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기관의 정보화를 가늠하는 척도는 ‘1공무원 1PC’라는 용어로서 업무보고서에 등장하여 공무원 마음을 설레게 하던 때가 있었다. 초기에는 1개 국에 1대의 컴퓨터가 있을 뿐이어서 국 주무과 주무계에서 이 장비를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중앙정부의 미래지향적인 블루오션을 실천하신 선배공무원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는지 경기도청에 컴퓨터 1대가 보내졌다. 영화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영화 부시맨을 보면 경비행기 조종사가 먹고 버린 코카 콜라병이 부시맨 마을에 떨어지고 이를 주워 야자수 열매를 두드리다가 나중에는 신주단지로 모셔지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 콜라병이 등장한 것은 고도의 광고였고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광고에 취해서 밖에 나가서 그 코카콜라를 집어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에는 PPL(간접광고)이 포함되었다고 아예 시청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컴퓨터라는 말을 해석해 보았다. 전자 회로를 이용한 고속의 자동 계산기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이 물건은 통계부서가 써야 할 것이라는 판단이 나왔다. 통계업무 부서가 복잡한 계산을 하고 숫자를 많이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무서운 기계를 피하기 위해 통계팀에 보낸
그때에는 윗선에 이야기하면 민원이 해결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많은 민원인들은 중앙에 아는 사람의 이름을 들먹이거나 도청에 간부들을 잘 안다고 말하며 민원을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공무원들은 민원과 관련한 압력이 늘 불편한 혹뿌리였다. 그런데 아주 멋진 국장님이 한분 계서서 명쾌하게 민원을 해결하고 추가민원도 예방하는 一石二鳥(일석이조)의 효과를 올려주셨다. 그 분은 당시 경제분야 국장이셨는데 일단 민원인이 국장실을 방문하면 실무자를 부른다. 7급이나 6급 실무자는 국장실에서 민원인, 국장과 함께 3자가 앉아서 민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국장이 먼저 나서서 실무자를 야단치기 시작한다. “당신이 일을 잘했으면 이 바쁜 시간에 사장님이 여기 도청까지 오실 일이 아닌데 당신이 일처리를 제대로 못하였으므로 오신 것이 아닌가. 이를 어찌할 것인가.” 담당자는 아무 말 못하고 국장의 야단을 맞는다. 이때 화가나서 찾아온 민원인(사장님)은 만감이 교차한다. 이거 오늘 한 건으로 내 민원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여러차례 실무자와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큰일 났구나.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이는 격은 아닐까? 결국 사장님은 야단치는 국장에게 미안하다면서 실무자
1984년경 서무담당자로 근무던 때의 사무실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왼쪽 칸막이안에 과장실, 오른쪽으로 교육계, 개발계, 보호계, 마을계가 있다. 요즘 같은 파티션은 없다. 계별로 4-6대의 전화기가 있는데 번호는 2개다. 2222, 4444번인데 이번호 하나에 2-3대의 전화기가 연결되어 있다. 이를 ‘뿌라찌’전화라고 했다. 뿌라찌는 브리지(bridge)가 일본어 발음으로 변형된 이 단어라고 하는데 남의 집 안테나선에서 한 줄 더 따오거나 전기선 중간을 연결해 도전(盜電)하는 등의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그리고 책꽂이와 몇 개의 화분이 있는데 요즘 사무실과 다른 비품은 바로 대형 재떨이가 계장님 책상과 차석 자리에 비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비운 재떨이에는 티슈를 깔고 살짝 물을 부어 주었다. 아마도 먼지, 즉 담뱃재가 날리는 것을 막으려 했던 지혜인 듯하다. 하지만 오전 11시가 되기 전에 재떨이는 꽁초와 담뱃재로 채워지는데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공무원들도 그냥 피우는 사람은 피워야 한다고 생각했던가 보다. 민원인이 와서 함께 피우기도 하고 계장
요즘 공무원 수첩은 참 많이 세련되었다. 큰 수첩은 내부회의에서 쓰면 되고 작은 수첩은 출장 갈 때 요긴하다. 더구나 뒷장에는 메모지도 있어서 작은 크기로 떼내어 쓸 수도 있어서 참 편하다. 과거 공무원수첩은 좌철로서 거즈를 대고 본드칠을 한 것이어서 가을쯤 가면 너덜거렸다. 그리고 그 큰 덩치를 항상 들고 다녀야 했다. 어떤 공무원은 승용차위에 수첩을 올려놓고 주민과 대화를 나누다가 깜빡 잊고 차를 출발하는 바람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요즘에 큰 수첩을 들고 출장가는 공무원은 적어 보인다. 과거에는 공무원증을 대신하거나 공무원임을 응근히 과시하기 위해 큰 수첩을 들고 다녔지만 요즘에는 작은 수첩을 속 주머니에 넣고 가면 되고 요즘 ‘나 공무원이요’하는 경우도 적은가 보다. “구내식당서 수첩으로 밥 퍼서 먹나?” 하지만 요즘에도 구내식당에서 무슨 행사가 열리거나, 쉬운 이야기로 기관장이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시게 되면 총무, 서무과 직원들이 그 ‘수첩’을 들고 온다. 물론 식당에서도 받아 적을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메모지를 속주머니에 준비하면 될 일인데, 식당에 수첩을 들고 와서는 수첩 때문에 손이 어찌할 바 몰라 하는 경우를 目睹(목도)하게 된다. 사실 식
지방행정 초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시골에 내려와 집에서 노는 사람이 있으면 면장이 ‘와서 일좀 봐주게’하여 공무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5세 전후의 공무원들 중에는 공채가 많은 터인데 이분들의 초임시절에 대학생 출신 공무원은 좀 희한한 인물이었다. 그 이후 1970년대 경제가 살아나면서 대졸자들은 일반 회사에 취업을 하였고 9급공무원 (당시 5급 을류)은 고졸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9급 공무원 공채의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고졸 신규 공무원을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고졸자가 공무원에 들어오면 대단한 실력이 있음을 인정 할만 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70년대 서정쇄신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아 지금까지 공무원으로 열심히 일하시는 1953년생 전후의 선배들은 매년 매월 급변하는 행정환경을 용케도 헤쳐 분들로 크게 존경받아 마땅하다. 우선 이들 선배들은 전쟁 중에 태어나 어린시절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보리고개를 넘고 전염병과 싸워 살아남은 끈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다. 그리고 경제발전 초창기 월급많이 주는 공장으로 가지 않고 꿋꿋하게 펜대를 지켜온 공무원이다. 초임시절에는 전자계산기가 없었고 행정전화도 부족했고 일반전화도 맘대로 통화할 수 없었다
유신시절 공무원의 복장은 콤비양복과 카라 넓은 Y-셔츠로 상징되었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앞단추를 풀어 콤비양복 위로 카라를 꺼내 독수리 날개처럼 양쪽어깨로 펴서 입었다. 관선 군수도 그랬고 간부들이면 어김없이 이 복장을 했다. 그리고 간부들은 근무중이나 출장시에 민방위복을 입었다. 좀더 여름으로 들어서면 양복이나 민방위복을 벗고 카라가 아주 큰 양복을 입었다. 굵은 팔뚝보다 더 넓은 셔츠. 속옷이 훤히 비치는 삼베로 만든 옷도 유행했다. 관선 군수와 민선시장을 하신 원로 김기형 선배님은 군수시절 면사무소를 순시하면서 가장 먼저 들어가 보는 곳이 읍면사무소 숙직실이었다. 이부자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펼쳐놓고 총무계장을 불러 야단을 쳤다. “이게 직원들 잠자리인가? 돼지우리만도 못하다.” 이분이 무척 예의를 중시하는 분으로 생각한 부면장은 군수님 초도순시날 남직원 모두에게 넥타이를 매도록 했다. 원님이 오시니 복장을 단정하게 하고 맞아들이자는 취지였다. 아직까지 넥타이를 매본 일이 없는 한 공무원은 부면장에게 ‘저는 넥타이가 없어서 맬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고 다음날 아침 부면장님은 자신의 넥타이중 젊은 색을 골라와서 그 젊은 직원에게 빌려주었다.
면 단위에는 이른바 5대 기관장이 있다. 면장, 파출소장, 농협장, 예비군 중대장, 우체국장이다. 여기에 학교장이 가끔 참여하기도 한다. 어느 날 5대 기관장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곁들이게 되었는데 권한이 높은 지서장 앞에는 술잔이 모어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체국장에게 술잔을 권하는 이가 없었다. 사실 우체국장은 당시 호봉제로 월급을 받았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선 오지지역 면단위 우체국은 별정우체국이라 하여 전세 들 듯이 기본자금을 입금하고 우체국 운영권을 받았는데 월급의 기준은 아마도 6급 몇 호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인이 이 별정우체국을 인수하면 높아야 4호봉의 월급을 받게 되어 수익성이 떨어지는 관계로 학교 선생님을 정년 퇴직하신 분이 유사경력을 보태 6급 30호봉 정도의 월급을 받는 것이 유리하므로 교사출신이 대부분 우체국장을 하게 된다고 들었다. 하지만 郵遞局長(우체국장)은 특별한 권한이 없었다. 오가는 편지 우표만 있으면 보내고 배달해야 하고 시외전화 신청하면 연결해 주고 요금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딱히 결정하는 권한이 없고 그냥 앉아서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평소 업무 중에 이권이나 인허가권이 없으므로 기
비가 온다 봄 가뭄에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린다 빗물은 벌어진 틈을 촘촘히 보듬어 주며 상처의 흔적을 가려준다 광주에서 담양으로 가는 국도변 도벌꾼에 의해 잘려 나갔던 대나무 숲에서는 푸른 뿌리들이 땅속 깊이 잠을 자고 있다 대숲으로 이어진 밭둑 길 반공방첩이라고 쓰인 낡은 표지판이 전봇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다 멧비둘기 울음소리 들리는 오후 진초록 마늘잎새 사이로 연두색 마늘종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다 아리다. 정겸 시인 경기 화성 출생(본명 정승렬) / 경희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 전공 / 격월간 '시사사'로 등단 / 시집 『푸른경전』 『공무원』 『궁평항』 『악어의 눈』 / 공무원문예대전 시부문, 시조부문 행정안전부장관상 수상 / 현재 경기시인협회 이사, 칼럼니스트로 활동 -시작메모- 녹음방초 승화시절이다. 산록마다 울울창창 생기가 넘친다. 그래서인가 5월은 여러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신록의 계절, 계절의 여왕, 장미의 계절, 가정의 달 등 등, 그래서인지 유독 다양한 축제와 행사가 다른 어느 달보다도 많다. 그러나 진초록의 신록 속에 점차 가려지는 것이 있다. 바로 1980년 5월 18일에 발생한 민주화 운동이다. 광주에서 담양으로 가는 국도변은 광주
화성 남양의 봉림사와 수원 중심지의 봉녕사. 글자하나 차이인데 부처님 오신날에 만나는 두 사찰의 상황은 크게 달랐습니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부부가 남양소재 봉림사에 갔습니다. 비봉산 봉림사는 청룡국민학생시절 12번의 소풍중 6번을 간 것으로 기억되는 참으로 연고있는 사찰입니다. 어린나이에 처음 사찰에 갔고 가서 대웅전이 우람하다는 생각을 하였고 동시에 사찰뒷편의 미군부대 레이더를 참으로 신기하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대웅전은 부연이 달린 멋진 기와집인데 평소 고향마을에서 본 집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레이더는 잠자리 날개를 둥굴게 펼치고 사마귀 머리를 한 물체가 중심부에서 축을 삼아 잠자리 날개를 향해 머리를 고추세우고 돌아가는 형상입니다. 아마도 날개의 칩에서 전파를 받아 사마귀머리로 보내면 그 내용을 분석하여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2학년 소풍에서 친구 2명이 점심을 먹고 부모님 등 가족의 대열에 합류하여 먼저 출발하는 바람에 남은 학생들은 모자라는 2명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세고 다시 주임선생님에 앉아일어서를 하고 나중에는 교감선생님이 2명씩 짝을 맞추며 헤아려보았지만 우리반 70여명중 2명이 모자랐습니다. 선생님들간
어느 기관이나 회사나 인사발령은 큰 관심사다. 드라마에서 보면 회사의 인사발령은 로비에 종이 몇 장 붙이는 것으로 발표된다. 社員(사원)들이 삼삼오오 기웃거리며 인사발령 A4 용지를 보면서 의외의 인물이 발탁되거나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의 영을 어긴 일로 해서 좌천되는 발령에 직원들이 호들갑을 떠는 장면도 볼 수 있다. 1980년대 公職社會(공직사회)의 인사발령은 하나의 커다란 잔치였다. 인사발령이 나면 잘된 사람 신나서 한잔, 오리알 된 직원 격려하느라 두잔. 그래서 관가 주변은 인사발령으로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하며 강원도청에서 모 직원이 분석한 바에 의하면 200명 인사발령은 7억원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주장한 바도 있었다. 인사작업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많은 나날을 지낸 후 어느 날 오후 사무실의 차임벨이 울리면서 인사발령은 시작된다. 그 당시 인사 담당자가 수없이 바뀌어도 인사발령 멘트는 변하지 않았다. “1987년 5월 30일자 인사발령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방송을 타는 순간 사무실은 물론 복도에 있던 직원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인사발령 나발을 불기 때문이다. 방송이 끝나는 순간부터 사무실은 분주해진다. 인사발령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