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채우기보다
꺼내 베풀어야 할 때에야
옆구리 터져 너덜너덜한 지갑
푼돈 몇 푼으로 견딘 허기진 세월
불평불만 한 번 뱉지 않고
묵묵히 동거해온 지가 어언 20여 년
아비는 지갑의 신하가 되지 못하고
아비는 지갑을 잘 모시지 못하고
아비는 그래서 가난한지
지갑을 선물 받을 때
배부른 지갑이 되어달라는 뜻이었겠지만
정작 너를 위해서는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지갑
인제 그만 버릴까 말까 하다가도
딸내미 얼굴이 어른거려서
한참을 만져본다
나석중 시인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작품 활동, 『저녁이 슬그머니』 『목마른 돌』 『외로움에게 미안하다』, 『풀꽃독경』 『물의 혀』 『촉감』 『나는 그대를 쓰네』 『숨소리』, 미니시집(전자): 『추자도 연가』, 디카시집(전자): 『라떼』 『그리움의 거리』, 시집 『저녁이 슬그머니』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2021년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
-시작메모-
이 시를 읽는 순간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내면의 세계를 곱씹어 보면 온 몸이 후끈거리며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화자는 나이가 지긋한 시인이다. 그야말로 한 푼이라도 모으며 안달 떠는 젊은 시절보다는 이제는 물심양면으로 베풀며 살아가는 황금빛으로 물든 인생인 것이다. 하지만 푼돈 몇 푼으로 견디며 살아 온 그는 넉넉하지 않은 삶속에서도 부의 가치를 축적하기 위해 욕심을 내지 않았으며, 세상에 대하여 원망 또한 하지 않은 성실한 주인공이다. 딸에게 지갑을 선물 받았을 때 화자는 그 빈 지갑을 채우려 하지도 않았다. 지갑은 곧 돈과 연결 되는 상징성이 있지만 결국 돈과의 인연이 없었는지 자식들을 위해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지갑이 되었다. 너무 낡아 이제는 버릴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선물로 준 딸과 아버지로서 넉넉히 못해 준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낡은 지갑을 다시 가슴에 품어 본다. 참으로 애틋한 시다.
(시인/한국경기시인협회이사 정겸)
정겸 시인
출생 : 1957년 경기 화성(본명 정승렬)
경력 : 경기도청 근무
등단 :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시집 : 푸른경전, 공무원, 궁평항
수상 : 2004년 공무원문예대전 시부문 행정자치부장관상
2009년 공무원문예대전 시조부문 행정자치부장관상, 경기시인상 수상
현재 : 칼럼니스트와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