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제 임동빈 선생님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석제 임동빈 선생이 타계했습니다. 좀 이른 연세에 갑자기 우리의 곁에서 떠나가셨습니다. 1984년 공무원 7년차 8급 공무원으로 경기도청 새마을지도과 서무로 발령을 받고 근무를 시작하니 다른 부서 중 매일매일 전화를 하시는 분이 바로 임동빈 주사님이었습니다. 그때는 주사보 7급이었는데 근무 분위기는 6급 고참으로 보였습니다.

 

 

당시 8급 신참으로 근무하는 입장에서 지금의 총무과인 당시의 서무과 서무계의 검정색 회전의자를 돌리시는 분이 7급인지 6급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위상과 폼새가 거의 태견 5단 이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니 전화만 왔는데도 지금 가겠습니다. 찾아가서 말씀을 듣겠습니다. 이렇게 예우를 했습니다.

전화를 하시는 이유는 금요일 저녁에 마감하는 과별 주요보고서를 제출하라는 독촉 입니다. 당시에는 "쪽지보고"라 해서 16절지를 반으로 잘라서 타자로 중요내용을 적어서 내무국 주무과에 보내면 각과의 자료를 모아서 내무국장에게 보고하고 다른 실국을 총괄하여 도지사실에 보내서 매주 토요일 아침의 실국장 회의에 도지사께 보고하는 자료를 완성하는 큰 일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국장선에서 전결처리할 수준의 업무인듯 보이는데 관선 도지사시절 공직사회의 특징은 매일매일 과장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도지사에게 보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야 다음번 인사에서 '군수되는 과장'에 보임되는 것입니다. 군수되는 과장이란 서무과장, 지방과장, 양정과장, 기획담당관 등 몇 자리가 있었습니다.

경기도청이 서울 광화문에서 지금의 수원 팔달산으로 이사올 때에 사무관 이상은 고등동에 자리를 잡았고 6급이하 중 일부는 지금의 세류동 비행장 인근에 집을 얻었습니다. 고등동은 도청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당시에는 고급주택이 지어진 곳입니다.

 

몇년전에 재개발되어서 아파트의 숲이 되었지만 도청이 자리한 팔달산 아래의 고등동은 이름대로 고등어급이었습니다. 밴댕이나 잡어는 노는 물이 달라서 고등동에서는 고등어급만 살았든가 봅니다.

그래서 지방사무관이 국비사무관이 되고 과장으로 일하다가 어느 날 불쑥 군수님이 되시면 골목에서 매일 만나던 사모님은 그날로 관사 안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과장님 사모님이 남편의 보직이동 소식을 듣고 무슨 과장인가는 모르지만 다음번에는 군수로 서기관에 승진할 수 있는 과장에 보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아빠가 이번에 군수되는 과장이 되었다'고 했답니다.

 

대략 앞에서 언급한 과장일 것이고 더러는 보고서 한장 잘 써서 군수된 분도 있다고 하니 당대 공무원으로서는 서기관 군수가 공직의 목표였을 것입니다.

석제 임동빈 선생이 근무하시던 서무과의 과장님도 바로 '군수되는 과장'이었으니 얼마나 바쁘고 힘들겠습니까만은 그만한 의무를 지니 그에 상응하는 권력을 가졌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내무국의 주무과로서 인사담당이고 근평을 총괄하여 부지사에게 보고하는 자리이니 서무과장을 하면 군서는 따놓은 당상관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업무를 하신 임동빈 선생은 일도 잘하시지만 글씨의 귀재였습니다. 아마도 '임동빈체', '석제체'라 할 수 있는 글씨를 쓰십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분의 글씨가 이미 완성된 줄 알았습니다.

훗날 제가 신문 기고를 모아 편집한 수필집의 제목을 '군자불기 대기만성'과 '금의야행 조삼모사'의 제목을 써주시면서 장시간 하시는 말씀 중에 그 당시에 저녁 6시반 정말로 바쁜 시간에 사무실을 비우고 시내로 나가서 당대의 서예가로 유명하신 이수덕 선생님의 글씨를 배웠다 하십니다.

 

이 정도 글씨를 쓰시는 분이 당시에도 저녁 시간에 서예 공부를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흔히 고수는 단증을 보이지 않는다고 절박하게 말한 바가 여러 번입니다만 역시 노력하는 분을 당해낼 자가 없겠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공직에 충실하면서 글씨로 큰 가문을 일으키시더니 2020년 말경에는 '밀물처럼 썰물처럼'을 제목으로 수필집을 내셨습니다. 감사하게도 집주소로 보내주셔서 페이스북과 까페에 올렸습니다.

선생은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20기), 홍재미술대전 초대작가, 경기도서예전람회 초대작가, 경기도서예가연합회 회장으로 책에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경기도청에서 공직자로 일하시면서 후학양성을 위해 큰 일을 하셨습니다. 경기도의회 지하실에 서도실을 마련하고 공무원 다수에게 굵은 붓으로 한자를 쓰는 공부를 지도하셨습니다.

퇴직 후에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문 인근에 경기도서예가협회 사무실겸 서예실을 마련하시는 열정을 바탕으로 후학을 양성하셨고 지역의 주민을 지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느 날 불쑥 訃音(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완숙기로 접어들어서 국전 심사위원으로 나가실 준비를 하시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인생을 통해 한 가지에 꾸준히 노력하신 선생께서 더 많은 후학을 키우시고 정말로 '석제 임동빈체'를 세상에 올려놓으실 단계에서 우리의 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상가에는 경기도청의 후배들이 다수 와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수제자가 토요일에 모셔드리고 일요일에 돌아가시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많이 아쉽고 안타까웠습니다.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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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