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직장인들의 수첩과 마지막장 달력에는 유난히 저녁시간 메모가 늘어가고 있을 것이다. 동창회, 총동문회, 과망년회, 係(계)모임, 契(계)모임, 기타 다양한 명칭의 모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송년회를 비롯한 저녁 모임에 가면 으레 술잔이 오가게 되고, 그러다보면 서로 친밀해지는 효과가 나기는 하지만 술로 인해 낭패를 보게된다. 어떤 땐 ‘병가의 상사’로만 생각할 일은 아닌 심각한 상황도 발생한다. 그것은 음주운전으로 인한 심적, 금전적, 신분적 부담은 물론 조직생활에서도 심대한 손실을 입게됨은 물론이다. 그래서인지 옛 어르신들은 술자리에 나이 어린 자손들을 앉히고는 술을 따르도록 시키고 이것저것을 이야기하면서 술을 먹는 과정을 체험시켰다. 그리고 이른바 酒法(주법)을 전수하는 것이다. 이 주법이라는 것이 가문마다 제례절차가 상이하고 사돈간에도 오이 먹는 풍속이 다르듯이 차이가 있지만 그 주된 내용은 술을 마심으로써 흐트러지기 쉬운 심성의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함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논문을 쓸 때 형식이 있듯이 어느조직, 어느가문이든 주법에서 공통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몇 가지 관습법이 있다. 우선은 술을 주고 받는 일은
京畿(경기)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고려 현종9년(1018)이라고 한다. 경기는 왕도가 소재하고 있는 지역과 그 주변의 모든 도·현의 총칭으로 경기는 京(경)자와 기현의 畿(기)를 합친 것이다. 2001년 8월10일부터 10월28일까지 열리는 세계도자기엑스포2001 경기도 土也(토야)가 토와 야를 합해 地(지)를 의미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명칭을 처음 정할 때 신중을 기해야한다. 한번 정해지면 바꾸기도 어렵고 바꾸면 일정기간 혼란을 준다. 한번 지은 이름을 바꾸려면 법원의 판결을 받아야 하고 법원은 신청한다고 무조건 改名(개명)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국회의원 중에 이름이 같아 신문과 방송보도시 보충설명이 필요하고 중국 쇼트트랙 선수 중에 양양A와 양양B가 중계때마다 구분하는 설명이 필요했다. 유사한 사례는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경기도 광주군을 말할 때마다 경기도 광주라고 보충설명을 해야 한다. 6.25전쟁때 연합군은 청주와 청주를 혼동하였다고 하고, 화성(수원성)의 4대문중 남문과 북문을 알면서 팔달문과 장안문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또 용주사와 함께 조선시대 정조왕의 효행을 상징하는 융건능은 융능과 건능을 합한 말이다. 경기도내
고종황제께서 61세 회갑을 맞으신 1912년에 고명딸 덕혜옹주를 얻으십니다. 고종은 요즘 유치원의 嚆矢(효시)랄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 교육에 정성을 들입니다.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덕수궁(경운궁)에 처음으로 유치원이 설립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유치원 1회 졸업생이 덕혜옹주입니다. 덕혜옹주는 9세까지 ‘복녕당 아가씨’로 불리다가 1921년에 덕혜옹주로 봉해졌습니다. 1925년 일제가 유학이라는 명분을 세워 일본으로 데려갔습니다. 일본에서 영친왕과 한집에 살면서 학교를 다녔고 19세에 소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일찍 그 딸을 잃고 맙니다. 딸을 잃은 아픔과 이혼, 그리고 해방된 조국에 귀국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겹쳐서인지 1946년에 조현병으로 입원합니다. 그리고 신문기자의 노력으로 1962년 대한민국으로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하십니다. 영화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덕혜옹주는 1989년 4월21일에 세상을 떠나시고 남양주시 금곡동에 소재한 아버지 고종황제의 홍유릉 인근에 묘소에 안식처를 마련하고 영면하십니다.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된 그날 오후 남양주시 공무원 2
1919년 3월에 우리 남양주시에서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독립만세를 부른지 97년이 흘렀고 1919년 그 해에 승하(昇遐)하신 고종황제는 사후에 대한민국 백성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3·1운동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종황제(1852~1919)와 명성황후(1851~1895)를 홍유릉(洪裕陵·사적207호)에 모셨습니다. 홍릉(洪陵)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모셨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왕릉에 등을 기댄 듯 위치한 유릉(裕陵)에는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순정황후가 영면하십니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고종과 국정을 논의하는 파트너였으며 당시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배경이 없는 분이라서 황후(왕비) 자리에 올랐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홍유릉을 지나 뒷산으로 가면 영친왕을 모신 영원(英園), 이구 황세손을 모신 회인원(懷仁園)이 자리합니다. 의친왕묘가 같은 자락에서 마주하며 특히 고종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묘가 참으로 단아하게 우리를 맞아줍니다. 고명딸 덕혜옹주(1912~1989)의 교육을 위해 고종황제께서는 덕수궁에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幼稚園)을 설립했다고 합니다. 정략결혼과 따님을
화성궐리사지(華城闕里祠誌) 연혁에 보면 오산시 궐동에 소재한 ‘화성궐리사’는 정조 16년 (1792년) 칙령으로 창건된 공자의 사당이다. 정조가 왕권강화책으로 신도시를 화성에 추진하는 시기에 수원지역의 고적을 탐사하던 중 중종 대에 경기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한 孔瑞麟(공서린, 1483~1541) 선생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서원임이 확인되었다. 이 같은 역사를 확인한 正祖(정조, 1752~1800)는 수원부사에게 명하여 사당을 건립하게 하고 공자의 유상을 보내 봉안하도록 하였으며 ‘궐리사(闕里祠)’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봄가을에는 국왕의 이름으로 제사를 올리고 국왕이 친히 축문과 이름을 써서 지방관에게 주어 初獻(초헌)하도록 명하였고 공씨 후손 중에 행실이 높은 자를 亞獻(아헌), 終獻(종헌)으로 삼았다. 궐리사는 서원이다. 궐리란 중국 곡부(산둥성)의 지명으로 공자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일반 서원이 사립학교라면 궐리사는 왕립(국립)학교다. 다시 말하자면 요즈음의 공립 중고등학교라 할 수 있다. 십수 년 전부터 궐리사에서는 교육사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서예, 경전, 민요, 다도, 우리 춤, 사군자, 대금반이 요일별로 운영된다. 학생 교육도 준비되
코로나19를 못 버티고 구조조정 대상에 오른 김씨 눈치 싸움에 밀려난 귀농 초년생이다 얼떨결에 고추 배추 호박 백화점식 농법에 아직은 혼란하다 튼실하게 올라온 고추모 배추 호박모의 작은 숨소리 이랑에 가득하다 병들고 나약한 어린 모를 찾아 솎아내기 한창이다 새싹들은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푸른 웃음으로 세상에 화답하고 있다. 눈동자와 색깔의 빈도에 따라 퇴출 대상이 결정된 순간 가느다란 잎사귀는 작은 경련 일으킨다 병든 녀석과 허리가 굽어진 놈 뽑을까 말까 망서려 진다 시베리아 바람을 몰고 다니던 인사부장이 실루엣처럼 스쳐 지나간다 내 눈은 어느새 악어의 눈을 가진 인사부장 눈을 닮아가고 있다 꽃샘추위 속에서도 솎음질 한창이다. 정겸 시인 1957년 경기 화성출생(본명 정승렬), 2003년 시사사 등단, 시집 '푸른경전', '공무원', '궁평항', 공무원문예대전 시, 시조부문 행정안전부장관상, 경기시인상 수상, 현재 칼럼니스트와 한국경기시인협회이사로 활동 -시작메모- 산다는 것은 어쩌면 고달픈 여정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주기적 생애에서 별의 별 일을 다 경험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코로나19와 3년 넘게 싸우고 있다. 지칠 대로 지친 코로나와의
학생의 미래 직업을 드립니다 - 중·고생 청소년 진로지도 강의 - 미래 직업의 방향성 제시 전문 직업인으로 활동한 신중년들이 사회 공헌의 일환으로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진로 교육을 강의하는 ‘드림n드림’의 진로교육 프로그램이 교육현장에서 청소년들의 직업관 정립에 크게 기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영리단체인 드림n드림(대표 : 이용의)은 2023년 중고생에 대한 진로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였으며 최근에 전문강사진을 대폭 보강하여 2024년 서울, 경기, 강원의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진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강사들은 강의를 통해 중학생에게 자신의 삶 이야기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장래의 직업관에 대한 공감을 갖도록 하였으며 교육활동을 통하여 학생들이 자신의 꿈과 비전을 찾아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며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을 제시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강사의 유형을 보면 대학교수를 비롯하여 행정, 기후환경, 민화, 미술, 창업, 경제, 정책, 성악, 여행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자체 강의프로그램을 통해 중고생들에게 적합한 강의기법과 강의 방향성을 조율하는 등 수준높은 강의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다. 최근
올 가을에는 먼저 온 겨울 때문에 대부분의 은행나무들이 프른 잎을 회색 보도위에 뿌리며 아주 짧은 생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을이 겨울을 미워하지 않고 겨울도 미안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풍성한 가지를 머금은 은행나무는 그 잎새들과 약속도 안한 것 같은데 순서도 없는 것 같은데 겨울날 눈 내리는 모습을 미리 배워왔는지 차례차례 내려와 차곡차곡 쌓입니다. 쌓인 잎새들은 아직도 푸르지만 서로 불편함 없이 쌓이고 포개져서 대지의 품으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다만 인간들이 만든 시멘트 블럭으로 인해서 잎새들이 원하는 토지가 아닌 곳으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곱디고운 잎새 피부가 이리저리 흐트러진 후에야 아주 낯선 땅으로 보내집니다. 이 가을에는 모든 이들이 본래 태어난 대지와 토양을 생각하고 그곳을 향해 잠시 두 손 모아 생각하고 여인들은 노랑 저고리 여미며 기도하고 남정내들은 잃어버린 과거를 되돌려보려 애써보는 것 같습니다. 어느 도시의 환경미화원들은 떨어진 은행잎을 자루에 담아 제약회사에 팔았고 그 돈으로 동료 자녀의 장학금으로 전달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올가을 은행잎이 저렇게 이른 아침을 택해 일시에 떨어져 그 값을 올리고자 하
강원도 동해시 수해현장은 모래와 자갈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터였다. 1925년 7월 18일 을축대홍수 이래 처음이라는 노인의 말씀을 들었고 산불이 난 자리에 산사태가 발생한 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로 이해하였으며 밀려오는 물기둥을 피해 달리다가 팔을 다친 할머니의 말씀으로 그날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일요일 아침 5시50분에 집결하여 3대의 버스를 타고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을 향해 출발했다. 흔들리는 버스안에서 도시락으로 아침을 먹었다. 고속도로를 지나 동해시로 들어서자 곳곳에 수마의 상처가 일행을 압도한다. 신문에서 본 항공사진이 실감난다. 이어서 도착한 수해현장은 전쟁터였다. 가재도구가 길 앞에 늘어서 있고 계절을 뛰어넘는 빨래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다리 상판이 털석 주저앉았고 시멘트 공장을 연결하는 구조물(수로와 비슷한)이 물살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금 전 올라오다 본 철 구조물이 바로 그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해복구 현장에는 이미 굴삭기와 덤프트럭이 굉음을 울리며 재건의 의지를 선도하고 있고 군장병과 벌써 도착한 자원봉사자와 이재민들도 복구에 나서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도착하자마자 동해시 공무원의 안
[시작하는 말] 초등학교때 漢字(한자)교육을 하다가 말다가해서 混沌(혼돈)의 시기를 거친 세대입니다. 그래서 상용한자를 몇자 넣었습니다. 인터넷에서 한자를 검색하니 漢字工夫(한자공부)를 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2000년대 경기도는 2002월드컵 준비와 세계 도자기엑스포에 행정력을 집중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언론홍보를 하면서 기고문에도 행사에 대한 홍보성 내용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기고집의 제목은 ‘錦衣夜行(금의야행) 朝三暮四(조삼모사)’라 정했습니다. 열심히 해도 언론에서 비판을 받고 더러는 기대 이상의 좋은 홍보결과를 얻기도 하니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기도 하고 아침 3개가 4개가 되기도 하고 저녁 4개가 5개도 되었습니다. 공무원 사무관으로서 치열한 시기를 보냈던 시기인 만큼 당시에 써 올린 글 속에서 몇 가지 모순과 과도한 홍보 열기가 보이기는 합니다만 큰 加減(가감)이나 添削(첨삭)없이 원문 중심으로 편집하였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시는 마음으로 一瞥(일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의 제자를 석제 임동빈 선생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수원에 있는 사무실을 찾아가서 금의야행#조삼모사, 군자불기#대기만성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