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경하는 하동원 원장님 ▨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경기도의회사무처 이강석입니다. 공직에 투신하시어 중요보직에서 많은 성과를 올리신 후 이제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서 경영기획본부장의 중책을 담당하신 원장님께 늦은 축하의 인사를 올립니다. 저는 원장님께서 미리 마련해 주신 참으로 멋진 감사패를 2008년 12월 30일에 전달받았습니다. 요 며칠 전부터 실무자들이 원장님께서 이 감사패를 친수하시고자 하시었지만 일정이 여의치 않으셨다는 전갈과 함께 빨리 전하고자 하시는 마음이시라고 하여 아침 출근시간에 연수원에 가서 오전 9시에 받았습니다. 참으로 멋진 패입니다. 제 생에 이처럼 행복한 날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더욱 기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송구합니다만 제가 올해 공직 30년을 맞이했습니다. 경기도에서는 공직 30년이 되면 부부 동반 해외여행을 보냅니다. 그리고 오늘 30일 지사님께서 직접 30년 장기근속 공무원상을 주시고 시상금도 50만원을 주었습니다. 원장님께서 현재 공단에서 하시는 업무에 참고가 되실까요? 오늘 저는 원장님께서 마련해 주신 감사패를 저희 처장님께 보여드리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지방행정연수원 창설이래 도 공
존경하는 선배님, 후배님 그리고 동료여러분! 저는 오늘 25년가까운 공직을 떠나면서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몇글자 남기고자 합니다. 사실 그동안 신문을 통해 몇 번인가 공무원으로서의 의견을 올린 바 있어 생소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40대 중반에 이 자리를 떠나는 글을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20세에 공무원에 들어올 당시에는 공직에 입문하면 60세까지는 정년이 보장되니 그냥저냥 일하다보면 60세까지는 갈 것이고 그러면 공무원 40년을 했다고 자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하다 보니 저의 초심처럼 공무원 생활이 쉬운 것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오늘 이처럼 허망한 상황을 맞고 보니 그동안 조직원으로서 일했던 세월이 아쉽고 자신없어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학교때 배운대로 최선을 다하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네 자신이 안다는 신념하나로 일했습니다. 때로는 유혹도 있었지만 공무원이라는 자긍심하나로 뿌리치면서 나름대로 공직관을 지키며 일해왔고 앞으로도 그리하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60세까지 계속되지 못한 것은 저의 부덕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깊이 반성하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새로운 제
▨ 동두천 생연4동 주민여러분께 -시를 떠나면서.... 1999년- 제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동두천시에 발령받아 생연4동장으로 근무를 시작한지도 2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이끌어 주시고 깨우쳐 주시면서 우리 시 발전을 위해 미력이나마 일할 수 있도록 애써주신 어르신께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의 사랑과 격려 속에 일하다가 다음번에 다시 뵈올 날을 기대하며 잠시 근무지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길지는 않은 2년여의 시간이지만 그간 저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크게 성장하는 기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르신께서 부족한 저를 이끌어 주시고 가르침을 주신 덕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제 인생이나 공직생활에서 평생 간직할 소중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시청에서는 많은 공무원들이 동사무소에서 통 담당, 시청 여러 부서에서 다양한 조직에서 근무하다 자리를 옮기게 되고, 시군을 달리하여 인사이동이 있습니다만 저의 이동도 늘 있을 수 있는 우리 시 부서내의 전보로 생각하고 언젠가 다시 시 발전을 위해 마음으로부터 노력할 것을 감히 다짐드립니다. 특히, 1998년 8월 수해피해와 그 복구과정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행정적 단련의 기회였습니다. 송구스럽게도 우리시 시민들은 물질적, 정신적
국토방위를 위하여 연일 바쁘신 와중에서도 이번 수해복구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국방부장관님 이하 장병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경기도 동두천시청 생연4동장 이강석입니다. 지난 8월6일(1998년) 침수도 동 전체의 90%이상이 수해를 당하여 동민 모두가 삶의 터전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았고 자칫 실의에 빠져들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너무나 중요해 평소 잊고 있었던 우리의 군이 있었습니다. 침수이후에도 폭우가 계속되면서 며칠 새벽을 동두천시 신천둑에서 밤을 지새운 시민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이 아침의 태양처럼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군인이었습니다. 이른아침 도착한 우리 군인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희망의 불빛이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방부장관님! 우리의 군인은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병사, 하사관, 위반, 영관 등 모두가 수해복구에 쏟은 정열은 폭우와 강풍, 번개와 진동을 잠재웠던, 10여일 만에 길을 뚫고 골목의 아스팔트를 찾아내고 할머니의 안경과 아이들의 인형을 돌려주었으며 수재민의 아픈 가슴속에 재활의 푸른 새싹을 피워냈습니다. 주민이 건네는 음료수
1984년경 경기도청 발간실은 기계음과 종이 돌아가는 소리가 겹쳐나오는 한편의 오케스트라 또는 오페라였다. 하지만 요즘 발간실은 대부분이 기계화되었고 장비도 발전해서인지 클래식처럼 조용하다. 그래서 25년전 경기도청 발간실의 모습을 청사진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당시 발간실의 주 기능은 갱지에 공문서를 인쇄하는 일과 각종 회의자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선 36개 시군에 보낼 문서를 인쇄하여야 하는데 공문서 표지는 각 부서의 문서시행 담당자가 청색의 원단에 타자를 해서 가져온다. 사실 초기에는 가리방과 타자가 공존했는데 일본어인 듯 한 가리방은 말미에 언급했다. 우선 청색 타자 원단에는 미세한 그물망 같은 것이 있고 양초성분의 막이 있는데 여기에 타자를 하면 글씨가 새겨지고 인쇄 잉크를 문지르면 갱지 위에 글씨가 새겨지는 것이다. 요즘 말하면 실크인쇄 원리와 비슷하다. 그리고 첨부되는 지침서, 회의서류 등은 발간실에서 청타를 찍어 교정을 본 후 인쇄를 거친다. 청타는 앞의 공문서 작성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데 글씨체가 타자체와 다르다. 인쇄활자를 찾아서 신문처럼 찍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의서류는 오늘날의 인쇄체와 비슷한 것이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1960년대 초등학교 운동회는 지역사회의 구심체 역할을 다했다. 가장 높은 국기대에 태극기가 걸리고 만국기가 휘날리는 가을운동회. 국민학생 200명, 동네주민 300명이 모여들어 청군백군을 연호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동네청년, 처녀총각들이 모두 모였다. 사실 어린이 운동회이면서 부락 체육대회가 열리는 것이다. 물기가 흐르는 대형 축전지에 연결된 마이크 소리가 신기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축전지가 떨어지기 전에 다른 축전지를 등에 지고 읍내까지 가서 충전해 오시는 소사 아저씨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발틀을 밟아가며 연주하는 풍금소리, 축전지로 돌리는 검정 레코드판에서 나오는 행진곡이 운동회 음향이고 나머지는 사람들의 함성, 발자국 소리, 농악소리. 아침 9시. 구불구불한 논길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든다. 태극문양을 연상하게 하는 모자는 청색과 백색천으로 만들어졌으므로 흰색으로 쓰면 청군, 백식으로 쓰면 백군이다. 청군백군은 아주 오랫동안 전통을 이어온 대진표다. 먼저 청군과 백군이 양쪽에서 입장하면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을 맞이하여...로 시작된 말씀은 승패를 떠나 스포츠 정신을 살리자는 말씀으로
5월 한달동안 3번 왕릉을 방문했습니다. 종중행사로 건원릉을 비롯한 8분의 왕과 왕비를 모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서 조선왕릉의 진면목을 만났습니다. 우리 문중에서 영조께 제를 올리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바로 영조시대에 효령대군의 청권사가 건립되었습니다. 정조는 청권사에 현판을 내렸습니다. 청권사는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왕위를 세종대왕에게 양보한 것을 중국의 역사를 견주어 이름을 붙인 효령대군 사당입니다. 화성시공무원동우회가 주관하는 융건릉 방문일정에 동참하여 장조와 정조의 스토리를 들었습니다. 해설사님마다 매번 추가해서 들려주는 스토리가 새롭습니다. 융릉의 주인은 사도세자입니다. 아버지 영조가 사후에 사도라는 시호를 지었다고 합니다. 역사적, 정치적, 시대적 상황과 또다른 사연과 이유로 젊은 나이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사도세자는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의황제(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었습니다. 고종황제가 스스로 황제가 되면서 윗대 4대까지를 황제로 모실 수 있었다 합니다. 경기도공무원동우회에서 2024년 첫번 일정으로 여주시를 선택했습니다. 신륵사와 영릉을 방문했습니다. 여주에 소재한 英陵(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을 모셨고 여주의 寧
1977년 9급(당시 5급을류)공무원의 월급은 쌀 2가마니 값이었다. 당시 상머슴은 쌀 12가마니를 받았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12가마를 받는 머슴이나 제집에서 다니고 24가마니를 받는 공무원이나 대우는 비슷했다. 그래서 공무원을 말할 때 공복이라고도 하고 머슴이라고 칭했을까? 하지만 공무원의 강점은 호봉과 승진에 있다. 머슴은 소를 부리는 일을 하면 12가마이고 그보다 못하면 10가마, 8가마, 5가마 등 차등이 있었지만 공무원은 24가마로 시작해서 매년 호봉이 늘고 승진하면 봉급이 올랐으니 말이다. 이제 연봉 5천만원이면 쌀 한가마 20만원을 쳐서 월평균 20가마 이상을 받으니 참으로 대단한 처우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많은 공무원들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엥겔계수가 점점 작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비, 문화비, 경조비 등 부수적인 지출이 많아서일 것이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공무원들에 대한 국민의 인식속에는 ‘부수입’이라는 공식적인 단어가 떠오르곤 했다. 공무원들은 무엇인가 추가되는 수입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공무원 봉급이 오르는 데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다. 보너스라는 것이 매 분기 1회씩 주어지고 정근수당이 1년에 2번 주어졌으며 복리
1970년초 시골 초등학교의 가을소풍은 낭만이 있었다. 어른들은 소풍을 ‘원족’이라고 했다. 소풍 필수품은 나무도시락, 나무젖가락, 찐계란, 코카콜라였다. 특히 코카콜라는 돈푼이나 있는 집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소품이었다. 소풍날 아침. 아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점심과 음료(대부분 물이지만)를 준비하여 학교로 향한다. 그리 소풍가는 곳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일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어떤 학생은 자신의 집뒤에 있는 절로 소풍을 가면서 일부러 학교까지 갔다가 다시 집 근처 소풍장소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당시의 선생님들은 소풍장소 근처에 사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적었다. 무조건 학교에 와서 인원파악하고 다시 소풍장소로 출발했다. 있는집 아이들이 가지고 온 콜라 한병은 그반 아이들 모두에게 고른 혜택이 주어진다. 일단 어렵사리 뚜껑을 따고 콜라주인이 한모금 마시고 나면 친한 친구부터 한모금씩 마시게 되고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초리는 병을 거꾸로 들고 마시는 아이의 입보다는 병안에 남아있는 콜라의 양에 관심이 높다. 저렇게 줄다가 ‘뒷 순서’에 있는 나에게 한 모금, 한 방울이 돌아올 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학생에게는 콜라방울이
아마도 공무원의 여관작업은 1990년 초까지 이어진 것 같다. 남녀 공무원들이 여관의 한방에서 낮에는 물론 밤늦게까지 일하고 새벽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일하고 인근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작업하는 강행군이었다. 한번 여관작업이 시작되면 1주일에서 10일정도 걸리고 때로는 2-3일에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었고 처음에는 30여명이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304명이 남아서 최종 정리를 한다. 그리고 이중 대표선수는 중앙작업에 차출되기도 한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할 줄 안다. 이들은 이미 시군지역에서 수일간의 여관작업을 거쳐서 도 작업을 온 것이고 이어서 중앙작업까지 가게 된다. 이제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여관작업은 복잡한 행정통계를 집계하기 위해 공무원들이 여관에 모여 숙식을 함께하며 일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한방에 3-4명이 일하게 되는데 이들은 복잡한 서식이 담긴 서류와 계산기, 주판 등을 가지고 일한다. 시군에 따라서는 남녀 젊은 직원이 거들기도 하므로 36개시군이 있었던 당시 도 작업을 하게 되면 그 인원은 40명이 넘었다. 그래서 불경기에 여관작업 한팀을 유치한 여관은 돈벌이가 되었다. 40명이면 최소한 방 10개 이상이 나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