에는 그 기관의 실무자가 대접 여부를 결정하고 내부 보고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상급기관의 출장자가 가져온 술병에는 모월모일에 중앙의 모 공무원이 가져온 술이라고 적고 이를 술저장 캐비넷에 보관한다고 한다. 이렇게 모여든 술은 연말 회식이나 부서 식사가 있을때 필요한 만큼 꺼내어 마시는데, 이때 술병을 가져온 이들의 이름과 날짜, 출장수행 업무내용, 성품 등을 회상하면서 마신다고 한다. 이때 출장온 이의 이미지가 좋은 이의 술은 기분 좋아 빨리 마시고 악질적인 인물이었다면 또한 그래
요즘에는 과거 서무담당자가 발품을 팔아야 할 일들을 인터넷이 대신해 준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팩스가 서무담당 업무를 도와주었다. 우선 팩스를 청사 내 다른 부서에 보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통신요금이 늘 부족했던 터라 외부에 전화를 하려면 주무계장의 사전 결재를 받아야 했던 터라 청내 팩스를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나 보다. 실제로 행정 전화기 중에 일반전화가 되는 것은 실과에 1대씩 지정되어 있었고 이 전화기 다이얼은 작은 자물통으로 채워서 통제를 받았다. 1980년대. 계원 9명이 근무하는 부서에 행정전화는 2대뿐이다. 실제 전화기는 6대가 있지만 전화선은 2개다. 3대의 전화기를 연결하여 사용했다. 그래서 전화를 받아 다른 직원에게 넘겨주려면 “계장님! 2번입니다”라고 말하고 계장님이 송수화기를 들을 때까지 기다려 조용히 끊어야 한다. 요즘 행정전화는 넘겨주기 버튼을 누루고 전화를 끊어야 상대편이 통화를 할 수 있다. 행정전화 1인 1대 시대는 1공무원 1PC와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것 같다. 하지만 통화량이 늘은 것인지 행정전화도 바쁘다. 더구나 공무원 모두가 개인 전화기인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데도 사무실
행정전화선이 부족하여 4개 면사무소를 행정전화선 1개에 연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행정전화 벨이 2번 울리면 甲면, 3번 울리면 乙면, 4번 울리면 丙면, 5번 울리면 戊면이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마구 울어대면 4개면 모두가 전화를 받아야 했다. 군청 담당자가 전언통신문을 보내려면 양손에 2개씩 4개의 전화기를 들고 내용을 불렀다. 16개 읍면을 동시에 연결해 알리는 것이다. 참! 傳言通信文(전언통신문)이란 긴급한 문서를 전화로 알려주고 송신자와 수신자를 적어 확인해 두는 일이었다. 해서 전언통신문을 부르다 보면 빠르게 적는 이가 있고 筆記(필기)가 느린 이도 있게 마련인데 하도 답답하여 먼저 적은 이가 잘못 듣고 헤매는 이를 위해 거들다가 군청직원에게 ‘어떤 oo이야. 조용히 해!’하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면사무소 일반전화는 자석식으로 우체국 교환을 통해 연결되었다. 서울에 전화하려면 전화기의 손잡이를 돌린 후 수화기를 들면 교환수가이 나오고 서울 번호를 대고 잠시 기다리면 연결해 주었다. 전화주문이 밀리면 20분 이상을 기다리기도 했다. 요즘의 전화는 많이 달라졌다. 우선 행정전화가 1대씩 공무원 개인에게 주어지고 이 전화기로 행정전화는 물론 일반
지금(2000년) 40대 후반 공무원이면 대부분 서무담당을 했다. 모든 조직에는 서무담당이 있게 마련인데, 그래서 계서무, 과서무, 국서무가 있었고 지금 총무과의 전신은 서무과였고 서무계가 있었다. 서무계속에서 서무담당이 있었을 것이다. 서무(庶務)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특정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반적인 사무, 또는 그런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다. 실제로 서무담당을 하다보면 그 업무의 한계가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했다. 그래서 서무 담당자들 끼리 모이면 우리는 서무용 운동화 값을 1년에 2번 정도 받아야 한다는 농담이 오갔다. 우선 청내 방송이 나오기 전에 “딩동댕”하는 차임벨이 울리고 이어서 울려 나오는 말은 “총무과에서 알려드립니다. 각실·과 서무담당자는 지금 곧 숙직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나오는 “지금 곧”이라는 말이 가슴 저리게 들렸다. 총무과 호출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또다시 들리는 방송은 “기획담당관실에서 알려드립니다. 각·실과 주무계 차석은 지금곧 기획담당관실 확인평가계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청내방송은 모든 사무실에 동시에 울리는 것일터인데 기획관실에서는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는 몰라도 주무계 차석을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사 올 당시 공무원들도 이삿짐을 꾸려 수원으로 내려왔다. 우선 간부급 공무원들은 수원시내 허허벌판이었던 지금의 고등동에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그리고 젊은 직원들의 이사터는 최근에 새로 전철역이 생겨난 수원비행장 주변의 작은 평수의 양옥집이었다. 이곳으로 신혼 살림살이를 옮겼다. 수원비행장 주변으로 이사온 젊은 직원들은 그후 근무지가 바뀌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는지 이분들의 삶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등동으로 이사 온 간부들은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거주했다. 우선은 도청과 가깝고 시간과 세월이 흐를수록 땅값도 오르고 따라서 집값도 뛰었으며 주변에 커다란 상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슷한 연령과 계급의 도청 간부들이 고등동에 장기 거주하게 되면서 사모님들 간에는 선의의 경쟁도 있었다. 남편의 도청 계급이 중요해졌던 것이다. 도청이나 시군청에도 녹지회니 해서 간부공무원 부인들 모임이 있는데 그 서열이 남편을 따라가는 것으로 인해 불협화음이 있다고 해서 최근에는 모임이 거의 없애버렸다고 한다. 여하튼 고등동 사모님들은 남편의 출세에 늘 신경을 쓰게 되었고 요직으로 옮긴 남편의 보직을 정확히는 모
옹진군청은 인천광역시에 있다. 옹진군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군청이 입주할 말한 큰 섬이 없어 지금도 군청이 인천에 있는 것 같다. 사실 양주군청이 의정부에 있었던 것과도 같은 연유일 것이다. 군청이 일을 하려면 공무원만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단체도 있고 설계사무소도 있고 건설회사, 작지만 문방구도 있어야 하니 섬마을에 군청이 이전한다면 효율적인 일처리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적극적으로 열심히 일하던 군수가 군 개청이라 처음으로 옹진군 관내 작은 섬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배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섬마을에서 군수를 맞이한 것은 섬마을 주민에 앞선 해군 수병이었다. 배를 내려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던 수병은 군수에게도 신문을 물었고 군수는 공무원이라고 답했다. 수행비서는 멀 리가 심해서 배안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수병은 공무원증을 보자고 했고 군수는 순순히 증을 보여주었다. 수병은 공무원증을 보다가 혼잣말을 했다. ‘칫, 서기면 서기지 시기관은 뭐야!’ 이 수병이 근무하는 동안 섬마을을 방문한 가장 고위직 공무원이었으니 젊은 수병이 늘 만나던 공무원은 서기나 서기보이고 서기관은 처음 접했다는 이야기다. 보
요즘은 공무원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과거에는 현재보다 개인의 능력과 판단이 행정에 던지는 긍정적 파급효과가 컷던 것 같다. 90년대 공무원은 대부분 대졸자이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력이 장년층 공무원보다 젊은 층에서 강하게 나타나므로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특히 인터넷, 이메일, 그리고 IT를 통한 정보의 전달력은 과거 문서와 입을 통해 전달되던 정보 흐름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쉽게 말해 70년대에는 모든 정보는 32절 쪽지 몇장과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모두였고 별도의 정보흐름의 시냇물이 없었다. 당시에는 ‘쪽찌보고’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의 복사지 A4보다 작은 16절지를 반으로 잘른 종이에 타자를 쳐서 8장 복사를 한 것을 총무과에서 취합(종합)하여 도지사, 부지사, 기획관리실장,(경투실장 없었음), 내무국장(자치행정국장) 등에게만 제한적으로 전달되었다. 요즘 여의도에서 돌다가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는다는 정보지(찌라시)만큼이나 궁금한 내용들이 들어있었고 많은 간부 공무원들이 이것을 보고 싶어 했다. 다시 말해 간부들은 수준 높은 정보를 독점하면서 조직내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이고 이 같은 제한적 정보의 흐름 속에서는 몇 가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